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159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50)
신기하다, 그 느낌과 분위기를 투란은 듬뿍 깨달았다.
곁에는 살의를 품었지만 단정한 태도로 덮어 감추고 있는 하멘, 그 뒤로 보렌이라 불린 자를 중심으로 해서 여전히 착착 발걸음을 맞춰 따라붙고 있는 무장한 기사들이 있었지만…… 투란이 느끼는 분위기를 덜어내지는 못했다.
‘낯선 곳인데, 낯익어.’
친근함, 그리고 아련한 그리움.
투란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정서(情緖)가 이 별궁, 봄의 궁전으로부터 따사롭게 흘러나와 주변을 맴도는 듯했다. 곁에 붙고 감시의 눈길을 늦추지 않는 이들을 주렁주렁 매단 듯한 처지를 고려하면, 전혀 느낄 리가 없어야 하는데…….
―이곳에 저런 몰골로 거침없이 들어서는 것부터가 괴상하잖아.
드라고니아는 그들이 여전히 축성봉을 들고 무장한 채인 것을 짚고 있었다.
‘뭐, 평소 여기서 저러고 다닐 수도 있잖아?’
투란은 그저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어째서 자신이 아련하고 그리운가를 되새겨보려 했다. 하지만 왼쪽 어깨가 찌릿거리며 달아오르는 것 말고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마치 아직은 아니란 듯, 자신의 또 다른 의지가 소곤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투란은 그대로 걸음을 내디뎠다.
궁전의 벽을 채운 나무의 무늬, 음각(陰刻)과 양각(陽刻)이 뒤엉킨 상감(象嵌)은 벽이 단순한 석재(石材)가 아니라 금속(金屬)과 목재(木材)까지 거침없이 섞여 있다는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 무늬를 보는 투란으로서는 ‘처음 보는 나무다! 뭔 나무야!’라는 느낌만 강했지만, 그 느낌 위로 금방 덧씌워지는 아련함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기묘한 느낌 속에서 투란은 하멘이 안내하는 복도를 지나 넓고 큰 별궁의 중심에 도달했다.
천장을 대신해서 한없이 치솟는 나선의 계단을 휘감은 기둥이 우뚝 서 있었다. 기둥을 중심으로 활짝 펼쳐진 꽃잎처럼 단을 이루고 사방으로 이어질 듯한 복도의 입구가 문도 없이 드러난 모양…… 아예 광장이라 불러야 할지 그냥 거대한 방이니까 그랜드 홀이라 일컬어지는 실내가 아닐런가 싶기도 한데…… 중앙의 기둥이 워낙 인상적인 채로 자리 잡고 뿜어내는 분위기가 그 모든 상황을 압도하고 있었다.
잠시 멍하니 투란이 올려다보는 사이, 갑작스럽게 들려온 큰 목소리가 있었다.
“정말 투란이로군, 정말로 투란이야.”
올려다보던 눈길을 돌려 투란이 바라보니, 기둥을 휘감은 나선 계단의 맨 아래쪽에 장식처럼 앉고 서 있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잔뜩 키운 수염을 이리저리 자르고 다듬어서 꽤 깔끔하게 꾸며놓은 낯이었고 눈매가 낯익지만, 그 눈가와 콧등 주변에 자글거리는 세월의 낙인은 굉장히 낯선 이였다.
하지만 투란은 그가 누군가 금방 입 밖에 낼 수 있었다.
“알킨?”
아비를 닮지 않은 아들, 아무래도 어미 쪽에 가까운 얼굴이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투란의 기억을 쿡쿡 쑤셨다.
―딱히 외모로 알아본 것은 아니지?
드라고니아가 투란의 심정이 기묘하게 소용돌이치는 것을 느낀 듯, 갑작스럽게 투란이 미쳐 날뛰려는 것을 막으려는 듯이 불쑥 말하고 있었다.
‘당연히 아니지! 저렇게 팍 삭았는데 알 게 뭐야! 저놈도 대놓고 목에서 꺼내 대롱대롱 매달아 보이고 있잖아!’
투란은 피식 입꼬리를 당기는 스산한 웃음과 함께 붉은 보석을 가슴에 매달고 있는 알킨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그 순간, 하멘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목소리만큼이나 날카로운 힘이 투란의 앞을 가로막듯이 흐르며 나지막한 외침이 울렸다.
