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198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89)
여제라 불렸던 여왕의 영령은 말을 잇고 있었다.
“왕이 수명을 줄여 가며 마련해 준 시간을 그렇게 선 채로 낭비할 건가요? 정신 좀 차리고 빨랑빨랑 움직여 줬으면 좋겠는데!”
잠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카이람의 얼굴을 채웠다.
그러나 카이람은 아리엔과 다투는 것이 정말 싫었는지 한숨을 푹 쉬는가 싶더니 투란을 흘깃 보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자마자 카이람의 형체가 사라졌다.
투란은 카이람이 다른 곳으로 갔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 사납게 일어나는 기묘한 군세(軍勢)!
하이람이 조금 씁쓸한 낯빛으로 아리엔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투란에게 말한다.
“괜찮을 거야. 일단, 아리엔의 말대로 낭비할 때가 아니니까……. 그럼 나도 움직이도록 하지.”
말을 마친 하이람의 몸이 그대로 바닥으로 가라앉아 사라졌다.
튼튼한 땅바닥이 무슨 깊은 연못이었다는 듯이 출렁하더니 거기 하이람이 서 있었던 적이 없다는 듯이 깔끔해졌다.
눈 한 번 깜박하는 사이에 고대의 왕이랑 궁정 마도사가 사라지는 광경에 투란은 멀뚱거리며 홀로 남은 아칸 프로디운만을 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 상황에서 저 검푸른 비늘의 아칸, 단정하면서도 웅장한 자태와 함께 날개 아래로 여전히 로브를 뒤집어쓴 모습인 물결왕을 두고 있는 프로디운이랑 무슨 얘기를 나눠야 하는가? 어째 그냥 서로 마주 보기만 해서는 안 될 듯한 묘한 분위기였다.
“드라코눔의 아칸 프로디운, 왕의 가호가 드라코눔의 일족 모두에게 닿으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은 잘 알고 있지요?”
그러나 아리엔이 곧바로 아칸을 향해 말하며 투란의 잡념을 날려 버렸다.
프로디운도 살짝 어색해지려는 묘한 낌새를 느낀 듯, 묻는 말에 바로 답한다.
“네, 당연히 시간이 필요한 일이지요.”
“드라코눔의 성스러운 석판이 그 옛날 예정한 대로 완성된 아티팩트라면 그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나요?”
아리엔이 가차 없이 가혹한 말투로 다시 물었다.
프로디운은 그 말투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지만, 그 의미에는 깊은 관심을 드러내며 되묻고 있었다.
“모릅니다. 어떤 방법을 말씀하시는가 들려주시겠습니까? 아, 석판은 대마도사의 도움 덕분에 예정된 것 이상으로 훌륭하게 완성되었습니다. 아티팩트를 초월한 맹약의 섭리라 할 정도지요.”
“음…… 뭐, 그렇게 자신 있다면 좋은 일이죠. 방법은 간단해요, 여기서 가호를 입은 그대가 석판에 접촉하면 돼요. 직접 가서 가호를 입은 몸이 닿기만 하면, 가호가 석판을 통해 순식간에 전파될 거예요.”
“순식간에?”
프로디운이 살짝 놀란 듯이 되뇌었다.
아리엔은 도도한 코웃음과 함께 말을 보탠다.
“그래요. 그대의 손끝이 닿는 순간, 몰래 춤추는 산맥을 정찰하며 위험을 감수하는 드라코눔의 감시자, 수호자 들이 지속적으로 몸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마법이 전혀 필요 없어지겠죠. 가호가 닿는 순간부터 바로 그 상황을 알 수도 있을 테고. 그 정도 수준은 되잖아요?”
“네, 춤추는 산맥에 퍼진 혼돈의 영향력이 숨결을 타고 들어오지 않는 순간 바로 알겠지요.”
숨을 가다듬은 프로디운이 아리엔의 말을 받았다.
