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194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85)
‘아, 시끄러!’
덥석,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내밀어 불타는 알을 받아 내면서 투란이 투덜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투란은 익숙한 그람벨크의 잔소리를 지우며 마음을 덮어 오는 깊은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람벨크…… 그람크로마 앙헬 벨케랄드……?
‘응? 누구? 어?’
투란은 자신이 아주 이상한 영역 안에 놓인 것을 깨달았다.
어스름하고 짙은 풍경, 해가 뜨는 것인가 지는 것인가 아주 애매하게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고 너무나도 짙은 탓에 곳곳에 보랏빛마저 번져 가는 기괴한 풍경 속에서 허리를 반쯤 땅에 파묻은 거인, 불꽃으로 이뤄진 탓에 절대로 인간의 흉상(胸像)이라고는 할 수 없는 괴이한 거인과 마주 보고 있잖은가!
한숨부터 나올 상황인 것을 느끼며 투란은 물어야 했다.
“너…… 음, 그대는?”
막말로 나갈 뻔한 것을 추슬러 적당한 말투로.
불꽃의 거인이 고개를 숙였다.
흉상, 허리 위로 짤막하게 나온 채라 해도 불꽃의 거인은 이미 4, 5미터를 훌쩍 넘어 6, 7미터는 되는 신장이기에 내려다봐야 했다. 그런 거인의 눈동자는 밝았지만 햇빛과는 전혀 다른, 짙은 어스름 속에서 버티기 위해 열심히 장작을 쌓고 한껏 피워 올린 모닥불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하다. 나는 세계의 여명에서 태어나 세계의 황혼에 저물어야 하는 숙명의 불꽃, 어둠이 찾아오고 물러나는 어스름과 함께하기에 녹스의 이름마저 붙은 불길. 라그나녹스. 그대는?
“투란…… 카이람, 아카인.”
투란은 쓴웃음과 함께 마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전하며 소리 내야 했다.
‘모닥불의 왕’이란 별명도 붙은 이 고대의 불꽃 정령이 어째서인가 다른 목적으로 계약하려는 느낌이 솔솔 풍겨 나는 때문이었다. 마치 투란과 계약해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어 한다는, 살짝 마지못한 듯 묘한 느낌이었다.
라그나녹스의 입가가 이글거리며 휘었다.
―카이람, 켈 로그람. 투란, 라그나녹스는 그대의 진정한 맹우(盟友)로서 함께할 것이다. 심려하지 마라, 정령의 세계에서 라그나녹스가 불꽃왕의 위엄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진실이나, 그대의 세계에서 발휘할 수 있는 위용이라면 불꽃왕이 오히려 라그나녹스에 이르지 못하니!
“고마워, 그런데…… 무슨 다른 볼일인 거야?”
슬그머니 말을 돌리며 신뢰를 외치는 고대의 불꽃 정령을 향해 투란은 곧바로 캐묻고 있었다.
라그나녹스는 이 물음을 피하지 않았다.
―그람벨크, 감히 나를 무시하고 내뺀 놈! 이 건방진 용족의 애송이! 그 버르장머리를 고쳐 놔야 하지 않겠는가?
입만 벙긋벙긋, 투란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드라코눔의 정령술, 그 비전을 통해 사대의 정령수를 제작하고 키워 봤기에 투란은 알고 있었다.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면 정령이 개성을 갖춘 자아를 형성한다는 것은 지난하다는 사실을.
네키아처럼 터무니없이 특별하고 특수한 상황이라면 모를까, 직접 만들고 키운 녀석들도 잠깐 한눈팔면 반쯤 몽롱한 짐승 같은 버릇이 나오는 지경인데 자연에서 태어난 정령이 대체 어떻게 이토록 강력한 자아를 지닐 수가 있는가?
―라그나녹스는 세계의 여명에서 태어났으니까. 세계의 황혼이 이르러 파멸의 시작을 겪을 때까지 라그나녹스는 변화하고 성장한다. 그 변화와 성장을 올곧게 이끌어 줘야 하는 것이 드라코눔의 아칸이 지닌 의무였다.
“어, 그래. 알았어, 뭔 얘기인가 느낌이 오네.”
제대로 이해할 일은 아니라고 판단하며, 그럼에도 심술궂은 기분으로 투란은 실실 대답을 흘렸다.
화르륵, 이글이글!
라그나녹스의 거대한 흉상이 미끄러지며 투란을 덮치듯 씌워졌다.
불꽃의 거인, 땅에 박힌 거대한 흉상 속에서 투란은 몸과 마음으로 정령의 불꽃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어스름한 풍경이 사라졌다.
깜박깜박.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 사이에 투란은 오른손을 휘감으며 스며든 불꽃의 자취를 느낄 수 있었다. 더불어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프로디운, 카이람, 하이람의 모습에 대답해 줄 필요도.
하지만 그 무엇보다 투란은 장렬하게 마음을 울리는 드라고니아, 그람벨크의 외침부터 들어야 했다. 뇌리를 울리니 귀 막아도 소용없는 외침이었기 때문이다.
