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163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54)
알킨은 눈을 번뜩였다.
순간적인 일이었지만, 그 번뜩임은 마음가짐이 변한 것을 드러내는 미세한 광경이었다.
투란은 살짝 갸웃하며 다시 자신감에 차오르는 알킨을 바라봤다.
무엇 때문에 자신의 잘못을 짚어줬는데 저리 당당해지려는 꼴을 드러내는가?
알킨이 입을 열었다.
“그렇군…… 잊을 뻔…… 아니, 잊고 있었군. 이게 다 뭣 때문인가. 맞아, 보석! 그 보석 때문에 전부 이렇게 된 거야.”
굵고 센 목소리였다.
알킨은 아까처럼 넋이 나가고 허우적거리는 말투와 전혀 다르게, 회복한 자신감이 가득 담겨 있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투란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뭘 할 수 있으면 해보란 듯.
드라고니아는 투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뭘 하든, 일단 여기서 벗어나자고!
‘보자고.’
심술궂게 투란은 한 걸음 더 딛는 시늉을 하며 알킨을 바라봐줬다. 뭘 하든 어서 해보라고 보채는 듯한 눈빛으로.
―너 정말…….
드라고니아는 한숨을 투란의 뇌리에 강렬하게 꽂아넣었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어느 정도는 투란에게 공감한다는 듯이 주변을 탐지하고 검색하며 갑작스러운 위협에 대해 대응할 태세도 확실히 하는 드라고니아였다. 느닷없이 꽂히는 벼락 따위는 티도 안 나게 가볍게 물리칠 정령수(精靈獸)의 방어도 한층 더 강화시키고 여차하면 마법의 방벽까지 거침없이 들이댈 것처럼…… 드라고니아는 투란을 보호하기 위해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드라고니아의 염려를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듯이 알킨이 굵직한 음성으로 하던 말을 잇고 있었는데.
“석 달도 안 된 갓난아이 때부터 목에 걸려 있었지. 내 목에 말이야. 그래서 내게 상당히 감화(感化)되고 동조(同調)마저 일어날 지경이었다. 샤오콴 마을에서는 그랬지. 그러나 이 왕국에 들어서면서 그 망할 보석은 나를 외면했다. 그래, 그래서 포스테인 후작은 내게 오러 사인을 새겨주지 않았어! 내가…… 내가 혈통을 증명하게 되면 왕가의 비전을 물려받을 거라고, 그때까지만 눈과 귀를 밝혀줄 거라면서 오러 마크만을 새겨줬지! 이십 년이 넘도록, 난 오러 사인이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가를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며 듣기만 해야 했다! 그 빌어먹을 혈통의 증명 때문에! 그까짓 혈통이 대체 뭐라고! 난 이십 년이 넘게 귀족으로서 살면서 배웠는데! 네놈, 투란 네놈이 오자마자 가짜로 내몰릴 지경이 돼버렸어!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너처럼 아무것도 못 배운 몬스터 로드 따위에게 위협받는 엉터리라니! 하지만 이젠 아냐, 그래, 이젠 아니야 투란. 하핫, 이젠 그깟 혈통은 중요하지 않아. 하하핫, 성전(聖殿)의 힘 따위도 필요 없어! 포스테인 후작이 준비해준 마도구? 다 필요 없어! 하하하, 아하하핫!”
투란은 귀찮다는 듯이 왼손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시늉을 했다.
―뭔 놈의 오러 마크냐. 목 위로 집중시켜서 오러를 발산하다니, 음파공격도 되잖아?
드라고니아는 투란의 손짓이 제법 의미가 있기에 어이없어했다.
알킨이 품은 오러 마크는 머리부터 목울대까지 영향을 끼치는 오러를 형성시켜서, 시각과 청각, 후각, 미각을 강화하며 한편으로는 멀리 전하는 크고 분명한 목소리까지 낼 수 있는 효과를 드러내고 있었다. 다만 팔다리, 몸통 쪽으로는 그냥 튼튼하고 건강한 정도에 불과해서 전투능력으로 따지면 아무것도 없다시피 할 뿐이었다. 어찌 보면 그야말로 지휘를 전담하거나, 탐색 혹은 정찰에 집중한 듯한 기묘한 강화마법인 셈이었다.
