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196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87)
“알고 있습니다, 궁정 마도사의 영령이시여. 수많은 이종족이 얽힌 드라코눔이기에 늘 명심해야 할 일이니까요. 결코 허술하게 일을 처리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것이 아칸의 사명이기도 함을 알아주십시오.”
점잖고 신중하게 프로디운이 말했다.
덕분에 투란도 납득할 수 있었다.
드라코눔, 그 기묘하고 이상한 곳에는 드라고니아만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드라코눔 일족의 중심은 용족이지만 거기에 다양한 요정족이라든가 인간이면서 인간과 어긋나 있는 이들이 지성과 이성을 기반으로 함께 살아가는 곳이라고 했다.
‘음, 언제 들었더라?’
기억되는 시기가 아리송하지만, 투란은 넘어갔다.
중요한 일은 그냥 그런 상황이란 것을 기억해 냈고 납득한 것이니까.
그리고 이렇게 마무리 지어졌으니, 투란으로서는 매우 홀가분하게 되었잖은가?
“자, 그러면…… 보석도 받았고, 멀리서 온 손님과도 좋게 이야기 끝났고, 재앙도 싹 처리했죠? 이제 뭐가 남았다고 해도 파워 서클이랑 가디언이 있으니 괜찮으시고 말이죠! 이제 어디로 나가면…… 돼……요?”
낭랑하고 당당하게 떠들어 대던 투란은 점차 목소리를 줄이고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한복판에서 멀찍이 선 프로디운이 갸웃하는 것은 그냥 나중에 와서 영문을 모르니 그럴 만도 하다 싶었다. 하지만 카이람은 왜 저리 황당하다는 표정인가? 하이람은 또 왜 저렇게 너털웃음을 소리 죽여 흘리며 가만히 투란을 바라보는 걸까?
한숨과 함께 카이람이 소곤거리고 싶다는 듯이 목소리를 낮춰 말한다.
“야, 대범람은 몰라라 하는 거냐?”
“그게 언제 오는지 알고요?”
투란도 나직하게, 한편으로는 대이적 같은 위험한 마법까지 동원할 일이냐고 따지듯이 되물었다.
춤추는 산맥 깊은 곳에서 죽지 않고 쌓이다가 터져 나오는 몬스터의 거대한 규모, 어쩌다가 터져 나오는 몬스터의 거대한 무리를 일컫는 말이 대범람, 춤추는 산맥에서 홍수(洪水)와 강하(江河)의 일을 제쳐 놓고 먼저 짚어 부르는 말이었다.
한번 터지면 춤추는 산맥 전역이 다 뒤집히는 큰 사건이고, 보통의 경우에는 대범람이야말로 재앙이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는 무서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 왕국의 군단병이 끊임없이 순찰을 해 몬스터의 수를 줄이고 경계를 하며 싸우고 있잖은가. 그 근원을 어쩔 수가 없기에 긴 세월 동안 그렇게 해 왔고, 몬스터 헌터 도한 군단병과 다른 방식으로 그런 재앙에 대항해 오고 있었다.
왕궁에서 벗어나면 투란 역시 몬스터 로드로서 몬스터 사냥을 하며 비슷하게 지낼 터였다.
그런데 지금 그 일을 들먹여서 어쩌라고?
“폐하.”
하이람이 소리 냈다.
투란은 눈을 끔벅거리며 하이람을 바라봐야 했다.
프로디운 흉내도 아니고 갑자기 왜 점잖게 저리 부르는가?
“로그람의 군단을 움직이는 명령은 폐하로부터 비롯됩니다. 고대의 영령 카이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지금 로그람의 군단을 움직여 곧 일어날 대범람, 몬스터의 거대한 규모에 미리 대응하자 하는 것입니다.”
“편히, 하던 대로 얘기해요! 그러니까 왜, 왜 지금 대범람인데요?”
