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175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66)
Chapter 234. 재앙의 왕자, 열전 Ⅱ
보석의 붉은빛 속에 맺히는 잔상의 풍경은 투란에게 낯설지 않았다.
드라고니아가 프로브로 자주 하던 짓을 붉은 바탕으로 꾸미고 물들여서 보여주는 듯했으니까. 그 단색으로 이뤄진 풍경이라도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분명히 알 수만 있으면 되니까.
그래서 투란의 관심은 격전(激戰)의 전조(前兆)로 괴상한 말다툼이라도 하는 듯한 드라고니아에게 자연스럽게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 * *
빛줄기가 꼬인 창이 어둠을 꿰뚫기 위해 날았다.
어둠이 일으킨 장벽이 빛의 창을 꺾어버리겠다는 듯이 휘둘러졌다.
허공을 채운 거대한 어둠의 벽에 빛의 창이 꽂혔다.
한쪽은 꿰뚫기에 실패했고, 한쪽은 꺾기를 못했다.
팽팽한 빛과 어둠의 격돌은 연이어 쏟아지는 반짝이는 바람결과 칙칙하게 회오리치는 검은 물결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금방 지상으로 쏟아질 듯한 어둠의 물결, 이를 역류시키려는 듯한 빛의 바람결이 허공을 장악하기 위해 충돌하며 뒤엉켰다.
빛과 어둠의 군무(群舞), 보는 이에게는 그저 마냥 신기하고 느닷없어서 이상하기만 한 광경일 뿐이었다.
* * *
“저놈, 도시를 파괴하고 싶어 하는 거야?”
투란이 물었다.
누구에게 묻는가를 명확하게 하지 않은 물음이었지만, 대답은 둘에게서 거의 동시에 나오고 있었다. 먼저 드라고니아의 대답이 투란의 마음에 와닿았다.
“봉인이 틈새를 보이자마자 이리로, 저런 몰골로 왔다. 지금 하는 짓도 공격하는 내 쪽이 아니라 어떻게든 지상부터 피해를 입히겠다는 형세야. 이 틈에 놈을 가둬야 해. 마력 지원 좀 확실히 해줘!”
뭔가 빚쟁이 독촉하는 듯한 말투가 저절로 낯을 구겨지게 하잖는가.
“봉인에 대한 원한을 그동안 되새김질이라도 한 모양이군. 자신이 한 짓에 대한 반성이나 할 것이지…… 로그람에 대한 원한을 불태운 탓에 다시 도망칠 생각보다 어떻게든 해코지부터 할 마음부터 생긴 모양이다. 잘 막아줄 거지?”
이어지는 카이람의 대답은 슬그머니 투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꼴 아닌가!
살짝 구겨지는 낯살을 느끼면서도 투란은 한 가지 점을 먼저 짚어야 했다.
“그 얘긴, 저놈에게 원한을 되새길 정도의 지능이 있다는 뜻?”
카이람이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투란이 곁눈질로 보자 하니 새삼스럽게 몬스터 로드에 대해서 뭔가 되새겨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드라고니아는 보다 명확하게 대답해주고 있었다.
“드라코눔의 배신자라고 했잖아! 당연히 지성이 있지! 드레이크와 정신공명을 했다고 해서 그 지성이 어디 가겠냐?”
“그냥 갈아서 치워버릴 수 없단 얘기잖아. 음, 혹시 그 공명을 끊어버릴 방법은 없나? 그 정도 지성을 지닌 배신자라면, 너처럼 그런 공명을 꺼릴 정신도 있을 것 같은데?”
투란이 나직하니, 카이람이 듣지 못하는 마음의 영역으로 빠르게 되물었다.
격전 속에서 드라고니아가 ‘어?’ 하는 반응부터 시작하더니 보다 빠르게 답해온다.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 정신공명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정신을 지키기 위한 마법을 써둔 경우라면!”
“확인할 수 있어?”
“반쯤 죽여놓은 다음에 확인할 수 있을걸?”
