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162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53)
“세실! 마도기, 마도기를!”
알킨의 외침은 여전히 속삭임에 가까웠다.
하지만 귀족부인에게는 충분히 닿았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저 알킨과 같은 선택을 했는지도 몰랐다.
귀족부인 세실은 분노와 증오를 담아 투란을 노려보며 알킨의 속삭임과는 무관한 듯이 목청껏 외치고 있었으니까.
“포스테인의 피를 이은 자가 명한다! 깨어나라, 휘아드!”
세실의 목 언저리에 달라붙어 있던 보석이 빛을 뿌렸다.
시동(始動)의 키워드에 반응한 마도기(魔道機) 휘아드, 빛으로 먼저 그 형태가 그려지고 있었다. 세실을 휘감으며 두 배는 커진 몸집, 여성을 휘감지만 전투에 적합한 남성의 근골을 고스란히 구현해내면서 갑주와 방패, 늘어뜨린 케이프의 어깨걸이에는 화살통을 연상시키는 투창까지 몇 자루 가지런히 매달린 채였다. 허리 양쪽으로 묘하게 휘어진 칼이 하나씩 매달리기도 했고, 두 팔뚝에는 언제라도 방패를 대신할 수 있어 보이는 네모진 철갑도 굵직하게 붙어 있었다.
세실은 순식간에 휘아드의 형상 속에 감춰지는 듯했고 성난 목소리가 두 배는 커진 것처럼 연이어 울려퍼진다.
“죽여버리겠어! 로그람의 혈통을 끊어버리겠어! 내 아들, 내 딸의 원수!”
그 소리를 들으며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투란.
알킨은 그런 투란의 어깨에서 찰랑거리는 가시수렁이 이제는 어깨걸이 외투처럼 오그라들어 꿈틀거리는 것을 봤고, 그 심상치 않음이 손 언저리에 맺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치 실뜨기 장난질처럼, 굵은 넝쿨줄기를 엮어 인형을 만드는 것처럼 투란의 손 언저리를 맴도는 가시수렁의 줄기는 뭔가의 입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어찌 보면 뱀처럼, 어찌 보면 도마뱀처럼 느껴지면서도 앙증맞은 뿔모양까지 갖춘 장난감…… 몬스터의 형상이 아니라면 정말로 장난하려는구나 싶은 모양이었다.
알킨이 그 모양의 위화감에 뭐라 말하려 했지만 애초에 속삭이는 듯했던 그 목소리는 너무 낮았고 세실이 휘아드를 휘감고 터뜨린 외침은 너무 컸다. 그리고 그 모든 소리가 단숨에 지워지기도 했다.
툭.
둔탁한 음향(音響), 그저 뭔가 건드리고 지나갔다는 느낌이었고 귀로 듣는 소리는 아닌 듯한 음향이 울렸을 뿐이었다. 살갗에 닿는 그 음향이 기묘하게 번져 귀에 닿은 것이 아닐까 싶은…….
그 결과가 무엇인가 알킨은 겨우 굴린 눈동자 한편으로 엿볼 수 있었다.
마도기 휘아드, 어지간한 마법과 괴력으로는 흠 하나 날 리가 없다고 하는 포스테인 후작가의 전략병기가 으스러지고 갈려서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광경이었다. 그 와중에도 착용자인 세실은 투명한 천에 그려진 듯이 너울거리며 저편에 밀려 나가 뒹굴고 있었으니, 휘아드가 파멸하는 순간에서조차 착용자를 지키는 훌륭한 마도기라고 스스로 증명하는 듯했다.
이명(耳鳴)과 함께 알킨이 현기증을 느끼는데, 불쑥 귓가로 꽂혀드는 소리가 있었다.
“너도 저런 거 있냐?”
문득 알아차렸다는 듯이 저쪽에서 너울거리며 투명한 채로 뒹굴다가 다시 본연의 형체를 되찾아가는 세실, 귀족부인의 너덜거리는 몰골을 흘깃하면서 투란이 묻고 있었다.
