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197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88)
하이람이 씁쓸하니 대신 대답했다.
“투란, 그건 위험한 발상이야. 우리는 오래전에 살았고, 죽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이 끈질기게 남아서 이런 길을 선택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망령이야. 그 의지를 훌륭하게 여겨 영령이라 불러 주기도 한다만…….”
가만히 듣던 투란은 금방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야말로 어린아이가 아무 생각 없이 상황도 모르는 채로 억지라도 부리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걱정부터 하는 걸 보니 아주 멀쩡하잖아요? 게다가…… 만약의 경우를 위한 대책도 이미 세워 뒀죠?”
그러나 투란은 불쑥 단정 지은 듯 묻고 있었다.
하이람이 몇 마디 더 하려다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카이람은 슬그머니 눈길을 돌리면서 모르는 척했다.
가호를 만끽하며 흥분했다가 이제는 조금 진정한 듯했던 아칸 프로디운이 살짝 날개를 흔들거렸다. 잠깐 사이에 이야기가 이리저리 튀는 것이 흥미롭다는 듯, 곧 아칸의 눈길이 두 영령과 투란 사이를 오갔다.
투란이 툴툴거리며 하던 말을 잇는다.
“못된 망령처럼 음흉하시긴! 뭐…… 걱정거리를 까마득하니 고대부터 쌓아 오신 분들이니까 관대한 내가 그냥 넘어가 줄게요. 하지만 내가 바보도 아니고, 하지도 못 할 짓을 이런 자리에 앉혀 놨다고 할 거란 망상은 버려요! 하고 싶은 일이든 해야 할 일이든, 자기 손으로 하라고옷!”
점점 높아지던 목소리가 성수의 옥좌를 흔들고 나무와 성벽으로 둘러쳐진 알현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 울림에 작은 여우가 몸을 움찔하며 투란의 허리에 바싹 붙었고, 카이람과 하이람은 갑작스럽게 몰아닥친 기묘한 파동의 폭풍을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프로디운이 높이 올려다보며 나직하게 ‘이 마법은……?’이라고 되뇌었다.
하이람도 퍼뜩 알아차린 듯이 ‘어?’ 하고 놀란 소리를 냈고, 카이람 역시 뭔가를 느끼고 바로 외쳤다.
“야, 너 무슨 짓을!”
투란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훤히 열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옥좌가 놓였고 사방이 막힌 실내 같은 곳에서 뭔 하늘이 보이느냐고 툴툴거리는 듯한 표정만 또렷하게 드러낼 뿐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투란의 목소리가 노래처럼 빠르게 흘러나왔다.
“지난 세월의 기억, 산 자의 의지, 죽은 자의 각오, 영웅의 마음을 품은 망령,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려 하는 자여…….”
두서없이 섞인 듯한 이야기를 담은 그 노랫소리는 카이람을 화들짝 놀라게 했다.
“뭐? 잠깐 그거어어……!”
“카이람, 그만.”
버럭 터져 나오던 카이람의 외침은 하이람이 들어 올린 손, 그 손짓에 따라 움직인 마법의 바람에 먹히고 사라졌다. 카이람이 한층 더 놀란 듯이 하이람을 바라보니, 하이람은 아예 한쪽 무릎을 살짝 굽혀 몸을 낮춘 자세로 투란을 바라보며 마주 읊조리지 않는가.
“왕의 결정을 존중하오니, 그 뜻이 올바른 길로 이어져 온 나라에 퍼져 나가길 기원합니다.”
버둥버둥, 카이람은 손짓, 발짓으로 ‘그건 아니잖아!’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 목소리가 바람의 장벽을 넘지는 못했다.
프로디운이 높이 올려다보던 눈길을 돌려 투란을 바라봤다.
거대한 마법, 고대로부터 왕국에 전해지던 어떤 마법을 기동시키는 약속어를 투란이 방금 흘려냈고 고대의 궁정 마도사가 이를 승인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제 투란은 마지막 명령을 꺼내고 있었다.
