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166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57)
“카이람, 켈 로그람. 아카인, 툴 로그람. 네가 고를 수 있는 두 가지 진명이다. 둘 중 하나를 네 영혼에 새겨넣어야 하지.”
억제된 탓에 오히려 담담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투란은 카이람을 노려보며 입을 다물었다.
어찌 보면 둘 중 하나도 고르지 않겠다는 태도였는데, 그 의지가 선명하게 투란의 눈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기에 부정할 수가 없었다.
“왜?”
카이람은 짜증을 가득 담아 아주 짧게 그 까닭을 묻고 있었다.
투란은 아예 팔짱을 끼며 카이람을 노려봤다.
투란이 딱히 입을 열지 않고 있지만 그 사나운 눈길 속에는 카이람을 향한 명백한 물음이 몇 가지나 담겨 있었다.
어째서 이름을 알고 있느냐부터, 왜 이름이 둘 중 하나 고르는 상황인 거냐까지.
한편으로는 왜 투란이 당연히 그 이름 중 하나를 골라 알고 있었으리라 행동했는가도 포함된 눈빛은 꽤 사나웠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카이람이 잠시 뒤에 한숨처럼 투란이 말없이 던진 물음에 답을 한다.
“넌…… 이 궁전에서 태어났다, 눈치챘지? 하지만 여기서 자라지 못했고 왕궁을…… 왕도를 떠나야 했다. 제대로 된 성명식(成名式)조차 치르지 못했지. 하지만 네 아비, 어미는 약식으로나마 너에게 이름을 부여했었다. 네 아비가 부여한 이름은…… 내 이름을 잇기에 켈의 호칭이 붙어서 카이람 켈 로그람, 네 어미는…… 위대한 마도(魔道)가 널 가호하기를 기원하며 아케인을 바탕으로 한 아카인, 때문에 툴의 호칭을 붙어서 아카인 툴 로그람이란 이름을 남겼다. 두 이름 모두 약식으로 겨우 성명식을 대행했기에 넌 둘 중 하나를 고를 권리를 얻은 거야. 알겠어?”
“전혀 모르겠거든요?”
삐딱하니 투란은 차갑고 날카롭게 대답했다.
부모가 왜 이름을 하나씩 부여했는가?
어째서 약식이었는가?
왜 투란이 그 이름 둘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란 짐작으로 말하는가?
쿠르릉, 사방에서 울리는 기묘한 반향이 왕도 곳곳에서 벌어지는 지형의 요동과 함께 아련한 안개와 구름의 벽을 울리며 전해져 왔다.
카이람은 그 광경을 흘깃 돌아보다가 조금 무표정하게, 격노가 너무 심해서 오히려 가라앉은 듯한 낯빛을 드리운 채로 이야기를 잇는다.
“네 아비는 죽음과 함께 너에게 이름을 남겼지. 하지만 네 어미는 그걸 몰랐다. 때문에 너를 출산하자마자 이름을 지어줘야 했어. 너는…… 로그람의 마지막 혈통이었으니까. 왕국을 지켜야 하는 왕가의 마지막 혈통이었기에 전승된 마법을 유지하기 위해서 약식으로나마 너의 이름이 필요했어. 보석은 약식으로 갖춰진 너의 이름을 모두 기록했고…… 너에게 전해야 했다. 원래는 보석과 영수가 항상 네 곁에 머물면서 너를 키우고 지켜야 했었어. 하지만…….”
“영수?”
―음? 설마?
투란이 보석 이외의 다른 무엇에 대해 눈살을 찌푸렸고, 드라고니아는 퍼뜩 계단가의 영수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여전히 사방에서 울려오는 지진과 요동은 점차 심해지는 듯했지만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인 채, 투란은 갸웃거릴 뿐이었다.
카이람은 그런 투란을 보며 으득 이를 가는 듯하다가 어깨를 떨구고 숨을 골라 억지로 자신을 진정시키는 모습으로 말하는데.
“지금 자세한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란다. 최소한의 사연을 이야기했을 뿐이고, 네가 이름을 고르는데 반드시 알아야 할 부분만 전한 거야. 이름을 고르고, 말해라. 그 이름을 통해, 증명된 너의 혈통을 바탕으로 보석이 되살려진다고! 그러니까, 어서 위대한 신목의 상징을 향해 네가 고른 이름을 말하라고!”