‘어라?’
오른손으로 스며든 불꽃이 어깨를 타고 가슴으로, ‘천칭’에까지 닿는 순간부터 문장의 풍경 한쪽이 새롭게 변화하는 광경이 보이잖는가.
―허억? 이 미친 정령이! 넌 몬스터 아냐! 도대체 어딜……!
―태워 주마, 이 버릇없는 용족의 애송이! 감히 나를 두고 불꽃왕이 더 좋아? 얻을 기회가 있다면 불꽃왕이야? 그러고는 미쳐 버렸다고? 이 멍청한 놈! 널 그냥 굽고 태워서 억지로 제약해 현현하지 않은 나의 자비를 그따위로 보답해!
라그나녹스는 그람벨크에게 원한을 쏟아 내고 있었다.
‘아니, 지금 당장 그러는 거였어?’
어이없어 투란이 희미한 불꽃의 자취가 맴도는 손등을 바라보는데, 그 불꽃의 붉은 가닥 위로 물결이 덧씌워졌다.
네키아의 손길이었다.
투란이 살짝 눈을 돌리니 바로 얼굴 곁에 붙은 네키아의 머리가 보였다.
웃고 있는 네키아의 표정은 꽤나 재미있어하는 듯했다.
분명히 투란의 심상 속을 함께 엿본 까닭인 것 같은데, 왜 웃는 것일까?
투란은 의아함과 동시에 네키아로부터 장난스러운 답을 전해 받을 수 있었다. 라그나녹스가 보이는 감정, 네키아는 그 감정적인 언행이 너무나 흥미롭고 재미있는 것이다!
“어, 프로디운…….”
투란은 손을 터는 시늉을 하며, 자신의 심상 속에서 벌어지는 황당한 광경을 모르는 척했다. 그리고 드라코눔의 아칸, 어째서인가 오래 함께한 드라고니아 그람벨크보다 더 믿음직스러운 아칸, 진짜 아칸이라고 느껴지는 물결왕의 동반자인 프로디운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데 그 물음이 완성되기도 전에 프로디운은 투란의 기대에 응하듯이 이미 답을 꺼내 주고 있었다.
“태고의 정령, 세계의 여명부터 함께했기에 가히 신령(神靈)이라고까지 일컬어질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 때문에 신들의 권속 혹은 신의 일족으로 불리기도 했답니다. 그래서 진명(眞名)조차 이명(異名), 별명(別名)의 영향이 누적되어 변화하고 말았다더군요. 그 현현한 자태를 놓고 만들어진 가장 일반적인 통칭이 모닥불의 왕이온데, 모닥불가에 모여 앉아 떠들고 다투고 웃고 우는 이들의 정념(情念)마저 자신의 일부로 삼았기에 그리 불렸다 합니다. 하오니…….”
“관록 있는 감성을 지닌 어르신 정령이었군요.”
투란이 헛웃음과 함께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다.
드라고니아 그람벨크를 닦달하고 야단치는 꼴이 딱 어린아이 다그치는 할배가 아닌가. 어르신의 자태가 또렷한 까닭이 저절로 납득이 간다!
어쨌든 이제 그쪽보다 투란이 관심을 기울일 일은 따로 있기도 했다.
대이적이 마무리 지어졌고, 로그람의 마법도 이제 흔들림 없이 굳건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제 내려가도 되는 거죠?”
일단 이 자리에서 벗어난다는 목적을 담아 물어보는 투란이었다.
그 의미가 조금 잘못 전해졌던 모양이다.
카이람이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끼고 답하잖나!
“성수(聖樹)의 옥좌(玉座)로 가야지. 왕의 정무(政務)는 옥좌가 놓인 알현실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당연하겠지.”
“……네?”
솔직하게 ‘뭔 정무?’라고 나올 소리를 눈치껏 억누르며 투란은 의아함을 드러냈다.
카이람이 로그람의 초대, 시조 왕의 위엄을 보이겠다는 듯이 다시 똑바로 투란을 마주 보며 뭐라 하려는데, 하이람이 재빠르게 먼저 나서서 투란 앞에 서며 말한다.
“보석의 완성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옥좌에 앉아 볼 필요가 있다. 느껴지지? 아직 완전히 맥동이 가라앉지 않았잖아? 제자리를 확인할 때까지 보석이 충동을 심어 주도록 되어 있거든. 알겠지?”
“그러네요.”
투란은 인정해야 했다.
이 보석은 단순히 혈통을 증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혈통을 계승하는 자가 제 의무를 다하는 것을 확인한다는 목적도 분명히 담겨 있었다.
왕의 그릇을 채우고 그 의무를 다한 다음, 여전히 살아있기에 왕으로서 올바른 자리에 오른다는 부분까지 보석은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왕가의 마법은 왕이 제대로 옥좌에 앉는 것을, 나중은 몰라도 최초의 한 번만큼은 반드시 확인하려 드는 것이다.
