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153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44)
‘내가 무슨 마법사냐? 흑마법의 대가야? 뭘 완성시켜 시키긴…… 저절로 된 거야, 저절로! 본능 따라 된 것뿐이라고!’
―헛소리하지 마! 문장 속에서 너의 의지 없이 뭐가 이뤄질 리가 있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흑마법의 결사단도 언제나 미완성으로 둘 수밖에 없고 제한된 효과만을 겨우 완성형이라고 받아들인 것을! 어떻게 한 거냐고!
‘어? 못 느꼈어? 으흠…… 멀뚱거리고 모른 척한 게 아니구나.’
―뭘 모른 척해! 닥치고 무슨 염원을 품었던 거냐? 어떻게 블러드 룬이 완성되었다고 확신하는 거지? 어떤 효과이고 마법인가 이해는 하고 있냐?
‘야, 야. 보채지 말고 기다려봐. 잠깐 점검 좀 하자.’
숨을 고르면서 투란은 다시 한 번 주변에 어떤 흔적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프로브까지 움직여 재차 확인하면서 낯을 구기는 채로, 마치 뭔가 있어야 하는데 없다는 듯한 투란의 태도…… 드라고니아가 바로 흥분을 가라앉히며 묻는다.
―뭔데? 몬스터 로드의 느낌이냐?
‘어, 뭐…… 이상하지?’
―이상한 일은 아니지. 옵저버에도 미묘한 어긋남이 일어거든. 프로브도 한기나 두기로는 그럴듯하지만 다섯, 여섯 묶음이 되어서 교차검증을 시도하면 이것저것 어긋남이 감지되기는 한다. 하지만 탐지영역 안에 걸리는 것은 없고 말이야.
‘음, 그렇다면?’
―이런 수상한 층을 만들어두고 놔둔 것은 위로 뽑아 올릴 수 있는 유리통 하나다? 그럴 리가 있냐!
‘그러면…… 이렇게 해볼까.’
투란은 가슴팍에 힘을 주는 시늉을 했다.
흉골이 부푸는 듯하며 근육이 탱탱해지는 대신에 오그라든 머리 달린 촉수가 응축되며 구슬처럼 생긴 부위가 돋아났고, 바로 갈라지면서 눈알을 불룩불룩 내밀었다. 가슴이 순식간에 눈알밭이 된 듯한데, 겨드랑이를 거쳐 등 쪽으로도 불룩거리며 눈꺼풀과 눈알이 연이어 돋아나니 어쩐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아르곤? 왜……?
드라고고니아는 아르고누스를 지닌 투란이 왜 굳이 두룩칼에게서 갈취한…… 사기꾼처럼 속여서 얻은 아르곤을 꺼내는가 의아해했다. 아르곤의 역량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아르고누스와 격이 다른데…….
눈알이 터지고 섬광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가며 드라고니아의 의문에 답했다.
‘아, 이거였구나.’
동시에 산양 머리, 두 뿔 사이에서 기묘한 눈동자를 드러낸 투란이 히죽거림을 담아서 중얼거리고도 있었다.
―눈깔꽃 찾는 거였냐.
쓴웃음 짓듯 드라고니아도 중얼거렸다.
아르고누스가 간직한 눈동자는 가볍게 셈할 수 없이 많다. 그 눈알에 대한 기억은 크게 손상되어서 투란은 함부로 마구 꺼내기도 어려웠다. 어떤 눈알을 꺼내면 먼저 그게 무엇인가부터 따져봐야 하는 처지가 된 것…… 그런 상태로 그라이아이를 만나 ‘예견의 눈’을 얻게 되면서부터는 그 무지몽매(無知蒙昧)함이 많이 해소되기는 했다. 하지만 그 또한 한번 꺼내봐야 한다는 조건까지 해소시켜 주지는 않았다. 때문에 시간날 때마다 눈알을 점검해두는 일도 했었는데…… 십 몇 년에 걸친 그 기억은 파묻혀 덮힌 채!