투란이 진심으로 느닷없어 짜증 난다는 듯이 으르렁거리며 되물었다.
하이람은 쓴웃음을 지었고, 카이람이 하던 대로 매우 편안하게 말한다.
“억제력을 다 치워 버렸으니까. 설마 네가 대이적으로 열심히 없앤 녀석들이 단순히 검은 심장에만 대처하기 위해 그 위험한 마력을 정제하던 중이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었어요?”
“당연히 아니지! 검은 심장을 속박하고 거기서부터 다시 마력을 쥐어짜서 왕가의 마법을 유지하고 그 힘의 단편을 끌어내서 국경으로 다가오는 몬스터를 위협하고 있었단 말이야! 그걸 다 치웠으니 어쩌겠어! 위협적인 뭔가가 사라진 것을 느낀 몬스터가 어쩌겠냐고!”
“이런 썩을! 위협만 하고 몬스터 수를 줄이진 않았단 얘기잖아! 어떤 바보가 그렇게 얼빠진 짓을 하도록 뒀는데? 왕국의 군단병이라면 당연히 국경 가까이에 몬스터가 쌓이지 않도록 대처하고 있었어야잖앗!”
막가는 기분을 그대로 토해 내면서 투란이 으르렁거렸다.
카이람의 말투에 대응해서, 그냥 몬스터 헌터들과 어울릴 때처럼 내뱉은 셈이었다.
한데 이렇게 씨근거리는 투란을 향해 돌아온 것은 몇 배는 더 신중하고 진지한 표정을 짓는 카이람과 그 분위기를 인정한다는 듯이 가만히 한 걸음 물러서는 하이람이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가 투란이 의아함을 토하려는데, 카이람이 그 무거운 분위기를 그대로 목소리에 담아 말한다.
“오랫동안 왕이 없었다. 왕가의 혈통은 어딘가에서 이어지고 있었지만 찾아내지 못했지. 몇 세대 전에 왕이 지정한 대리인의 혈통,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네 공작가이다만, 그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간신히 국경을 좁힌 채로 버티고만 있었다. 봉인해 둔 재앙의 마력이 아니었다면 국경을 더 당기고 물러서야 할 지경이었지. 그러니 ‘살아 있는’ 군단병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봉인 주변을 순찰하고 상태를 확인한 다음에 물러서는 것이 고작이었어. 대부분 인적이 끊긴 곳에 봉인이 자리한다는 것, 기억하고 있지? 그래서 그 모양이 된 거야. 왕의 부재로 인해 공작가 넷의 혈통까지 다 끊어질 뻔한 위기가 백여 년 전부터 이어졌다. 군단을 제대로 움직여서 치고 나간다든가 하는 일은 그 백여 년 동안 손댈 수 없었지. 봉인물의 마력을 이용해 위협하는 것조차 무시하고 덤벼드는 몬스터 무리는 그만큼 위험한 것이었으니까, 날이 가도 국경을 더 물릴 것이냐 말 것이냐로 대립만 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에테온으로부터 새로운 변화가 찾아왔다.”
“반역왕? 아니, 그게 로그람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투란은 갑작스럽게 무거워진 분위기가 거북해서 작게 투덜거렸다.
반역왕은 분명히 춤추는 산맥에 굉장한 영향을 끼쳤고, 꽤나 좋은 이야깃거리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점과 사람들 사이의 소문, 흥미롭기에 재미로 떠드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는 고대의 율법에 따라 변함없이 하던 대로 하고 있었다는 소문이 전부였는데 반역왕의 일이 어떻게 로그람에, 왕이 없는 로그람의 왕가에 영향을 끼친단 말인가?
카이람이 억지로 꾸민 담담함을 말투에 담았다.
“분명히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기에 왕가의 마법을 유지시켜 주는 왕의 혈통, 하지만 찾을 수 없었던 왕의 혈통을 찾아낼 방법을 에테온에서 복원해 냈지.”
“복원?”