다소 급박한 낌새가 가득 담긴 채로 쏟아져 나온 목소리였다.
때문에 투란은 지금 왕도 전체를 흔드는 괴이한 지진, 요동치는 상황과 부서진 보석을 되살리는 일 사이에 뭔지 모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카이람은 갸웃하다가 미묘하게 눈알을 굴리는 투란을 보고는 금방 무슨 생각을 했는가 알아차렸다는 듯이 말을 잇는다. 이번에는 조금 차분한 말투, 억지로 냉정하게 꾸민 목소리로.
“왕의 부재(不在) 탓이다. 보석이 부서진 때문에 시작되었고, 너를 대신해야 할 놈이 스스로 자격 없다는 것을 증명했으니까. 그래, 이 새끼야! 네가 로그람의 왕이어야 한다고! 그 책임과 의무를 몰라라 하면 안 되는 거였다고! 그래서 로그람을 지키는 왕의 마법이 흔들리는 탓에 나라 전체가 이 모양이란 말이다! 저걸 가라앉히기 위해서 네가 다시 왕의 권리를 주장해야 하고 보석이 그걸 증명해야 한단 말이야!”
“나라 전체?”
무슨 이야기냐고 하려던 투란은 어느 순간에 냉정을 잃어버린 카이람의 말, 그 몇 마디 속에 담긴 해괴한 부분을 자신도 모르게 되뇌고 말았다.
―야,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냐! 일단 왕의 마법을 유지해야 한다! 왕의 마법이 뭉개지면, 브로큰 킹덤보다 더한 재앙이 로그람을 삼키고 춤추는 산맥의 균형이 무너져 내려! 이 세상이 몽땅 춤추는 산맥처럼 돼버릴 가능성이 열린다고! 정말이야! 나중에 따지고 일단은…… 투란!
‘알았어, 알았다고! 젠장.’
후욱, 길게 숨을 고르며 투란은 카이람을 노려봤다.
여전히 자세한 사정은 전혀 모르겠다.
그렇게 투란이 중요하다면, 왜 갓난아이인 채로 왕국의 경계에 간신히 걸치고 있는 샤오콴 마을까지 쫓겨나게 했고 거기서 자라게 했단 말인가? 도무지 카이람, 진짜 건국왕의 망령인지 유령인지 모를 존재의 말은 투란에게 납득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그나마 드라고니아까지 보태니 지금 상황에 대한 말은 거짓이 아닌 듯할 뿐…….
저절로 치솟아 배어나오는 듯한 짜증 속에 투란은 자신의 두 발을 묶고 있는 것을 내려다봤고, 그것이 자신의 ‘천칭’과 꼭 닮은 신목…… 분명히 세간에서는 로그람의 신수(神樹)라고 불리는 문장에서 튀어나온 듯한, 진짜 나무는 아닌 듯하지만 뭔가 굉장한 아티팩트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카이람, 아카인. 꼭 골라야 되냐?’
―진명을 둘 쓰겠다고? 야, 그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 네 경우에는 말이야. 너는 이미 투란이란 이름을 진명 대신에 사용하는 중이었기도 했고, 의식을 둘로 나눌 줄도 알지. 그러면 하나의 혼에 두 개의 이름을 새겨넣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아. 단지…… 정말로 할래?
뭔가 복잡한 상황을 가정하고 예상하던 드라고니아는 투란의 정서(情緖)가 맹렬하고 강하다는 것을 느낀 듯이 짤막하게 되묻고 있었다.
‘어, 할래. 보석 말고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이 둘이나 불어났잖아. 아빠도 모르고 엄마도 모르겠지만…… 죽어가면서 남긴 유산이 이름뿐인 것 같은데, 다 갖고 싶어.’
―그러냐? 그렇기도 하겠군. 알았다, 그러면…….
드라고니아는 더 길게 따지지 않았다.