그런 투란 앞에 아르곤, 백안(百眼)의 소유주(所有主)란 몬스터의 정수가 눈알과 함께 넘어온 셈이다. 아르곤의 본능에 각인된 눈동자를 꺼냄으로써, 그 형질을 아르고누스를 통해 맛보고 엿보며 이미 간직했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만약 없는 것이라 하면…….
콰아아아!
폭음이 지층을 흔들며 퍼져나갔다.
눈깔꽃이 순식간에 터져나가며 아르곤의 눈꺼풀이 하나씩 닫히며 사라졌다.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드라고니아는 역시 탐색망에 걸린 것이 없다고 고백했다.
투란은 그 말투에 살짝 짜증이 어린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왠지 프로브가, 개량해낸 옵저버가 무능하게 보이는 상황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드라코눔이랑 싸우는 결사단이라며? 너 아칸이던 시절에도 다 못 잡은 모양인데, 이제 와서 내가 한 놈 만났다고 여기서 정리가 될 수준은 아니잖아? 그런 작자가 왕도 한복판, 거의 한복판에 꾸며놓은 곳이라고. 당연히 드라코눔의 마법이나 왕도의 마법에 탐색당하지 않도록 해놨겠지. 몬스터 로드가 날뛸 수 있는 지하실 아래쪽이기도 하니까 이 정도는 당연한 거잖아.’
―주절주절 떠들면서 뭘 하는 거냐?
말이 길어진 투란을 향해 드라고니아가 갸웃하며 물었다.
얼핏 들으면 위로해주는 말 같기는 한데, 소리 없는 그 중얼거림과 함께 투란의 온몸에 시커먼 잉크의 장막이 둘러쳐지는 중이었고 아르곤의 역량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백, 수천의 눈알이 눈꺼풀에 덮힌 채로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뜨지도 않을 그 많은 눈알을 대체 왜 형성했다가 해체했다가 하는가?
‘예견하는 중이잖아.’
투란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고, 드라고니아는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뭐? 그라이아이의 눈을 쓰는 중이었다고? 아니, 그런데 왜 그 많은 눈을…….
말로 대답하는 대신에 투란은 몸을 써 보였다.
팔뚝과 가슴, 등과 배에 주먹보다 더 큰 불룩임이 생겨났고 다른 크기의 눈알은 눈꺼풀에 덮인 채로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큰 불룩임이 살을 가르며 동일한 눈알을 일제히 드러내는네…… 두툼하게 가로로 찢어진 눈동자가 빙글거리는 눈알 속에서 사방을 훑어봤다.
그 두리번거림과 함께 투란이 살짝 놀란 소리를 낸다.
“어? 뭐야? 제대로 안 보여? 뭐가 잘못된……?”
또렷한 시야가 아니라 뭔가 잔뜩 겹쳐진,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 지층의 공간과 함께 겹쳐진 채로 투명한 윤곽을 일렁이며 보인 탓이었다. 환영은 아닌 듯한데, 그야말로 시각의 결함으로 나타나는 엉뚱한 광경인 듯한…….
―젠장! 썩을! 제대로 본 거 맞아, 투란!
드라고니아가 으르렁거림으로 투란을 지지했다.
‘미안, 왜 제대로 본 건지 모르겠는데? 이 눈알로 보면 뭐가 보인다는 것까지는 예견했는데, 지금 뭘 보는 건지 모르겠어.’
정직하게 투란이 고백하니, 곧 드라고니아가 신중하고 진지하게 답한다.
―위상변주(位相變奏)의 마법이야. 하나의 시공간에 다른 시공간을 겹쳐놓는 대마법, 최상위 주문이야. 이런 건 기대도 예상도 못 했다만…….
‘헐? 간단히 쳐 죽였나 싶었는데, 그 흑마법사가 최상위 주문을 쓸 정도라고? 무슨 암흑의 대마법사냐?’
―그럴 리가 있냐! 암흑의 대마법사는 또 뭐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이런 대마법을 홀로 구사할 정도인데 너한테 그렇게 뒈질 리가 없잖아! 나인 가드랑 툭탁거리는 세븐 폴을 쓸 일도 없다!
‘그러면?’
