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176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67)
하이람은 느끼고 볼 수 있었다.
‘섭리의 석판’을 완성하지 못하고 갈라진 채로 날뛰던 부서진 파편, 섀터드 패턴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새로운 마법의 길을 억지로 뚫고 열어야 했던 원인이었던 조각들이 석판을 이뤘던 평면 위상에서 벗어나 입체의 차원을 갖추기 시작하는 광경을.
‘아, 마침내!’
살아서 아무리 매달려도 안 되던 일, 죽어서조차 포기 못 한 채로 지켜보며 노력해도 안 되던 일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 일을 이뤄내는 것은 열두 가닥의 꼬리를 지닌 채로 이마 위에 구슬을 얹어놓은, 머리 안에 숨기고 있다가 토해져 나온 구슬로 인해 온전한 여우의 낯을 드러낸 괴물이었다. 앞발 대신에 창백하게 빛나는 두 팔을 고스란히 드러냈는데, 그 팔의 정체를 하이람은 곧바로 되뇔 수 있었다.
“페일 글로우…….”
창백하고 여린 빛을 머금은 채로 날뛰던 고대(古代)의 몬스터, 가히 천 년 전에나 볼 수 있었던 괴물이었다. 그 지체(肢體)를 지닌 이상한 여우는 소문으로 듣던 정령의 숲, 아빈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 우연일까?
“어이! 흘깃거리지 말고 정신 차려!”
여우의 입에서 사납고 거친 말이 하이람에게 쏘아져 나왔다.
하이람은 입가에 쓴웃음이 매달리는 것을 느꼈지만, 곧 마음을 지워 비운 채로 섀터드 패턴에 집중했다. 입체가 된 채로도 여전히 독립해서 서로에게 반발하며 본래 이루려던 근원의 형상을 제멋대로 구축해 나가려는 마성(魔性), 그 마법의 속성 때문에 세계를 찢어내는 위험한 마력(魔力)이 발생하고 있었다.
구슬을 이마 위에 얹은 여우는 놀랍게도 그 마력을 제어하며 섀터드 패턴의 충돌을 휘젓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놀라운 짓을 하면서 하이람에게 경고하듯 말을 덧붙이니.
“완전한 옴니무스가 아니야, 이건 불완전한 시제품(試製品)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정신 바싹 조이고 당신의 경험을 쏟아부어야 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뭘 하려는 거야?”
파워 서클의 틀을 자아내는 회오리를 일으키는 채로 세란드가 바로 되묻는 말을 꺼내고 있었다. 여차하면 가디언 세란드는 자신의 옆구리에 걸려 덜렁거리는 금색 휘장이 새겨진 채로 사슬에 감긴 두꺼운 책을 펼칠 듯한 낌새도 드러내는 채였다.
몬스터 세란드가 차갑게 가디언 세란드를 노려보며 말을 잇는다.
“금색의 마도서 쓸 생각 하지 마! 찢어발기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라고! 그딴 것 없어도 정리할 수 있으니까! 뭐하러 그딴 걸 복원해서 갖고 다니냐고 대체!”
여전히 가디언 세란드로부터 되짚어 묻는 말이 나오는데.
“최상의 결과가 필요해. 어중간하게 할 거라면…….”
“월드 가디언이 상상한 최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내줄 테니까!”
으르렁거리듯이 말을 자르는 몬스터 세란드였다.
하이람이 그 광경을 흘깃하고 낮고 빠른 소리로 외친다.
“서둘러야 해! 왕국에는 시간이 얼마 없어!”
“왕도 보채고 있기는 하지. 그러니까 왕이여, ‘나’에게 허락해줘. 너만의 비전, 보이드셸을!”
여우의 입이 이를 가는 듯한 형상으로 토해낸 말이었다.
하이람에게 대꾸하는 듯했지만, 가디언 세란드는 그 말에 담긴 ‘나’의 의미를 깨닫고 놀란 눈을 한 채로 여우 형상에 몇 가지가 더 섞인 몬스터를 바라봤다. 몬스터 쪽의 세란드는 투덜거리듯이 그 눈길을 마주 보며 이를 갈 뿐이었다. 하지만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세란드’는 본래 둘이 하나이며 ‘나’의 견고한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했다.
곧 투란으로부터 대답이 들려왔다.
“서둘러.”
그래서 하이람은 볼 수 있었다.
보이드셸, 그 공허가 어떻게 섀터드 패턴을 포장(包藏)하고 포장(包裝)해서 서로를 완전히 갈라놓는가를…… 갈라진 섀터드 패턴들이 어떻게 제멋대로의 영역을 구축하며 독자적으로 ‘섭리의 석판’을 이뤄내려 하는가를!
“좋아, 이제 제물이…….”
‘세란드’가 여기까지 중얼거릴 때, 가디언은 담담하게 하이람을 바라봤고 몬스터는 찌푸린 채로 이를 갈며 말을 멈췄다.
하이람은 문득 깨닫고 알아차렸다.
“내 차례로군. 어찌하면 되는가? 이미 그대가 거쳐온 길이잖나? 알려주게.”