`“로그람의 왕이 명한다, 해야 할 일을 해라. 지난 세월 지켜본 이들이여, 마땅히 그대들이 해야 할 일을 하라. 징벌해야 할 자에게 벌을, 보상해야 할 자에게 상을! 그리고 여분의 시간 동안에는 하고 싶었던 일을 해도 좋다. 나의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허락한다!”
푸핫!
카이람이 숨을 세게 토해 냈다.
숨소리가 울리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카이람은 투란을 향해, 하이람을 흘겨보기도 하면서 으르렁거린다.
“왜 그러는 거야! 이 마법은 너의 수명을, 목숨을 줄이는 거잖아! 그렇게까지 해서 망령 군단을 발동시킬 필요가…….”
“영리한 아이야, 정말 잘했어.”
갑자기 툭 치고 들어온 소리가 카이람이 하던 말을 잊게 했다.
사라락, 야영지의 풍경이기에 거친 바닥을 부드럽게 휩쓰는 옷자락 소리가 요란했다. 그 소리를 낸 주인공은 당연하다는 듯이 카이람을 지나쳤고, 지나치는 와중에 몇 마디 흘리기도 했다.
“초상화 모습 그대로이네요? 아, 전성기를 그렸던 초상화라서 그런가? 아니, 아니지. 할아버지는 전성기 그대로 돌아가셨다고 했죠? 상상할 필요도 없이 똑같이 생겨서 실망스럽네요.”
벙긋벙긋, 카이람은 투란이 말문이 막혀 당황할 때처럼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 소리도 못 내고 있었다. 느닷없는 폭언이었음에도 말을 한 당사자에게 뭐라 반박할 수가 없는 분위기였고, 설마 이렇게 마주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한 낌새가 역력했다.
하지만 하이람은 카이람을 할아버지라 부른 이를 향해 마주 서며 말하고 있었다.
“아리엔, 노파의 모습은 하지 말아 다오.”
“흥! 이게 나 죽을 때 모습이잖아요. 뭐…… 나도 전성기가 좋기는 하지만.”
투덜거리는 듯한 말과 함께, 노파의 모습으로 나타나 카이람의 곁을 스쳐 온 이가 급격하게 변모하기 시작했다. 노파에서 중년 귀부인으로, 중년에서 겨우 성년이 된 소녀의 모습으로.
투란은 눈을 끔벅이다가, 소녀의 어깨 너머에서 벙긋거리는 카이람을 바라보며 입술만 달싹여야 했다. 도대체 이 할머니였다가 소녀로 변신한 분이 누구시기에 로그람의 초대 왕이며 시조인 카이람이 저리 당황하는가?
일반적으로 할아버지란 호칭을 썼다면 손녀 정도가 맞기는 할 텐데, 지금 영령의 형상을 갖춘 이가 과연 카이람의 친손녀일 것인가? 아니면 훨씬 후대의 왕족으로 카이람에게 불평불만이 많았던 경우일까?
투란이 보기에는 어느 쪽이든 그럴듯했다.
마지막 후손에게 냅다 심장을 바치는 의무를 다하라 밀어붙인 것이 카이람이니, 후대에 그 희생의 마법을 알고 원망한 후손이 한둘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이리저리 가늠하며 추측하는 투란의 생각은 아리엔이 손을 머리에 얹어 쓰다듬는 순간 딱 멎어 버리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세상에 남겨지길 바랐던 내 아이의 핏줄인데, 끝내 저 사악한 시조 할아범의 마수에 걸려 왕궁에 들고 말았구나. 가엾게도…….”
벙긋벙긋, 이번에는 투란이 카이람처럼 입만 달싹이고 아무 말도 못 했다.
정말 이분은 누구신가?
“어엉! 엉! 엉! 우리 아가! 아가!”
갑자기 누군가 투란의 목을 끌어안고 울었다.
아리엔은 옥좌 곁에서 그냥 머리만 쓰다듬는 중이었고 반대편에서 누가 투란을 끌어안고 우는 것이다.