―아티팩트가 있을 거야. 그런 놈이라도 이런 대마법을 통제할 수 있게 해주는 어마어마한 마도구가! 일단 찾아라. 하나둘도 아니고 일곱 겹이나 겹쳐둔 위상변주니까, 의외로 찾기 쉬울 거야.
‘쉬워?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겹쳐지고 어긋난 풍경 속에 똑같은 것이 하나 있을 거야. 어느 풍경과 겹쳐지더라도 당연히 어울리는…… 어느 풍경 속에서도 동일하게 보이는 것을 찾아.
드라고니아는 투란의 감각, 위상변주를 간파하는 눈동자의 시각과 프로브를 동조시키면서 재촉해 말하고 있었다. 마치 뭔가 끔찍한 일이 다가올 수도 있으니 빨리 피할 길을 찾는 듯도 한 말투였기에 투란은 재빨리 말해줘야 했다.
‘혹시 저기 저거?’
스윽 한쪽으로 몸을 돌리며 투란은 윤곽이 떠돌고 겹쳐지는 와중에 오롯하게 놓인 상자 하나를 짚어줬다. 옆구리에 돋아난 눈알이 아까부터 다른 것과 달리 보이는 그 상자를 주목하는 중이기도 했으니 짚는 것은 쉽고 빨랐다.
―맞아. 저거다. 어처구니가 없군. 로그람 왕가의 보물을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응? 뭐라고? 왕가의?’
투란은 놀라서 되뇌었다.
무슨 장난이 아닌가 싶은데, 드라고니아가 한층 더 진지하고 신중하게 골라 말을 더하고 있었으니…….
―망자(亡者)의 묘실(廟室)이란 마도구야. 네가 보는 그대로 일곱 겹으로 시공간을 겹쳐둘 수 있는, 위상변주의 마도구 중에서 언제나 최상위권에 꼽히는 보물이지. 설마 이런 곳에서, 이런 상황에서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만.
‘야, 나도 상상도 못 했어! 왕가의 보물이 어떻게 두룩칼이나 흑마법사랑 엮인 곳에서 나오냐고!’
―후원자. 망자의 묘실인 줄은 몰랐다만 로그람의 대귀족 몇에게 왕가의 보물이라 불리는 마도구가 지원된 적이 있다고 했다. 꽤 오래전이다만, 그 탓에 보물의 실체가 몇 번 드러났었지. 당연히 왕가에 반납되었을 거라고 여겼는데 아니었나 보다.
‘반납 않고 날름 삼켰다? 허어…… 그런 짓은 좀 두룩칼이랑 어울리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자고?’
―겹쳐진 것들을 봐라. 그냥 두고 가도 될 것으로 보이냐?
냉소적으로 드라고니아가 되물었기에 투란은 다시 일곱 겹이 겹쳐진 풍경, 투명한 윤곽 너머를 두루 살펴봤다. 아르고누스로부터 찾아낸 눈알은 위상변주의 대마법을 간파했을 뿐 아니라, 겹쳐진 풍경 속에 놓인 사물 또한 제대로 보게 해줬는데…… 하나같이 연금술의 소재이거나 몬스터의 파편, 딱 숨겨졌다가 무너져 내린 위층을 일곱 번 되풀이해놓은 것인가 싶을 정도로 닮아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품종이 다른 몬스터이고, 소재라 할 수밖에 없어 보일 지경이다.
‘그냥 두지 않으려 해도, 손이 닿을 것 같지는 않은데?’
투란은 조금 냉정하게 상황을 짚었다.
‘망자의 묘실’이라 불리는 마도구, 상자의 형태는 보이지만 투란이 자리한 현실의 풍경 속에서는 그냥 환영일 뿐이었다. 손이 닿지도 않을 터였고 불이라 벼락으로 후려쳐도 환영답게 투과(透過)시켜줄 뿐이었다. 마법도 정령도, 몬스터 로드의 고유마력조차도 이 위상변주 속에 감춰진 풍경에는 닿을 수가 없다!
―손이 닿을 필요 없어. 일단 가까이 가서 몇 마디 해주면 된다.
‘네? 뭐라고요?’
간단한 드라고니아의 말에 투란이 어이없어서 되물었다.
