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183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74)
보랏빛 덩어리는 갑자기 풀려나서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다시 느낄 수 없었던 세계를 느끼게 된 상황을 받아들이는 일에 전혀 고민하지도 않았다.
그저 본능에 따라 주변으로 살살 몸을 흘리며 퍼져 나갈 뿐이었다.
포동포동하고 푸근했던 덩어리는 퍼져 나가면서 걸쭉하고 찐득한 진흙처럼 눌어붙으며 사물(事物)을 변화시켰다. 처음에는 진홍(眞紅)으로 덧칠하고 짙게 배어들었다 싶으면 원래의 보랏빛 물씬 풍겨나는 색채로 변하는 과정은 사물에 따라 빠르거나 늦거나 차이가 있었지만 진홍빛이 칠해진 다음에 그 변화는 반드시 일어났다.
돌도, 나무도, 벌레도…… 간혹 나무에 앉아 있다가 발목부터 진홍빛이 입혀진 작은 새도, 벌레를 노리던 쥐도 모두 보랏빛으로.
그렇게 보랏빛이 된 다음에 사물은 본래의 움직임을 잃고 느릿해지며 포동포동, 찐득해지며 서서히 푸근하게 퍼진 형태로 변화를 마무리했다. 그 변화 이후에도 이전처럼, 새가 새처럼 날고 벌레가 벌레처럼 기며 나무는 바람결에 이파리와 가지를 흔들려는 듯했지만 변해버린 형질 탓에 괴상한 결과만 드러낼 뿐이었다. 그리고 분별되어 있던 사물은 서로 닿으면 엉겨 붙으며 결국에는 보랏빛 덩어리가 되어 뭉개질 뿐이었다.
그렇게 보랏빛 덩어리가 그 크기를, 부피를 확장해나가는 앞길을 막은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다 느닷없이 보랏빛 앞에 금빛의 꿀렁거리는 담장이 돋아나니, 보랏빛 덩어리의 팽창이 멈춰지며 움찔움찔 담장을 향해 조심스럽게 곁가지를 뻗어내는 묘한 행태가 드러나고 있었다.
한데 그 곁가지 줄기가 꿀렁거리는 금빛과 닿는 순간, 보랏빛 덩어리 안쪽으로 금색의 실금이 벼락처럼 그물처럼 뻗어 나갔다.
단숨에 보랏빛 덩어리 한쪽에 금색 실금이 뒤엉켜 반짝이는 영역이 생겨난 것.
그 영역은 작았지만 보랏빛 덩어리 전체를 출렁거리게 했다.
그 출렁거림의 결말은 굉장히 과격했다.
조심스럽게 곁가지 줄기 하나를 내뻗었던 보랏빛 덩어리가 부글거리며 잔뜩 부풀고 한층 더 포동포동, 찐득찐득, 물컹물컹한 혹을 드러냈고 혹마다 잔가지가 가득 돋은 형태를 드러냈다. 가시 같던 잔가지가 단번에 뻗어 나오며 금빛의 꿀렁거림 사이로 꽂혀 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금빛의 꿀렁임, 보랏빛의 포동한 물컹임이 뒤섞이며 출렁거리는 채로 커다란 덩어리처럼 섞이는 광경은 그 부드러운 형태를 잊게 할 정도로 보는 이를 오싹하게 하는 묘한 분위기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이 광경을 볼 수 있는 인간, 짐승은 주변에 없었다.
산속 깊은 곳, 황량한 골짜기 안의 작은 숲에 놓인 아담한 기둥을 깨고 나온 보랏빛 덩어리가 이미 주변을 온통 자기 색으로 물들인 다음이었으니까.
그래도 높은 하늘에서 시전되는 고대의 마법, ‘왕의 눈’은 이를 확실하게 포착하고 있기는 했다.
그 때문에 드라고니아는 말문을 열 수 있었다.
―저건 어쩌려고? 짝짓기라도 시키게?
그러고도 말을 계속했다.
―괜찮은 거냐? 저래도 되는 거야?
