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160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51)
Chapter 231. 왕의 자격 Ⅰ
갑작스러웠다.
때문에 하멘은 한 박자 늦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하멘의 입술은 마음보다 먼저 움직인 듯, 목청이 울리기가 무섭게 뒤틀린 외침이 혀를 휘감으며 터져나갔다.
“성화봉을!”
귓가를 울리는 자신의 외침에 하멘은 가슴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을 깨달았다. 오러가 맹렬히 유동(流動)하며 몸을 지키기 위해, 갑작스러운 놀라움으로부터 빠르게 진정시키는 효과를 발휘하며 퍼진 순간이었다.
때문에 하멘은 두 번째로 펼쳐진 광경을 아주 차분하게, 그야말로 냉정하게 관찰하듯이 지켜볼 수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움직이는 자신의 손이 너무나도 느리다는 것을 뼛속까지 느끼면서…….
화륵, 축성봉의 끝자락에 불꽃처럼 일렁이는 빛이 피어났다.
빛은 진짜 불꽃처럼 바람결을 흔들었고 허공에 유려한 파문을 흘렸다.
여러 자루의 축성봉이 둘러싸고 퍼뜨린 그 빛의 파문이 중첩된 자리, 중심에서는 투란이 바닥을 향해 구부렸던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우는 중이었다.
그리고 빛을 가르는 기묘한 수직의 단선(單線)…… 마치 불꽃을 가르고 지나간 바람결의 흔적처럼, 하지만 그 색채는 선명하게 붉은 핏빛에 가까운 외줄의 자취가 생겨나는 듯했다가 사라졌다.
보렌의 몸이 수평으로 토막 나며 바닥에 무너지는 장작더미처럼 처박히는 과정이 거의 마무리 지어질 때였다. 그 참상(慘狀)을 보고서도 흔들림 없이 축성봉을 들이대는 모습들은 숙련된 기량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듯했다.
그런 숙련된 모습 때문일까, 축성봉과 함께 수직으로 토막 나며 좌우로 갈라져버리는 몸통이 즐비한 풍경은 누구의 예상에도 없는 것이었다.
“무슨 짓을! 멈추……!”
뒤늦게 칼자루를 당기며 하멘이 외쳤다.
그러나 이 외침은 칼자루처럼 크게 뻗어나가질 못했다.
칼자루가 멈춰진 것처럼 하멘은 입이 굳어 말을 멈춰야 했다.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그저 하멘의 어깨가 썰려나갔고, 한쪽 다리의 무릎 아래도 끊어졌을 뿐이었다.
반사적으로 발동한 오러 가드로 인해서 머리부터 쪼개지는 것은 피했지만, 하멘은 칼자루를 당기던 팔과 그에 맞춰 내딛던 다리를 완전히 빼내지 못해 절단당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치명상이 하멘을 당혹시킬 때, 그 귓가로 투란의 나직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귀찮아…….”
나른한 짜증이 어린 말투였다.
아이들이 장난감을 갖고 놀지 못하게 하면 징징거릴 때 낼 듯한 말투, 목소리 또한 그에 어울리는 속삭임처럼 나직하잖은가.
하멘은 위화감을 느꼈다.
도시 귀퉁이의 은밀한 여관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 느꼈던 투란이 저랬던가?
몬스터 로드가 몬스터의 본능, 감성에 휘둘려 뒤죽박죽인 인격을 드러내는 것을 하멘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투란처럼 순수한 인간의 감성을 드러내는 경우는 없었다. 폭동, 광란으로 일컬어지는 몬스터 로드의 착란 현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인간으로서…… 어린아이처럼 불만과 짜증을 토해내는 모습이라니, 정말 몬스터 로드이긴 한가?
하멘은 잘려나간 팔다리로부터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며 다시 투란을 바라봤다.
오싹함이 하멘의 오러를 흔들었다.
토막 나고 잘려나간 성화봉이 여전히 성스러운 불꽃의 힘을 방출하고 있었다.
