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154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45)
‘자아, 그러면…….’
마음을 가다듬기가 무섭게 투란은 왼쪽 어깨 언저리가 불끈불끈하면서 따스한 느낌으로 채워지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문장 속의 풍경이 이전보다 선명하게 느껴지며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는가’와 ‘해야 하는가’를 단숨에 가늠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이 저절로 ‘알게’ 된 느낌이었다.
그 느낌을 거부하지 않고 투란은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오른손을 크게 휘둘러 내지르기, 그 과정에서 어깨에 자리 잡은 사자 머리의 갈기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며 줄기가 되고 가시를 내밀며 소용돌이치는 수렁처럼, 그물질을 하듯이 뻗어나갔다.
왕가의 전설적인 마도구가 열어버린 문 너머에서 훼손되지 않은 용비늘과 썩어 문드러진 탁한 살점이 뒤엉킨 채로 돌진해 나오던 거대한 달팽이가 가시수렁과 그대로 맞닥뜨렸다.
그 순간 갈래갈래 요동치던 가시수렁, 그 줄기 틈새로 물컹거리는 황금빛이 터져나왔다. 투명하면서도 물렁거리는 황금빛 덩어리는 끈적하게 엮인 채로 거침없이 용비늘 달팽이의 몸 안팎으로 짓치고 스며 물감이 도포(塗布)되듯이 들러붙었다.
―어어? 야, 야! 뭐 하는 거야!
드라고니아가 한 박자 늦게 황금빛 꿀방울이 뭔가 알아차렸다는 듯이 외쳤다.
투란은 산양의 입가에 주름을 잡아 빙그레 웃음을 만들며 대답한다.
‘달래고 길들이잖아. 수문장이라며?’
용비늘 달팽이는 돌격해나오던 파괴적인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다.
그 대신에 불룩 튀어나온 더듬이를 까닥이며 몸을 둥글게 말며 투란에게, 자신을 휘감고 당기는 가시수렁에게 떠안기듯이 굴러나오려 했다. 가시수렁은 거대한 손아귀처럼 매듭짓고 황금빛 점액(粘液)으로 빈틈을 채우면서 그대로 용비늘 달팽이를 받아 내니, 크기가 수 미터를 가뿐히 넘는 달팽이 흉내 내는 공을 받아 쥔 꼴이었다.
투란의 움직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바로 왼손을 움직이는 순간, 왼쪽 어깨에 자리 잡은 뱀의 머리가 살갗을 강으로 여기는 것처럼 흘러내리며 손까지 내려왔다. 손에 가득 범벅된 시커먼 잉크와 뱀의 머리가 엮이면서 툭툭 잉크 방울을 퉁기는 싶은 찰나, 웅크리고 말린 달팽이를 단숨에 삼킬 정도로 입을 크게 열어젖힌 뱀의 머리가 허공에 그려졌다. 단순히 시커먼 채색이 아니란 듯, 그 입속은 붉은 가닥이 뜨겁게 번들거렸고 얌전해진 용비늘 달팽이를 날름 삼켰다.
우드득, 쿠드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용비늘 달팽이가 오그라들었다.
어떤 부분은 곧바로 투명해진 채로 으스러졌고, 어떤 부분은 용비늘의 위용을 과시하듯이 툭툭 비늘과 함께 떨궈지며 버텨냈다.
‘이 녀석, 어떤 놈이지?’
거대해진 두 손을 맞잡으며, 계속해서 크기를 줄여가다가 투란이 물었다.
―응? 어떤 놈이냐니? 몬스터로서의 특징? 아니면 습성?
‘이 비늘 말이야, 몬스터 엠블럼에도 삼켜지지 않고 버텨내잖아. 얘, 몬스터 맞기는 하냐? 어째 마수 같은 느낌도 드는데?’
툭, 투툭.
손아귀에 남은 잔해를 털어내며 투란은 세심하게 떨어져 내린 용비늘을 살폈다.
달팽이의 하얀 속살이 비늘 안쪽에 여전히 들러붙은 채였다.
어딘가 물컹하고 보드라워 보이는 속살은 땅에 닿고 나서는 빠르게 움츠러들며 비늘로 들러붙어 꽉꽉 눌린 모양을 만들기도 했다. 얼핏 보자면 억지로 비늘을 떼어내다 보니 살점이 곁다리로 뜯겨 나온 듯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투란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몬스터의 살점답게 나머지 부분은 모조리 삼켜졌으니까.
문장의 마력에 저항하는 낌새도 없이, 그저 몬스터와는 별개의 존재임을 확실하게 드러내며 남은 부분이었다. 용비늘과 마찬가지로 어떤 것은 삼켜지고 어떤 것은 남겨진 채…… 분명히 한 마리인데 마치 두 마리, 순수한 마수와 괴물이 섞인 듯한 몰골이라니!
―경계상의 괴수, 어느 쪽으로든 기울어질 수 있는 경우야. 이 녀석의 경우에는 죽어가면서 몬스터로 변이되던 중간쯤에 멈춰졌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런 모호한 상태의 특성을 이용하려고 몰아붙여서 수문장으로 박아놓았는지도 모르지.