작은 소란이 곧 드라고니아가 낸 이야기의 뒤를 이어 ‘왕의 눈’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에게서 터져 나오고 있기도 했다.
금빛과 보랏빛이 뒤엉킨 괴상한 풍경에는 전혀 들리지 않는 저편에서.
* * *
“바이올렛 정크한테 뭔 짓을 하는 거냐!”
노여움이 섞인 경악을 담아 카이람이 외치고 있었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려서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광경에 대해 얼마나 놀랐는지, 카이람은 그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전혀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나마 하이람이 가볍게 손짓하며 카이람 주변으로 마력의 바람을 둘러 진정시키지 않았다면 튀어올라 단숨에 투란의 목이라도 조를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미안, 저게 뭔지 간략하게라도 설명해주지 않겠나?”
차분한 하이람의 목소리는 투란보다는 카이람을 진정시키기 위한 듯했다.
투란도 그냥 얼렁뚱땅 넘기지 않고 대답은 했다.
“로열젤리 슬러그.”
하지만 덜렁 이름만 던져놓고는 드라고니아를 향해 가볍게 턱짓할 뿐이었다.
웅크린 몸짓을 하다가 쏟아져 오는 카이람, 하이람과 아칸의 눈길을 느낀 드라고니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창 바쁜 시늉을 하는 투란을 대신해 조금 길게 이야기를 해야 했다.
“얼마 전에 엘더 헌터의 의뢰로 함께 사냥한 몬스터랍니다. 독특한 능력도 대단하지만 로드 오브 몬스터의 특성을 지니기도 해서…… 저 바이올렛 정크에 물들고 오염될 일은 없어요. 애초에 몬스터 로드의 일부이기도 하고…….”
“그 말썽꾼들이랑 엮였…… 젠장!”
카이람이 눈가를 살짝 떨며 으르렁거리려다가 말을 멈추고 말았다.
그래도 엘더 헌터들에 대해 그다지 좋은 인상을 품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히 드러난 셈인데, 하이람이 바로 몇 마디 더한다.
“가끔 몬스터 사냥에 지나치게 몰두해서 더 큰 희생을 막는다고 작은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짓을 하고는 하니까. 몬스터 격퇴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도 따지지도 않는 일이 잦기도 했고…… 그래, 알고 있다네. 지금은 옛날이랑 또 다르긴 하겠지.”
드라고니아는 투란이 듣지 못한 척, 모르는 척하는 태도인 것을 보며 한숨처럼 대신 대꾸를 해야 했다.
“늘 엘더일 리는 없으니까요.”
엘더, 그 안에 담긴 원로라는 의미와 함께 연장자, 보다 상위의 존재란 점을 짚으면서도 그 뿌리가 결국은 젊고 어린 시절을 거쳐 단련되었다는 뜻도 섞인 것을 짚는 말이었다. 더불어 드라고니아는 흘깃 카이람과 하이람, 아칸을 동시에 흘겨보는 눈빛도 흘려보냈다. 괜히 더 말 시키지 말라는 듯, 지금 따질 일이 아니니까 나중에 따로 묻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듯.
투란 주변을 맴도는 판화, 그 판화마다 엿볼 수 있는 ‘재앙’들의 상태가 시시각각(時時刻刻) 변화하고 있기에 넌지시 짚는 드라고니아의 태도는 금방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도 검푸른 비늘의 아칸은 공감과 함께 짚을 바가 있다는 듯이 살짝 말문을 열어 몇 마디 흘렸다.
“애초에 저걸 어떻게 봉인하신 겁니까?”
하지만 과거의 위업을 감탄하거나 궁금해하는 말투가 전혀 아니었다.
카이람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지만 하이람은 금방 그 말투에 담긴 의도를 알았다는 듯이 투란을 향해 말한다.
