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173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64)
투툭, 가늘고 높은 비석의 한편이 금이 가며 돌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렸다.
주변을 청소하던 병사, 로그람 왕국의 군단병으로 갓 들어온 신입은 빗자루를 들고 그 부스러기를 원수처럼 노려봤다.
“아, 썩을! 방금 쓸어냈는데!”
아무 생각 없이 쏟아낸 투덜거림이 신입의 생각보다 크게 울린 모양이었다.
“방금 뭐라고?”
군단의 고참병, 그냥 오래 복무한 고참병도 아니고 상급군단원으로 어쩌면 미래의 군단을 이끌 장군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가 신입을 향해 큰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신입으로서는 찔끔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닙니다! 그냥, 쓸어냈는데 또 부서져서…….”
“그러니까 뭐가 부서졌다는 거냐!”
보다 격렬하고 사나운 물음과 함께 군단의 상급병사가 신입병사 앞에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섰다.
이런 식으로 군기를 잡으려 하다니, 너무한 것 아니냐는 생각부터 들었지만 신입병사는 더 둘러대는 거짓말을 하다가 받을 벌보다는 그냥 사실대로 말하고 꾸지람 몇 마디를 듣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하급병사가 지휘를 맡은 상급병사에게 소소하다고 거짓말을 하면 닥치고 징벌이라는 군단의 전통을 훈련기간 동안 뼛속까지 새겨넣은 탓이었다.
그래서 신입이 주춤하면서도 나름 또박또박 말을 하는데.
“여기 이 낡은 비석이…… 땅 울림 때문인가 부서져서 저도 모르게 그만…….”
찌익, 몇 마디 꺼내기가 무섭게 상급병사가 걸치고 있던 외투의 장식 하나를 사납게 뜯어내고 있잖은가!
신입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함부로 손대서 올이 나가거나 얼룩만 묻혀도 징벌이 확정이라는 상급병사의 견장이 코앞에 들이밀어지다니! 설마 하급병사에 불과한 자신에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단 말인가? 자기 손으로 떼내고 징벌처분을 내려보겠다는 것인가!
신입 하급병사의 망상은 군단의 상급병사가 내리는 몇 마디에 바로 멈춰졌다.
“군단 사령부로 달려가서 이걸 제출해라! 제3종 경계령의 즉각 발동을 요청한다고 확실하게 전달하고! 알아들었나? 대답!”
“네? 네! 네넵! 견장을 제출하고…… 3종이라고요!”
엉겁결에 두 손으로 찢겨나온 견장을 받아들고 되뇌던 신입이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부릅뜨고 되물었다.
군단병으로 입단이 결정되고 나서 가장 먼저 들었던 이야기가 경계령의 등급이었는데, 숫자가 올라갈수록 무시무시한 상황이라고 했다. 그리고 군단병의 대부분은 1종과 2종의 경계령 수준에서 대부분의 복무를 마친다고 했었다.
3종부터는 평범한 군단병은 즉각 퇴각이고, 그에 대비하는 이들은 상급 군단병이거나 기사, 기사에 준하는 무력을 지닌 경우라고 했다.
“닥치고 달려가! 3종이라고 확실하게 전하고!”
너무 갑작스러워서 신입은 받아 든 견장을 두 손으로 꽉 쥔 채로 엉겁결에 내달리기 시작했다. 너무 놀란 탓에 신입은 자신이 속한 분대원, 거의 대부분이 고참병인 분대가 고스란히 남았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달려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견장을 떼내준 상급병사 곁으로 남은 고참병 한 명이 다가오며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배낭 하나를 건네주는 채로 말한다.
“3종 경계령? 그 견장 떼면 최소 5종 경계령 아니었수?”
다른 고참병이 낄낄거리는, 누가 봐도 억지로 웃음 짓는 것이 분명한 표정으로 다가오며 품에 가지런히 앉고 있던 여러 자루의 창 중에서 하나를 골라 상급병사에게 내밀며 말한다.