투란은 그 한복판에서, 그 성스러운 불꽃을 온통 뒤집어쓴 듯한 모습임에도 어떤 제약도 받는 낌새가 없었다.
‘어째서?’
하멘의 소리 없는 절규는 모두에게 닿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어, 어떻게? 뭐야, 어찌 된 일이냐고!”
알킨이 외치고 있었다.
모두가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던…… 텅 빈 방을 울리는 메아리처럼 퍼지던 알킨의 외침, 이는 보다 나른하고 짜증 난 속삭임이 흐르는 순간에 지워졌다.
“정말 귀찮으니까 한 번만 말할게. 끼어들지 마. 끼어들면 죽어. 신전이든, 기사든…… 끼어들면 죽일 거야.”
말하는 투란의 왼편 어깨에서 은은한 핏빛의 여운이 맴돌았다.
하멘은 오러로 지혈(止血)을 하던 중에 확실하게 그 핏빛 아지랑이를 봤다. 그리고 바로 깨달았다.
‘성스러운 힘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몬스터!’
춤추는 산맥에서 별로 희귀한 일은 아니었다.
성스러운 힘이 깃들었다는 무구를 지닌 성기사, 성전사.
성물을 몸에 지녀 사악하고 뒤틀린 존재는 저절로 회피하게 만든다는 사제.
그들이 몬스터에게 잡아 먹히고 찢겨 죽는 일이 어쩌다 드물게 일어나지 않는 마경(魔境), 바로 로그람 왕국이 자리 잡은 춤추는 산맥이잖은가.
하도 잘 죽어서 신전에서 신관이나 성기사를 파견할 때 아예 목숨을 보존시켜줄 성스러운 비술을 각인시켜 보내기도 한다 했다. 덕분에 춤추는 산맥을 떠도는 몬스터 헌터 사이에서 그들은 배반과 탈주를 일삼는 도망자로 악명이 자자하기도 하잖던가.
몬스터 로드가 그런 성향의 몬스터를 삼켰다면, 그런 몬스터 중에서도 강력한 괴물을 품고 있다면…… 어쩌면 지금 투란처럼 성스러운 불꽃의 힘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을 수도 있잖을까?
하멘의 생각은 이 지점에서 멈춰져야 했다.
하멘이 물러선 자리가 알킨의 앞쪽이었고, 투란은 똑바로 한 걸음 디디며 하멘을 노려보는 중이었으니까. 두 번 말할 생각이 없다는 의지가 그 눈빛 속에서 역력히 번뜩이기에 하멘은 어떻게든 대처를 해야 했다.
물러서든가, 비켜서든가.
하멘의 결정은 빠르게 이뤄졌다.
“그대는…… 결코 왕좌에……!”
잘려나간 쪽의 손이 하멘의 주력이었지만, 남은 한 손으로도 하멘은 오러 윌더로서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춤추는 산맥에서 무서운 것 없이 날뛰는 몬스터 헌터들조차도 인정해준다는 오러 윌더, 오러로 지혈하고 부상을 감추며 사지(四肢) 중 하나만 남아도 전력을 발휘한다는 오러 윌더답게 하멘은 빈손으로 칼자루를 잡아 그대로 밀어내듯이 뽑아 휘두르고 있었다.
하멘의 몸이 동강 나서 옆으로 밀려 나갈 때, 그 핏방울이 잔잔하게 허공을 수놓는 광경을 알킨은 똑똑히 봐야 했다. 바로 자신의 앞에서, 마법의 장막이 아니었다면 알킨은 자신의 얼굴까지 저 핏방울이 튀어왔을 것이란 것을 똑똑히 알면서 지켜봐야 했다.
왕국의 근위기사, 그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강력한 오러 윌더인 하멘이 길가의 풀 이파리처럼 동강 나서 담벼락에 부딪힌 개구리처럼 튕겨 나가는 광경…….
알킨이 결ㅗ 기대한 적도, 상상한 적도 없는 일이었다.
