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179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70)
‘어디 보자.’
숨을 가다듬으며 투란은 먼저 ‘천칭’의 풍경부터 살폈다.
‘천칭’ 담긴 늑대, 펜릴의 문장을 형성했고 태양의 아이들, 파편이 성장해 완성했다는 하늘 높은 곳에서 둥실거리던 몬스터를 잡아먹었다. 마치 몬스터의 정수를 바탕으로 그 형상을 재현하듯, 드라고니아가 실체를 이룬 것처럼 형성시킨 문장의 화신(化身)이 해낸 것이다.
얼핏 생각해도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낸 셈!
하지만 어째서인가 투란은 붉은 보석의 광채를 눈에 담으며, 아직 그 중심의 핵이 온전하지 않기에 가져갈 수 없다는 진실을 파악하면서 펜릴의 문장이 웨어울프의 형상으로 실현되었다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치 로그람의 ‘대이적’이라면 이 정도는 당연하지 않느냐고 마음 깊은 곳에서 누군가 속삭이기라도 하는 듯…… 그리고 이 애매한 느낌과 다르게 보다 선명하게 문장의 풍경 깊은 곳에서 웅대한 울음을 느릿하게 퍼뜨리는 녀석들도 둘이나 있었다, 그 정도가 뭐 그리 놀랄 일이냐는 듯한 무거운 숨소리가 너무나 강대한!
도대체 무엇에 그 둘이 반응하고 있는가?
투란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 * *
블랙 드레이크, 잔뜩 어둠을 두르고 기괴한 형태를 한껏 웅크린 채로 공허의 껍질에 둘러싸인 녀석은 수룡과 사룡의 틈새를 맴돌고 있었다.
한껏 공허를 날갯짓하며 떠도는 사룡, ‘천칭’의 기둥 아래를 점거하는 연못을 꾸민 수룡…… 어찌 보면 둘이 자신들 사이에 블랙 드레이크를 얹어놓고 노려보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오랫동안 도망 다니던 범죄자를 이제 잡았다는 듯한 낌새까지 흘리면서!
투란은 이 느낌이 착각인가 아닌가 판단할 수가 없었다.
다만 블랙 드레이크에게 ‘암룡’이란 이름이 온전히 부여되지 않았다는 것, ‘암룡’이란 이름을 얻을 수도 있었다는 것은 ‘알아낼’ 수가 있었다. 막연한 느낌, 아련한 기억이 흘려내는 냄새가 그렇다고 속삭여준 셈이었다. 어쩌면 그저 망상일 뿐이고 착각일 수도 있는 ‘앎’…….
“조건이 필요한가?”
투란은 솔직하게 묻기로 했다.
의지가 언어가 되어 사룡과 수룡, 더스크라이더와 크리스탈가드에게로, 둘의 정수를 울리며 전해졌다.
순간, 둘의 대답이 투란의 마음속에 떠올랐다.
“이름?”
웅얼거리며 갸웃하던 투란은 퍼뜩 느낄 수 있었다.
사룡좌, 더스크라이더.
수룡좌, 크리스탈가드.
아늑한 옛날 드래곤 로드 그림 투아란이 둘에게 이름을 부여했었다.
그래서 둘은 용의 이름을 얻었다고 하잖던가.
투란도 저 블랙 드레이크에게 이름을 붙여놓고 암룡좌라 할 수 있는가?
문득 투란은 사룡과 수룡이 맴도는 언저리보다 높은 곳에서 깨진 알을 요람 삼아 뒹굴고 있는 골든 드레이크를 살펴봤다. 이름을 붙이면 저 녀석이 단숨에 자라서 광룡좌(光龍座)가 될 수 있으려나?
‘썩을…….’