그 대신에 드라코눔의 심오한 마법, 그 과정을 압축하고 존재와 진명의 이론을 축약시킨 지식을 곧바로 심상을 통해 투란에게 전하며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어찌하면 두 이름을 단숨에 혼령에 새겨넣어 진명으로 삼을 수 있는가를 전했다.
그리고 투란은 이를 매우 간결하게 받아들였다.
‘뭐야, 그런 거면 쉽잖아?’
―뭐? 쉽다니? 야, 이건…… 얌마! 뭐 하는 거야얏!
드라고니아가 화들짝 놀랄 때, 투란은 이미 입을 열고 있었다.
가슴속에 세 가닥 심장의 고동을 담고, 하나뿐인 입을 통해 세 가닥의 목소리가 의지의 마력, 윌 라이트를 바탕으로 울려 나오며 ‘천칭’을 닮은 장식물처럼 보이는 왕가의 아티팩트에 전해졌다.
“내 이름은…….”
첫음절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천칭의 받침 접시가 움직이며 투란 앞에 목소리마다 맞춰준다는 듯이 셋이나 다가왔다. 그중 둘에는 빛으로 이뤄진 손바닥이 띄워진 채였고 가운데 하나에는 뭉클거리는 입술 속에 눈알이 빙글거리는 듯한 빛의 형태가 엮이고 있었다.
그 광경에 드라고니아가 바로 침묵했고, 카이람은 놀란 소리를 냈다.
주변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듣도 보도 못하는 듯이 투란은 세 가닥 목소리를 울려내며 세 가지 이름을 소리 냈다.
왼손이 빛의 손바닥 하나를 찍으며 ‘카이람 켈 로그람’이란 소리를 전했고, 오른손이 다른 빛의 손바닥 하나를 누르며 ‘아카인 툴 로그람’이란 소리를 전했다. 그리고 가운데 빙글거리는 눈알, 입술 속의 눈알을 마주 보며 의지가 가득 담긴 소리가 ‘투란’ 이란 울림을 전했다.
순간, 두 손바닥에서 혀끝에서 투란은 피냄새와 피맛을 느꼈다.
핏방울이 빛의 손바닥으로, 눈알로 옮겨가며 신목의 천칭 형태가 빙글거리며 돌기 시작했다. 수십은 되는 가지가 한꺼번에 움직였고, 핏방울은 그 가지를 타며 중심으로 옮겨가 위아래로 핏빛의 붉은 광채를 덧칠하는 듯했다.
그 광경은 투란을 기묘하게 자극했다.
‘본 적이…… 있어?’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투란은 느낄 수 있었다.
아직 사물이 분명하지 않을 때, 주변의 소리가 제대로 분간이 가지 않았을 때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손발, 몸을 한 채로 마냥 누운 몰골로 자신이 이 로그람의 신수를, ‘천칭’의 바탕이 된 형상을 흥미롭게 지켜본 적이 있다!
어쩌면 투란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눈 뜨고 처음 본 것이 바로 로그람의 신수, 신목이라고도 하는 천칭 형태의 마도구였을 수도 있다!
그 마도구가 핏방울을 삼키고 줄기와 뿌리로 핏빛을 옮기는가 싶더니 그 정점의 한 부분에 강렬한 광채를 머금었다. 핏빛을 바탕으로 새로 태어난 붉은 빛…….
“어? 아!”
투란은 그 붉은 빛을 보며 ‘내 것’이라고 느꼈다.
어린 시절 보석을 보며 느꼈던 바로 그 ‘내 것’이란 의미를 투란은 퍼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 피였……?”
“이 망할 놈! 아직 완성된 거 아냐! 이제 맹세해라! 로그람의 왕족으로서, 왕좌를 잇는 자로서 의무를 다하겠다고! 너의 핏줄에 새겨진 책임을 다하겠다고 다짐하라고! 그래, 이 새끼야! 네가 의무 따위 몰라라 하고 선언했던 순간이 바로 보석의 파괴를 결정짓는 때였다고! 그러니까, 그 의무를 받아들여서 책임을 다한다고 맹세하란 말이야! 그러면 다시 보석이 완성된다고!”
“괜히 복잡하긴!”
카이람을 흘깃하며 투덜거리는 말부터 흘리는 투란이었다.