“그럼, 죽여.”
간단히 말하고 투란은 마음을 넓혔다.
다중사고를 통해 바라보는 상황은 좋다고 할 만한 구석이 전혀 없었다.
곳곳에서 해체된 봉인, 그 안에서 서서히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재앙이라 일컬을 수 있는 괴이(怪異)…… 과연 흔히 부르는 대로 괴물, 마물이라고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벗어난 것들처럼 이상하고 괴상했다. 몬스터 로드로서 다양한 몬스터를 겪어봤음에도 저것들은 낯설었다. 그나마 낯익은 것이 두엇 있어 보이기도 했지만, 낯익은 만큼 섬뜩했고 어떻게 봐도 위험할 뿐이었다.
때문에 투란은 세란드에게, 하이람에게 마음을 조금 더 기울여 봐야 했다.
붉은 보석이 반짝이며 아직 부족하다고 하는 마력, 왕국의 대마법을 보다 빨리 써야 할 필요가 넘쳐나니까.
세란드가 일으키는 소용돌이가 회오리를 치솟게 했고, 그 회오리 안에는 부서진 파편이 다채로운 문양을 머금고 반짝이는 채로 휩쓸려 있었다. 휩쓸린 채로도 더 부서지지 않으면서 독자적인 광채를 문양을 통해 찰랑이는 꼴은 그 독립성을 아주 강렬하게 호소하는 듯했다.
하이람이 한쪽에서 손짓하고 눈빛을 번뜩이며 부서진 파편, 섀터드 패턴을 제어하기 위해 힘쓰지만 저 말썽꾸러기 파편들은 그렇게 순순히 따를 낌새가 전혀 없었다. 그야말로 자기만의 독립성을 주장하며 회오리 속에서 버티며 튕겨나갈 궁리만 하는 난동만 부릴 뿐이었다.
그 난동이 충돌하며 특이한 마력을 뿜어내 허공을 찢고 회오리의 영역에서 벗어나려는 듯한데…… 저대로 새터드 패턴이 풀려나게 된다면 세계가 상처 입을 것이 분명하잖은가. 그야말로 오랫동안 ‘검은 심장’의 마력에 파묻혀 드러내지 못했던 특성이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는 셈이었다.
투란은 눈동자를 돌려 드라고니아 쪽에 좀 더 정신을 집중했다.
골든 드레이크를 통해 느껴지는 드라고니아의 위세는 대단했다.
어둠을 압도하는 빛무리를 한껏 뿌려냈고 마침내 허공을 가득 채워 빛의 아레나를 형성시켰으니까.
블랙 드레이크가 몸을 감싼 채로 휘돌리던 그 어둠을 지키지 못해 결국 그 자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드레이크와 닮았지만 심하게 일그러진 탓에 드레이크를 닮은 괴수가 아닐까 싶은 기묘한 모습이었다.
‘제법 괴물답네?’
투란은 살짝 그 포악하고 사나운 형상이 마음에 들었다.
보기만 해도 일단 사람 겁주기에는 딱 좋으니까.
머리부터 꼬리까지 가느다란 몸매, 두 쌍의 날개는 거의 뼈대만 남은 몰골인 채로 가죽과 비늘을 누더기처럼 걸친 듯했다. 뼈가 드러난 것인가 싶은 가느다란 몸에서 돋아난 네 가닥의 가지가 앞뒤의 다리인 듯한데, 일그러진 꼴이 사나운 손톱을 위해 억지로 붙인 손아귀 넷을 그 끝자락에 붙여놓은 모양이었다. 그런 채로 안개와 구름처럼 몸 주변에 어둠을 휘감고 맴돌게 하는 몰골은 한없이 깊은 저주와 증오로 가득해 보였다. 그야말로 세계의 파괴를 위해, 타락을 위해 몸부림치는 압도적인 힘을 간직한 마물!
블랙 드레이크의 그런 형상을 두루 살피다가 투란은 낯을 구겼다.
