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19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9)
사각, 사각.
발목에서 허벅지를 타고 올라오는 덩굴줄기는 섬세하게 투란의 살갗을 긁었다. 줄기를 따라 살짝 돋은 잔가시는 날카롭지 않고 적절하게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만을 알릴 정도로 부드러웠다.
‘그래, 기다려. 잠시만…….’
투란은 오러에 의지를 실었다.
온몸에서 흐르는 오러가 뿌리에서 뻗어 온 덩굴줄기를 타고 흘러갔고, 빗줄기는 점차 얇고 가늘어졌다.
악마의 심장으로부터 흘러 나가, 몬스터 엠블럼의 고유 마력을 잔뜩 실은 줄기들이 고요하게 투란의 의지에 따르는 것이 느껴졌다. 빗줄기의 가늘어지는 풍경 속에 하늘의 구름이 서서히 밝아지는 광경이 보였다.
얼굴에 흐르는 빗방울, 오러를 두드리며 소모시키는 독성.
가만히 선 채로 투란은 드레이크의 ‘삶’을, 자신에게 각인된 그 시작과 끝맺음을 다시 한 번 관통하며 느꼈다. 드레이크의 ‘삶’, 그 길고 긴 세월은 투란이 살아온 시간을 아주 짧게 느끼게 할 정도였다.
‘기억을 되새긴 적이 없고, 더듬지도 않아. 그저 새겨 두기만 할 뿐.’
그러나 드레이크는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단 한 번도 되새기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흘러가게 두었고, 자신의 본능에 따라 ‘존재’해 왔다. 조급하지도 않았고, 서두르지도 않았다. 때가 되면 스스로를 낳아 준 어미, 어버이처럼 다음 계승자를 낳고 꺼져 간다는 숙명조차도 그냥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일 뿐이었다. 오롯하게 오직 자신의 본능에 의해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느낄 뿐이었다. 그 본능을 통해 느끼고, 행동할 뿐이었다.
그래도 때로는 격노하고, 때로는 환희하고…….
문득 투란은 사람인 자신을 돌아봐야 했다.
‘나도…… 되새기지 않고, 더듬지 않았잖아. 그냥 잊고 넘어가잖아.’
드레이크는 그 본능에 따라 ‘삶’을 새겨 두지만, 투란은 소소하고 자잘한 일을 쓱쓱 넘어가며 잊어 왔다. 그 순간에 중요하다 여겼던 일도,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 ‘어어, 그랬었나?’ 하면서 훌렁 넘겨 버렸다.
몬스터 로드가 된 다음에는 조금 달라졌을까?
“바보가 칼을 쥐면 똑똑해진다던? 약골이 방패를 들면 튼튼해지고? 몬스터를 삼킨다면, 그 몸통이 바위처럼 튼튼해질 수는 있지. 하지만 대가리도 더 돌덩이가 되는 수가 있거든!”
앞뒤가 꼬인 말이었다.
뜻도 없고, 그 말을 지껄인 이는 그저 누군가에게 욕설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투란은 그때 갸웃했다, 저게 대체 뭔 소리인가 하고.
자신이 멍청해서 못 알아듣는가 했다.
이제 다시 생각해 보니, 아마 그 말을 떠든 녀석도 자기가 뭔 말을 하는지 몰랐을 것이다. 어디선가 들었던 말을 욕하면서 꺼내려 했는데, 혀가 꼬이고 생각이 꼬여서 앞뒤 없이 마구 토해 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는 대체 어떤 말이었을까?
‘칼을 들든 방패를 들든, 어떤 몬스터를 삼키더라도 나일 뿐이지. 내가 멍청하면 내 칼도 내 방패도 멍청하고, 내가 바보짓을 하면 나와 하나가 된 몬스터 역시 바보짓을 한다.’
투란은 생각을 정리하며, 단편적으로 흘려들었던 이야기도 정리해 봤다.
뭔가 말이 되는 것 같잖은가?
……아니면 말고.
“풋, 하하하.”