그런 오러 마크였지만 목소리를 이용해 가까운 거리에 있는 상대방의 청각을 공격하는 정도는 가능한 듯했고, 알킨은 지금 그런 힘을 아낌없이 드러내며 열심히 폭언(暴言)을…… 정말로 사람의 귀청을 깨부술 목소리를 것이다.
한데 그 정도에 쓰러질 일은 없다고, 투란이 살짝 찌푸리며 귀찮다는 듯이 끄떡없음을 드러낸 꼴인데도 알킨은 놀라기는커녕 아까보다 훨씬 더 여유 있게 표정을 풀면서 하던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있잖은가.
“투란, 너에겐 정말 어울리지 않는 자리야. 이 로그람의 왕좌는 절대로 네게 어울리지 않아! 너는 스스로 그걸 증명했다! 이런 참극이나 펼쳐놓으면서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는 비천함을 스스로 증명했어!”
―엉? 왕좌? 아까 저 기사도 그러더니…… 설마?
드라고니아가 화들짝 놀랐다.
투란은 심드렁하니 알킨을 바라만 봤다.
그 표정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가, 알킨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나, 알킨이 지금 청하노라! 로그람이여, 그대의 마지막 혈통으로부터 양도받은 나의 권리를 인정하라! 지금 여기 로그람의 왕, 새로운 주인이 나임을 받아들여라! 그리고…… 자신의 혈통을 부정한 저 비천하고 더러운 자를 추방하고 벌하라!”
결코 투란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누가 들어도 로그람 왕국에게, 한 나라를 지칭하며 투란을 배척하는 말이었다.
투란이 이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기도 전에 드라고니아가 다급하게, 아주 빠르게 가속된 이야기를 퍼붓고 있었다.
―야, 이거 심각해! 설마 왕좌의 권리를 지닌 마지막 혈통이라니! 그냥 적당히 왕족의 피가 이어졌으려니 했는데! 투란, 네가 지금 왕의 의무를 저버린 것이라면 왕가의 마법은…….
드라고니아의 급한 말은 더 길고 깊이 이어질 듯했지만, 투란이 끊고 있었다.
“알킨, 너 이 나라도 망하길 바라는 거냐?”
알킨이 투란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눈길을 높이 쳐들며 외치던 알킨이었기에 그 태도는 기묘하다 싶을 정도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투란이 던진 말투가 너무 담담하면서도 기시감(旣視感)을 강렬하게 일으켰기에 알킨은 그 자신감으로 바로 대꾸하질 못했다.
“나한테 전부 죽여달라고 부탁하는 거지?”
어제의 일도 아니었다.
지금 투란이 밟아온 바닥, 아직 흥건히 젖어 있는 피와 살, 죽음의 잔해가 깔리던 광경 속에서 던져진 말이었다.
그와 똑같은 말투였고, 똑같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 나라도 망하길 바라는 거냐?”
알킨은 오싹함을 느꼈다.
어이없다고 뇌리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속삭임을 짓밟는 오싹함은 실로 괴이하게 알킨의 마음으로 파고들며 가슴을 오그라들게 했다.
하지만 알킨은 인정할 수 없었다.
“늦었어, 투란. 넌 아무것도 못해! 내가 이미 요청을 했어! 양도를 받았다고! 네가 버린 혈통의 권리를…….”
열심히, 눈가에 맺힌 열의가 광기로 보일 지경으로 떠들던 소리가 끊어졌다.
허공으로부터 쏟아져 내려온 거대한 압력, 마력이 투란의 주변에 격돌하며 은은하고 거센 충격을 일으킨 탓이었다. 갑작스러운 압력은 바닥에 깔린 피와 살을 밀어냈으니, 투란의 발아래를 청소하듯이 치워내면서 거세게 회오리쳤다.