‘배반자인지 배신자인지는?’
정신공명을 한다고 했는데, 함께 봉인된 채라고 했는데 어디에도 드라고니아를 닮은 뭔가가 없었다. 저 블랙 드레이크에게 들러붙은 채라든가, 올라탄 모습이어야 할 텐데…….
―융합해서 그래.
돌연 드라고니아가 투란에게 말했다.
일부러 소리치던 것을 자제하며 마음으로 전하는바, 그 안에는 드라고니아가 바라보는 블랙 드레이크의 기괴한 일그러짐이 함께 담겨 있었다. 온몸을 감은 마력, 그 마력 안에 흘러넘치는 악의, 윌 라이트가 흉악한 증오에 물든 듯한 형세잖은가.
그 어디에서 드라코눔의 배신자를 엿볼 수 있는가?
투란은 금방 깨달았다.
저 흉악한 증오가 가득 담긴 의지, 안개와 구름처럼 시커먼 드레이크의 몸을 감싼 저것이 바로 그 배신자의 형상인 것.
‘본래 모습을 잃었다고?’
―아니, 마법을 바탕으로 한 형태변이일 뿐이다. 다만…… 저 계통 마법으로는 드라코눔에서 거의 최고라고 일컬어졌었지. 그렇기에 낯선 세계를 탐색하는 임무를 자청했고 인정받아 맡게 되었는데…… 이제 끝장을 내야겠어!
이야기를 끊어버리면서 드라고니아가 각오를 확연하게 전해왔다.
‘야, 빨리 죽이라고.’
투란도 깔끔하게 보챘다.
―준비 끝났다, 간다!
드라고니아가 이제 결실을 수확한다는 듯이 다짐했다.
‘정신없네.’
‘어, 정신없으니 이쪽은 보지 말라고.’
‘아, 놔아아!’
‘섞지 마!’
‘침착하게, 하나씩.’
‘집중해, 맡은 바에만 집중하라고!’
다중사고(多重思考)에 의해 형성된 다양한 마음의 갈래, 저마다의 ‘투란’이 보석 앞에 선 채로 전체를 관조(觀照)하는 투란에게 한꺼번에 투덜거렸다. 어떤 말이 먼저이고 어떤 말이 나중인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투란은 지금 가장 중요한 상황, 봉인으로부터 풀려난 재앙들이 서서히 주변을 확인하면서 바로 움직일 것인가 말까를 고민하거나 가야 할 방향을 잡지 못해 어리둥절한 이 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저 재앙이 봉인의 후유증을 벗어내고 제대로 활동한다면…….
‘춤추는 산맥에서 왕국 몇 개가 지워질지도?’
‘더 이상 고대 왕국이 남아 있지 못한 산맥?’
‘온 세상으로 마물, 괴물을 풀어놓는 마경?’
당장 바쁜 와중에 몇 갈래의 마음이 이뤄낸 요약(要約)을 투란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신이 그리 생각한다는 때문이 아니라, 어떤 현자가 온다 해도 그만 한 능력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재앙이었으니까.
때문에 투란은 공중에 뜬 거대한 석판의 이야기를 다중사고로 검토하고 왕가의 마법을 통해 봉인이 깨져나간 곳의 상태를 살피면서 드라고니아에게, 드라코눔의 아칸이 지원해야 할 필요가 있는 세란드와 하이람 쪽까지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무엇보다 저 재앙들을 한꺼번에 상대하기 위해 왕가의 마법, 대이적이 절실하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는 탓이었다.
이대로 상대한다면, 아홉 ‘그릇’과 그 안에 담긴 심장을 제물로 바쳐 얻어낸 희생의 마력만으로 대이적을 거듭하려 한다면 한꺼번에 상대할 수 있는 재앙의 수는 기껏해야 둘 혹은 셋…… 투란은 냉정하게 계산했고 반짝이는 붉은 보석을 보며 마음을 정했다.
‘천칭’이 곧바로 투란의 결심에 호응해왔다.
