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195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86)
Chapter 238. 옥좌에서
옥좌 앞에 성수란 말이 왜 붙었는가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며 보이는 궁전의 한쪽 벽이 나무인데, 목재를 다듬어 판자를 쌓고 이은 나무 벽이 아니라 그냥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통으로 박힌 채였다.
나무의 밑동 쪽 줄기 하나가 썰려 그루터기를 빼꼼히 내밀었는데, 그 그루터기를 다듬어 앉을 자리를 만들어 뒀다. 그 자리가 바로 옥좌, 로그람 왕국의 왕이 앉는 성수의 옥좌인 것이다!
그리고 궁전 실내여야 할 알현실의 다른 세 방향은 성벽이었고 천장이 없었다.
성벽 너머로 높이 솟은 첨탑이 사방에 놓인 듯한데, 정작 알현실은 천장이 없고 소박하게 세 곳을 성채로 감싸고 거대한 나무에 기댄 풍경이라니…….
‘저 나무, 진짜야 허상이야?’
그 풍경 속에서 거대한 나무가 천장에 닿는 부분부터 흐릿해지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라지는 형상이었기에 투란은 의문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느 때처럼 드라고니아, 그람벨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만 좀 해, 이 미친 정령아! 지금 이런다고……!
―잘못을 뉘우치는 자세가 티끌만큼도 없구나, 어린것이!
아직도 별빛무리가 불길에 물든 광경만 펼쳐내며 툭탁거리는 것만 확실할 뿐.
그래서 투란은 계단 아래에 서자마자 하이람을 바라보고 옥좌가 빼꼼히 내밀어진 배경, 거대한 나무를 눈짓했다.
하이람이 쓴웃음과 함께 답한다.
“경계의 신목, 로그람의 성수를 일컫는 다른 이름이지. 성스러운 나무가 지닌 신령한 능력이 저런 광경을 펼쳐냈다. 반쯤 이 세상에 걸쳐 있지만 다른 세상으로 넘어간 모습이라고 해도 좋겠지. 그 다른 세상이 때로는 망자의 세계이고, 때로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이기도 하고…… 종잡을 수 없다만, 한쪽은 분명히 우리가 사는 세상이며 신목이 그 경계를 가르고 울타리 노릇을 해 준다는 점은 확실해. 신목의 울타리가 춤추는 산맥으로부터 퍼져 나오는 혼돈의 영향력까지 막아 주기에 우리는 이 나무를 발견하자마자 지켜 내기로 결의했단다. 로그람은…… 이 나무와 함께 시작한 왕국이었고.”
투란은 옥좌라는 그루터기를 바라봤다.
가만히 그 크기를 가늠하던 투란의 눈길이 스윽 카이람의 허리부터 아래쪽으로 훑어 내려가니, 카이람이 어이없다는 듯이 으르렁거린다.
“내 엉덩이 크기랑 맞췄을 리가 있냐! 넓고 편안해서 저기 올라가 누워 잤다고! 자기 전에 여기 모여서 회의도 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옥좌가 된 거야!”
“아, 네…….”
엉성하게 대답하며 투란은 작은 여우 아리아를 내려놓았다.
아리아는 투란의 품에서부터 계속 옥좌를 향해 킁킁거리더니, 내려놓자마자 투란의 다리를 물고 당기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어서 옥좌에 앉으라는 것처럼.
보석의 맥동이 미묘하게 빨라진 것을 느끼며 투란은 일단 옥좌라는 그루터기로 가서 슬그머니 엉덩이를 걸쳐 봤다. 보석의 맥동이 금방 차분해질까 했는데, 방향을 지닌 새로운 맥동이 피어나며 투란에게 깊숙이 제대로 앉으라고 으르렁거리지 않나!
“……누굴 닮아서 이렇게 까탈스럽냐.”
들으란 듯이 투덜거리면서 투란은 일단 옥좌 깊숙하게 몸을 밀어 넣었다.