“무한순환(無限循環)의 미궁옥(迷宮獄)이라는 장난감이 있단다. 마력을 순환시키면 쉼 없이 내부구조를 변환시키는 훈련용 장난감이지. 아주 특별한 소재를 이용해서 그걸 만들었고, 그 안으로 저 녀석을 유인해 밀어 넣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녀석의 잔재가 전혀 남지 않도록 밀어 넣은 다음에 외부를 밀봉하고 잠갔다. 위상차원의 변이를 덧씌워놓았기에 왕국이 멸망해서 마력공급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결코 세상에 다시 나타날 일이 없다고 여겼어. 그 미궁옥은 꽤 특수한 소재라서 망가졌다 해도 아직 고쳐 쓸 수 있는 잔재가 남아 있을 거란다. 그때 사용한 방법은…….”
마법의 손짓과 함께 투란은 바이올렛 정크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 위로 그 봉인의 세세한 부분이 덧붙여져 오는 것을 느꼈다.
‘아하, 이렇게 단순한…… 척만 하는 거잖아!’
꽤 간단한 방법이란 생각이 순식간에 투란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바이올렛 정크 역시 단순한 능력인 듯했지만 그 특성의 위험은 로열젤리 슬러그에 못지않을 지경이었는데, 그걸 봉인한 방법도 아주 간단하게 들리지만 정작 실행단계에 이르면 세계를 갈아 넣은 것처럼 어렵다!
―야, 정말로 로열젤리 슬러그로 갈아 삼킬 작정이냐? 저건 정수라 할지라도 엄청나게 위험할 것 같은데? 단색의 오염, 접촉만으로 전염시켜 형질변이를 일으키는 특성은 본능으로 어떻게 억제되는 것이 아니잖아?
드라고니아가 투란에게 예상한 근심을 그대로 전해오고 있었다.
그래서 투란도 조금 진지하게 대답해야 했다.
‘미궁옥이 뭐야? 난 본 기억이 없는데?’
―만화경이 시각적인 변이를 보여주는 것처럼 마력을 머금은 소재가 계속해서 선형, 비선형, 대칭, 비대칭을 반복하며 내부구조를 변화시키도록 만든 장난감이야. 그 내부구조의 단면이 미궁과 닮았다고, 갇히면 벗어날 수 없을 지하뇌옥 같다고 해서 미궁옥이라 부르지. 고대 마도사들이 마력제어와 함께 그 변화하는 미궁을 탐지하며 기억하는 훈련을 했었어. 말 그대로 어린 마도사를 위한 장난감이지.
‘아, 대강 알겠어.’
설명과 함께 전해진 심상 속의 미궁옥, 그 형태를 보며 투란은 알아차렸다.
더불어 특수한 소재로 왕가의 마력에 호응하도록 제작된 미궁옥, 바이올렛 정크를 봉인했던 아티팩트의 잔해 또한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어이없을 정도로 아티팩트의 잔해를 빨리 찾아낸 셈인데, 바이올렛 정크가 그 자리에서 전혀 벗어나질 않은 탓이었다. 봉인의 미궁에서 해방된 다음에도 바이올렛 정크는 자신을 가뒀던 마법의 도구를 물들이겠노라고 덮어 누르고 있는 채로 주변으로 확장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주변이 온통 진홍빛으로, 보랏빛으로 차분히 변화하는 와중에도 옛날 마도구의 잔해는 여전히 덤덤하게 본래의 색채…… 광택 없이 시커먼 채로 부드러운 질감을 뽐내고 있었다. 그 위로 포동포동, 물렁한 보랏빛 덩어리가 얹어지기는 했지만 그 흑색(黑色)의 특이함은 보랏빛 바탕 속에서 도도하게 존재를 과시하는 것처럼 또렷했다.
몇 조각으로 분리된 듯했지만 한자리에 모여 있는, 다시 끼워 맞추기만 하면 원래의 마도구로 되돌아갈 듯한 자태를 확인하고 투란은 로열젤리 슬러그를 보다 맹렬하게 유동시키며 압축했다.
―로열젤리는 오염 안 되고 제대로 버티는 거 맞냐?
드라고니아가 금빛 속으로 서서히 스며드는 진홍빛을 파악하며 묻고 있었다.