마주 보는 투란의 얼굴, 세월을 전혀 담지 않은 기억 속 그대로의 얼굴이 알킨을 한층 더 마비시키는 듯했다. 할 말도, 해야 할 일도 잊은 듯이 알킨이 투란만을 바라볼 때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귀족부인의 목소리가 차갑고 사납게 터져나왔다.
“사제님들! 구경만 하실 때인가요?”
“그럴 리가요, 이미 알킨 공 앞에 신성 장막이 펼쳐져 있잖습니까? 허헛, 그러면…… 정리해드리도록 하지요.”
여유롭고 당당한 대답이 깊은 두건을 눌러쓴 채로 몇 걸음 뒤에 서 있던 이들 속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불린 호칭 그대로, 로브를 열어젖히면서 사제들이 성의(聖衣)를 드러내며 앞으로 나섰다.
잘려 나간 성화봉으로부터 남겨진 성스러운 불꽃의 여운이 그림자처럼 흔들거리며 물결치는 잔상과 함께 알킨의 앞에 드리워진 장막…… 무지(無知)하거나 분별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그저 마법의 장막이라 불리는 것이 당연한 성광(聖光)을 머금은 장막과 겹쳐졌다.
투란이 물끄러미 그 장막을 보며 살짝 눈가를 찌푸리는데, 사제가 장막과 몸을 겹치면서 말을 잇고 있었다.
“스스로 내려놓은 권리요. 억지 부리지 말고 물러서는 것이 어떻겠소? 당신의 조상들이 지금 당신 모습을 보면 얼마나 부끄러울지 조금이라도 생각을…….”
퍼석, 투둑.
사제의 말은 끝맺음 없이 멈춰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말하던 사제의 턱 아래와 목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렸고, 가슴 또한 머리통이 지나다닐 만한 구멍이 생겨난 탓이었다. 원래 그 구멍을 채우고 있어야 할 피와 살은 사제가 걸은 자리를 탐하듯이 장막 뒤로 밀려나 떨궈지며 둔탁한 소리를 내기까지 해서 누구도 잘못 봤다거나 잘못 들었다고 하지도 못했다.
새로 생겨난 광경은 조금 전에 기사들이 절단당하고 그 우두머리인 하멘이 쓰러졌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이끌어냈다.
“주, 주교님!”
“대, 대사제!”
성의를 입은 이들은 ‘주교’란 말과 함께 압도당한 자의 경악을, 사제들에게 나서길 요청했던 귀족부인에게서는 ‘대사제’란 한 마디에 가득 공포를 담은 외침을 끌어냈다.
그리고 계단을 밟으며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선 알킨은 급하게 손목을 비틀며 흔들었다. 손목에 걸린 방울이 소리 없이 찰랑거리는 손짓인 셈이었고, 이는 곧바로 저편의 문을 열게 했다.
정돈된 소란이 새롭게 풍경을 채워나가는데…….
투란은 자신이 들어온 문의 맞은편, 좌우로 세모꼴을 이루는 듯한 저편의 두 문이 열리면서 새로운 기사들…… 축성(祝聖)을 담은 마법봉 따위는 들지 않고 검과 방패로 중무장한 기사단으로 보이는 이들이 와르르 몰려나오는 광경을 확인했다.
한숨이 투란의 입가에 걸렸고, 왼손으로 머리를 긁적이게 했다.
왼쪽 어깨에서 아지랑이처럼 맴도는 핏빛의 여운, 그 여운과 함께 투란은 잃었던 기억의 일부가 손끝을 따라 재현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뭔가 지금 폭발해버릴 듯한 자신의 울화를 적당히 희석시키면서도 할 일을 제대로 해주는 느낌이기에 될 대로 되라고 내버려뒀더니 곧바로 뇌리에 쑥쑥 스며온 것은 뭘 어찌해야 하는가에 대한 간략하고도 명쾌한 지침(指針).
그래서 투란은 핏빛 어린 오러의 칼날로 하멘과 그 일당들을 도륙(屠戮)했고, 어처구니없이 나서는 사제란 작자에게도 구멍을 내줬다.