흠칫하며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서던 알킨은 투란의 눈길이 자신이 걷어 올린 팔목을 향한 것을 깨달았다. 세실이 휘아드를 불러냈을 때 빛났던 보석, 그것과 색채만 다른 보석…… 그저 좀 더 색이 바랬을 뿐으로도 보이는 보석이 알킨의 팔찌에도 하나 박혀 있는 것을 보며 묻는 말이었다.
알킨은 다른 때라면 자신이 ‘그렇다!’라고 외쳐 답할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었다.
알킨이 차고 있는 보석의 마법은 휘아드를 본체로 따르는 종자(從者)로서 발동하는데, 지금 그 주인 노릇을 해야 하는 휘아드가 간신히 착용자만 살려두고 재가 되어 사라진 참이므로! 모처럼 소매를 걷고 손목을 드러낸 것인데, 아무 쓸모 없는 짓을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른 채로 놀림만 받는 듯한 상황이잖은가.
“못 쓰는 거였냐? 뭐, 상관없지. 벌 받을 마음의 준비는 끝났지?”
아무렇지도 않게 금방 조금 전까지의 일은 잊었다는 듯이 한 걸음 한 걸음 차분히 옮기며 투란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알킨에게는 피와 살이 범벅이 된 늪을 밟으며 둥실둥실 떠오는 사신(邪神), 악마(惡魔)가 저런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도대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 과연 ‘저것’이 알킨이 알던 투란이 맞는가?
멍하던 알킨은 마침내 마음을 비운 것처럼, 아예 정신을 놔버린 것처럼 달싹이며 품고 있는 의문의 파편을 토해내고 말았다.
“어떻게 한 거냐? 도대체 어떻게.”
“알아서 뭐하게? 어디 가서 또 사기 치게?”
피식 새는 웃음이 섞인 말투로 투란이 대꾸했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대답했잖아? 심술궂기는.
드라고니아가 스쳐 지나간 투란의 상념, 알킨의 물음에 대한 답을 짚으며 핀잔했다.
‘안 알려줄 거라고. 뭐하러 알려줘. 그보다.’
소리 없이 툴툴거리면서 이제 몇 걸음 남지 않은 간격을 한 걸음 더 좁히는 투란, 그 광경에 알킨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다가 계단에 뒤꿈치를 부딪혔다. 뒤늦게 알킨은 자신이 계단에 걸친 채로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럴 수밖에 없기는 했지만, 정말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구경만 하고 있게 될 줄은 몰랐기에 알킨의 표정이 색다르게 일그러지고 말았는데.
“너, 오러 마크를 새긴 거냐? 오러 사인이 아니고?”
투란이 가까워지면서 확인했다는 듯, 웃긴다는 듯이 묻고 있었다.
순간, 알킨의 표정이 변했다.
당혹스러움도, 줄줄이 흘러내리던 공포도 사라진 채 남은 것은 분노뿐인 채로 일그러진 기괴한 낯짝으로 알킨이 이를 갈고 있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변한 그 표정과 더불어 알킨이 조금 전까지 내던 작은 소리와 다른 큰 목소리까지 내고 있었으니.
“너 때문이다! 너 때문에 내가아아!”
딱, 가볍게 투란이 튕긴 손가락이 정적을 드리웠다.
알킨이 뭐라 더 떠드는 소리를 내는 듯했지만 입만 벙긋거리는 몰골이었다. 뒤늦게 자신의 상황을 깨달은 알킨은 다시 두려움을 되찾은 듯, 그래도 아까처럼 계단에 뒤꿈치를 부딪히는 대신에 한 걸음 물러서며 한 계단 올라서는 모습이었다.
투란은 실실 새는 웃음과 함께 한 걸음 더 다가가는데.
―야, 그만 몰아붙여라. 적어도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려는 시늉이라도 하라고. 여기가 깊은 산골인 줄 알아?
드라고니아가 음울한 낌새를 담아 투덜거리고 있었다.
‘아, 그렇지. 알아, 안다고.’