순간 투란은 당황했다.
‘우리 아가? 설마……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과거의 망령, 마법은 로그람이 고대로부터 기록한 이들을 카이람처럼, 아리엔처럼 다시 형체를 부여하고 불러내는 것이기는 했다. 방금 투란은 범위를 아주 넓게 설정해서 그 마법을 썼다.
그러나 로그람 왕국의 마법에는 분명히 제약이 있었다.
죽은 자가 산 자의 일에 마구잡이로 간섭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특히나 왕족의 경우에 더욱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 백 년 이내에 죽은 자들은 형체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제약.
그러니 투란의 아비나 어미는 나타날 수 없어야 했다.
그런데 대체 누가 이리 부른단 말인가?
아리엔의 목소리가 투란에게 스며들었다.
“아리아는 너의 누이나 마찬가지란다. 너와 함께 태어났고, 너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지. 네가 성년이 될 때까지는 너를 돌보는 유모의 역할을, 그 뒤에는 너의 곁에서 함께 살아가며 너를 위해 싸우는 수호자로서 기능하게 돼. 그래, 어떤 이들은 살아있는 마도구라고 부르기도 한다만, 왕가의 혈통을 수호하는 영수를 탄생시키는 이 마법을 창조한 내 입장에서는 아리아가 다른 형태로 태어난 너의 형제자매라고 확언해줄 수 있단다.”
“아리아?”
겨우 마음이 다독여져 고개를 돌린 투란은 살랑거리는 여우 꼬리 몇 겹을 분명히 다시 보았다. 하얀 털과 여우 귀는 여전한데 훌렁 인간 소녀의 형상으로 변해 있는 존재, 영수의 느낌은 여전히 풀풀 휘날리지만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당황하는 투란을 향해 아리엔이 다시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면서 말을 이어 나간다.
“아홉 꼬리의 여우에게는 원래 변신 능력이 있단다. 대마도사가 전한 이계의 설화에 따르면 말이지. 더불어 한 인간을 골라 목숨을 걸고 헌신하는 습성도 있다더구나. 그래서 네 어미가 골랐단다, 너를 지키고 헌신할 수호자이며 영수로서. 안타깝게도, 아리아는 너를 왕궁에서 탈출시키기는 했지만 너의 보호자를 잘못 고르고 말았지. 갓 태어나 무지했던 탓도 있지만, 악독한 것들이 정보를 조작해서 잘못 알고 찾아간 것이야. 음? 아가야, 그 일은 네가 더 이상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단다. 아리아를 훼방 놓은 것들, 너를 탈출시켜야 할 정도의 상황을 만든 것들, 이미 모두 징벌을 시작했으니까. 아가야, 넌 그런 흉악한 일을 굳이 알 필요가 없단다.”
“아…… 네.”
투란은 맹하니 대답하며 카이람을 바라봤다.
옥좌 곁에 아리엔이 서 준 덕분에 훤히 열린 시야로 보이는 카이람은 매우 당황하고 살짝 분노한 듯도 보이지만, 뭔가 주눅 든 몰골이 엄청난 약점을 잡힌 탓에 꼼짝 못 하는 낌새가 무럭무럭 배어 나오는 모습이었다.
그러니 투란이 ‘이게 뭔 상황이죠? 뭐라 말 좀!’이라고 눈짓을 해도 감히 대답을 못 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드는 것이다.
“어흠, 어으읏흠! 아, 아리엔, 그, 그러니까 말이다.”
“닥쳐요. 할아버지에게 묻고 싶은 말은 천 년도 전에 다 했어요. 이제 와서 그 답을 듣고 싶지는 않거든요! 천 년이 넘게 답 없이 침묵했던 주제에 무슨 변명을 하겠다고 입을 열어요? 그냥 닥치고 있어요!”
