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164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55)
‘잘못 본 거지?’
투란은 눈을 비비며, 가시수렁으로 비벼서 눈알 파낼 뻔한 것을 용케 피하고 멀쩡한 형태의 손을 들어 확실하게 두 눈을 비비적거리면서 생각했다. 물론 그 눈을 다시 떠봐야 이미 봤던 광경이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알킨은 밟힌 채로 꿈틀거리고 있었고, 허공에서 느닷없이 알킨을 밟은 이는…….
“아오, 이런 덜떨어진 미친 새끼가!”
어딘가 장엄해 보이기까지 하는 군복, 틀림없이 로그람 군단병을 위한 제식(制式) 전투복의 기본을 한없이 화려하게 꾸민 채로 기능을 보다 극대화해 놓은 듯한 차림새를 무색하게 입으로 쌍욕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실존(實存)……하는 것 같은데?
드라고니아도 잠시 숨을 죽이는 듯하다가 간신히 말하는 듯했다.
때문에 투란은 어처구니없어서 눈을 깜박이며 알킨을 짓밟고 있는 이를 다시 훑어봐야 했다.
‘마력이잖아? 마력으로 몸의 형태를 가다듬어놨을 뿐이잖아? 그런데…… 실체라고 하는 거야?’
갑작스럽게 허공에서 발부터 그려낸 형상, 환영이나 다름없다고 여겨야 했다.
다만 그 환영에 마력이 실려서 실체를 갖췄기에 드러낸 듯한 위력, 알킨의 낯에 발자국을 만들어 코와 입을 평평하게 뭉개는 채로 뒤통수까지 계단에 찍어버릴 정도로 밟을 수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런데 드라고니아가 ‘실존’이란 말을 입에 담다니…….
투란으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를 그냥 마법이니까, 하고 끄덕거리며 훌러덩 제치고 몰라라 할 수도 있기는 했다. 그렇기는 한데…….
어째서일까,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그림자가 맴도는 듯한 짙은 갈색의 눈동자, 어딘가 낯익은 그 얼굴이 결코 몰라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를 풀풀 흩날리는 듯하여 투란은 열심히 기억을 더듬으며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누구야!’
―확실히 나도 어디선가 본 듯하다만.
드라고니아도 묘하게 당혹스러운 듯, 그러나 역시 투란처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인가, 그 몇 마디에 한가득 짜증과 불만이 담고 있기도 했다.
듣는 투란으로서는 어이없을 뿐이었다.
드라고니아에게 애매모호한 기억이라니, 이런 상황이면 마법으로라도 강제로 기억할 듯한데 묘하게 머뭇거리는 듯도 했고 믿을 수 없어서 얼버무리는 듯도 하잖은가. 어찌 보면 스스로도 믿지 못해서 투란에게 말을 못 하는가 싶을 지경.
의아함과 고민이 새록새록 솟았지만 투란은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인간인지 아닌지조차 그 기괴함 때문에 마땅히 의심해야 할 작자가 먼저 으르렁거려주는 탓이었다.
“너 이 새끼! 뭐 보석을 흠집 하나 없이 되찾겠다고? 그럴 거면 한밤중에 몰래 와서 이 모자란 새끼 목을 따고 가져가면 될 거 아냐! 한밤에 날뛰기도 딱 좋은 핏발 세우고 있으면서…….”
이어지려던 폭언(暴言)이 살짝 느슨해지다가 멈췄다.
투란이 한밤이란 말에 ‘어?’ 했고 목을 딴다는 소리에 ‘아!’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며 살짝 놀란…… 왜 미처 그 생각을 안 했지라는 표정을 가득 낯짝에 채운 탓이었다.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투란을 보다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폭언을 잇는 질문이 불쑥 튀어나온다.
“생각도 안 한 거냐? 암살이라든가 도둑질은?”
“어, 음, 아니, 뭐…… 얘가 이렇게 부를 줄은…… 이렇게 급하게 준비하고 부른다는 생각은 못 했죠.”
투란은 순순히 대답하며 알킨을 흘깃거렸다.
―그럴 수도 있다고 했잖아! 내가 한 말은 왜 듣지 않았는데!
드라고니아가 으르렁거렸다.
‘네가? 그랬어?’
투란은 어리둥절하며 몰라라 했다.
별궁까지 오는 길에 드라고니아가 뭔가 떠든 모양이라고 느끼기는 했는데, 정말로 듣지는 않았으니까. 오랜만에 알킨이 초대했다는 말에 묘한 기대를 하며 살짝 들뜬 채였으니까. 어쩌면 알킨은 두룩칼과 다르게 아직 어린 시절의 철없이 순수한 일면을 남겨두고 있을 수도 있다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다시 만난 알킨은 두룩칼보다 더 심한 악질로 변해 있었다.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노골적으로 투란을 죽이려 드는 알킨에게서는 조금이나마 순수했던 과거의 모습 따위는 전혀 없었다. 정신줄 놨던 두룩칼과 달리 온전히 제정신으로 당당하게 흉악한 짓을 하려 할 뿐!