“애 하나 살려주자는 거잖아. 뭐, 발이 느리면 가다가 휩쓸려 죽을 테지만……. 뭘 노려보슈? 그 견장 뗀 순간, 우리 여기서 다 죽을 참이잖수? 괜히 아닌 척하지 말고 상냥한 대장님이라고 적당히 인정 좀 해줍시다. 아니, 뭐 꼭 내가 신참 대장님이 상냥하다는 쪽에 돈을 걸어서가 아니라…….”
쿠르릉.
실없는 병사들의 이야기는 비석이 박힌 지면째로 울리며 치솟는 순간에 멈췄다.
이미 배낭에서 꺼낸 도구로 무장하고 창까지 받아 든 상급병사가 냉큼 부서져 내리는 비석을 향해 서며 외친다.
“창 올려! 우리는 로그람! 죽어서도!”
“싸운다!”
고참병들은 지휘를 맡은 이의 곁으로 늘어서며, 부서져 내리는 비석을 둘러싸며 사납게 외치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알지 못하는 로그람 왕국의 군단 구호를!
콰앙.
비석이 진동을 견디다 못해 깨졌고, 환한 빛이 그 자리에 생겨났다.
처음 일그러진 물방울처럼 생긴 빛의 형체는 곧 둥글게 변했고, 명멸(明滅)하듯이 커졌다 작아졌다를 되풀이하며 서서히 그 온도를 올리고 있었다. 따스한 느낌이 뜨겁다로 변할 때까지 불과 두어 번의 수축(收縮)과 확장(擴張)이 있었고, 그때마다 빛의 형상은 더욱 밝아졌다. 비석의 잔해가 이글거리며 붉게 달아오르며 주변의 자갈이 녹아내릴 때까지는 겨우 대여섯 번 수축, 확장이 되풀이되었을 뿐이다.
병사들이 내민 창 또한 그 끝부터 붉게 달아올랐고, 뚝뚝 녹아 흐르는 시뻘건 쇳물을 떨군 것은 당연했다. 그나마 창대까지 단숨에 녹아내리지 않은 것은 빛의 형체가 온도를 올리는 영역이 그리 넓지 않은 덕분이었다.
어쨌든 고참병의 입에서는 험한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으니.
“씨, 썩을! 대장! 어쩔 거요?”
내밀고 있는 창끝부터 녹는 상황에 찔러보겠다고 가까이 다가갔다가는 몸이 불타든가 뼈까지 녹아버리든가 할 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단병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물러서!”
외침과 함께 상급병사는 창을 휘둘러 녹아내린 부분으로 바닥을 긁고 창대를 분질러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물러서는 것을 확인하며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창대를 거꾸로 땅에 박아넣었다.
그리고 곧바로 견장이 뜯긴 외투를 목에 감으며 상급병사가 어떤 자세를 취했다.
“오러?”
“아니, 잠깐!”
“이 미친놈아! 안 돼!”
“봉인된 마물이잖아! 그깟 오러로는……!”
물러섰던 고참병들이 돌아서며 상급병사의 가랑이라도 잡을 듯이 손을 내밀고 마구 외쳐대는 순간이었다.
둥실, 상급병사가 그 자리에서 떠올랐고 고참병들 쪽으로 튕겨 나왔다.
털썩, 엉겁결에 상급병사를 받아 든 고참병들은 무엇이 이런 짓을 했는가를 보다가 다 함께 눈을 휘둥그렇게 뜰 수밖에 없었다.
거인, 그 덩치만 보면 일단은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언데드, 뼈다귀인 채로 움직이는 광경은 다른 생각을 몰아낼 수밖에 없었다.