“멈추십시오! 더 이상 가까이…….”
하멘의 외침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말과 함께 하멘은 번개처럼 잰걸음으로 투란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지만, 말을 멈출 무렵에는 순식간에 열 걸음 이상 투란에게서 멀어진 채였다. 그리고 뒤늦게 그런 자신의 발놀림을 깨달은 하멘은 식은 땀을 흘리면서 투란을 놀란 눈길로 바라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덩달아 투란의 뒤에 붙으려던 보렌 또한 다른 이들과 함께 투란에게서 십여 걸음 이상을 뒷걸음질 치며 칼자루에 손을 얹는 중이었다.
갑작스럽게 하멘을 비롯한 이들이 느낀 바가 착각이 아니었다는 것을 서로의 움직임, 태도, 뒤늦게 교차한 눈길로 서로 확인할 때 다시 알킨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아, 그만, 그만해요 하멘 경. 최소한 상급의 몬스터 로드라고 이미 알고 있었잖아, 다들…… 어, 투란 너무 겁주지 말라고. 오싹오싹해서 도망가고 싶잖아. 하하핫, 그래 오랜만에 보는데…… 뭐 할 말이 있는 모양이네? 뭐야, 어서 말해. 너무 겁주지는 말고 말이야. 하핫.”
투란은 살짝 낯을 구겼다.
담대한 척하는 알킨의 눈가, 입술 아래가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찌 보면 알킨은 진실을 그대로 토해내는 모양이었다.
너무 겁을 주면 정말로 도망치겠다고 말하는 것이 거짓이 아닌 듯 보이니까.
‘그냥 가벼운 한숨 쉰 것뿐이잖아?’
투란으로서는 주변에서 거리를 둔, 간격을 두고 잔뜩 경계심을 드러내며 노골적으로 오러 가드를 몸에 두르는 하멘 일행부터 저리 떠드는 알킨까지…… 딱히 한 짓도 없는데 너무 과장된 반응을 보이는 것 아닌가 싶어 못마땅하다! 하지만.
―사룡의 숨결이 토해지는 것 같았잖아! 너, 지금 정서적으로 오락가락한다고! 사룡이 너에게 호응해서 방금 오러의 형세(形勢)에 살짝 형상을 실었단 말이다! 단숨에 다 쓸어버릴 것처럼!
드라고니아가 뇌리를 들쑤시는 외침을 터뜨리고 있었다.
‘내가? 정말로?’
―그래! 오러로 마음부터 가다듬어!
다시 한 번 으르렁거리는 외침이 뇌리를 쑤시는 탓에 조금 더 낯을 구기면서도 투란은 일단 가볍게 숨을 가다듬으며 두어 걸음 더 앞으로 내디뎠다. 그리고 알킨을 바라보며 입을 여는데.
“쭈글쭈글해서 진짜 너인가 헷갈린다. 계속 얘기해봐야 계속 알킨인가 의심만 할 것 같으니까, 간단히 용건만 말하지. 내놔.”
길어질 듯한 말이 끝부분의 한마디로 압축된 채였다.
알킨이 잠시 어이없다는 듯이 투란을 바라봤다.
곧 키득거리는 웃음과 함께 알킨은 자신의 가슴팍에서 대롱거리는 붉은 보석, 그 보석을 매단 줄을 살짝 당겨 추처럼 흔들면서 묻는다.
“이거 내놓으란 이야기지?”
“흠집 하나 내면 손목 하나 날아간다. 둘 내면 손발 어느 쪽이든 하나 더 날릴 줄 알아.”
투란은 장난처럼 흔들거리는 붉은 보석을 바라보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그 차분함과는 꽤 거리가 있는 협박이 담겼지만.
알킨이 느릿하니 계단에서 일어서며, 여전히 보석을 매단 끈을 가슴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투란을 향해 한 걸음 나선 채로 말한다.
“투란, 너 이게 무슨 보석인가 알고는 말하는 거냐?”
한숨이 투란의 입가에서 새나왔다.
이번에는 하멘 일행을 움직이는 한숨은 아니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아까보다 누그러진 듯도 하고, 자제한 듯도 한 모습으로 투란이 알킨을 마주 보며 말한다.