드레이크의 ‘삶’이 주는 깊은 인상 속에서 다시 투란은 사람으로서 웃었다.
드레이크가 ‘삶’을 시작한 광경, 그 뒤로 알을 낳아 품을 때까지의 시간이 다시 한 번 투란의 마음을 채우고 넘쳐흘렀다. 온갖 바보짓, 이상한 경험, 그 속에서 드레이크는 자신을 다듬고 고쳐 왔다. 때에 따라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오로지 경험을 통해 몸에 새겨 넣은 것이다. 생각은 아예 없는 듯했다.
‘그리고 여기서 쓰러졌고…… 나를, 몬스터 로드를 만났다.’
이 또한 드레이크는 생각보다 본능에 따라 행동한 것뿐이었다.
새끼를 지켜야 하는 의무, 책임도 본능에 따라 느꼈으며 본능에 따라 분노를 드러냈을 뿐이다. 그 때문에 쓰러졌고, 죽어 가야 했다. 그 죽음이 서서히 조여들어 모든 절망의 끝이 찾아들 때, 그가 끼어들었고 하나가 되었다.
후우웁!
투란의 입가에서 거센 숨결이 들락였다.
빗방울이 서서히 잦아들었고, 밝아졌던 구름은 조금씩 흐려지며 사라져 갔다.
더불어 투란의 오러도 소모를 통해 약화되고 있었다.
그럴수록 주변에 모여드는 덩굴줄기는 쌓여 갔다.
투란은 망설임을 버렸다.
드레이크의 ‘삶’을 통해서 사람으로 살아온 자신의 시간을 돌이켜 볼 수 있었다. 별로 다른 것 없었다. 투란 또한 그렇게 그 순간마다 닥쳐온 것만을 놓고 생각하고, 몸으로 떼워 오지 않았던가? 그 생각이란 것이 딱히 드레이크의 본능보다 뛰어나지도 않았다. 드레이크가 바보짓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교정했다면 투란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 상황들을 겪으며 다음에는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더할 뿐이었다.
물론 그런 어제의 생각은 오늘이 되면 잊은 채였고!
‘……그래서 엉망진창.’
간단한 생각이 결론이었다.
자신에 대한 차가운 비웃음이 불쑥 투란의 입가에 피어났다.
너무 멍청해서, 드레이크처럼 온갖 바보짓을 해도 보살펴 주는 어버이도 곁에 없는 채로 온갖 괴상한 짓을 되풀이하면서 지냈다.
몬스터 로드가 되기 전이든, 되고 나서든!
“애들은 뒹굴면서 크는 거지.”
샤오콴 마을의 심술쟁이 어른들이 애들을 보면 귀찮아하며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었다. 이제는 그 말이 그냥 헛소리라는 것을 투란은 깨달았다. 제대로 가르쳐 줄 마음도, 그럴 능력도 되지 않으니까 그저 그 자리를 피하기 위해 내뱉은 헛소리에 불과했다.
물론 애들을 가르치겠다고 나선 작자들도 제대로 가르칠 능력은 거의 없었고!
‘거참, 황당한 환경이기는 하네.’
실실 새는 웃음은 투란이 거쳐 온 모든 것을 비웃는 듯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곧 차분하고 담담한 표정 속에서 지워졌다.
‘키린, 많이 답답했겠군요.’
엉망진창으로, 오러 몽거를 떡하니 두른 채로 그 앞에 나타났잖나.
거기에 키린이 하는 말의 대부분을 그게 뭔 소린가 하고 눈만 껌벅댔고, 열심히 처먹기만 했다!
“크크큭…….”
참으려 해도 참을 수 없는 웃음이 새 나왔다.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로 듣던 전설의 왕자님 앞에서 대체 무슨 꼴을 보였는가!
드레이크가 철없이 저지르고 다닌 바보짓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런 투란을 향해 키린은 끈질기게 이야기했고, 다듬어 주려 했으며, 자신의 일생을 뒤바꿨다 할 수 있는 몬스터까지 넘겨줬다. 키린 자신보다 투란에게 더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웃음은 한숨으로 변해 갔고, 투란은 눈을 감으며 생각을 멈췄다.