그렇게 그루터기의 딱딱한 나무둥치에 몸이 완전히 얹혔다 싶은 순간, 투란의 몸을 덮쳐 오는 강렬한 맥동이 있었다. 보석과 호응하며, 진정한 왕이 옥좌에 올랐음을 알리는 맥동이 왕궁을 흔들었다.
“으와앗!”
투란은 엉겁결에 놀란 소리를 냈다.
맥동은 왕궁을 흔들고, 아직 비가 내리는 왕도를 누비며 왕국 전체를 향해 강렬한 파동이 되어 퍼져 나갔다. 흡사 맑은 물 위에 시커먼 잉크를 한 방울 떨궜는데 파문을 타고 번져가듯, 결국에는 맑은 물이 모조리 시커먼 잉크의 빛깔로 물들어 버릴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처럼 짙고 사납게 번지고 있었다!
움찔움찔, 투란은 카이람과 하이람이 옥좌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좌우로 늘어서서 지긋이 바라보는 광경을 확인하며 떨리는 몸을 추슬렀다.
“이거…… 정상적인 반응 맞아요?”
그러다가 겨우 묻는 말을 꺼냈다.
“그럴 리가 있냐.”
한숨처럼 카이람이 대답했고, 하이람이 보태 설명한다.
“특별해서야, 제물로 희생된 왕이 그 자리에 앉는 것은 아주 특별하니까. 카이람 이후에는 없었을 정도로 특별하지. 이제 겨우 두 번째 생긴 일이라고.”
“두 번째?”
투란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카이람을 보며 되뇌었다.
심장을 팍팍 뽑아서 그릇에 올려놓는 투란을 보고 식겁하고 놀란 분께서,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그런 일을 저질러 보셨다고? 그럼 그사이에 놀란 척한 것은 뭔가? 그냥 까마득한 후손을 놀리고 싶었나? 아니, 그보다 몬스터 로드도 아니면서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었는가? 저 ‘그릇’이 진짜 심장을 받는 사이에 대신 끼울 마법의 심장이라도 있었던가?
“무슨 마법으로?”
퍼득 떠오른 바를 투란이 바로 입으로 토해 물었다.
카이람이 픽 새는 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한다.
“오러 하트. 로그람 왕가의 비전인 오러의 기예야. 너라면 금방 해낼 수 있겠지. 어디서 배웠나 모르겠다만, 여섯 왕가에 전해지는 오러의 기본은 확실히 배운 모양이니까.”
“그렇군요.”
투란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키린이 가르쳐 준 오러의 다양한 비전, 이제 와서 돌아보니 키린은 필요한 것 이상으로 왕가의 예법이라든가 무투술을 잔뜩 새겨 넣어 줬다! 지금 당장 투란이 왕자로서 귀족들 앞에 서더라도 어리바리 여기선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는 상황은 절대로 나오지 않을 만큼!
그 강압적인 가르침의 각인 속에 오러를 이용해 거의 괴수를 형성한다 싶을 정도의 비전도 있었다. 날개라든가 손톱 따위의, 출중한 오러 윌더라면 왜 그딴 짓을 하냐 싶을 해괴한 재주까지!
그런데 그 비전이라면 빠져나간 심장을 대신할 오러의 심장도 만들 수 있을까?
벅벅, 투란은 맹하니 생각에 빠져들었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눈앞을 다시 바라봐야 했다.
지금은 어차피 알려 준다는 오러의 비술이나 비전을 탐구할 때가 아니다.
일단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거구를 슬그머니 일으켜 세우며 카이람과 하이람 너머로, 그 한복판을 채우듯이 자세를 잡고 뜨거운 눈길로 뭔가 호소하는 듯한 드라코눔의 아칸에게 물어야 했다.
“아칸 프로디운, 모닥불의 왕…….”
말을 꺼내자마자 투란의 마음에는 불쑥 미묘한 고민부터 찾아왔다.
라그나녹스, 그 이름은 정령의 진명이 아니던가?
함부로 널리 알리면 곤란한 것이 진명이라 했다.
그러니 별명인 모닥불의 왕이라 칭하는 것이 맞는 듯하긴 한데, 어째서인가 라그나녹스란 이름이 저절로 튀어나오려고 한다!