투란은 가만히 되뇌었다.
그러니까 원래 왕가의 혈통을 찾을 마법은 고대부터 존재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가 그것을 잃어버렸고, 반역왕이 에테온의 패왕으로 등극하면서 그 마법을 되찾은 것이었다.
“왕의 혈통을 대신해 자손을 거의 다 소모할 지경이었던 공작가 넷은 거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왕의 혈통이 다시 한 번 옥좌에 앉고 그 후손이 번성한다면, 그들 또한 절멸(絶滅)로부터 벗어나 살아남을 길이 열리는 것이니까. 그래서 칠십여 년 전 에테온 왕실의 도움을 받아 수색을 시작했고, 삼십여 년 전에 간신히 희미하기 이를 데 없지만 왕가의 혈통으로서 최소한의 조건을 지닌 청년을 찾아냈다. 대평원의 제국까지 흘러간 핏줄을 다시 춤추는 산맥으로, 로그람으로 데려와서 왕실에 입적시키고 왕위에 올린 거야.”
투란은 낯을 구기고 눈살까지 거침없이 찌푸렸다.
느닷없이 카이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왜 그렇게 무겁게 말하는가를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새로운 재앙이 다가오고 있었고, 쇠약해진 왕국의 힘으로는 거기에 대항할 방법이 거의 없었지. 왕국이 반 토막 나서 절반이 몰살당하고라도 살아남으면 다행이고, 어지간해서는 로그람이 브로큰킹덤과 마찬가지인 폐허가 될 위기였다.”
“못 들었어요, 그런 위기.”
나직하게 투란이 반항하듯 툴툴거렸다.
카이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겁게 이어 나간다.
“군단의 상급 이상 지휘관에게만 알리고 만 일이야. 군단 사령관은 몰살을 각오하고 나아가 싸우려 했다. 무모한 시도가 몇 번 있었고, 겨우 몇 년 시간을 벌기는 했지만 재앙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여전히 없었다. 그사이에 청년은 제대로 등극하지도 못한 채로 왕의 소양만 키우고 있었지. 그러다가 청년의 뒤를 이을 아이가 잉태되었다. 기대보다 빠르게 하지만 다행이라고 할 수는 없는 시기에 말이야.”
빠득, 투란은 저절로 이가 갈리는 것을 느꼈다.
지난 일이고 이제 와서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눈앞의 시조 카이람, 영령인 로그람 초대 왕이 그런 상황에서 어떤 해답을 찾을지는 꽤나 분명하니까.
이미 투란 자신에게 한 짓만 봐도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한데 하이람이 고개를 젓고 있었다.
“투란, 그 일에는 우리가 개입할 수 없었다. 우리는…… 혈통이 완전히 끊어지고 왕의 계승이 더 이상 이뤄질 수 없는 것이 확정된 다음에야 이렇게 형체를 갖출 수 있거든.”
“개입할 수 있었으면…… 다른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어요?”
투란은 숨을 골라내고 무심한 척, 뒤틀린 기분을 담아 물었다.
묻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지만 울컥한 탓에 참을 수가 없어 내뱉은 말이었다.
한데 기다렸다는 듯이 카이람이 바로 대답한다.
“말해 줄 수 있었다면 다른 방향을 제시해 줄 수도 있었겠지. 공작가에는 그런 경우를 대비한 대책을 확실히 준비시켜 놨으니까. 그놈들이 묻기만 했어도…….”
투란은 말투 속에 이를 가는 소리가 섞인 것을 느꼈다.
다른 선택을 할 기회를 누군가 고스란히 날려 버린 탓에 울화가 쌓인 모양이잖은가.
픽, 투란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리고 어딘가 카이람과 닮은 웃음을 띤 채로 투덜투덜 말한다.