그야말로 ‘제정신이냐?’라고 따지는 말투였는데, 씁쓸한 낌새를 가득 담은 드라고니아의 대답이 돌아온다.
―아까 말했잖아. 왕가의 보물이 실체를 드러냈었다고. 지원품으로 내놓은 순간부터, 반납되지 않은 상황까지 보면 저 대단한 마도구는 정해진 키워드에 반응해서 기능할 뿐이란 말이다. 그리고 너무 널리 알려진 채로 사용된 탓에 관계자들에게 그 키워드는 모조리 까발려진 상태이기도 하지. 드라코눔의 선조들은 그런 귀한 이야기를 꽤 좋아했었어. 뭐, 나도 좀 좋아한다만.
‘아, 네. 그러시군요.’
웅얼웅얼 투덜거림과 함께 투란은 시야를 조절하며 마도구 앞으로 다가갔다.
텅 빈 층, 눈깔꽃의 섬광에 긁힌 자국조차도 그저 얼룩진 정도로 보이는 널찍한 광장이나 다름없는 지하층에 가득한 환영을 너울너울 지나치면서, 그럼에도 또렷하게 보였기에 부딪힐까 움찔거리는 몸짓으로 투란은 상자 앞까지 다가가 섰다.
어떤 풍경 속에서도 같은 위치, 같은 모양인 상자는 고작해야 어린아이 주먹 둘을 겹쳐놓은 크기로 길쭉했고 그 표면에 드러난 무늬는 날개를 펼친 나무처럼 보였다. 갈색과 적색이 얽힌 채로 금줄이 그러진 무늬가 투란에게 꽤 신기했지만 그 무늬와 함께 보이는 투명한 환영의 풍경이 새삼 이것은 닿지 않을 것이란 점을 분명히 알려줄 뿐이었다.
‘야, 정말 키워드를 뱉으면 되는 거야?’
―그래, 따라 해라…… 로그람의 선조는…….
강하게 권하고 확신하는 드라고니아의 말에 투란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어서 시키는 대로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산양의 머리에서 나오니 조금 기괴한 목소리가 된 듯하지만 그래도 그 말은 또박또박 흘러나온다.
“로그람의 선조, 카이 칼 로그람의 이름 아래에 복종하라. 망자의 묘실이여, 너의 문을 열고 일곱 층의 세계에 닿는 길을 보여라.”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에 작은 속삭임처럼 메아리가 흘렀다.
그리고 투란은 이제까지 풍경 안에 없었던 것을 새롭게 볼 수 있었다.
‘저건 무슨 마법? 와, 막 기어오는 것 같은데? 몬스터처럼 생겼네?’
―망할! 몬스터 맞아! 수호자로 몬스터를 선정해놨나! 그것도 하필이면 저놈이냐! 투란! 닥치고 피해! 넋 놓고 볼 때가 아냐! 저놈이 문을 넘어온다!
‘로튼 웜?’
투란은 기억 속에서 가장 닮은 놈을 떠올렸다.
썩어 문드러진 채로 꾸물거리는 형체가 딱 그 썩어버린 웜을 떠올리게 하니까.
드라고니아가 단숨에 이를 부정하며 외친다.
―용비늘 달팽이야! 보다시피 거대종이다! 야, 구경하지 말고 피하라니까!
‘피하면, 여기 다 무너뜨리고 지상으로 돌파해나갈 것 같은데? 그럴 수 있는 놈이지? 반쯤 껍질이 벗겨지고 썩은 몰골이지만 말이야, 저거 진짜 용비늘을 두른 대형 달팽이인 거지? 짐승이나 사람을 꿀꺽꿀꺽 삼킬 수도 있는 몬스터, 그렇지?’
―그래.
환영 속을 헤집으며 ‘망자의 묘실’ 입구가 열린 쪽, 자신을 향해 맹렬하게 돌격해오는 거대한 괴물을 똑바로 마주하며 굳건히 발을 딛고 버티는 투란이었기에 드라고니아는 짧게 대꾸했다.
저리 덤벼오는 몬스터에 대응하는 몬스터 로드의 자세, 투란은 지금 그 올곧은 태도를 보여주는 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