투란은 금방 부정하며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에도 드라고니아나 아칸, 하이람보다 먼저 골든 드레이크는 빛을 거두고 투란 앞으로 날아왔다. 재빠르게 그 거대한 형상을 축소해 다시 깨진 알의 요람 안에 담긴 새끼의 형태가 되었는데, 정상적이라면 그렇게 해도 몇 미터의 거대한 알 안에 담긴 곰보다 큰 덩치였어야 할 녀석이 고작해야 투란의 무릎 아래에 달라붙는 조그마한 몰골로 줄어든 채로 어리광부터 피웠다!
마치 이 험한 세상이 싫다는 듯, 싸우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는 듯!
어이없어하면서도 어쩐지 어미의 감정을 느낀 탓에 투란은 곧바로 깨진 알과 새끼 드레이크의 형상을 거둬야 했다.
그런 상황을 떠올리면 그냥 이름 붙인다고 드레이크가 용좌에 걸맞은 존재가 되는 것은 분명히 아닐 터…….
그르르, 크릉!
촤악, 사아아아.
기묘한 울림이 수룡으로부터 느껴져 왔다.
투란은 그 느낌 속에 담긴 낯선 ‘의미’를 알아차렸다.
‘크리스탈가드?’
자신만의 커다란 연못, 이 풍경에 어울리는 거대한 호수를 꾸미고 그 안에 몸을 감춘 녀석이 독특한 형태로 투란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드라고니아와는 전혀 다른 방식, 오롯하게 과거의 기억과 지식만을 전하는 ‘이야기’가 투란에게 속삭여지고 있었다.
그래서 투란은 알 수밖에 없었다.
사룡 또한 그 거대한 격동을 공허 안에 뿌리며 보태듯이 투란에게 전해오는 바가 있었다.
먼 옛날 그림 투아란에게서 벗어난 블랙 드레이크, 잡혔다면 이름을 부여받고 암룡좌로서 속박되었어야 할 녀석, 이번에야말로 완벽하게 감금할 수 있으니 얼른 이름을 걸어 속박하자는 의지였다.
‘잠깐? 아니, 이 녀석들!’
움찔하며 투란은 곧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깨달았다.
사룡과 수룡, 둘은 드라코눔의 배반자와 블랙 드레이크를 제압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 사룡이 격동의 장벽을 둘렀고, 수룡이 빛의 집결(集結)을 돕는 수정안개의 거울을 꼼꼼하게 배치해놔서 드라고니아와 골든 드레이크가 주변에 끼칠 여파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마음껏 날뛸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평소의 느릿함, 어딘가 귀찮아하며 게으름을 슬금슬금 흘려내는 낌새가 전혀 없어서 투란도 살짝 의아하기는 했는데…… 설마 아주 머나먼 옛날에 자신들처럼 이름을 부여받지 않고 달아난 놈에 대해 은근히 품고 있던 시기와 질투가 그 동기(動機)라니!
그림 투아란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기는 했지만 한쪽으로는 용의 이름을 얻은 만큼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싶었던 둘은 이름을 얻지 못했지만 멋대로 야생에서 살아가는 블랙 드레이크를 시샘한 것이다!
‘이런 속 좁은! 덩칫값은 해야잖아!’
으르렁거리듯 투란은 투덜거렸다.
물론 용의 이름을 걸고 속 좁은 녀석들이 제안한 바를 거부하지는 않는 투란이었다.
잔뜩 웅크리고 한껏 증오를 꾹꾹 눌러 담으며 자신을 속박하고 감금한 공허의 껍질 속에서 어떻게든 버티려 하는 블랙 드레이크를 그냥 둘 수는 없으니까.
때문에 이름을 붙여놓으려 하는데…….
‘뭐라고 해야 하지?’
막상 적당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문득 로그람의 시조 왕이라든가 시초의 궁정 마도사라면 이럴 때 적당히 암룡좌에 어울리는 이름을 만들어주지 않을까 싶어 투란이 심상 풍경에서 눈길을 돌리려 하는데, 갑작스럽게 푹푹 꽂혀오는 이름이 있었다.
