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192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83)
“왕으로서 예의를 갖춘 사절에게 응답을…….”
카이람이 높였던 목소리는 금방 잦아들었다.
인사를 마친 아칸 프로디운도 카이람처럼 크게 떠진 눈으로 투란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보석을 집고 있는 투란의 손, 그 손의 새끼손가락이 올라가며 허공에 안개가 어린 물줄기를 흘려내고 있잖은가. 살아 있는 듯이 움직이는 그 물줄기를 향해 투란은 아예 말도 걸고 있었다.
“휘드라곤, 약속을 지킬 때인가 봐. 잠깐 잊을 뻔했는데…….”
허공에서 맴도는 물줄기가 소용돌이의 형상을 갖췄다.
소용돌이의 위쪽, 끝자락이 갈라지며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튀어나오며 슬그머니 아칸의 머리와 닮은꼴을 만들어냈다. 드라코눔의 아칸을 흉내 낸 머리처럼 보이는 까닭은 작은 물줄기 끝이 꾸며내는 뿔의 형태 때문이었다. 한꺼번에 대여섯이나 되는 머리를 꾸미고 까닥거리는 짓은 어딘가 개구쟁이 같았다.
살짝 웃음을 머금은 투란이 휘드라곤에게 속삭인다.
“네키아에게 전해줘, 내 이름 알았다고. 음, 셰이아처럼 셋 다 골라도 되고 마음에 드는 것 하나만 골라도 된다고 전해줘야 하는데…… 잘할 수 있어?”
휘드라곤의 여러 머리가 한꺼번에 눈길을 돌리며 아칸 프로디운을 향했다.
의아해진 투란이 다시 눈길을 프로디운에게 옮겼다.
프로디운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눈길에 응하며 입을 열다.
“네키아…… 혹시 춤추는 산맥 깊은 곳에서 정화의 업(業)을 감당하고 있는 물결왕의 아이를 말씀하신 것입니까?”
“알아요?”
투란은 프로디운의 날개 안에서 맴도는 물결, 뒤늦게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정령의 기척이 웅장하게 피어나는 중이고 전혀 감출 생각도 없다는 점을 깨달으며 짧게 되물어야 했다.
드라고니아가 그런 투란을 보며 질렸는데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 있었다. 덩달아 흔들거리는 황금빛 뿔이 반짝이는 꼴에 투란은 뒷발꿈치로 슬쩍 드라고니아의 정강이를 내질러봤지만, 철벽보다 더 강한 듯한 붉은 비늘 가죽은 보통 사람의 힘으로는 닿은 기별도 안 가는 모양이었다!
프로디운의 시야에 이런 광경이 훤히 담기고 있었지만, 드라코눔의 아칸은 담담하게 꺼낸 이야기를 잇고 있었다. 아예 그런 소소한 장난질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것처럼.
“물결왕의 동반자이기에 알고 있습니다, 물결왕은 폐하께서 네키아의 동반자인가 궁금해합니다만,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동반자? 어, 계약한 것이냐는 말이죠? 어, 뭐…… 할 뻔했는데 내가 이름을 몰라서 못했죠. 그랬더니 얘를, 휘드라곤을 맡기더라고요. 이름을 알게 되면 정식으로 계약할 수 있다고, 그때까지 기다려주겠다고요. 음, 그런데…… 물결왕과 계약한 아칸이라면…… 아칸 프록세티아에게서 계약을 전승받았다는 셀크로네이…… 씨가 아닌가요?”
투란은 어정쩡한 말투로 주섬주섬 되묻고 있었다.
카이람은 눈살을 찌푸린 채로, 하이람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이게 무슨 일인가 하며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셀크로네이란 이름이 나오니 프로디운의 눈길이 슬쩍 드라고니아를 스쳐 갔다.
드라고니아가 그 눈길을 외면하며 시침 떼는 꼴인 것을 투란이 간파할 때, 프로디운이 다시 우아한 인사와 함께 말한다.