그러니 투란도 망설임 없이 알킨을, 알킨을 편들며 나서는 자들에게 티끌만큼의 자비도 베풀지 않아도 되고 말이다.
“누구세요?”
암살이나 도둑질을 태연하게 거론하는 이에게, 사실 나타나자마자 물었어야 할 일을 투란은 뒤늦게 묻고 있었다.
알킨을 쳐 밟는 모양새로 봐서는 전혀 편들 생각은 없는 듯하다.
하지만 일찌감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투란이 알킨을 끌고 가려는 찰나에 나타나 저러고 있으니, 딱히 투란을 편들려 한다고 보이지 않잖은가?
―딱 로그람의 멸망을 예고했을 때 나온 것 같지?
드라고니아가 뭔가 짚인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그 말투가 너무 조심스러워서 투란이 어리둥절할 지경인데, 나타난 이가 갸웃거리는 투란의 모습을 찌푸린 눈길로 바라보며 묻는다.
“너…… 내가 누군지 전혀 모르겠다고?”
“누구신데요?”
투란은 다시 물음을 되풀이했다.
왜 당신을 알아야 하는지, 어디서 만난 적이 있는지…… 하나하나 짚은 대신에 보다 간결하게 알아서 설명하라고 보채는 셈이었다.
퍽.
다시 한 번 알킨을 밟으며, 이번에는 목 줄기를 밟고 바로 뒤통수를 차서 알킨이 정신을 완전히 잃게 만들면서 투란을 향한 대꾸가 나온다.
“이런 썩을…… 몰라! 내가 누군지 알 바 아니란 놈한테 알려주고 싶지도 않네! 그보다 너! 똑바로 대답해! 이 덜떨어진 놈을 죽인다는 핑계로 로그람을 멸망시킬 작정인 거냐? 그게 목적이야? 재앙(災殃)의 왕(王)으로서 유명해지고 싶다는 거냐?”
“뭔 미친 소리예요?”
어처구니없어하며 투란이 겨우 말했다.
정체불명의 인물, 마력으로 형상을 이룬 존재가 투란보다 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눈을 부라리다가 돌연 갸웃하며 묻는다.
“너, 로그람에 무슨 원한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로그람에 원한? 딱히…… 내 하는 일에 훼방질만 안 하면 관심 없는데 말이죠.”
한 걸음 더 내디디며 어깨를 으쓱한 채로 투란이 대답했다.
이런 투란을 보며 그는 황당한 표정으로 입술과 볼을 부르르 잠시 떨었다. 뭔가 험악한 소리를 내뱉고 싶은데 너무 어이가 없어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복잡한 표정…….
“너 진짜…… 그래서, 오직 이놈을 잡아 죽일 궁리만 하고 왔다는 거냐? 방해만 안 했으면 이 놈 말고는 아무도 안 건드렸을 거라고?”
“음? 알킨을 죽일 궁리를 하고 오지도 않았는걸요?”
키득거리는 웃음을 입가에 담고, 정말로 누구인가 궁금해하며 투란은 말했다.
어째서 갑자기 나타나서 저런 것을 묻는가? 무엇 때문에?
정체불명의 존재가 눈가를 찌푸린 채로 투란을 향해 다시 묻는다.
“그 말은…… 보석만 넘겨줬으면 그냥 갔을 거라는 뜻이냐?”
“분명히 그렇게 말했는데, 그 멍청이가 거짓말을 하고 죽이려 들었잖아요? 그런 거짓말쟁이를 편들고 나대는 작자들까지 한가득이었고.”
어깨를 으쓱하며, ‘이 상황은 절대 내 책임이 아니다!’라는 의미를 강조하는 투란이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보석을 넘겨주면 그냥 가겠다고?”
“이미 부서졌잖아요? 지금 따져봐야 무슨 소용 있겠어요?”
투란은 설혹 보석을 받는다 해도 알킨을 그냥 둘 생각이 없다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애초에 불가능한 조건을 내걸고 있으니 다른 말을 굳이 보태야 할 필요가 없었다. 보석이 그냥도 아니고 완전히 먼지 티끌이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으니까. 더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니까.
그런 투란을 향해 살짝 가늘고 날카로운 눈길이 잠시 쏘아졌다.
어딘가 마력의 낌새조차 담긴 그 눈길은 금세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졌다.
“되살릴 수 있다면? 되살려 갖겠다는 의지는 있는 거냐?”
“네?”
멈칫하며, 가만히 옮겨가던 발걸음조차 멈추면서 투란은 어리둥절했다.
보석은 그냥 부서진 것이 아니었다.
어떤 복구, 복원 마법도 듣지 않을 정도로 아예 자취를 잃고 사라졌다.
그냥 깨진 정도였다면 파편이라도 모아서 다시 복구를 시도하겠지만, 그런 여지조차 남겨놓지 않고 괴멸(壞滅)해버린 것이다.
그 결말은 정말 보통 보석이 아니라는 증거인 셈이었다.
그러니 남은 것은 보석을 흠결 없이 넘기겠다던 거짓말쟁이에게 벌을 주는 것뿐이었다.
“보석을 되살리겠느냐고 묻는 거잖아!”