‘블러디 오러라니…… 뱀파이어가 이런 짓도 할 줄이야.’
뱀파이어, 그 혈족들은 이렇게 오러를 발생시켜 다루는 것을 ‘생명(生命)의 투기(鬪技)’라고 읊조렸다. 피를 마시고 히죽거리는 몬스터가 아니라 제대로 지성을 갖추고 대화가 가능한 존재란 것을 과시라도 하듯, 순수한 인간과 다르지만 같은 계통의 능력과 기교를 갖춘 문명을 이루고 있다고 자랑했던 것이다.
물론 그 과시와 자랑을 깡그리 잊게 만드는 짓거리는 더 많았던 듯한데…….
‘불리트로 다 쓰러뜨리기는 좀 그러네.’
문득 새로 등장한 기사단을 둘러보면서 투란은 조금 더 눈가를 찌푸린 채로 손가락 사이로 맴도는 ‘블러디 오러’를 희석시켰다. 이 특별한 뱀파이어의 오러를 더 강화하고 중첩시키면 뱀파이어의 형상이 보다 더 구체화되어야 했다. 그게 어째서인가 이 상황에서는 달갑지 않다는 느낌이기에 투란은 다른 방법을 생각하기로 한 셈이었다. 혹은 무심결에 언더섀도우에서의 모습을 더 끌어내고 싶지 않은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전투기사단이다. 몬스터를 주로 상대하는 왕궁의 주요전력이야. 다 쳐 죽이면 로그람에 큰 피해가 생길 수도 있어.
갑작스럽게 드라고니아의 침착하고 냉정한 말이 투란의 뇌리에 스며들었다.
어쩐지 조금 전까지 희미하게 가라앉은 듯했는데, 돌연 제자리를 찾은 듯한 읊조림을 흘리는 드라고니아였다.
투란으로서는 자신이 잠깐 울컥해서 아무 말도 듣지 못했던가 싶기도 했지만, 이를 따지기보다는 지금 새로 나타난 전투기사단이란 이들부터 살펴봐야 했다.
‘남자 두목이랑 여자 두목?’
이끄는 이가 둘이었다.
아직 어린 티가 나지만 충분히 어른인 듯한 청년, 그보다 더 어리기에 소녀스러운 티가 더 짙기는 하지만 사나운 태도와 표정이 그리 어린 쪽은 아니라고 드러내는 듯한 여성인 기사…….
그런데 분명히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한 듯한 둘의 기량은 함께 튀어나온 다른 기사들보다 전혀 나은 부분이 없는 듯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왕국의 중요한 전력을 이끄는 자라면, 그야말로 온갖 경험을 다 갖춘 베테랑 중에서도 베테랑이어야 하는 것 아니던가?
때문에 투란으로서는 이게 무슨 조합인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의문에 대해서 투란이 더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우두머리 청년이 드높이 외친 소리, 그 외침 담긴…….
“아버님, 어머님! 괜찮으십니까?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사제분들…… 물러서서 지원을 맡아주십시오! 대사제께서 비운 자리를 맡아주세요! 성스러운 방벽을 유지하십시오!”
알킨과 귀족부인을 향한 호칭에서부터 뭔가 어렴풋이 납득할 낌새가 느껴지잖나.
“전투기사단은 대귀족의 자제가 이끄는 경우가 많지. 전투력 때문이 아니라, 귀한 집 애새끼라도 직접 전장에 나서는 꼴을 보이려는 때문이랄까? 뭐, 그렇다고 해서 그 애새끼들이 약골인 경우는 없어. 몬스터랑 드잡이하듯 싸우는 곳에 보내는데 약골을 내보내면, 기사단 놈들이 엉덩이를 걷어차서 몬스터 끼니부터 채워주려 할 테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애새끼들이 지휘를 맡았다면, 나름대로 인정받고 있다는 얘기지.”
투덜거리던 오러클 아저씨의 이야기가 새록새록 투란의 귓가에서 다시 울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