“셀크로네이 운탈 프로디카움, 드라코눔의 아칸으로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복잡하고 긴 호칭을 싫어하는 분들이 많아서 드라코눔 외부에서 활동할 때는 프로디운이란 간결한 이명(異名)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람크로마 앙헬 벨케랄드에게서 저의 본명을 들으셨겠지요?”
“네.”
투란은 불쑥 ‘누구요?’라고 튀어나올 뻔한 물음을 억지로 누르고, ‘그람크로마 앙헬 벨케랄드’란 이름을 열심히 뇌리에 새겨넣으면서 드라고니아를 흘깃하며 착실하게 까닥거리는 고갯짓과 함께 대답했다.
그 고갯짓, 눈짓, 몸짓을 보며 프로디운은 한층 더 차분하게…… 마치 심연이 소용돌이를 치며 그 위세를 과시하는 것처럼 말을 잇는다.
“그람벨크, 그 이명은 들으셨던가요?”
“아뇨!”
재빠르게 투란이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대꾸했다.
프로디운은 검푸른 비늘 가죽을 꼬는 것처럼 입꼬리를 올리며 ‘나는 지금 명백하게 웃고 있다’고 과시하는 표정으로 다시 이어 말했다.
“에테온으로 파견될 당시, 그가 고른 이명입니다. 지금은 그저 광분의 드라고니아로만 알려지고 말았지만…….”
“앙헬이란 이름을 불리면 왜 성질낸대요? 아, 드라코눔 출신 할배가 그렇게 불렀더니 막 성질을 부리는데…….”
투란은 냉큼 그동안의 호기심을 입에 담아 뿜어내고 있었다.
더불어 투란은 재빨리 손을 휘둘러 드라고니아를 침묵시키는 중이기도 했다. 아주 잠깐이겠지만 그 정도면 저 검푸른 아칸의 폭로가 끝날 테니까!
프로디운의 올라갔던 입꼬리가 가늘게 떨리며 살짝 어색한 눈매와 함께 헛기침하는 말투로, 하지만 투란이 억지로 쥐어짜 낸 틈을 채워 주는 대답이 나온다.
“아명(兒名)이거든요. 철없던 시절을 잊지 말라고, 드라코눔의 일족에게는 어린 시절의 이름을 성년이 된 다음에도 붙여 놓는답니다. 어린 시절의 한심한 언행을 되새기라고 놀리고 싶을 때 그리 부르는 관습이 있지요. 영문도 모르는 누가 부른다 해도 듣는 입장에서는…… 으흠! 폐하, 그보다 네키아에게 전언 보내는 일을 도울 수 있습니다만.”
드라고니아가 억센 숨결과 함께 이빨을 드러냈고 투란이 두른 마력을 물리치며 본격적으로 으르렁거리겠다는 의도를 드러내는 순간, 프로디운의 이야기는 방향을 홱 틀어버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여담을 치우고 본론으로 넘어간 셈!
투란도 이에 빠르게 대응했다,
“우와, 정말요? 어떻게요?”
이 몇 마디에 호응한 것처럼 휘드라곤이 투란의 팔뚝을 휘감으며 물결로 이뤄진 팔찌에서 여러 가닥의 머리를 뒤틀며 보채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때문에 드라고니아는 으르렁거림을 입 밖으로 토해 내기 난감해졌다.
프로디운이 가만히 한 손을 내밀며, 날개 아래에서 끌어낸 물줄기로 커다란 물 구슬을 만들어 그 손 위에 올려놓고 말한다.
“정령의 문이랍니다, 이 세상 어딘가로, 가야 할 곳을 아는 정령을 보내는 통로를 열어 주지요. 물결왕의 문은 물이 있는 곳이라면,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곳이라면 곧바로 정령을 보낼 수 있습니다.”
“정령만?”
살짝 기대를 담아 투란이 물었다.
프로디운이 미묘한 쓴웃음을 짓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한다.
“네, 거의 정령만 지날 수 있는 문이고 통로이지요.”