“쭈글쭈글해지더니, 쓸데없는 말만 많아졌네. 알킨, 닥치고 내놔. 얌전히 말로 할 때 말이야. 보석만 내놓으면 너랑 볼일 없으니까.”
“보석만…… 보석만이라, 그러니까 투란 네가 원하는 것은 이 작고 붉은 보석뿐이란 말이냐? 이 보석에 얽힌 사연, 보석을 지닌 자가 품어야 할 의무 따위에는 관심없어?”
알킨이 번들거리는 눈빛을 숨기지도 않은 채 다시 묻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확인하고픈 것처럼,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것처럼 묻는 알킨의 태도에 드라고니아가 바로 경고를 하려 했다. 하지만 투란은 그 낌새를 느끼자마자 문장의 풍경 속에서 일렁이는 별빛무리를 저 멀리 밀어내며 그 소리를 외면하는 채로 보다 분명하게 알킨을 향해 대답한다.
“관심 없어, 알킨. 네 어머니와 약속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경고하지. 보석을 흠집 하나 없이 온전하게 내놔. 보석만 온전히 받으면 난 너랑 다시 볼일 없어. 하지만 알킨, 허튼수작을 부리거나 보석에 흠집 하나라도 생긴다면…… 내가 널 어떻게 할지 몰라. 그 때는 아무도 날 못 말린다.”
차가운 말투였고, 서리가 흩날릴 듯한 분위기마저 맴돌았다.
그런데 알킨은 투란을 향해 웃고 있었다.
번뜩거리는 눈빛 속에 기괴하게 맺힌 웃음을 얼굴에 박은 채로 알킨이 투란에게 느릿느릿 또박또박, 세게 당겨 목에서 끊어낸 줄에 매달린 붉은 보석을 내밀며 말한다.
“어머니라…… 남작 부인 이야기지? 그러니까, 넌 이 보석의 의무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거지, 투란? 그저 이 보석, 이 작고 귀하며 비싼 보석만 가져가면 된다고 말하는 거지? 보석의 의무 따위는 아무 관심도 없다고, 진심으로 말하는 거지? 그렇다면 투란, 내가 보석에 얽힌 의무를 떠맡는 것에도 불만없겠지? 관심도 없고 말이야. 그렇지, 투란?”
살짝 입술을 달싹이려다가 문득 투란은 하멘 일행이 꽤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덤으로 알킨과 함께 계단가에 있던, 귀족부인의 눈빛도 의아할 정도로 심각해지고 있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저 알킨 옆에 있나 싶었던 귀족 부인의 정체 따위는 전혀 알 수 없지만, 그 주변에 커다란 두건을 푹 눌러쓴 채로 치렁치렁한 로브를 늘어뜨린 이들 또한 묘한 분위기로 열의를 드러낸다는 것 또한 느낄 수 있었다. 모두가 투란의 지금 대답에 뭔가를 기대하는 듯한, 그리고 누구보다도 알킨이 간절히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가를 투란은 느껴 알 수 있었다.
‘하아, 이것 참…….’
심술궂게 그 대답을 피할 것인가?
굳이 그래야 할 까닭이 있는가?
투란은 자신이 보석에 얽힌 사연에 관심이 있는가를 되짚어봤다.
아무 느낌도 없었다.
가슴속에도, 온몸의 맥동 어디에도 보석에 얽힌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부분은 없었다. 그저 보석의 맥동, 반짝임을 보며 저것만 온전히 되찾으면 된다는 의지가 굳건해질 뿐이었다.
그래서 투란은 차가운 숨결 사이로 알킨이 갈망하는 대답을 꺼내줬다.
“귀머거리 시늉이냐? 관심없어, 알킨 네가 그 보석을 이용해 무슨 짓거리를 하며 살아왔는지도 관심없다고. 넌 그냥 얌전히 보석만 넘기면 돼. 의무? 짊어지고 싶으면 그렇게 해. 하지만 뭘 하든 그 보석은 온전하게, 흠하나 없이 내놔야 한다. 알킨, 날 화나게 하지 마.”