투란의 가슴에서 황금빛 가닥이 새 나왔고 곧장 왼쪽 어깨 위로 흘러나가 맴돌며 매의 형상을 그려냈다. 처음에는 연기처럼 일렁였지만 황금매의 형상은 곧바로 실체를 갖추고 그 또렷한 발톱으로 투란의 어깨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 움켜쥔 발톱 위로 찰캉이는 사슬이 발목을 감으며 흘러내려 투란의 겨드랑이를 지나 팔을 감싸고 어깨를 감으며 고정되기도 했다.
투란의 입술이 달싹이며 아홉 심장이 맥동했고, 카이람이 무슨 말인가 귀를 쫑긋할 때 황금매의 목 아래로, 가슴에서 튀어나온 듯한 구슬의 형체가 맺혔다. 구슬은 한없이 소용돌이치는 하늘빛이었다.
“야아! 이게 무슨!”
희미한 괴성, 비명 같은 울림을 터뜨리며 하얗고 작은 털뭉치가 하늘빛의 결을 타고 튀어나와 곧장 투란의 발 사이로 떨궈지며 사라졌다. 튼튼한 돌처럼 보이는 바닥이 부드러운 샘물이었다는 듯이 스며들며 사라진 광경이 카이람을 흠칫하게 하는 사이, 투란이 조금 또렷하게 속삭인다.
“미안, 하지만 알지? 브로큰 킹덤도, 알드바인도, 시알라까지 모두 휩쓸릴 수 있는 대사건이잖아. 보석이 완성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건 도망쳐서 구경만 할 수 없는 탓이라니까. 게다가 나서면 해결할 수 있잖아. 저 봐, 드라고니아도 있는 힘을 다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세란드, 몬스터답게 어흥 하고 오늘만 도와줘. 오늘만이야, 오늘만!”
카이람은 눈을 깜박였다.
투란을 미친놈 보는 듯한 눈길이 저절로 카이람의 눈가에서 배어 나오는 듯한 낌새도 살짝 섞여 있기는 했다. 하지만 카이람의 표정에는 미친놈을 바라보는 낌새가 없었다. 일그러진 카이람의 낯빛은 아쉬움, 안타까움, 서글픔이 뒤섞여 있는 채로 힘내라고 지켜보는 듯할 뿐이었다. 지금 상황이 미쳐도 모자란다고, 미쳐서 끌어낼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당연히 미쳐야 할 것이라고 인정하는 듯했다.
“이 썩을 놈! 오냐! 이번 한 번만이다! 한 번 보고 나서 두 번 꺼낼 생각이 드는가 봐 주마!”
하늘 높이 솟은 환영의 궁전으로부터, 왕궁의 초석보다 아래인 지하의 거대한 반석으로 내리꽂히는 채로 토해진 으르렁거림은 착실하게 심상의 영역을 넘어서 전해졌다. 그러나 그다음에 몬스터가 토해낸 외침은 반석 안에 새겨진 이차원(異次元)의 위상(位相)과 그 안에서 격렬하게 마법을 제어하려는 이들까지 흔들면서 퍼져 나갔으니.
“이 얼빠진 가디언 같으니라고! 그렇게 꼬물거릴 거였으면 한 걸음 물러서서 준비부터 갖췄어야지! 너 때문에 나까지 이 꼴로 현신(現身)해야겠냐고!”
파워 서클의 기초를 그려내는 회오리,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욕을 처먹은 세란드가 이에 냉철하게 답한다.
“물러설 자리가 아니다. 가늠해보고 따질 처지도 아니지. 그만 투덜거리고 힘을 보태라.”
마치 몬스터 세란드가 올 것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이 당당했다.
“썩을, 예견의 눈깔 같으니라고!”
투덜거림을 한 번 더 토해냈지만, 하얀 털뭉치는 노골적으로 갈라지며 여우 꼬리의 가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여러 가닥의 꼬리 중심에서는 투명하고 밝은 구슬의 광채가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