인외(人外)의 마물(魔物), 투명한 뼈와 뿔이 돋은 머리…… 여러 쌍의 팔이 제멋대로 자리 잡은 기괴한 형태는 바탕이 인간의 골격이라 해도 역시 인간일 리가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그 등, 어깨뼈 아래에서 돋아난 팔은 하늘을 향해 접히는 듯한데 손목부터 시작된 손뼈가 심하게 길고 넓게 펼쳐져 날개의 골격이 아닌가 싶은 모양일 지경이었다.
그런 수 미터에 이르는 형상은 간신히 골반만 땅에 걸친 채로, 마치 지면(地面)이 수면(水面)이란 것처럼 솟아나서 명멸하는 빛의 형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날개처럼 펼쳐진 등 쪽의 뼈가 울타리가 되어 덮어 눌렀고, 가장 멀쩡한 자리에서 돋아난 팔 끝의 손이 빗자루질하듯이 움직여 팔뚝으로 쓸어 담아 거대한 뿔이 돋보이지만 날카로운 송곳니가 위아래 쌍으로 돋은 뼈뿐인 입으로 담아 넣는 것이다.
빛의 형체가 흘려내는 고열(高熱)은 투명한 뼈의 형체를 살짝 뿌옇게 만드는가 싶었을 뿐이나, 그 또한 뼈와 뼈 사이로 빛의 형체가 굴러 들어가면서 금방 사라져 흔적도 남지 않았다.
너무나도 기괴한 광경의 끝은 부서진 비석의 잔해가 격렬한 진동과 함께 치솟으며 복구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해괴한 뼈의 괴인이 사라진 다음, 상급병사가 목에 감은 외걸이 외투가 빛의 문양을 드러냈다.
“뭐야?”
“대장, 그게 뭐야?”
“어? 군단의 문장인데?”
“뭐? 저거 그냥 유물 아니었어?”
“전승 유물이다, 이렇게 빛이 날 때는…….”
오가는 고참병들의 말 사이로 상급병사는 신중하게 몇 마디 넣다가 멈췄다.
고참병들도 떠들던 말을 일제히 멈췄다.
상급병사는 급히 목을 둘렀던 외투를 끌어내 펼쳤다.
선명한 문양, 로그람의 성수(聖樹)가 한없이 가지를 뻗어내고 뿌리를 흘려내는 모양이 외투 안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옥좌(玉座)가 채워졌다.”
대장인 상급병사의 말에 고참병들이 숨을 죽였고, 그중 한 명이 간신히 목에 맺힌 침을 삼키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들 앞에는 비석이 쪼개지듯 열린 채로 우뚝 서서 햇살에도 흐려지지 않는 선명한 빛의 무늬를 드러내고 있었다. 오랫동안 품고 있던 마물이 사라졌으니 이제 다른 것을 넣어달라는 듯…….
* * *
“당장 급한 것은 치웠어요. 이거 정말 급한 것 맞는 거죠?”
투란이 조금 뚱하니 카이람을 흘깃하며 말했다.
카이람은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반짝였다. 그 꼴이 방금 치운 ‘태양의 파편’이란 녀석 말고도 다른 소소한 것들까지 모조리 읊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 하이람이 불쑥 끼어들어 말한다.
“태양의 파편은 한번 터지면 사라진다. 하지만 그 피해는 단숨에 산 하나둘을 날려버리고 그 자리에 사라진 산의 몇 배를 담을 만한 구멍을 파놓지. 그게 최소한의 피해이고, 상공으로 떠오르기라도 하게 되면 나라 하나 불태우고 용암이 가득한 화염지대로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닌 괴물이야. 처음 발견될 당시에 산악요새와 함께 수천에 이르는 군단병, 함께 거주하던 요새의 시민까지 폭사(爆死)시켰다. 춤추는 산맥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면 그 지형이 여전히 그 피해를 증명하며 남았겠지. 당장 처리해야 할 가장 급한 일은 일단 해치운 것 맞아. 그러니까…….”
카이람은 살짝 못마땅하다는 듯이 잠시 말을 멈추는 하이람을 바라봤다.