알킨은 그 마력의 바람이 자신에게 닿지 않는 까닭을 금방 알아차렸다.
거대한 압력이 계단 아래에 집중하며 기둥을 휘감은 계단에는 한 치도 닿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계단에 닿지도 않은 채로 그 압력을 받는 투란은 아까 모습 그대로 꼿꼿하게 선 채로 두리번거리며 ‘이건 뭐야?’라는 표정이잖은가!
때문에 알킨은 다시 한 번 오싹함이 가슴 속으로 파고들며 이번에는 자신감마저 사라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이 느낌을 뿌리치기 위해서 알킨은 압력으로 인한 바람결 탓에 닿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껄여야 했다.
“넌 이 궁전에서 태어났지, 투란. 하지만 이 궁전에서 자라지 못했어. 넌 아무것도 받지 못했어! 그저 샤오콴 마을에서 자란 고아일 뿐이고, 비천한 운명을 물려받은 몬스터 로드일 뿐이야! 그러니까 꺼져버려! 내 눈앞에서 어서 저 비천한 자를 치워버려, 로그람! 왕의 명령이란 말이야!”
우우웅, 솨아아아.
마력이 한 번 더 세차게 궁전 안을 채우며 투란을 옭아매기 위해서 몰려들며 거센 바람을 일으켰다.
투란은 그 바람과 격돌하는 셰이아의 마력장벽, 거기에 호응해서 힘을 보태는 사대정령수를 확인하며 쓴웃음이 담긴 한숨을 쉬었다. 드라고니아가 그 한숨을 질타하듯이 바쁘게 떠드는 말이 투란의 뇌리에 팍팍 꽂히는 중이었는데.
―헛소리하는 거 아니야, 투란! 이건 정말로 왕가의 마법이 발동해서 널 추방하려는 거야! 덤으로 날려가는 와중에 어딘가 비틀고 꺾어놓을 참이라고! 오래 못 버텨! 나라를 지탱하는 마법으로부터 새나오는 마력이란 말이다! 아무리 드라코눔의 스피릿 아티팩트랑 자연에서 태어난 정령의 힘이라도 오래 버틸 상황이 아니라고! 뭘 하려면 빨리 결정하란 말이다!
‘그래, 결정했어.’
진지하게 염려하는 이야기에 투란은 간략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투란의 입이 열리며 마력을 담은, 의지의 마력 ‘윌라이트’가 선명하게 맺힌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내버린 고아의 손에 멸망하길 바라나? 가로챈 보석으로 으스대는 놈을 왕이라 하며 그 명령에 따르겠다? 로그람, 너도 브로큰 킹덤처럼 되고 싶어? 계속 저 헛소리에 따르겠다면…… 그렇게 해줄게.”
―얌마! 협박을 하냐?
드라고니아가 식겁한 듯 으르렁거리며 하소연하는 심정을 고스란히 담아 외쳤다.
대상이 인간도 아니고 나라, 고대부터 춤추는 산맥에 자리 잡은 왕국!
괜한 소리가 아니란 것처럼 아예 본보기로 이미 망해버린 고대왕국까지 들먹거리고 있다니!
그냥 들으면 웃고 넘길 미친 소리 같은데, 진지하게 투란이 말하니 드라고니아로서는 이뤄질 수 있어도 이뤄지면 안 될 폭언(暴言)이잖은가!
―너, 대체 나라가 뭐라고……!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는가, 드라고니아는 아예 작정하고 긴 설교까지 작정한 듯싶었다.
하지만 그사이에 투란은 어깨를 으쓱했고, 가시수렁이 콸콸 쏟아지듯이 발아래로 줄기를 뻗어내며 변화하고 있었다. 한쪽 어깨걸이의 외투가 물렁거리는 수렁빛에서 화강암(花崗巖)의 번들거림을 뿜어내는 형상을 띠었고, 그 표면에는 붉은 무늬가 핏줄처럼 맥동하며 고열(高熱)의 씨앗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순식간에 투란이 디딘 자리, 두 발을 주변으로 거뭇한 색채가 번졌고 이글거리는 아지랑이와 함께 고열을 머금은 붉은 거품 몇 개가 퐁퐁 터져올랐다.