“뭐, 세상일이 다 그렇죠. 아무리 열심히 대비를 해 놔도 누가 옆구리 찔러서 망하는 일이 한두 가지인가……. 됐어요, 그만해도 대강 알겠어요. 잘 풀렸다면 내가 고아가 되었을 리도 없고 나를 지키는 수호 영수가 우두커니 아무도 없는 계단에 앉아서 기약 없이 기다리는 일도 없었겠죠. 잘 안 풀렸으니까 내가 보석을 되찾으려다가 아예 새로 만든 거잖아요. 그럼 된 거예요. 음…… 지난 일은 그렇다 치고, 대범람은 어쩌자고요? 내가 또 대이적을 일으켜서 다 막으라고요? 그렇게 팡팡 굴려도 되는 마법은 아닐 텐데요?”
“맞아, 그렇게 마력을 발동시켜서 당장 문제를 해결하다 보면 나중에 험한 일이 꼭 생겨나지. 네가 한 일은 그나마 옛날 일의 뒤처리니까 덜했겠다만, 대범람은 그렇게 막으면 안 돼.”
카이람이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 모습에 왠지 속이 꼬이는 기분이 된 투란이 삐죽거리며 묻는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뭘 어째! 넌 왕이야. 왕답게 왕국을 움직여서 대처해야지!”
“이런 미친!”
“뭐? 이 녀석이 지금 시조를 놓고 미쳤다는 거냐! 불경한 놈!”
“아, 놔! 정신 줄 놓지 말아요! 왕이니까 왕국을 움직여? 그딴 바보 같은 소리가 어딨어요! 옥좌에 앉으면 왕의 능력이 저절로 발휘되기라도 한대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투란이 으르렁거렸다.
카이람이 한 대 맞았다는 표정으로, 한쪽으로는 ‘이놈이 그런 걸 어떻게 알지?’라는 의문을 담은 표정으로 투란을 바라봤다.
한 걸음 물러나 둘을 가만히 지켜보던 하이람이 슬쩍 한발 앞으로 디디며 말한다.
“투란, 네 말대로란다. 당장 너에게 왕의 업무를 수행하라고 할 수는 없지. 그 때문에 우리가…… 아, 나는 조금 다른 상황이 되었지만, 카이람이 아직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란다. 준비가 되지 않은 왕에게 조언을 해 주기 위해서 말이야.”
“음? 어? 흐음…….”
투란은 눈을 깜박이며 하이람의 말을 되새기다가 카이람을 바라봤다.
그 눈길을 카이람이 피하지 않고 마주 보니, 투란이 느릿하니 말한다.
“결국, 이래라저래라 할 건데 나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얘기였어요?”
“왕으로서 칙명을 내리는 것은 너의 일이야! 네가 왕이라고! 이런저런 일을 이야기해 주겠지만 그중에서 선택은 순전히 네가 한단 말이다!”
으르렁거리는 대답이 카이람에게서 빠르게 튀어나왔다.
투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의 시선은 카이람에게서 하이람에게로, 그 중간에 아직 왕의 가호를 만끽하는 듯한 프로디운을 거쳤고 슬그머니 몸 위로 올라와 비비적거리는 여우도 만지작거렸다.
다채로운 하지만 분명한 어떤 사유가 투란의 뇌리를 기민하게 스쳐 갔다.
그 과정을 투란은 숨기지 않고 그대로 중얼중얼 내뱉고 있기도 했다.
“마력의 형체, 아칸, 가디언, 수호의 영수…… 도움말…… 왜 말뿐?”
“야, 그건…….”
‘말뿐’이란 소리에 듣던 카이람이 울컥한 듯 뭐라 하려 할 때, 투란이 손끝으로 카이람을 쿡 찌르듯이 가리키며 묻는다.
“대이적이랑 비슷한 작은 이적으로 몸만 만들어 주면 되는 거잖아요? 마력이 아니라 피와 살이 깃든 몸! 그러면 제한이라든가 한계라든가 상관없는 거잖아요? 맞죠?”
카이람은 어이없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