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182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73)
블러디 데몬 메이든.
그 외형은 인간의 소녀를 닮았고 체구조차 작아 결코 2미터를 넘지 않는 키, 가느다란 몸매를 얇은 가죽으로 감싼 듯한 모습이었다. 다만 어깨에 견갑처럼 굵직한 발톱을 올려놓은 기묘한 날개가 등에 불룩 달려 있어 매우 이질적인데, 그 또한 깔끔하게 접힌 채라 얼핏 보면 치렁거리는 목도리나 치마의 한 자락인가 싶을 뿐이었다. 그나마 매끈한 꼬리와 머리에 돋은 커다란 한 쌍의 뿔이 인간과 괴리된 존재임을 확실하게 주장하는 듯했다.
그러나 막상 그 형체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결코 인간일 리가 없고 제대로 된 생명체가 아니란 것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뿔과 턱 사이의 얼굴이 박리(剝離)되며 가면처럼 벗겨졌다. 그렇다고 가죽을 벗긴 근육과 뼈가 드러나지는 않았다. 텅 빈 채였고 한없이 깊은 구멍이 뚜껑이 열렸다는 듯이 드러날 뿐이었다. 그 구멍의 안쪽은 암석이 꿀렁꿀렁, 물렁물렁한 듯한 질감을 머금고 한없이 깊이 뚫려 있는데, 눈으로 봐서는 이미 뒤통수를 뚫고 지나갔을 듯했다. 그러나 블러디 데몬메이든이 뿔을 흔들며 주변을 살피듯이 고개를 돌릴 때, 그 머리의 뒷부분은 뿔과 가늘고 섬세한 머리카락만이 살랑거리는 채로 얼굴 자리를 차지한 깊은 구멍 따위는 전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기괴한 형상을 남긴 채로 떨어져 나온 얼굴은 연기를 흘려내며 둥실둥실 떠다니고 이리저리 둘러보는 듯하다가 한쪽으로 입을 열며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 입이 다시 다물린 때는 멀리 수풀 사이로 지나가던 사슴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은 다음이었다.
가면 같은 얼굴로부터, 원래 속살이 붙어 있어야 할 부분으로부터 모락모락 피어나던 연기가 피와 살을 엮어내며 긴 끈처럼 변했고 밧줄처럼 사슴을 목 줄기부터 휘감았다. 사슴이 몸부림치며, 춤추는 산맥에서 사는 짐승답게 칼날 같은 뿔을 휘두르고 주변의 나무, 바위에 몸을 내던져 부딪히고 긁어댔지만 얼굴은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매우 작은 소란은 결국 사슴이 쓰러진 다음에 끝났다. 그리고 사슴의 몸이 부풀고 뒤틀리며 변화했으니…….
앞발이 손가락을 내밀며 앞다리가 팔의 형태로 변화했다.
그 손이 목덜미에 매달린 얼굴을, 가면을 집어 들고 사슴의 길쭉한 주둥이에 걸치듯이 얹고 눌렀다. 사슴의 머리에 인간 소녀의 얼굴이 들러붙었고, 마치 사슴 머리가죽을 얹은 듯한 몰골이 되었다. 그다음에 일어서는 사슴은 두 발로 섰고, 뒤뚱거리며 그 몸통을 온전한 두발짐승처럼 변태(變態)하며 텅 빈 얼굴로 주시하는 데몬메이든을 향해 다가갔다.
얼굴 뚜껑이 사라져 텅 빈 구멍을 흔들며 다가오는 쪽을 주시하는 듯한데, 두 발로 걷는 몰골이 된 사슴이 가속하며 구멍 안으로 머리를 들이댔다. 그 머리에 붙은 가면 같은 얼굴을 데몬메이든이 한 손을 내밀어 마주하며 잡았다. 그 순간, 변형된 사슴이 오그라들고 핏물과 핏덩이가 되어 얼굴 안쪽의 속살처럼 들러붙어 작은 덩어리로 압축되었다. 그 얼굴을 다시 구멍 앞에 끼워 맞추며, 살짝 어긋난 틈새 사이로 핏물로 이뤄진 금이 간 듯한 모습으로 데몬메이든이 한 걸음 내디뎠다.