드라고니아의 대답은 투란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 수문장이란 거, 자세히 좀 말해봐.’
―자세히고 뭐고 없어. 왕가의 보물 중에서 이 망자의 묘실은 대상을 속박하고 감금해서 침입자에 대항한다는 얘기지. 수문장을 억제하는 키워드는 따로 있을 거야.
‘어? 엥? 야, 너!’
투란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으르렁거릴 준비를 했다.
‘망자의 묘실’을 열라고 해놓고 수문장에 대응하는 키워드에 대해서는 아예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잖은가!
드라고니아의 변명은 쏜살같이 투란의 뇌리에 꽂혔다.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흑마법사 놈이 쓰던 중이었으니까. 수문장을 두기 위한 키워드는 알려진 적이 없지, 마찬가지로 수문장을 제어하는 키워드도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그 부분은 왕가의 기밀사항으로 남겨졌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흑마법사가, 결사단에 속하는 놈이 다루고 있다면 수문장 따위는 없이 오로지 열고 닫는 키워드만으로 운영된다고 판단했단 말이야. 뭐, 내 판단이 잘못되긴 했다만…….
‘뭐가 나오든 나라면 얼렁뚱땅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잖아!’
―살짝 그런 생각도 하긴 했다만, 수문장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니까!
으르렁거리는 투란에게 드라고니아는 강경하게 대꾸하고 있었다.
조금 더 뭐라 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투란은 문턱 너머를 보며 멈춰야 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고, 이제 어쩌냐? 저 너머는 진짜 같은데?’
묘한 석재로 이뤄진 문의 형상, 그 너머는 실체를 갖춘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문을 통하지 않고 슬쩍 옆에서만 바라보면, 여전히 투명한 윤곽으로만 비춰 보이는 환영에 불과했다. 그나마 문이 열린 다음에는 어설프게나마 통상적인 시각으로 보이게 되었을 뿐이다.
이대로 넘어가도 좋은가?
넘어갔다가 닫히게 되면?
안과 밖의 여는 주문이 다르면?
순식간에 투란의 뇌리를 헤집는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왠지 들어가기 싫다, 하지만 저 안에 굴러다니는 것들을 그냥 두고 가기도 싫다!
두룩칼과 어울린 흑마법사를 하나 때려잡기는 했지만, 상대가 달랑 그 둘이 아닌 것이 너무 분명한 상황이니 털어 낼 수 있는 것은 몽땅 다 털어가고 싶다!
―야, 진정해! 진정하고 들어!
복잡한 투란의 마음을 향해 드라고니아가 버럭 외쳤다.
마음의 울림, 문장을 통한 외침이었기에 투란은 몰입에서 벗어나 대꾸할 수 있었다.
‘어쩌자고?’
물론 나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던 중인데 넌 어떤 대책을 궁리해냈냐는 물음을 담은 대꾸였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역시 마음으로, 문장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지는 의도.
드라고니아가 한숨과 함께 답한다.
―우선, 다 가져갈 방법은 있다. 잘 봐라, 망자의 묘실이 어떤 크기인가. 이 지하를 왜 비워둔 채로 망자의 묘실이 자리 잡고 있을 것 같냐? 저 마도구는 일정한 영역을 쓸어 담고 비워내고 다시 채워 넣는다. 마도구를 움직여서 담아둔 물품을 한꺼번에 옮기거나 하는 것이 아니야. 한 층씩 이 지하실로 끌어낸 다음, 쓸어 담고 다음 층을 끌어내면 된다. 문제는 일곱 층인데, 다 담을 수 있겠냐는 부분인데…… 블랙레온의 빈자리에 여유가 있겠냐?
‘아, 여유야 있지. 블랙레온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정말로 망자의 묘실을 채워 넣은 채로 움직이지 못해?’
―그런 얘기는 들은 적 없다만? 알려진 바로는 안정적인 영역에서 확실하게 자리 잡는 쪽을 더 중요하게 여긴 마도구라고, 그래서 급할 경우에는 작은 요새 대용으로도 쓸 수도 있다고 했지. 응? 어쩌려고?
투란이 쥴에게서 받은 반지를 떠올리며 히죽 웃었기에 드라고니아가 움찔했다.
그 낌새를 즐기는 듯한 말투로 투란은 곧장 중얼거림과 함께 손을 내민다.
사람의 손가락에는 쥴의 반지가 어둠을 헤아리듯이 은은한 일렁임을 머금고 끼워진 채였고.
“자아, 대마도사님! 믿어요!”
엉뚱한 말과 함께 투란은 곧바로 일곱 층의 환영 속에서 변함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는 ‘망자의 묘실’을 반지로 낙인찍듯이 눌렀다.
격렬한 파동이 퍼져나갔다.
* * *
콰아앙!
숲의 한 귀퉁이를 뽑아 올리는 듯한 굉음이었다.
로잭은 화들짝 놀라서 재빠르게 나무를 타고 올라가야 했다.
쿠르릉.