하지만 다시 열매처럼 영글고 엉키는 붉은 보석을 보며 투란은 더듬거리는 채로 카이람이 시킨 말을 꺼내고 있었다.
“어, 내 의무를…… 아무튼 책임져줄 테니까. 보석 내놔.”
―에라, 이 멍텅구리!
터무니없이 단순하고 조촐한 투란의 몇 마디에 드라고니아가 울컥한 듯이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카이람만큼은 아니었으니…….
투란이 어리바리한 몇 마디로 ‘맹세’의 형식을 토해내는 순간, 카이람은 천둥처럼 선포하고 있었다.
“맹세가 이뤄졌다! 내가 증언한다! 그러므로! 왕의 심장을 바쳐 호국(護國)의 제례(祭禮)를 시행한다!”
사납고 강한 목소리, 그 안에 담긴 기이한 슬픔.
투란은 ‘뭐?’ 하다가 ‘뭘 바쳐?’라고 갸웃했고 ‘누가?’라고 되뇌는 채로 카이람을 바라봤다. 우렁차게 천둥처럼 울린 목소리에 담긴 슬픔, 뒤돌아볼 생각 따위는 티끌만큼도 없는 강인한 의지가 카이람의 얼굴 위에 고스란히 얽혀 있었다.
―이런 개썩을!
드라고니아는 투란에게 향했던 으르렁거림 따윈 홀랑 저 멀리 날려 보낸 듯이 격노하며 형언(形言)할 수 없는 분노를 아낌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자칫하면 윌 라이트의 힘으로 주변에 폭풍과 불길까지 끌어낼 정도로 사납게, 순식간에 뭔가 간파하고 참지 못한 감정을 고스란히 투란의 심상 속에 투영하고 있었다.
그런 이상한 상황, 뭔가 뒤틀린 상황 속에서 투란은 문득 자신의 발치를 울리며 지팡이를 기둥 삼아 치솟는 요람…… 뭔가를 담는 ‘그릇’이지만 겨우 주먹만 한 것을 담을 정도의 크기일 뿐인 요람을 바라봐야 했다.
하나도 아니었고 둥글게 투란을 감싸며 솟아오른 아홉 가닥의 지팡이, 아홉 개의 요람 모양의 ‘그릇’…… 투란은 이게 뭐냐고 묻지 않았다. 그 크기로 봐서 딱 사람의 심장을 담을 정도인 ‘그릇’이니까.
대신 투란은 카이람을 가만히 바라봤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눈길에 카이람은 냉정한 표정으로, 한가득 슬픈 눈빛을 머금은 채로 묻지 않은 말에 대답을 한다.
“로그람은…… 왕을 지키는 나라가 아니다. 왕이 지키는 나라이지. 왕의 마법은…… 내가 시작한 왕의 마법은 내 피를 잇는 혈통 속에 새겨져 있다. 왕이 그 심장을 바칠 때, 왕의 마법은 그 심장이 뛰는 동안 세계를 변혁(變革)해서 이 나라를 지켜낸다. 그 어떤 혼돈조차도 걸러내고, 섭리가 자리 잡은 세계를 자아내도록…… 그것이 우리가 이 산맥에 여섯 왕국을 세울 때 새겨넣은 마법이야. 우리는 왕이 되어 자손과 함께 그 마법을 남겼다. 그래, 그러니까…… 이번에는 네가 심장을 바칠 차례란 거야. 미안하다.”
이어질수록 카이람의 목소리는 잔잔해졌지만, 그만큼 깊은 격정을 꾹꾹 눌러 담은 채이기도 했다. 억지로 가다듬은 그 목소리와 다르게 카이람은 마력으로 이뤄진 그 몸의 곳곳을 바들바들 떨게 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억누르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사기 쳐놓고 뭐라는 거야! 알킨이 친 사기는 저 건국왕의 망령이 한 짓에 비교하면 차라리 귀엽잖아! 맹세를 하면 보석을 되살려? 그 대신에 심장을 뽑겠다? 이 미친 망령 같으니라고!
드라고니아가 고대왕국의 시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망각한 듯이 포효하고 있었다.
그래서 투란은 ‘그릇’을 둘러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