소리 없는 잔소리에 소리 없이 답하면서 투란은 담담하게 알킨을 향해 소리 내서 말한다. 또박또박, 아주 분명하게 자신의 말소리가 닿도록 다시 한 번 사룡의 파동을 제어하면서, 이번에는 손가락 움직이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 채로.
“바깥세상에서 이십 년 정도 살다 보니 바보가 된 거냐? 지금 시답잖은 사연으로 변명할 때가 아니라 용서를 구걸하고 죽여달라고 간청해야 하는 것도 모르겠어?”
어찌 보면 극히 무덤덤하니 조롱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런 투란의 몇 마디를 듣는 순간, 알킨은 공포가 잔뜩 맺힌 낯을 한 번 더 구기면서 기억 저편에서 불쑥 솟아오른 메아리를 느끼고 있었다.
“너의 시답잖은 사연이 변명이 될 것 같냐?”
“용서를 구걸해봐라, 들어는 줄 테니까. 내가 귀머거리는 아니라서.”
“금방 죽여달라고 간청하게 될 거야. 물론 빌어 봐야 안 죽일 거다만.”
바깥세상, 샤오콴 마을에 사는 이들이 마을 밖을 일컫는 말이었다.
마치 샤오콴은 전혀 다른 세상이라도 된 것처럼, 마을 밖의 세상…… 인간이 가득 산다는 도시가 몇 개나 있다는 왕국 등을 일컬을 때 바깥세상이라고 부르는 곳이 샤오콴이었다. 춤추는 산맥의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 샤오콴에 사는 이들은 그렇게 자신들이 사는 곳이 세상과 격리되었다고, 마경의 한복판이라고 하루하루를 마음에 새기고 느끼며 살아야 했다.
그런 마을에 찾아온 외부인, 외지인은 대부분 몬스터와 엮인 이들…… 몬스터 헌터가 아니면 몬스터 로드였고 몬스터에게서 뭔가를 얻어내려는 목적을 지닌 자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샤오콴 마을이기에, 도착하는 과정에서만도 수없이 동료를 잃고 피를 흘리며 찾아온 이들이 순한 마음을 지닌 다정한 성격을 보이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하나같이 어디 내놔도 포악하다는 말을 당연히 듣거나 거칠고 사납기로 겨루기나 할 이들…… 심지어 사제와 성기사조차도 어딘가 비뚤어진 성격으로 인간의 탈을 썼다고만 여겨질 지경이었다.
그런 탓에 샤오콴에 도달한 이들, 팀을 완성했든 일시적인 목적의 파티이든 간에 그들은 배신과 배반을 참지 않았으며 무능한 자에 대한 배려심 따위는 전혀 갖추질 않았다.
몬스터 앞에서 무능한 자는 배반자였고, 배신자이며 자신의 목숨을 내다 버리려 하는 악당에 불과할 뿐이라 여기는 분위기가 샤오콴 마을에는 가득했다.
그 속에서 알킨이나 투란 같은 어린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은 기적에 가까웠다. 몇 년을 머물렀던 신관, 오러클이라고까지 하던 그 신관이자 전사조차도 그 기적을 조금이라도 더 보겠다는 말을 술 취한 채로 토해낼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적을 소소하게 만드는 심판의 시간 또한 드물지 않게 자주 있었다.
몬스터 앞에서 뒤돌아 도망친 자들, 무능함으로 동료를 죽고 다치게 한 자들…….
그런 이들에게 징벌을 가하는 몬스터 헌터, 열정 어린 복수도 아니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다고 여기던 이들이 입에 담던 말을 방금 투란이 하나로 엮어서 토해낸 것이다. 알킨의 기억조차 일깨울 정도로 선명하게!
“기억난 모양이네? 그러면 내가 널 어떻게 할지도 알겠지?”
투란은 담담하게, 어찌 보면 상냥하다 할 정도로 부드럽게 말했다.