퍼억, 알킨이 옆구리를 걷어차여 저편으로 굴러갔다.
바닥에 가득 깔린 피와 살의 융단 위를 구른 탓에 금방 핏덩어리 같은 몰골이 된 알킨은 먼저 퉁겨나갔던 귀족부인 세실에게 부딪혀서야 멈췄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깨어나지 못한 채로 그냥 널브러진 몰골 그대로였다.
잠시 그 몰골을 흘깃거리다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투란은 느릿하니 노려보는 눈길을 마주하는 채로 대답해야 했다.
“할 수 있다면야…… 되살려 갖고 싶기는 하죠. 뭐, 저 녀석은 나중에 실컷 두들겨 패는 걸로 미뤄둘 수도 있겠죠.”
가만히 아까 들었던 ‘암살’이라든가 ‘도둑질’의 수단도 입가에 얹는 듯한 말투로 나온 투란의 말, 이에 대해 코웃음과 함께 정체불명의 존재가 몸을 돌려 계단을 밟아 오르는 채로 대꾸한다.
“그 보석은 원래 너의 생명이 끊어지지 않는 한, 네가 어떤 형태로든 살아 있다면 불멸(不滅)이고 불후(不朽)인 상태를 유지한다. 아주 특수한 조건이 아니면 절대로 붕괴할 수가 없는 보석이지.”
“으흠.”
투란은 몇 계단 위부터 밟아가는 걸음에 따라 기묘하게 밝은 발자국이 일렁이며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꼴을 보며 얌전히 따라갈까 말까를 고민해야 했다. 냉정하게 따져보자면 이미 부서지고 사라진 보석을 놓고 불멸이 어쩌고 불후가 어쩌고 하는 사기꾼이니 그냥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겠노라 버티는 쪽이 영리한 듯싶은데…….
“현실은 늘 상상과 가정을 초월한다. 그러니까 아주 특수하니 어쩌니 해도 결국은 어처구니없는 일의 맞물림으로 얼렁뚱땅 조건이 갖춰질 수도 있다고 말은 들었다만 정말로 그 꼴을 볼 줄은 몰랐어. 다행이라면 그런 해괴한 상황까지 가정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대처할 방법도 궁리해놓았다는 점이겠지. 얼른 따라와라. 보석이 재생되기 위한 조건 중 하나는 너란 놈의 존재니까, 너 없이는 안 돼.”
정체불명의 존재는 홱 몸을 돌리면서 이리저리 가늠해보는 투란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외침을 터뜨리며 손짓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허튼 생각 버리고 따라오라는 태도인데, 어째서인가 성난 낯빛 속에는 살짝 성급함도 묻어나오는 듯했다.
“따라갔는데 보석 안 내놓으면 한 대 칠지도 몰라요.”
투덜거림과 함께 투란은 계단을 밟았다.
계단은 투란이 딛는 순간 밝아졌다.
―이런…….
드라고니아가 뭔가 눈치챈 듯 신음하는 시늉을 했다.
‘마법이냐?’
―당연히.
‘위험해?’
―아니.
짧게 묻고 들은 투란은 느릿하니, 마치 ‘원래 내 걸음이 좀 느려요.’라는 것처럼 다음 계단을 밟았다. 두 번째 걸음이 닿은 계단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밝아졌다. 얌전히 발자국 언저리만 밝아지는 꼴과는 분명히 달랐다.
“이거……?”
“넌 산 사람이고 난 아니니까.”
“네?”
“뭘 놀라? 이게 마력으로 이뤄진 몸뚱이란 것 알고 있었잖아.”
“아?”
“그만 닥쳐. 시간이 얼마 없어. 보석을 되살릴 수 있는 시간에는 제한이 있다. 이미 상당히 소모했어. 빨리 올라가야 해.”
통통, 발자국이 밝게 빛나면서 빠르게 지워져 나갔다.
밟는 속도, 움직임에 따라 그 명멸(明滅)할 시간이 정해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투란이 밟는 계단은 밝혀진 다음에 살짝 그 빛이 여려질 뿐이고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뭔 마법이야?’
의아해하면서도 투란은 일단 차분히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제법 계단 높이가 있었기에 단번에 두 계단, 세 계단을 밟는 것은 피하고 착실하게 한 계단씩…… 어째서인가 이것이 옳은 방법이라는 느낌이었기에 투란은 서두르지 않고 한 계단씩 밟았다.
그렇게 해서 기둥을 한 바퀴 돌고 나니 주변 풍경이 모두 사라지고 계단과 기둥, 희미한 빛의 안개가 벽을 대신해서 남는 듯했다. 그리고 두 바퀴째에는 완연히 지붕보다 높아진 듯, 사방이 트이면서 안개 너머로 왕도의 풍경까지 보일 지경!
‘밖에서 이 계단 안 보이는 건가?’
―전혀 안 보이겠지.
‘그래? 무슨 마법…… 응?’
소소한 의아함을 풀려던 투란은 문득 올라가는 계단 한편에 하얗게 웅크린 털뭉치 같은 형체를 봐야 했다. 작고 어린 짐승이 웅크린 듯한데, 이 계단에 왜 저런 녀석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