가디언과 몬스터, 어쩐지 전혀 어울릴 수가 없는 둘의 형상 속에 끊어질 수 없게 맺힌 바를 느끼며 묻는 말이었다. 하이람의 물음에 가디언 세란드가 담담한 태도를 그대로 담아 말한다.
“올라서서…… 도달하시오.”
곧바로 몬스터 세란드가 덧붙인다.
“후회할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관둬. 언제 끝날지 모르는 영원한 싸움에 뛰어드는 셈이니까. 당신이 하지 않아도 우리 왕이라면 어떻게든 해낼 방법이 있을 테니까. 물러설 기회는 이게 마지막이야. 죽음조차 거부한 자라 해도…… 어렵다고.”
하이람은 둘이 말하는 사이에 자신의 발아래 그려져 온 빛나는 길을 봤다.
한 가닥 얇은 가닥으로 그어지고 펼쳐지며 발을 디딜 폭을 겨우 꾸며낸 선이었지만 파워 서클과 섀터드 패턴이 그려지는 중심으로, 그 핵심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위로 한 걸음, 아무 망설임 없이 디디며 하이람이 말한다.
“죽어서도 싸운다.”
가디언과 몬스터가 동시에 하이람을, 고대 왕국의 궁정 마도사를 아주 낯선 눈길로 바라봤다.
그 눈길 속에 담긴 의아함, 어리둥절함을 느끼며 하이람은 웃었다.
아마도 하이람 역시 카이람이 처음 저 소리를 꺼냈을 때 비슷한 표정을 짓지 않았을까?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로그람 왕국 군단의 상징 같은 군호(軍號)…….
“무슨 미친 소리냐?”
“언데드라도 되고 싶다고?”
“데드워커 지망이셨어?”
다들 카이람을 향해 그렇게 으르렁거렸었다.
그리고 고대에서 현세까지, 로그람의 외침에 여전히 그런 말이 나온다!
과거를 추억하며, 하이람은 발을 옮겨갔다.
한 점의 후회 없이, 앞으로도 더 싸울 수 있다고 기뻐하며.
희생하는 제물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를 부여받은 로그람의 궁정 마도사다. 하이람은 파워 서클의 획(劃)을 이끌며 섀터드 패턴 사이를 거닐며 그 중심을 향해 걸어나갔다.
순간은 영원처럼 이어졌고, 그 영원이 끝났을 때 하이람은 새롭게 태어난 파워 서클의 중심에 놓인 듯이 서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어느새 몬스터 세란드도, 가디언 세란드도 사라지고 없었다.
있는 것은 거대한 빛과 어둠을 바탕 삼아, 다채로운 무늬를 허공에 잔뜩 띄운 채로 명멸하는…… 정사각형의 상자 안을 꽉 채운 듯한 구형(球形)의 중심에 가디언으로서 하이람이 홀로 머물고 있을 뿐이었다.
자각과 함께 하이람은 자신이 어찌 변했는가를 ‘알았다’.
가디언 세란드가 그려놓은 길을 따라, 몬스터 세란드가 꾸며놓은 섀터드 패턴의 조화된 영역을 가로지르며 로그람 왕가의 마법으로 이뤄진 하이람의 형상은 분쇄되었고 사라졌다. 남은 것은 그 혼(魂)의 의지, 파워 서클에 바쳐진 망령일 뿐이었다.
그 망령에게 신생 파워 서클은 형상을 부여했고 생명을 담아줬다.
더불어 로그람의 왕도 아래에 감춰진 거대한 마법의 지반은 파워 서클과 함께 새로운 형태를 이뤄냈다.
위아래, 사방의 경계를 이루는 지반에 새겨진 새로운 무늬는 섀터드 패턴의 영향을 드러냈지만 여섯 방향으로 각자의 영역을 구축하며 조율된 채로 세계의 상처를 보듬어 다스리고 치유하는 성질을 또렷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하이람은 과거의 궁정 마도사가 꿈꿔온 염원이 이뤄진 것을 깨달았다.
가디언으로서 다시 태어난 하이람의 의무 또한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 할 일도.
* * *
지반 속의 마법이 응축되며 공간이 재구성되었다.
재구성된 공간은 빈틈없이 꽉 채워진 암석의 내부이면서도 텅 빈 채로 거대한 마법의 술식이 떠도는 텅 빈 지하 석실(石室)이기도 했다. 그 크기가 거뜬히 수십 미터이기에 석실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았지만.
거대한 정육면체의 상자와 같은 석실은 그 중심에 자신의 모형을 아주 작게 만들어냈다. 석실의 수십 미터에 달하는 규모를 압축시킨 탓에 주먹만 한 주사위라고 착각할 수도 있는 정육면체는 그 안을 전혀 보여주지 않으면서 외부에 다채로운 마법의 문양을 화려하게 각인한 자태를 이뤄냈다.
그 큐브를 손에 들고, 하이람은 꽉 차 있으면서도 텅 빈 로그람의 왕도 지반에서 벗어났다. 지반을 감싸는 마력이 하이람을 자연스럽게 따라 나갔고…… 왕도의 중심인 왕성, 그 왕궁의 한쪽 봄의 별궁이라 불리며 거대한 신목의 환영을 시작하는 궁전의 정상으로 솟구쳤다.