알킨은 절망과 공포가 가득한, 기억 깊은 곳에 담가버리고 지우려 했지만 여전히 조금만 자극받으면 치솟는 그 ‘일’을 다시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려 했지만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 중 몇몇이 기어코 몰래 보고 말았던…… 봤던 것을 수십 년이 흐른 다음에도 후회하게 만드는 그 ‘일’을 되새기며 알킨은 투란의 한 말의 의미를 뒤늦게 느낄 수 있었다.
쥐어짜 낸 물음이 알킨의 입술을 타고 넘었다.
“내게…… 내게 하겠다고? 그 짓을……?”
“응. 하나도 안 빼놓고 다 해줄 거야.”
명쾌하게 투란은 대답했다.
온몸을 떨던 알킨은 새삼스럽게 눈가에 색다른 경련이 찾아온 것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더듬어야 했다. 그 경련은 알킨에게 속삭이고 있었으니까, 그때 봤던 그 광경을 당하면 어찌 되는가를…….
몬스터 앞에서 배반했으니, 몬스터에게 던져준다.
그것이 배신자에 대한 기본적인 징벌이었다.
하지만 몬스터가 단숨에 죽이도록 방치한다면, 용서해주는 꼴이니까 절대로 즉사하지 못하도록 처리한다.
그 처리란, 인간을 단번에 동강 내고 찢어발겨 즉사시키는 흉포하지만 자상한 몬스터를 징벌의 대행자로 고르지 않는다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인간의 몸을 숙주 삼아서 오래오래 자라고, 자라는 동안에 공포와 비명을 잔뜩 쥐어짜 내며 간식으로 삼는 몬스터가 가장 적합하다고 여겼다.
덤으로 비명을 지르고 공포에 젖으면서 바로 미쳐버리는 경우도 배제하기 위해 고르고 골랐다.
온몸을 파먹으면서도 뇌수(腦髓)로 스며들어 공포와 절망의 파동이 퍼져나가도록 조절하는, 고대의 악마가 인간성을 말살시키려고 세상에 남겼다고 하는 벌레나 풀잎 형태의 몬스터.
먹잇감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사지를 절단하고 끈끈이로 포박하기는 하지만, 단숨에 살점을 뜯어먹는 것이 아니라 먹잇감을 사육하며 그 배설물을 쪽쪽 뽑아먹는 역겨움과 부정(不淨)으로 가득한 괴물(怪物).
사고(思考) 기능이 발휘되는 머리, 온몸의 감각기관은 남겨둔 채로 살점 사이로 스며들어 뼈를 휘감고 자극해서 미쳐버릴 지경으로 몰아넣지만, 그 현상을 조절하며 인간에게서 배양시킨 양분을 빨아먹는 요물(妖物)까지…….
알고 대처하면 몬스터 헌터가 지나가면서 가볍게 밟아 죽일 수도 있는 연약한 종류임에도, 그 희생자가 될 경우에는 이보다 더한 고통이 있을 리가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경우였다.
그것이 몬스터 헌터가, 몬스터 로드가 자신들을 배신한 자에게 내리는 징벌…… 샤오콴 마을에 도달한 이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고 물려받는 심판의 지식이었다.
잔인하고 흉악하다 하지만, 그 배신과 배반으로 인해 희생될 뻔한 이들은 희생당한 동료를 돌려받으면 용서한다며 거침없이 실행에 옮기고는 했었다.
때문에 샤오콴에 도달해서 저런 것을 알게 된 이들은 차라리 몬스터와 전력으로 싸우다 죽으면 죽었지, 배신이나 배반으로 보이는 행동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다……라고 하잖던가.
그렇게 노력한다고 해서 무능한 자가 유능하게 변하거나 몬스터 앞에 겁을 먹고 도망치는 이들이 사라지는 일도 없기는 했다.
그저 남은 것은 섬뜩한 복수, 그 고통과 절망의 결과물에 불과할 뿐인데…….
투란은 알킨이 입에 담지 못하는 채로 되새기는 바를 안다는 듯, 그 눈빛에 답을 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덧붙이니.
“보석을 멀쩡하게 내놓든가.”
사라진 것에 대해 짚어주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