그냥 넘어갔다가는 어딜 가든 밤낮없이 보석이 열심히 맥동하며 그 의무를 알려줄 터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맥동이 강렬해지면서 주변을 시끄럽게 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므로 투란은 인정하고 옥좌에 잠깐 들러 볼 필요가 있었다.
“그럼 어디로?”
멀쩡한 별궁 한복판에서 치솟은 기둥 계단, 그 끝에서 뭔가 대이적의 발판으로 형성된 은밀한 곳이었다. 여기서 계단을 타고 내려가 이동한다는 것은 상식적이지만, 아무래도 카이람이나 하이람에게 그런 상식을 기대할 수는 없잖은가.
과연 투란의 기대대로 하이람이 손짓하며 말하고 있었다.
“계단을 재배치할 거야, 곧바로 내려갈 수 있도록…….”
손짓과 함께 올라섰던 바닥이 돌기 시작했다.
문득 투란은 기둥을 감싸고 있던 계단, 이 자리에 닿은 계단이 줄사다리처럼 흐느적거리며 아래쪽에 이어진 부분을 떼어내고 왕궁의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보석이 맥동하며 그 광경을, 궁전과 벽을 아무렇지도 않게 환영처럼 지나치며 어떤 장소로 이어 내려가는 계단의 풍경을 보여 준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움직이는 계단에서 화들짝 놀라 깡충거리며 뛰어오는 작고 하얀 여우가 있었다.
여우가 계단 끝에 이르러 뛰어오르는 순간, 프로디운이 살짝 자리를 옮겼다.
여우를 위해 길을 열어 주는 듯했고, 여우는 그 배려를 거침없이 받아들이며 질주해서 투란을 향해 뛰어오르고 있었다.
“어?”
품에 올라타는 여우를 받아 안으며 투란은 카이람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이 여우에 대해서 궁금했다.
영력을 가득 흘려내는 환수, 드라고니아 그람벨크가 그리 말했었다.
카이람을 따라 계단을 오르느라 바빠서 잠깐 잊고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이 녀석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카이람에게 물어야 할 듯하잖나? 카이람이 이끌었던 계단 위에 이런 여우가 있을 까닭이 대체 뭔가?
그런 투란의 눈길에 카이람이 팔짱을 풀고 머리를 긁적이며 슬그머니 다른 곳을 보는 시늉을 하면서 털어놓고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길다만, 간단히 말하자면 너를 위해 태어난 수호자야. 왕가의 마법으로 오래 축적하고 제련해 온 특수한 마력, 영력에 이른 그 마력을 기반으로 너와 함께 태어났지. 마도사의 관점에서는 환수라고 하는 모양이다만, 대대로 수호의 영수라 불렸다. 그래, 불리는 그대로 원래 네 곁에서 떠나지 않고 너의 성장을 지켜보며 돕는 역할을 부여받은 녀석이야. 하지만 그 의무에 실패한 채로 왕궁으로 귀환했고, 녀석이 머무를 수 있는 곳은 왕의 제단에 이어지는 계단뿐이었지. 네가 돌아왔으니, 녀석도 다시 본래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기는 했다만.”
“이름이 없어요?”
투란은 코를 킁킁거리며 들이대는 여우를 손으로 살짝 누르면서 물었다.
카이람이 흠칫하며 망설이는 듯할 때, 하이람이 손짓을 거두며 대답한다.
“아리아, 대마도사가 남긴 이계의 설화에 등장하는 영험한 마수의 이름을 부여했단다. 애초에 그 마수를 바탕으로 삼아서 여우의 형상이 된 것이도 했고.”
“아리아……?”
투란은 살짝 그 이름을 되뇌었다.
여우 아리아가 혀를 날름거리며 꼬리를 흔들었다.
그 순간 투란에게는 꼬리가 여러 겹으로 분화되었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보였다.
“자라면 꼬리가 여럿이 되나요?”
“아홉 꼬리의 여우라고 하더군.”
카이람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하이람이 투란에게 자리 잡은 계단을 손짓하며 보태 말한다.
“요정의 일족 사이에서도 대마도사의 설화는 널리 퍼졌지. 그렇다 보니 정말로 그 영향을 받은 듯한 여우가 태어나기도 한 모양이더군. 대부분 마수로 각성하는데, 요정의 일족과 교류해서 영수로 자각하는 일도 적지 않다는 소문이 있었어.”
투란이 문득 아빈가의 여우를 떠올리는데, 프로디운이 슬그머니 입을 열고 있었다.
“요정을 수호하는 영수가 여우인 경우는 꽤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표범이나 부엉이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여우를 수호자로 고른 경우도 꽤 된다더군요. 아주 특별한 힘을 지녔기에…….”
말과 함께 프로디운은 한 걸음 물러서는 시늉을 하며 계단을 바라보았다.
그 태도를 보며 하이람이 투란에게 말한다.
“드라코눔의 아칸이 긴급하게 찾아오시기는 했지만, 이 만남의 마무리는 알현실에서 치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왕이시여, 아칸 프로디운을 성수의 옥좌 앞으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다는 표정부터 나와 버렸지만, 투란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직 프로디운과는 할 말이 남아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