흥, 하는 작은 소리가 드라고니아의 코끝을 스쳐 갔지만 투란도 프로디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대신 한쪽에서 구경하는 듯했던 카이람이 툴툴거리듯이 몇 마디 한다.
“정령과 동조하고 동화한 존재라면 넘어갈 수 있지. 전이 마법 중에서 상당히 안정적으로 꼽히기는 해. 조건만 갖춘다면 말이지만.”
혀를 차며 카이람을 흘깃한 하이람은 의아한 듯이 곁눈질하는 투란을 향해 몇 마디 더 보태 말한다.
“에아본 왕국의 비전마법이었단다. 이제는 잊힌 마법이지.”
“아…… 그렇겠군요.”
투란도 금방 납득했다.
그리고 투란의 눈길은 조금 날카롭게 프로디운을 향했다.
“휘드라곤을 보낸다고 전언을 중간에 가로채거나 엿보는 일은 없겠죠?”
“없습니다.”
즉답이 강렬하게 튀어나왔다.
드라고니아가 더 못 참겠다는 듯이 투란의 뒤통수에 손을 얹는 시늉을 하며 말한다.
“그런 바보 같은 소리는 하질 말라고! 정령의 문은 그저 정령을 넘겨줄 뿐이란 말이야! 휘드라곤의 전언은 너와의 계약이라 깨지는 순간 휘드라곤이 증발해서 사라질 뿐이잖아!”
“어, 그렇게 되냐? 음…….”
키득거리는 웃음을 억누르며 고개를 살짝 까닥여 드라고니아의 손을 피하는 시늉을 한 투란이었다. 그러고 나서 투란은 본론으로 넘어간다는 듯이 프로디운을 바라보며 말한다.
“오래 기다리게 했으니, 도와준다면 기꺼이 도움을 받도록 하죠!”
보석을 유니콘홀드가 형상화된 목걸이 위로 얹고 나서 투란은 휘드라곤이 감긴 손까지 내밀고 있었다.
프로디운 역시 더 기다릴 필요 없다는 듯이 가볍게 손짓했고 물 구슬이 앞으로 둥실거리며 밀려나 허공에서 맴돌게 했다. 곧 물 구슬의 한복판이 소용돌이를 일으켰고 깊이 파여 들어가며 투란을 향해 구멍을 열었다.
휘드라곤이 곧바로 구멍으로 쏘아지듯 날아들었다.
소용돌이에 휩쓸린 휘드라곤의 형상은 금방 구슬처럼 응축되며 구멍 깊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구슬이 어느 순간 수축을 멈추고 확장하며 소용돌이를 무시하듯 그 한복판에 둥실둥실 흘러 나왔고, 투란을 향해 거꾸로 쏘아졌다.
투란은 내밀었던 손 그대로 구슬을 마주했는데, 구슬이 투란의 손에 닿자마자 찰랑이며 손의 형상부터 꾸며내고 있었다. 명백하게 용의 머리가 여럿 달린 회오리를 닮은 뱀의 형상……이 아니라 사람, 여리고 가녀린 사람의 손이었다.
“네키아?”
투란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사이에 프로디운이 내밀었던 커다란 물 구슬, 그 안에서 튀어나온 조금 작은 물 구슬이 동시에 변화하고 있었다. 투란의 손에 닿은 작은 물 구슬에서는 갓난아기 크기의 소녀가, 프로디운이 내민 커다란 물 구슬에서는 로브를 깊이 둘러쓴 채로 손을 내밀고 있는 마법사 같은 형상이 생겨난 것이다.
물결로 이뤄진 소녀는 투란의 손을 맞잡았고, 아칸 프로디운의 앞에 생겨난 마법사는 자신의 앞에 조금 오그라든 물의 구슬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는 묘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가 따지기도 전에 투란은 심혼(心魂)을 울리며 스며드는 정령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었다.
―네키아, 네헬룬디아의 아이…… 네헬리아가 투란, 아카인 툴 로그람과 맺어지기를 원합니다. 받아들일 거죠?