드레이크의 ‘삶’을 되새기는 것도 멈추고, 소년의 삶을 돌이키는 것도 멈췄다.
살갗에 닿던 빗살이 멈추고, 서서히 햇살이 느껴졌다.
투란은 눈을 뜨고, 어린 드레이크를 봤다.
이 작은 섬에 뒹굴고 있는 다른 녀석들과 다르게 아직 어린것인데도 부식을 견뎌 내며 그나마 절반 이상의 온전한 형체를 유지하고 있다니, 대견하고 자랑스러우면서도 서글펐다.
‘두고 갈 수 없지.’
투란은 자신에게 ‘삶’을 모조리 넘긴 드레이크라면 어찌했을까, 분명히 느낄 수 있었고 깨닫고 있었다. 어버이, 어미를 잃었을 때처럼, 몇 날 며칠…… 몇 달을 곁에 머물렀을 테고, 이렇게 두고 가지 않았을 것이다.
천천히 투란의 마음이 몬스터 엠블럼 ‘천칭의 문장’에 집중되었다.
오러를 휘감은 채로, 투란의 가슴에서 온전한 형상을 가진 문장이 꿈틀거렸다.
하얀 톱니 고리가 불쑥 튀어나왔고, 투란은 느릿하게 손을 올려 받았다.
팽팽하게 손바닥에서 맴도는 톱니 고리를 내밀면서 투란의 빈손이 어린 드레이크의 살점을 헤집었다. 부식을 버티는 싱싱한 목덜미, 아직 생기가 맴도는 듯한 살점 위로 하얀 톱니 고리가 파고들었다.
화아아아.
하얀 불길이 어린 드레이크의 속살 속에서 번져 갔고, 어린 드레이크는 곧 다채로운 광채를 뿌리는 투명한 형상으로 변했다.
붉은 채광이 일렁이는 톱니 고리가 또렷하게 흩어져 가는 어린 드레이크의 형상 속에서 번뜩거리며 부유했다. 톱니 고리는 투란의 손길이 내밀어지자, 바로 그 손바닥으로 날아들었다.
천천히 분홍색 맥동을 일으키는 고리 속의 붉은 광채를 보며, 투란이 중얼거림을 토해 낸다.
“나는…… 몬스터 로드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드레이크의 포효가 반박하는 기분이 바로 찾아왔다.
결코 자신을 잊지 말라는 듯했다.
투란의 입술이 고요하게 움직였고, 자신을 향해 다음 말을 잇는다.
“나는 드레이크의 ‘삶’을 지닌, 사람이다.”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투란의 손이 가슴에 닿았다.
어린 드레이크의 정수를 끌어모은 톱니 고리가 그대로 ‘천칭의 문장’과 맞물려 돌며 사라졌다.
투란의 마음이 바로 문장 속 풍경, 자신의 심상을 향했다.
* * *
보이드, 다른 자의 것이 아닌 투란 자신만의 공허.
키린이 이야기했을 때, 그게 뭐지 하며 어리둥절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분명히 겪었고 어느 정도 써먹고도 있었으면서,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천칭’, 이 풍경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의 형상을 휘감은 이 허공…….
‘이게 나의 보이드라니.’
생각은 키린에게 물려받은 문자질을 통해 다듬어졌다.
어딘가에 써 놓을 수 있다면, 돌에다 새긴 것처럼 또박또박 박아 놨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신경 써야 할 일은 그게 아니었다.
마음을 가다듬으며, 투란은 천천히 톱니바퀴의 탑을 통찰했다.
그 안을 관통하며 스며드는 에센스…… 드레이크, 그 어린 것의 정수를 맞이했다.
‘천칭’의 정상에서 피어나던 빛의 아지랑이가 잦아들었고 기둥의 정상을 채우고 있던 난간을 만들던 원반, 원형이 톱니바퀴인 저울접시 위가 비워졌다. 사방의 풍경처럼 아무것도 없는 허공만 남겨 둔 채로.