이 기묘한 충동은 대체……?
―그 이름은 널리 알려야 한다. 알릴수록 내가 강해진다.
갑작스럽게 묘한 몇 마디가 투란의 마음에 꽂혀 들었다.
‘엉? 뭐야, 그게?’
의문을 떠올리자마자 곧바로 투란의 뇌리에 답이 파고들었다.
모닥불의 왕의 진명은 라그나녹스가 전부가 아니다.
그 이름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변화했고, 그 일부가 라그나녹스였다.
세상에 알려질수록 정령에게 힘을 주는 이명, 아는 자들이 저절로 모닥불의 왕에게 경의를 표하게 되는 이름이었다.
‘나에게 이름 전부를 알려 준 것이 아니라고?’
―함께하는 시간이 쌓이면 저절로 알게 된다. 계약으로 새겨졌으나 세월을 거쳐 단련하고 소통함으로써 결속이 강해질 때, 그대는 나의 진정한 힘을 하나씩 일깨울 것이란 뜻이다.
한쪽으로는 투란에게 앎을 전하면서도 다른 한쪽으로는 여전히 그람벨크를 쥐어 패고 괴롭히는 중이다!
‘아하! 과연 어르신!’
쓴웃음과 함께 투란은 프로디운을 향한 말을 이어 나갔다.
“라그나, 신령족을 뜻하는 이름까지 붙은 라그나녹스는 드라코눔에서 물결왕 못지않은 중요한 정령이었잖아요? 큰 도움에 이어 그렇게나 중요한 정령이 이 춤추는 산맥을 떠도는 나랑 계약을 맺게 해 준 일은 정말 고맙지만, 역시 그건 나라는 몬스터 로드가 아니라 로그람의 왕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 아닌가요? 고대왕 가의 혈통을 잇는 왕이 아니면 드라코눔에서는 진짜 왕이 아니라고 아칸이 사절로 오는 일도 없다고…… 얼핏 그런 소문도 들었어요. 프로디운, 도대체 춤추는 산맥의 고대 왕국에 드라코눔이 뭘 원하는 거죠?”
호기심이 가득했지만 꽤나 진지하게 꺼낸 이야기였다.
한데 이는 투란에게만 궁금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카이람과 하이람이 묘하게 눈가를 찌푸리면서 프로디운을 바라보는데, ‘이 틈에 말하려는 것은 아니겠지?’라고 슬그머니 탓하는 낌새가 새 나오고 있잖나!
그 미묘한 압박 속에서 프로디운이 담담하게 말문을 열고 있었다.
“두 영령께서는 이미 알고 계신 일이지요. 오랫동안 드라코눔에서 춤추는 산맥에 자리 잡은 여섯 왕국에 청원하는 일이었으니까요. 드라코눔의 일족이 이 세상에 처음 이르렀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청원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게 뭔데요?”
두루두루 둘러가려는 말투를 느끼며 투란은 바로 짚어 달라고 물어야 했다.
카이람이 끄응,하고 조금 삐진 표정을 지었고, 하이람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투란도 알아야 할 일이니 말해도 된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 마지못한 허락을 확인한 프로디운이 조금 더 침착하고 담담하게 말을 잇는다.
“왕의 가호, 드라코눔의 일족에게 춤추는 산맥을 지키는 왕가의 가호를 부탁드려 왔습니다. 그 가호는 혼돈의 영향으로부터 일족을…….”
“가호하죠. 음, 허락? 승낙? 아닌가? 에잇, 몰라! 드라코눔의 일족을 가호한다! 아칸 프로디운의 청원 들어준다!”
―이 미친놈아! 하지 마!
―호쾌하군, 마음에 든다.
“응? 뭐여?”
“폐하?”
“하, 하, 핫.”
프로디운의 말을 자르고 투란이 되는대로 외치는 순간, 다양한 반응이 곧바로 투란에게 몰려왔다.