장난스럽기도 하고 오랜 기다림이 원망스럽다고 탓하는 듯도 한 말투였다.
쓴웃음을 지으면서 투란은 느끼고 알 수 있었다.
네키아는 셰이아와는 또 다른 성격이잖은가.
그림자 정령이 투란의 심혼이 지닌 모든 면을 원했다면, 네키아는 간략하게 투란이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쪽을 선호한다고 밝히는 셈이었다. 그러면서도 투란을 확실히 인지하고 통찰하며 기꺼이 함께하겠노라고 선언하는 것이기도 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 그래, 나랑 계약하자.”
담담하게 투란은 소리 내서 말했다.
달칵, 순간적으로 투란은 자신과 네키아 사이에 뭔가 맞물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정령의 마력이 스며들어 뒤섞이는 고유 마력.
“투란, 이제 아쿠아랑 다른 아이들 도와도 돼요?”
새로운 감각에 투란이 어리둥절할 때, 네키아가 불쑥 묻고 있었다.
“응? 다른…… 아쿠아? 왜?”
“그 아이들은 투란의 의지에서 태어나서 자연을 배운 아이들이잖아요. 자연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맡아야 할 기둥을 그냥 힘으로 굴리고 있거든요. 워낙 힘이 세서 그렇지, 투란의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기둥 안에서 벌써 소모되어 몇 년은 없는 것처럼 희미해졌을걸요.”
엄청나게 빠른 속삭임이었고 그 의미가 가슴을 푹푹 찌르듯이 투란의 마음에 닿고 있었다.
네키아가 짚은 바대로 로그람 왕국의 정령주는 사대 정령수, 드라코눔의 비전으로 태어난 스피릿 아티팩트를 받아들여 겨우 본래의 기능을 되찾는 중이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된 탓인가 꽤나 버벅인다고 여겨졌는데, 네키아는 그것이 윌 라이트를 바탕으로 제작된 정령수인 탓이라고 하다니?
투란으로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엉뚱한 일이었다.
“그냥 힘으로 버티라고 두면 어떻게 되는데?”
“수십 년 동안 비틀림을 방출하게 될 것이다. 그 비틀림에서 태어난 일그러진 정령이 춤추는 산맥이란 환경에서 성장하면, 홍수를 몰아 범람을 일으키는 물의 괴물이 되겠지.”
투란이 호기심에 꺼낸 물음에 대한 대답은 네키아가 아니라 프로디운의 앞에 선 마법사의 형상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이에 투란이 ‘아, 그런가?’라고 맹하니 웅얼거릴 때 카이람이 먼저 진절머리 난다는 듯이 외친다.
“천재지변의 재앙이잖아! 빨리 도와주라고 해!”
그사이에 잠깐 깊이 생각한 듯, 하이람도 몇 마디 하고 있었다.
“일그러진 정령이라면 타고난 속성을 꼭 유지한다고 할 수 없겠고, 물에서 태어나 불처럼 번지거나 토사(土砂)를 몰고 다니는 경우라면 도시를 파묻을 수도 있으려나?”
이는 맹하니 흘려듣던 투란을 황당하게 했다.
“아니, 꼭 그렇게까지 심하게…….”
“폐하, 궁정 마도사님의 염려는 현실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불쑥 끼어든 프로디운의 말이 투란의 입을 닫게 했다.
드라고니아가 뭐라 할지 당혹스러워하는 투란의 뒤통수에 대고 속삭이는 척하면서 살짝 높인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이야, 옛날에 가둔 재앙은 다 털어냈으니 이제 한 수십 년…… 늦어도 백 년 뒤까지 심심하지 않을 새로운 재앙을 준비해 두는 거야? 그것참, 재앙을 좋아하는 왕자님일세.”
‘닥쳐!’
차마 소리 내지 못하고 투란은 마음속으로나마 으르렁거려야 했다.
물결이 찰랑이는 소리에 담긴 몇 마디가 이 상황에 불쑥 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