* * *
하이람은 가볍게 아홉 ‘그릇’의 바깥쪽에 섰고, 카이람이 놀란 얼굴로 바라보는 모습에서 자신의 외형이 꽤 변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자각했다. 아마도 눈동자는 투란의 왼쪽 어깨에 놓인 황금빛 매와 같은 창공(蒼空)의 빛을 띠었을 터이고 머리카락은 세월에 탈색된 백색이 아니라 여린 백금의 색채를 띠었을 것이다.
그 까닭은 굳이 따질 필요가 없었다.
몬스터 세란드의 근원, 황금매의 영향을 받은 탓일 뿐이니.
그리고 하이람에게는 카이람이 의아해하는 바를 풀어줄 여유도 없었다.
지금 막, 하이람이 다시 이 자리에 서자마자 천징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강대한 존재…… 어찌 된 일인가 하나 더 늘어난 드라코눔의 아칸, 그 아칸과 완전히 동조한 듯한 물의 대정령인데 그 수준이 제대로 가늠이 되지 않아 물결왕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는 존재를 느끼면서도 무슨 일인가 물어볼 시간이 없었으니까.
“왕이여, 준비되었다네.”
간결하게, 신속하게 하이람은 투란에게 말했다.
동시에 하이람은 대정령과 함께 온 드라코눔의 아칸, 검푸른 비늘과 늘씬한 몸매 위로 적절하게 무장한 모습이 투란이 형성한 황금빛 뿔과 붉은 비늘을 머금고 홀랑 벗은 꼴인 드라고니아랑은 전혀 다른 쪽에 대해 의아해하는 표정도 지어 보였다. 과연 저 기묘한 존재를 여기 둬도 되느냐고 묻는 것처럼.
투란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설명하기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드라고니아는 굉장히 못마땅하다는 몸짓을 보이며 이대로 자리를 비우고 싶다는 태도였다.
그래서인가, 카이람이 끙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까닥였다.
언어를 대신한 의지, 로그람의 마법으로 이뤄진 형체 사이에서만 통하는 마법이 곧바로 하이람에게 전해져 왔다.
그 때문에 하이람은 웃을 수 있었다.
지난날의 자신을 허물 벗듯이 벗어놓았지만, 새로운 파워 서클의 한 부분인 가디언으로서 거듭난 꼴이었지만 하이람은 여전히 로그람의 궁정 마도사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었기에.
하지만 그 웃음은 곧바로 찌푸려진 입매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왜 이 자리에 드라코눔의 아칸이 제멋대로인 몰골로 둘인가.
그 전후 사정을 알고 나니 웃을 수가 없었고, 웃을 때가 아니었다.
* * *
“끝내 숨어 있을 참이라면, 그대로 사라져라.”
드라고니아가 격노를 담아 거칠게 외쳤다.
그 숨결과 호응해서 골든 드레이크, 광금룡의 일족이 한껏 들이켠 숨을 토해내었으니, 허공에 맺히며 빛으로 이뤄진 거대한 장벽 전체가 격렬하게 맥동하며 감금된 어둠을 조이고 억누르는 파문을 일으켰다.
그 파문에는 분명한 마도술식이 담겨 있었다.
―긍지 높은 일족의 염원을 담아 선포하니! 빛이여, 멸룡(滅龍)의 위엄을 드러내어라!
의지의 마력이 깃든 진언이 소리 없이 빛에 담긴 채로 퍼져 나갔다.
파문이 격렬한 힘을 머금고 요동치기 시작했다.
빛의 격류가 허공을 휩쓰는 바람결처럼 흘러넘쳤다.
블랙 드레이크를 감싼 어둠이 흩어지며 서서히 빛 속에 녹아내렸다.
그대로 버틴다면 블랙 드레이크가 가죽부터 뼛속까지 모조리 빛에 지워질 듯했다.
이를 거부하려는 듯이 블랙 드레이크가 다시 온몸으로 어둠의 숨결을 토해내며 몸부림치려 했지만, 드라고니아가 펼친 마도술식 멸룡은 드라코눔의 비원(悲願)을 담았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거칠게 맥동하는 빛의 파문을 더해가며 그대로 블랙 드레이크를 분쇄할 위세만 떨쳐낼 뿐이었다.
그 위세 속에서 빛이 가져다주는 파멸을 거부하는 자가 일어섰다.
블랙 드레이크의 등에서 솟아 날개의 중심을 가로지르며 목 줄기를 타고 머리를 밟는 자세로 일어선 어둠…… 그 어둠이 일그러뜨리며 나타난 자가 속삭이는데, 그 속삭임이 천둥이 되어 빛의 장벽을 두드린다.
“용의 일족이면서 멸룡이라고? 그렇게 타락할 것이면서 나를 탓하며 추방했던가?”
시커먼 어둠이 빛의 격류를 막아내는 장막을 드리웠다.
어둠의 숨결이 장막에 힘을 더하니, 빛의 파괴가 멈췄다.
격노가 담긴 드라고니아의 눈길이 그자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