더불어 비워둔 듯한 투란의 왼쪽 어깨는 질 수 없다는 듯이 불그스름한 안개를 일렁이는데…… 그 안개 속에서 터져나오는 기묘한 웃음이 투란에게는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스스로 속삭이는 듯한 느낌.
‘하하핫, 그래! 그래야 성혈(聖血)의 패왕(霸王)이지! 왕국? 고대의 전승? 까불지 말라고 해! 홀로 선 왕자(王者)여, 너는 패왕이야! 성혈을 잇는 패왕! 이런 이계(異界)에 떨어져 전락(顚落)한 처지에서 물려줬다 해도, 너는 모든 피를 지배하는 성자(聖者)! 나라 따위 까불면 모조리 흡혈종으로 물들여서……!’
―닥쳐! 이 조잡한 뱀파이어가 어디서 나대는 거냐! 패배한 몰골로 추한 짓 그만해!
드라고니아가 벼락같이 투란의 마음을 두들기는 울림을 뿜어냈다.
‘흠.’
투란은 문득 왼쪽 어깨가 드라고니아의 느닷없는 질타를 비웃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투란이 이 성혈 어쩌고 하는 말에 호응하면, 드라고니아가 어떻게든 막으려 할 테지만 의미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투란은 영문도 모를 뱀파이어의 성혈에는 관심 없었고, 딱히 의지할 마음도 없었다.
‘용암 호수를 만들 거야. 피와 살을 가진 녀석들은 다 떠나게 해줄 거야. 해가 뜨고 지는 사이에 쉴 새 없이 쾅쾅 터지는 시커먼 재로 가득 채울 거야. 용암이 굳어지면 가시가 가득하고 층이 겹겹이 쌓여서 한번 빠지면 못 나갈 그물 같은 계곡을 잔뜩 파놓겠어. 그러니까…….’
“브로큰 킹덤처럼 다시 나라가 세워지는 일 따위 없게 해줄게.”
투란은 선언했다.
계단 한 칸에 겨우 올라선 모습으로, 알킨은 자기 혼자 투란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 저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바보스러운가, 어처구니없고 어리석은가를 매도(罵倒)해야 할 사람은 알킨 자신뿐이었다.
그러나 알킨은 입을 열고 매도하지 못했다.
알킨의 열린 입은 오러의 힘까지 담고서, 오러 마크로부터 쥐어짜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다 담고서 허공을 향해…… 로그람 왕궁의 별궁, 봄의 궁전을 쩌렁쩌렁 울리는 탄원(歎願)을 토해내고 있었다.
“로그람이여! 나를, 나를 지켜라! 내가 왕이야! 내게 권리가 있어! 보석은 깨졌고, 내가 그 권리를 양도받았단 말이다! 나를 지키라고! 저놈을 어서 쫓아내란 말이야! 저놈은 자기 핏줄을 거부하고 있잖아! 저놈은 왕가의 배신자라고!”
이 순간 알킨은 투란의 발아래가 이글거리며 끓어오르며 붉게 물들어가고, 쏟아져 내리는 거대한 마력조차 그 뜨거움을 억누르지 못하는 광경에 반쯤 정신이 나간 공황(恐惶) 상태란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입꼬리를 살짝 뒤틀며 투란은 그런 알킨을 향해 가시수렁을 꼬아 두툼하고 큰 마그마 로드의 손아귀를 만들어 뻗으려 하는데…….
콱, 쿵.
느닷없이 허공에 나타난 발, 군화 신은 발이 알킨의 낯짝을 내리찍으며 뒤통수까지 닿도록 바닥에 처박으며 짓밟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