어린 드레이크의 정수가 탑을 쌓은 톱니바퀴의 중심을 관통하고 그 마지막에 열린 고리를 넘어섰을 때, ‘천칭’의 정상은 텅 빈 채로 이를 맞이했다. 탑을 쌓은 톱니바퀴는 열렸던 중심을 완전히 닫으며 더 놓은 곳을 향해 치솟듯이 멀어졌다.
몬스터 에센스는 뭉클거렸고, 작은 빛의 거품 막을 만들며 구슬을 이루듯이 웅크러들었다.
투란의 마음이 그 구슬에 다가갔고, 그 ‘형상’을 느꼈다.
거품 막 위로는 빙글거리는 톱니 고리의 환영이 무수히 나타났다 사라지면서 서로 맞물려 도는 무늬를 만들고 지웠다. 그 속에는 작고 어린 드레이크의 형상이 똘똘 뭉친 꼴로 바들거리며 담긴 채였다.
천천히, ‘천칭’의 축이 밀려 올라왔다.
저울접시의 중심에서 가늘고 긴, 흐릿한 빛의 실이 꼬여가는 꼴로 느리게 솟아나왔다. 그 빛의 실 가닥 끝은 느릿하게 일렁이는 구슬에 닿았고, 환영 속의 톱니바퀴와 이어졌다.
투란은 빛의 실을 이룬 것이 미세하고, 아주 작은 톱니바퀴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맞물린 순간, 환영이 실체가 되고 극단적으로 미세한 톱니바퀴로 분화했다.
맞물린 톱니바퀴가 서로를 긁으며 돌았다.
알에서 갓 깨어난 듯한 드레이크의 형상이 선명하게 저울 접시의 위편에 구현되었다. 그리고 곧 산산이 흩어지는 것처럼 흘러내리면서 빛의 실을 굵게 휘감으며 저울 접시에 내려섰고, 스며들었다.
‘좋아, 특별한 자리를 만들자.’
투란은 자신에게 속삭였다.
저 아래에서 어슬렁거리는 고르고니아, 스테노아처럼 독특한 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다는 작은 갈망을 그대로 드러내며!
키이이이이!
천칭의 축을 휘감으며 흐르는, 묘한 발톱 자국이 새겨졌다.
흘러 내려가는 형상 속에서 작은 드레이크의 앞발이 튀어나와 너무 멀리 내려가기 싫다는 듯, 저항이라도 하는 모습이었다.
웃음이 투란의 마음에서 피어났고, 투란은 즐겁게 이를 관찰했다.
어린 드레이크는 분명하게 투란의 특별한 소망에 호응하고 있었다.
‘그래, 보금자리…… 가장 좋아하는 그걸로!’
투란은 기억해 냈다.
드레이크의 ‘삶’, 그 끝맺음에 가까운 시간 속에서 어린 새끼가 좋아하던 보금자리의 형태, 꾸며 대던 모습.
카르르르.
발톱 자국이 금색 비늘처럼 번들거렸고, 그 안에 자리 잡아 금색으로 물든 미세한 톱니바퀴들이 격렬하게 맴돌았다. 그리고 갓 태어난 어린 드레이크를 휘감은 반쪽짜리 알의 형상이 나타나 그 속에 어리고 어린 드레이크의 형상을 품었다.
끼이?
투란은 울어 대는 새끼의 소리를 회상했고, ‘들었다’.
‘……좋아. 기다려.’
* * *
뚜득, 투드득.
투란의 몸이 가볍게 꿈틀했고, 뼈마디 소리는 온몸에서 제멋대로 울렸다.
사르륵, 사륵.
가슴에서 사라진 검은 무늬를 알아차렸다는 듯이 뿌리줄기가 넝쿨 가닥을 부풀리면서 뱀 가죽을 들어 올린 채 허리춤으로 기어들었다. 어서 귀환하고, 제자리를 찾고 싶다는 듯!
투란의 손이 심장의 맥동을 찾듯 가슴에 올려졌다.
악마의 심장이 형성되어,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