부서진 돌쩌귀가 발끝에 채여 무너졌고, 마지막 남아 있던 봉인의 마력이 흩어졌다. 봉인의 영역에서 벗어난 순간, 핏빛이 꿈틀거리며 아직 덜 맞춰진 듯한 얼굴과 구멍의 틈새에서 흘러내렸고 데몬메이든의 온몸에 핏빛 가죽이 뭉클거리며 문신처럼 덧칠되듯 돋아났다.
블러디 데몬메이든, 마침내 봉인에서 벗어나서 첫 사냥과 식사를 끝낸 재앙이 오래전에 자신이 침공해서 무너뜨린 도시가 남긴 폐허를 둘러보는데…… 바람이 칼날처럼 몰려왔다.
사각, 서거걱.
데몬메이든의 발아래, 주변의 무너진 벽의 흔적이 썰려 나갔다.
벼락처럼 날개를 펼쳤다가 오므려 몸을 감싼 데몬메이든은 상처 입지 않았다.
갸웃하며 데몬메이든이 바위조차 베어내는 칼날 같은 바람의 근원을 향해 몸을 돌렸다.
우람한 체구의 수사슴 한 마리가 날카로운 뿔가지를 뒤흔들며 콧김을 뿜어내며 발굽으로 디딘 자리를 긁어대고 있었다. 그 가지 친 뿔이 예리하게 흔들릴 때마다 바람이 솟아났고 사슴의 몸을 휘감은 잔광(殘光)이 피어나며 칼날처럼 쏘아져 나오고 있었다.
마수(魔獸), 춤추는 산맥에 적응해서 마력을 품고 다루는 능력을 지닌 짐승이 된 사슴은 단순히 마력을 다루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생명까지 쥐어짜 내 오러의 특성마저 지닌 바람칼날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이런 정황에 대해 블러디 데몬메이든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 듯,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걸음걸이를 내디디며 사뿐거리는 몸짓으로 사슴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새로운 먹잇감이 제 발로 와줬으니 그저 잡아먹을 뿐이라는 것처럼.
사슴이 더욱 짙은 잔광을 몸에 두르며 뿔을 내밀고 돌격하는 자세를 취하니, 바람칼날은 송곳이 된 회오리가 되어 몰아닥쳤다. 이제 휩쓸린 돌멩이는 순식간에 갈려 나갔고 먼지티끌이 되어 흩어졌다.
데몬메이든이 허공을 짚듯이 손을 내밀었다.
그 손끝에 자수정(紫水晶)처럼 박힌 손톱의 테두리를 따라 핏빛 이슬이 맺혀졌다.
핏빛줄기가 실금처럼 허공에 그어졌고, 바람과 사슴을 가로질렀다.
사슴의 뿔, 머리, 목이 실금이 지나간 자취를 따르듯이 절단되어 떨궈졌다.
바람은 뒤늦게 멈춰졌다.
피보라가 더 늦게 치솟으며 바람결의 여운을 따라 안개처럼 퍼졌다.
블러디 데몬메이든이 가면 같은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고 사냥한 먹잇감을 향해 사뿐사뿐 몇 걸음 더 나아가는데…… 갑자기 뿔을 치켜올리며 발을 멈췄다. 핏빛이 맴도는 구멍 같은 눈길이 허공을 노려봤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는 듯한 기묘한 태도, 그리고 허공을 울리는 사념(思念)이 그런 블러디 데몬메이든에 닿았다.
―최강의 몬스터 로드가 널 사냥해주마!
사아…… 부드러운 바람이 데몬메이든의 몸에 걸쳐진 핏빛에 닿았다.
도전적이고 맹렬한 사념이 한층 더 짙게 데몬메이든에게 닥쳐왔다.
데몬메이든은 핏빛의 그림자를 드리운 채로 웃었다.
오래전에 자신을 가둔 자, 그와 똑같은 눈길로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어떤 자가 감히 도전해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과거의 일을 완연히 잊은 듯!