조금 더 빠르게 치워버리고 싶은 몬스터, 이제 막 봉인에서 깨어나 어리둥절한 분위기에 취한 것들을 고자질하고 싶었던 낌새가 역력했다.
투란은 고대의 왕과 궁정마도사, 로그람의 시조인 둘에게서 외면하듯 눈길을 돌리며 말한다.
“그럼, 일단 이 정보가 맞는다고 가정하고…… 이 재앙의 왕족들을 처리하도록 하죠. 집중해야 하니까 말 걸지 마시고!”
“다중사고(多重思考)가 가능하지 않냐? 사고가속(思考加速)도 할 줄 아는 것 같던데?”
불쑥 튀어나온 하이람의 물음은 투란을 움찔하게 했고 다시 눈길을 돌리게 했다.
함께 투란의 시야에 들어온 카이람이 미묘한 웃음을 입꼬리에 흘리면서 말한다.
“얘가 마법사라서…….”
“중요한 일이다. 만약 네가 조금 전처럼 왕의 마법을, 대이적을 중복시켜 사용하려 한다면 말이야. 용족과 드레이크의 경우는 왕도에 가깝고 왕의 눈으로 직접 지켜볼 수 있는 곳이다만…… 지금처럼 왕의 눈을 직접 사용하지 못하고 천공의 그물과 연계시켜 대이적을 중첩시키려고 한다면, 안 될 거야.”
길게 이어가던 이야기를 하이람은 중간에 자르듯이 단언하고 있었다.
투란은 그 요점인 ‘안 될 거야’란 말에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요?”
“재앙의 왕자들이 풀려났고, 그 중심이 되던 검은 심장도 사라졌으니까. 마력이 모자란단 이야기야. 어쩌면 그냥 모자란 정도가 아니라…….”
하이람이 말을 흐리다가 멈췄다.
그 까닭을 투란은 발아래에서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왕궁의 기반, ‘검은 심장’이 봉인되었던 주변이 흔들리고 있었다.
보석이 새롭게 반짝였고 투란은 왕도의 바탕이 되는 커다란 지반(地盤)에 새겨진 거대한 마도술식, 왕의 마법을 발휘하는 근간이 자리 잡은 곳에 혼란이 생겨나는 광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인 거죠?”
강대한 마법이 갈라지며 제멋대로 마력을 뒤틀고 흩어지려 하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억지로 묶어뒀던 사슬이 풀렸다는 것처럼, 저마다 독자적인 특성을 지녔는데 그 사슬로 인해 참고 있었지만 이제는 더 참지 않아도 된다는 것처럼, 거대한 마법 몇 가지가 불끈불끈하며 격동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왕의 마법을 이루는 뿌리나 다름없는 것이 어째서 저러는가?
고대왕국의 가장 안정적인 마법일 텐데?
드라고니아가 투란에게 헛소리를 지껄였던가!
살짝 불평이 터질 듯한 투란의 표정을 읽은 듯, 하이람이 빠르게 말한다.
“용족의 높은 평가에는 감사해야겠지만, 착실하게 쌓아 올린 마법이 아니란다. 필요할 때마다 억지로 쥐어짜 내고 희생을 통해 간신히 이어 붙여놓고 있었을 뿐이야. 느낄 수 있잖니? 저 섀터드 패턴은 애초에 실패작이라고 말이야.”
문득 투란은 느낄 수 있었다.
하이람의 말이 맞다는 것, 그리고 지금 대화가 사고가속을 이용해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까지. 그러니까 하이람은 지금 시간낭비 따위를 할 생각이 전혀 없는 셈이고, 카이람은 곁에서 결코 방해하지 않는 중이었다.
“뭘 하려다가 실패했죠?”
투란은 일단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느낀 대로 물었다.
이에 카이람이 묘하게 놀라는 듯했고, 하이람은 대견하다는 표정부터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