차가운 아리엔의 말, 거기에 아리아가 ‘잉, 잉, 우리 아가!’라며 끌어안고 볼을 비비적거리는 상황이 겹쳐지니 투란으로서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그저 누가 이 난감한 처지에서 자신을 구해 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듯한데, 마침 하이람이 큰 목소리를 내며 말하고 있었다.
“아리아, 진정해라. 애가 곤란해하잖니. 지금은 여우의 모습으로 곁에서 지켜봐 주는 편이 더 나을 듯하구나. 이제 투란도 너에 대해 알았으니까. 그리고…… 아리엔, 형을 너무 핍박하지 말아 다오. 너 역시 로그람의 여제라 불리면서 카이람 형이 왜 그런 선택을 해야 했던가 납득했잖니?”
“흥! 그건 내가 죽기 전에 잠깐 노망나서 그런 거죠.”
아리엔의 말은 냉혹했다!
카이람이 다시 벙긋벙긋 입술만 움직였고 하이람도 흠칫하며 눈을 껌벅였다.
투란은 너무 당당하게 자신이 노망났었다고 하는 영령, 로그람의 여제였다고 하는 옛 여왕을 다시 봐야 했다!
단호하고 냉정하게 카이람과 하이람을 쏘아보는 아리엔의 눈길은 지금 하는 말이 절대로 장난이 아니라고 보증하고 있잖은가!
‘이, 이럴 때는……?’
굴러가는 투란의 눈길에 닿은 이는 프로디운이었다.
과연 드라코눔의 아칸은 이 상황에서 마주친 눈길이 무슨 의미인가 바로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진지하고 신중한 태도로 적당한 크기의 목소리를 골라 말문을 열었다.
“로그람 왕국의 3대 국왕이셨던 아리엔 님께 드라코눔의 아칸 프로디운이 인사드립니다. 살아 계실 무렵, 드라코눔에 여러 차례 베풀어 주셨던 호의를 저희 일족은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흐응?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뜯어내고 정작 가호는 내려 주지 못했는데도? 음, 참으로 관대한 일족이란 점은 아직까지도 여전한 모양이군요.”
싹둑, 단칼에 상대의 호의를 자르는 듯한 말투가 실로 냉정했다!
괜히 눈빛으로 도움을 청했다가 함께 쳐맞는 입장으로 몰아넣었나 해서 투란은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당시에는 여제를 원망하는 일족도 있었습니다만, 여제께서 요구한 일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드라코눔이 번성하는 기회를 얻고 성스러운 석판까지 확보한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니까요.”
“칫, 지나친 호평이군요.”
노파의 모습이었다고는 상상할 수 없는 삐죽거리는 소녀의 태도로 아리엔이 고개를 돌렸다. 그 눈길이 다시 여우로 돌아가서 투란에게 바싹 기댄 아리아가 닿으니, 아리엔은 곧바로 아리아의 목덜미를 잡아 들고 옥좌의 한쪽에 걸터앉았다. 작고 하얀 여우를 모은 다리 위로 올려놓으며 아리엔이 도도하고 당당하게 다시 말문을 연다.
“뭘 그리 보고 있어요? 궁정 마도사 하이람, 새로운 마도술식으로 낡아 빠진 옛날 마법을 전부 고쳐 써야 하는 것 아니었나요? 엄청난 마법이 새로 생겨났고 그 수호자가 되었잖아요? 그렇게 멀뚱멀뚱 구경할 때가 아닐 텐데요? 그리고 영령 카이람, 망령 군단이 출격 준비를 마쳤는데 총지휘를 맡을 사령관이 여기서 계속 나불거리고 있을 건가요? 이미 왕의 칙명이 떨어졌는데, 거부하는 거예요? 후우, 할아버지 나가 싸우는 거 좋아하잖아! 대범람 걱정은 입으로만 했나? 쓰읏!”
투란은 문득 깨달았다.
아리엔이 지금 한 말은 원래 왕으로서 자신이 했어야 하는 것이다.
‘오옷! 이 소녀 탈을 쓴 할머니 여제 대단하신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