―그림투스.
―크라잉나이트.
암룡좌, 블랙 드레이크가 용의 이름을 부여받았을 때 그 활동에 따라 드러날 성격에 맞춰져 붙여질 이명(異名).
어둠을 흘려내고 그 안에 숨어 잔혹한 이빨과 발톱으로 사냥하고 포효하는 괴수, 짙은 어둠을 늘 두르기에 비명과 포효가 섞인 밤과 늘 함께하는 마물.
블랙 드레이크는 그런 예상에 따라 이명이 고려되고 있었다.
잡히질 않았기에 용의 이름을 부여받지 않았고, 이명 또한 걸린 적이 없었다.
‘용의 이름, 이명. 둘이 모두 필요하다……라.’
새삼 투란은 사룡과 수룡이 거쳐온 ‘기억’을 더듬으며 둘이 동시에 제안한 이름 두 가지를 블랙 드레이크에게 얹어봤다. 오가고 지나며 본 가게 간판을 고려하듯이.
결정은 빠르게 이뤄졌다.
“좋아, 둘 다 붙여주지. 그냥은 애매하니까, 섞어서 말이야.”
낭랑하게 선언하며 투란은 한껏 웅크린 블랙 드레이크를 향해 의지를 담아 의미를 전했다. 소리 없는 그 속삭임이 빠르게 블랙 드레이크의 정수에 전해졌고, 암룡(暗龍)이 어둠을 펼쳐내며 그 자태를 드러냈다.
우드득, 콰아아아!
오랫동안 봉인되었다가 드러났을 때와는 달리, 네 가닥 지체는 팔과 다리가 우람하게 섞인 듯했다. 그 지체의 끝자락은 손이면서 발인 역할을 완벽하게 드러내듯, 칼날 같은 손톱과 두툼한 발톱이 매달린 가지를 오만하게 펼쳐 보였다. 마르고 가늘기만 했던 몸은 여전히 느슨하고 가늘면서도 곳곳에 꿈틀거리는 힘줄과 번뜩이는 검보라 빛 비늘이 세밀하게 자리 잡았다.
어둠 속에 걸린 붉은 등불 같던 눈동자가 이글거리는 보랏빛에서 새파란 불길에 이르도록 찰랑거리기도 했다. 그 눈빛에 어울리듯 길게 펼친 두 쌍, 네 장의 날개는 투명한 그림자가 다채로운 색을 머금은 장막처럼 드리운 듯했다.
그 모습을 감싸듯, 투란이 전한 이름이 느릿한 메아리가 되어 풍경을 울린다.
“그림나이트.”
암룡좌 그림나이트가 그 어둠을 응집(凝集)시키고 형상을 압축시키며 곧바로 ‘천칭’의 기둥을 둘러 감고 그림자처럼 채색하며 모습을 지웠다.
투란은 그 변화에 흠칫했지만, 암룡좌가 골든 드레이크…… 광금룡 일족의 새끼가 머무는 깨진 알에 그림자처럼 들러붙은 광경에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새끼 드레이크는 갑작스러운 봉변에 삐약거리듯이 놀라고 있었지만, 드라고니아가 하염없는 공허를 꿰뚫듯이 말을 전해왔다.
―적당히 수습했냐? 그러면 다른 쪽도 좀 둘러봐라.
“그래, 그럴 거야.”
대답과 함께 투란은 ‘천칭’의 바깥으로 마음을 돌렸다.
갈라진 채로 로그람 곳곳에서, 세상의 외진 곳에서 기다리는 대이적을 행할 때가 되었다.
* * *
‘세란드’는 몬스터의 본성이 저절로 발동하는 것을 깨달았다.
문장의 풍경 속, 자신을 가둔 곳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의 심상 속이지만 정수를 삼켜진 몬스터에게는 너무나도 견고한 현실인 그 풍경과 다르게 ‘세란드’를 자극하는 것…….