지진(地震)이 숲을 흔들면서 퍼지고 있었다.
“투란, 설마 너 아니지?”
휘청거리는 나무의 꼭대기에 매달린 채로 로잭이 중얼거렸다.
새소리와 작은 짐승의 놀란 소리가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흔들거리며 기울어지는 나무, 숲의 요동이 로잭의 시선을 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왕궁을 엿보고 가늠해서 그 방향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로잭의 표정은 굳어졌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찾아가겠다는 별장, 숲의 저택 쪽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 지진은 대체 뭔가?
“맙소사!”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고요한 숲을 울리고 하늘로 건축물의 분해되고 파괴된 잔해가 회오리의 격한 율동에 맞춰 치솟고 있단 말인가!
저 정도면 왕도 어디에서라도 볼 수 있을 듯, 못 본다면 눈을 감았거나 일부러 외면해야 할 듯싶을 정도로 굵직한 회오리가 기둥처럼 우뚝 서고 있었다.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기분을 꾹 누르며 로잭은 먼저 숨부터 골랐다.
아직 울려나오는 지진의 여파가 로잭이 매달린 나무를 휘청이게 했고 거기 매달려서 이 땅거죽의 파문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먼저였으니까.
숲의 요동이 가라앉고 지진의 여운이 잦아들 때,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싶을 때 로잭은 재빠르게 나무에서 나무로 뛰며 내달렸다. 간혹 끈을 던지고 채찍처럼 휘두르며, 로잭은 나무 사이를 가로질러 날 듯이 밟고 뛰었다.
거의 지면보다 허공을 움직인 로잭이 마침내 별장이 있을 자리에 도달하고 보니, 건물 흔적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투란, 너 정말 아니겠지?”
휑하니 뚫린 채로, 아직 상공에 자취를 남기고 있는 회오리가 뿌리를 내려보겠노라 파고들었던 흔적처럼 깊이 파낸 구멍처럼 뚫린 채로 비어 있는 흔적을 바라보며 로잭은 덧없는 중얼거림만 토해냈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해서 로잭은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저 구멍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투란이 저 회오리에 휘말렸는가부터 확인해보는 셈이었다. 만약 주변을 뒤지다가 만나면 로잭은 한 대 칠 궁리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을 돌면 돌수록 로잭은 투란이 저 회오리, 이 구멍이 생긴 원인과 무관하든 말든 휘말려든 것만큼은 확실하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었다.
노리던 저택, 별장이 날아갔는데도 아직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으니까.
“젠장! 이 자식, 날려간 거야 파묻힌 거야!”
로잭은 어쩔 수 없이 둘 중 어느 쪽이 더 가능성이 큰가를 궁리해야 하는데…….
돌연 살랑거리는 바람이 로잭의 얼굴에 찰싹 들러붙었다.
자연스럽지 못한 그 풍압, 세진 않지만 이상하고도 남을 상황에 로잭이 급히 숨을 멈추며 대응하려는데, 귀를 간지럽히며 쑥쑥 파고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로잭, 로잭, 로잭. 들려? 아, 들리겠구나. 혹시 날 찾고 있으면 그냥 여관에 돌아가 있어. 숲의 저택이 통째로 날려가는데, 나 땅굴로 도망쳤거든. 어디로 나갈지 모르겠지만, 나가면 여관으로 돌아갈 거야. 아, 이건 내가 아는 정령이니까.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에어로, 로잭에게 붙어 있어. 내가 찾아갈 때까지!
투란이었다.
“이 미친놈이!”
급히 로잭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땅굴!’이라며 구멍을 내려다봤다.
깊이 무너져 내린 구멍 어디에도 새나가는 땅굴은 없어 보였다.
그런 로잭을 위로라도 하는 듯, 바람결이 목을 휘감고 볼을 어루만지면서 쉴 새 없이 꼬물거리고 있었다. 장난처럼, 혹은 다독여주는 것처럼 움직이는 비정상적인 바람…… 로잭은 ‘정령’이라는 말의 의미를 자신이 체감하는 중이라고 인정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가 따지고 싶었지만, 지금 로잭 앞에는 따져 물을 놈이 없다!
“망할…….”
어쩔 수 없이 로잭은 물러서는 쪽으로 택할 수밖에 없었다.
더 오래 머물다가는 뒤늦게 이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오는 이들과 마주칠 가능성도 있었고, 만나서 무슨 일인가 오순도순 얘기해볼 처지는 아니므로.
그래서 로잭은 다시 잔잔해진 숲으로 몸을 던졌다.
* * *
“어푸풋! 아, 뒈지는 줄 알았네!”
무너진 통로 한편에서 반쯤 파묻힌 채로 입안에 머금은 먼지와 티끌을 뱉어내며 투란이 기어나왔다. 뇌리에는 드라고니아가 격렬하게 욕설을 퍼붓는 느낌이 꽂혀들지만, 듣지 않는 채로 앞부터 살피는 투란이었다.
지하의 붕괴에 휩쓸려 뒤편의 반쯤은 사라졌지만, 앞으로 나아갈 절반의 통로는 아직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