짓밟고 짓이기고 잡아먹고 사육(飼育)하며 핏빛으로 세상을 물들이던 데몬메이든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처럼!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자들이 몰려와서 자신을 가뒀는가, 그자들이 결국은 데몬메이든을 가뒀지만 단 한 마리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도전자라니.
데몬메이든은 자신의 기원(起源)을 되새기며 날아올랐다.
사슴이 뿌리던 회오리바람보다 더 날카로운 흔적이 데몬메이든이 디뎠던 자리에 소용돌이무늬로 남겨졌다.
데몬메이든이 새로운 핏빛을 그려내기 위해 도전자를 향해 날아갈 때, 그 한쪽의 풍경 너머로는 예전에 없던 성벽이 멀리 보이고 있었다. 그 방향을 흘깃하는 데몬메이든의 입가에 핏빛이 어른거리는 웃음이 새로 그어졌다.
오랜 세월만큼, 새로운 먹잇감이 가득한 세상이잖은가.
과거를 잊은 바보를 정리하고 빨리 새 먹잇감의 맛을 보려는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데몬메이든은 여전히 자극적인 사념을 쫓아 더 빠르게 날았다.
그리고 숲의 한복판, 훤히 트인 빈터에 우뚝 선 ‘어떤 것’과 눈이 마주쳤다.
콰아앙.
숲의 나무가 부러지고 튕겨나갔다.
제대로 착지를 못 하고 고속 비행을 하다가 추락한 데몬메이든이 구른 탓이었다.
온몸에 핏빛 무늬로부터 핏방울을 피워올리며 데몬메이든은 두 손으로 바닥을 내리찍으며 날개로 땅을 짚어 겨우 다시 일어서야 했다.
구른 자리가 움푹 파여 길쭉한 구덩이처럼 데몬메이든의 뒤편에 새겨졌다.
부들부들, 날개를 떨며 얼굴이 금세 튀어나와 구멍을 드러낼 듯한 몸짓과 함께 데몬메이든은 조금 전에 눈이 마주쳤던 존재를 다시 바라봤다.
그 존재는 여린 핏빛이 일렁이는 그림자, 블러디 데몬메이든의 형태를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환영을 입에 물고 우걱우걱 씹고 있었다. 그 기묘한 뼈뿐인 입이 움직일 때마다 블러디 데몬메이든이 몸을 움찔거렸다. 마치 저기 씹히고 있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처럼!
캬아아아!
얼굴이 들썩이며 잔혹한 괴성이 쏘아졌다.
메아리가 닿는 곳이 으스러지며 소리가 충격파로 번진 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블러디 데몬메이든의 핏빛 가득한 포효 앞에서도 그 영체(靈體)를 갈취하고 있는 존재, 뿔수리의 문장이 이뤄낸 몬스터 로드 ‘칼로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누가 한숨을 쉬었냐는 듯, 뼈로 덮인 ‘칼로드’의 몸은 우람한 날개조차 그대로 늘어뜨린 채로 충격파 따위가 언제 있었냐는 듯이 무덤덤할 뿐이었다. 그 주변은 완전히 부서지며 갈려 나가고 먼지가 폭풍처럼 쓸고 지나가는데도!
그 광경을 확인한 블러디 데몬메이든의 핏빛이 응축되며 태도가 바뀌었다.
뿔과 날개, 기본적인 체형과 구조가 왠지 서로 닮았지만 한쪽은 건장한 사내이고 한쪽은 여린 소녀인 둘이 마주한 채로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칼로드’가 물끄러미 쏘아내는 눈빛, 켈베로스의 눈에서 일렁이는 광채에 블러디 데몬메이든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겠다고 의지를 드러내는 듯했다.
뼈로 된 ‘칼로드’의 입매가 뒤틀렸다.
블러디 데몬메이든이 두 손을 활짝 펼쳤다.
자수정 손톱이 새로 핏방울을 머금으며 실금처럼 길게 뻗어 나왔다.
이를 보는 ‘칼로드’ 역시 가만히 한 손을 펼치니, 블러드 네일이 자연스럽게 살랑거리며 그 손끝에서 치솟았다.