피식, 옅은 웃음을 머금으며 투란이 대답한다.
‘금방 오염되고 전혀 버티질 않잖아. 보면 알면서, 뭘.’
―젠장, 그러니까 괜찮냐고!
‘어, 상관없어. 완전히 보라색이 되더라도 내 뜻대로 움직일 거야. 이대로 삼키면 문장 내의 모든 정수가 전부 보라색이 될 수도 있을걸? 그래도 내 뜻대로 움직이겠지만…….’
―그게 어디가 괜찮은 거냐! 결국 재앙을 일으킨단 말이잖아! 삼키지 마!
‘뭘 걱정하냐? 내게 작은 돌이 있잖아. 보라 돌이 되어도 언제든 원형으로 복귀할 수 있는 작은 돌이라고. 뭐, 보라 돌도 안 될 것 같다만…… 아, 이제 정리되었네. 그럼, 이제 마도구랑 바이올렛 정크를 다 회수해볼까!’
―뭐……?
* * *
꿀렁거리는 금빛 깊은 곳에 투명하고 얇은 막이 있었다.
돌로 이뤄진 작은 막은 금빛의 꿀렁거림 속으로 파고든 진홍색을 그대로 담았고, 금빛과 어우러지는 진홍색이 보라색을 띠도록 도왔다. 그리고 이뤄지는 삼색의 소용돌이, 주변을 가볍게 삼키는 늪의 바탕, 밑바닥이 되어 주기도 했다.
그 삼색의 늪은 아주 작았고, 금색의 꿀렁거리는 요동 곳곳에서 생겨났다.
핏빛의 동그라미가 그 늪에서 피어난 것은 금색의 꿀렁거림이 보라색 덩어리를 모두 덮은 다음이었다. 기본적인 부피의 격차가 큰 탓에 아직 너무 작은 보라색 덩어리의 영역을 꿀렁거리는 금색이 보자기처럼 감싸는 시간이 길지 않은 셈이었다.
그리고 삼색의 늪, 핏빛 동그라미가 생겨난 삼색의 늪이 보랏빛 덩어리를 향해 몰려나갔다. 투명하고 얇은 막을 바탕으로 그려진 동그라미가 핏빛으로 맴돌며 보랏빛 덩어리를 오염시키는 듯한 광경이었다.
어찌 보면 핏빛의 톱니가 삼색을 품고 순수한 보랏빛의 영역을 압축시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오염의 끝은 일 미터가 안 되는 시커먼 조각, 원래 모서리가 둥글게 깎인 육면체였으니 크게 금이 가며 조각나 있는 석공예품이었다. 자연스럽지 않은 원과 소용돌이, 많은 호선으로 이뤄진 표면을 지닌 석공예품은 꿀렁이는 요동을 따라 다시 원래의 형태를 기억하듯 맞물렸고 스며드는 로그람의 마력에 서서히 호응하며 본래의 기능을 미약하게나마 드러냈다.
그 부서진 마법은 금방 뒤틀림을 이뤄냈고 보랏빛 덩어리를 자르고 쪼개며 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보랏빛 덩어리는 갈라진 틈새로 더 짙고 많은 보랏빛을 흘려내고 있었으니, 마치 마도구 안에 담겨 있다가 새 나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찌 보면 마도구가 보랏빛 덩어리의 모체(母體)가 아닐까 싶기도 한 상태였다.
그런 상태의 마도구에 삼색의 늪이 핏빛 동그라미를 머금고 몰려들어 닿으니, 마도구가 투명하게 물들다가 부서진다!
* * *
―투란, 저건…….
드라고니아가 움찔하며 속삭였다.
‘그래, 그런 것 같지?’
투란도 가만히 그 속삭임에 동의했다.
검푸른 비늘의 아칸은 둘이 주고받은 속삭임을 엿듣기라도 한 듯, 혹은 카이람과 하이람을 향해 확인하는 듯한 말을 꺼내고 있었다.
“마도구마저 이미 전염된 상태였습니까?”
카이람이 신음했고, 하이람은 씁쓸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