그람벨크는 오래 함께해 온 드라고니아답게 화들짝 놀라서 욕부터 했고, 그런 그람벨크를 불 지르고 패는 듯하던 라그나녹스는 굉장히 만족스럽다는 듯이 칭찬했다. 그사이에 카이람은 ‘뭐? 내가 잘못 들었지?’라고 놀랐고, 프로디운도 ‘진담이신가, 농담이신가?’ 의아함을 가득 드러내며 투란을 향해 눈을 끔벅거리는 중이었다.
그나마 하이람은 반쯤 짐작했다는 듯, 그래도 반쯤은 설마 했다는 듯이 웃음을 반쯤 꾸미고 반쯤 놓아 버린 듯이 흘려 주고 있었다.
덕분에 잠시 이상해진 분위기 속에서 투란은 팔짱을 끼고 주변을 다시 한 번 둘러봤다. 작은 여우 아리아가 하얀 몸을 웅크리고 투란이 앉은 곁에 파고들어 함께 옥좌라는 그루터기에 올라 있는데, 이 알현실이라는 곳은 벽 너머를 감싼 궁전의 풍경을 지운다면 그냥 야영지랑 다를 바가 없었다.
흡사 알드바인에서 거신목의 그루터기 주변으로 벽을 쌓아 올리고 놔두면 이런 꼴이 되지 않을까 싶을 지경이었다.
그나마 깔끔하게 정리, 정돈을 하고 잘 꾸며 놔서 정원이겠지, 하고 여길 수 있는 부분이고 왕과 신하가 모인다는 옥좌가 자리한 알현실의 낌새는 사실 전혀 느낄 수가 없다!
왜 이렇게 된 것인가, 투란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가 있었다.
어딘가 성급한 싸움꾼 같은 카이람, 그 성격에 차분히 왕궁을 건축했을 리가 없다! 그냥 되는대로 이 자리에서 노숙을 시작했다가 야영지로 삼고 주변에 조촐하게 벽부터 쌓아 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엉겁결에 왕국을 세우고 말았겠지!
‘프릿이 딱 그 모양이었…… 아? 아하. 아하핫.’
자신의 추측이 어디에 근거를 뒀는가 느끼며 투란은 드러내지 못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지워내고 감춰버렸지만 사라지지 않은 기억이 불쑥 튀어나오다니! 역시 스스로 기억을 덮은 것은 자해(自害)가 아닌 모양이잖은가.
사람은 때때로 기억하고 싶지 않는 과거란 것을 지니니까.
그래서 투란은 조금 더 이야기를 앞날을 향해 이어 나가기로 했다.
“궁정 마도사 하이람, 어떻게 하면…….”
쿠웅, 두두둥.
순간, 맥동이 옥좌로부터 흘러나왔다.
이 새로운 맥동은 곧바로 프로디운을 향했고, 강렬하게 휘감았다.
드라코눔의 아칸은 크게 놀란 듯이 눈을 부릅떴지만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으며 그 맥동을 받아들였다. 세계를 향해 퍼져 나갈 맥동의 시초로서, 자신의 자리를 명확하게 못 박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주변을 울리던 맥동은 순식간에 희미해지며 사라졌지만, 투란도 프로디운도 ‘알고’ 있었다.
로그람 왕국의 가호가 드라코눔의 일족을 향해 확장되었다는 사실을.
카이람이 이를 알아차리고 뭔가 말하고 싶지만 할 말을 고르기 어렵다는 듯이 끙끙거리는 표정을 짓는데, 하이람은 고요하고 담담한 태도로…… 눈가랑 입가는 환히 웃는 탓에 들뜬 분위기를 숨기지 못한 채로 말한다.
“예상도 못 한 왕의 선언이었소만, 이뤄졌소. 왕의 가호는 드라코눔의 일족에게도 닿을 것이오. 하지만 아칸 프로디운, 잊지 마시오. 드라코눔의 일족이란 그대들의 성스러운 석판에 새겨진 이들에 한정된다는 것. 이는 그대들 스스로 정한 율법 때문이란 것을 잊지 말아 주시오.”
투란은 눈을 깜박이며 프로디운을 바라봐야 했다.
뭐가 또 한정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