* * *
“같은 손톱……?”
투란은 의아함을 담아 중얼거렸다.
드라고니아는 스윽 고개를 돌리며 카이람을, 하이람을 향해 대답을 원하는 눈길을 보냈다. 로그람의 시조 왕과 궁정 마도사는 굳은 표정인 채로 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검푸른 비늘의 아칸이 입을 열어 단정한 말투로 대신 대답한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애초에 악마의 손톱이라 불렸고, 데몬메이든이라면 악마란 호칭에 모자람이 없으니까요.”
“넌 어떻게 보는 건데?”
드라고니아가 황당하다는 듯, 말의 내용보다 어째서 드라코눔의 아칸이 이 낯선 곳에서 마법의 시야를 공유하고 있느냐고 따지듯이 소리쳤다. 너무 높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낮지도 않은 그 외침에 검푸른 비늘이 잠깐 움찔거렸지만 담담한 아칸의 단정한 대답은 그대로 이어지듯 나올 뿐이었다.
“그야, 왕께서 내게도 허용해주시고 있으니까요. 이 자리에 누구라도, 저 비전에 마력을 접촉하기만 하면 모두 볼 수 있잖습니까?”
슬쩍 손끝으로 허공에 드리워진 환영 판화를 가리키며 하는 말이었다.
드라고니이가 ‘엥?’ 하는 소리를 낼 때, 투란이 ‘어?’ 하는 소리로 응하며 하이람을 흘겨봤다.
하이람은 ‘왜? 몰랐어?’란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점잖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과연 드라코눔의 아칸이시군요. 보는 그대로 파악해내다니.”
이에 투란이 드라고니아를 가느다란 눈길로 흘겨보며 코웃음을 쳤다.
붉은 비늘을 푸닥거리며 곤두세우면서 드라고니아가 투덜거린다.
“아칸이라고 바로 알 일이 아닌데…….”
“예, 수십 년 전의 드라코눔이었다면 아칸일지라도 이런 고대마법의 술식을 봤다고 알 수는 없었을 겁니다. 불미스러운 사고 이후에 고대 왕국의 마법이 어린 궁정복원에 보탬이 되려 노력한 때문에 얼마 전부터 가능해졌지요.”
검푸른 비늘의 아칸은 담담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드라고니아가 재빨리 입을 다문 것은 ‘불미스러운 사고’란 말이 나온 때부터였다.
투란이 한숨을 쉬며 웅얼거린다.
“범인이 따로 있구만.”
굳이 캐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드라고니아가 광분한 사건, 그때 에테온에 입힌 피해에 대해 드라코눔이 책임지고 도우려 하다가 고대 왕국의 마도술식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는 뜻이니까.
카이람이 민망함을 품고 외면하는 드라고니아를 흘깃하다가 나직하게 묻는다.
“에테온의 새 왕조가 그 도움을 그렇게 깊이 받아들였나?”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불의한 사고였고 책임지는 것은 에테온의 왕족이 당연히 할 일이라고요. 그저 드라코눔이 지원한 물자를 예의 때문에 받아주신 정도가 고작이었습니다.”
씁쓸한 아칸의 대답이었다.
드라고니아가 조금 더 웅크린 몸짓으로 투란에게 바싹 붙으려는 듯이 슬금슬금 다가갔다. 아홉 ‘그릇’과 아홉 심장이 이룬 경계에 닿고는 바로 멈췄어야 했지만…… 문득 알아차린 듯이 드라고니아는 허공의 판화에 집중을 하며 이 자리의 일을 몰라라 하는 태도를 꾸미고 있었다.
그리고 그 꾸민 태도가 농담이 아니란 듯이 하나의 환영을 짚으며 드라고니아가 몇 마디 바로 꺼내기도 했다.
“저건 어쩌려고? 짝짓기라도 시키게?”
카이람과 하이람이 흠칫하며 그 판화에 담긴 ‘재앙’을 주목했다.
꽤 얌전히 한자리에서 오래 머물 듯한 낌새라 다른 곳처럼 격렬하지 않은 모습으로 우두커니 홀로 놓인 듯한 ‘재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