과연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던가, 알킨이 웃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 다르게, 드러내놓고 번들거리는 눈빛은 알킨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켰다는 신호처럼 보였고 흔들어대던 보석을 더욱 세게 흔들며 꺼내는 말투는 방금/조금 전과 다른 오만함이 넘쳐나는 목소리의 원인처럼 여겨졌다.
“너 따위를 화나게 해서 뭘 하겠나, 투란. 고귀한 혈통에 담긴 의무 따위는 알려고도 하지 않고 관심도 없다는 녀석이 화를 내든 말든, 누가 상관하겠나! 하하핫, 정말 밑바닥을 뒹굴며 몬스터나 품고 사는 녀석답구나! 그러니까 내가 기꺼이 맡아줄 수밖에 없겠지! 네가 말한 대로 내가 고귀한 의무를 짊어질거야! 하하핫! 아, 그렇지. 이 보석, 이 보석만은 갖고 싶다고 했지? 자, 가져가라고. 의무를 저버린 자여!”
과장된 몸짓, 주변을 둘러보며 승리한 자의 태도를 한껏 드러내며 알킨은 흔들고 있던 줄을 놔버렸다. 추처럼 흔들리던 보석은 그대로 허공을 가로지르며 투란 쪽을 향해 날려지는 듯했다.
그러나 보석은 투란에게 닿지 못했다.
어중간하니 바닥에 내동댕이쳐졌을 뿐이었다.
붉은 보석은 바닥에 부딛힌 순간 산산조각이 났고, 불으스름한 아지랑이처럼 증발하듯 사라지기까지 했다. 남은 것이라고는 바닥에 살짝 뒹구는 목걸이 줄, 금속으로 된 줄이 찰그렁거리는 여린 메아리, 흐릿하게 허공에 남겨진 붉은 자취의 잔상(殘像)…….
투란은 물끄러미 그 잔상을, 붉은 잔영을 향해 다가갔다.
―투란! 정신줄 놓지 마라! 주위를 둘러봐! 야, 너 대체……!
억지로 키운 드라고니아의 외침이 투란의 가슴을, 뇌리를 울리며 꽂혀들었다.
하지만 투란은 듣지 않았고, 주변도 돌아보지 않았다.
덤덤하게, 당연하다는 듯이 투란은 몸을 숙여 보석의 자취가 흐릿한 목걸이 줄을 쥐었다. 가만히 바닥에 들러붙은 듯이 한쪽 무릎을 굽힌 채로 목걸이 줄을 들고 보석이 매달려 있던 부분을 손끝으로 문지르는 투란의 입가에서 느릿한 한숨이 정적(靜寂)을 머금은 듯이 새나왔다.
그런 투란을 향해 알킨은 차갑게 조롱하는 눈길을 보내며 하멘을 향해 손짓하고 말한다.
“하멘 경, 봤습니까? 이것이 비천하게 자란 자의 모습입니다. 그 몸안에 무슨 피가 흐르던 저런 몰골이지요. 살아남겠노라고 괴물까지 몸에 품는 천박한 자로 전락한 모습, 잘 확인했습니까? 하멘 경, 과연 이런 일이 세상에 알려져야 할까요?”
하멘이 돌처럼 굳은 얼굴로 무겁게 대답한다.
“아니요, 왕가의 진정한 혈통이라면 결코 저렇게 전락할 리가 없습니다. 세상에 저런 모습이 알려져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이 자리에서 마무리 짓고 잊히도록 하는 것이 근위기사로서 해야 할 일이겠지요. 보렌, 발검(拔劍)하라. 고통 없이, 역대 선왕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로서 고통 없이 그 핏줄을 참하도록 하라.”
찰칵,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보렌이 성큼 투란을 향해 나서며 검을 뽑아 들었다.
여전히 보석을 매달았던 줄을 만지작거리는 투란에게, 그 목을 향해 검의 궤도를 잡고 보렌이 힘껏 팔을 휘두를 준비를 할 때 투란의 주변을 맴돌며 축성봉이 겨눠졌다. 몬스터를, 마법을 억압하는 성스러운 힘이 곧바로 투란을 휘감았고 압박해 퍼져나갔다.
보렌은 그 힘을 느끼며 오러를 가득 담은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모두가 확인했다.
보렌이 수평으로 툭툭 끊어지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토막 나며 미끄러져 바닥에 흩어지는 기괴한 광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