“얘기가 다르잖아! 투란!”
울컥한 외침부터 터뜨리며 몬스터 세란드는 손톱을 세우며 날아드는 광채를 후려치고 밀어내려 했다.
펑, 파칫!
광채가 불꽃, 번개를 뿜어내며 사라졌다.
그 불과 번개를 팔뚝으로 막아내며 몬스터 세란드는 다시 외쳤다.
“투란! 왜 내가 이런 곳에 있냐고! 도울 일은 다 도왔…….”
‘오늘만 도와달라니까.’
외침을 자르듯이 투란의 마음이 전해져 왔다.
몬스터 세란드는 흠칫하다가 퍼뜩 알아차렸다.
“이 새끼, 사기 쳤냐!”
한 번만, 한 가지 일만 도와달라는 말투였었다.
하지만 지금 전해온 것처럼 투란은 ‘오늘’ 도와달라고 했다!
그리고 몬스터 세란드는 그 말투를 바탕으로 어쩔 수 없으니까 한 번 정도는 돕자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직 끝나려면 멀었다!
“이 못된……!”
세란드가 괴물답게 다시 으르렁거리려는 순간이었다.
피잉, 파칫, 콰아아!
마력의 화살이 날아들었고 마력의 번개가 찔러왔으며 마력의 바람이 두껍게 몰려왔다.
여기저기서 날아든 그 마법 공세를 단숨에 휘두른 꼬리 하나로 물리치다가 몬스터 세란드는 이 상황이 아주 괴이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슨 상황인 거냐?”
로그람이 고대에 실패한 파워 서클, 섀터드 패턴을 더해 그 파워 서클을 그려내는 일은 굉장히 섬세하고 복잡하며 최상위 마법이 셀 수 없이 엮인 난해한 과정이었다. 그러니 몬스터 세란드가 품고 있는 옴니앙, 그 옴니앙을 제대로 다뤄내는 솜씨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 높은 수준의 마법이 엮인 자리에 밀어 넣었던 세란드를 이런 안개가 가득 채워진 허허벌판에서 갑작스럽게 날아드는 마법 공격을 겪는 자리에 투란이 던져놨다는 것은…….
‘왕국에서 모은 정보는 대강 이래.’
심상 속에 간단한 몇 마디와 함께 둥실거리는 석판처럼 보이는 도해가 전해져 왔다. 그 안에 담긴 바를 파악하면서 몬스터 세란드는 살짝 새는 신음과 함께 이를 갈아야 했다.
지금 날아든 몇 가지 마법 공격은 미약했다.
그러나 그 미약함은 덜 자란 열매에서 튀어나온 탓일 뿐이었다.
섀터드 패턴을 다루는 과정에서 잘못 태어난 영목(靈木)이 완전히 자란 열매를 뿌리게 된다면, 저 불꽃은 산을 태우는 화재(火災)가 될 것이고 벼락은 산을 무너뜨릴 터이고 바람은 무너진 산을 먼지 티끌로 세상에 뿌려버릴 것이다.
“뭔 놈의 실패작이 재앙까지 되냐고! 나무면서 어떻게 봉인당하고도 아직 저렇게 팔팔하게 살아남았을 수 있지? 이 나라 정상이 아니잖아!”
‘어, 그 의견에 찬성. 그래서, 치워버릴 수 있지?’
투란은 잔뜩 투덜거리는 몬스터 세란드에게 확인하듯 묻고 있었다.
몬스터 세란드는 아주 당연하게, 단숨에 부정(否定)을 담아 대답한다.
“나 혼자 할 일이 아냐! 봐라, 저 나뭇가지가 멀쩡한 나뭇가지로 보이냐?”
‘촉수네.’
투란도 인정해줄 수밖에 없었다.
덜 자란 열매를 사방으로 튕겨내며 땅을 후비적거리는 뿌리는 멀쩡한 나무에서 볼 만한 꼴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