투란이 곁에서 흘깃 보니 그 모습을 짓궂게 바라보는 듯하던 아리엔이 다시 말하고 있었다.
“물결왕의 정령문이라면 올 때만큼 빠르게 돌아갈 수 있지요? 긴급한 상황을 감지하고 와 줘서 고맙지만…… 아, 왕의 등극을 목격한 증인이 되어 준 것도 아주 고마워요. 그래도 드라코눔의 아칸이라면 정식 사절로 와 줬으면 합니다. 수십 년 전에 에테온에서 그랬던 것처럼. 물론 광분은 하지 않는 사절로요. 뭐, 하면 이 아이가 잡아먹을지도 모르겠지만.”
쓰다듬는 손길에 미묘하게 힘이 들어간 탓에 투란은 슬슬 머리를 빼야 하는가 고민했다. 소녀의 모습을 했지만 할머니, 까마득한 조상 할머니는 그에게 과연 여제라 불린 까닭이 무엇인가를 손에 담긴 힘으로 알려 주려는 듯했다.
하지만 프로디운은 담담하게, 성실하게 아리엔의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훌륭한 권고에 감사드립니다. 로그람 왕국에 정식으로 찾아뵙는 일을 소홀히 할 뻔했군요. 알려 주신 이야기 또한 큰 도움이 될 듯하니, 당장 실행해야겠군요. 폐하, 만약 이 아칸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물결왕의 아이가 바로 알려 줄 거예요. 영리한 아이처럼 보이던데, 그렇지 네키아?”
아리엔이 날름 가로채는 바람에 프로디운은 말을 멈췄고, 투란의 어깨에서 방울방울 샘솟는 이슬로부터 네키아가 바로 반응을 보였다.
“음, 내가 감당 못할 것 같으면…… 아빠 불러도 돼?”
“그래야 한다.”
물결왕의 찰랑이는 음성은 무겁고 강한 울림으로 옥좌에 닿고 있었다.
투란은 네키아가 볼 위로 이슬방울처럼 흘러 다니면서 웃는 것을 느꼈다.
물결왕도 프로디운의 온몸을 덮는 폭포 같은 장막을 만들어 내는 중이었다. 잠시 짙어지던 그 장막이 걷히고 나서는 프로디운도, 물방울 하나도 남지 않았다.
“간 거예요? 그렇게?”
마력의 유동도 없이 아주 간결하게 사라졌다.
물결왕의 힘이 어느 정도인가 한 번 더 놀라도 당연할 듯하잖나.
어느 정도 어이없기도 한 투란에게 아리엔은 고개를 숙여 얼굴을 마주했다.
자세히 보려는 듯도 하고, 뭔가 놓친 것이 있는가 살피는 듯도 한 묘한 표정…… 투란에게는 할머니가 꾸민 소녀의 모습이 슬그머니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런 투란을 보며 미묘한 한숨을 흘린 아리엔이 차분히 아리아를 품은 그대로 일어나 옥좌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투란도 일어나서 몇 걸음 따라갈까 말까 하는데 아리엔이 돌아서며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자신을 옥좌에 못 박는 듯한 그 눈길에 투란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실은…… 아가야, 너에게 내가 따로 할 이야기가 많단다. 음, 무엇보다 먼저…… 미안하다, 어찌할 수가 없는 일이었지만 미안해.”
“에, 네? 뭘……?”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 투란이었다.
어제 만났다든가 몇 년 전에 만났다든가 하는 가능성이 전무(全無)한 아리엔이 도대체 무엇이 미안하다는 말일까? 왕의 의무랍시고 살짝 속인 카이람이라면 몰라도 이제 겨우 형체를 갖춘 영령인 아리엔에게 그럴 만한 일은 없잖은가?
투란의 갸웃거리는 모습에 아리엔이 씁쓸한 분위기로 말을 잇는다.
“혼돈의 늪. 네가 빠져들었던 그 늪은…… 내가 만들어 냈단다.”
뭐라 대꾸해야 할지 투란은 알 수 없었고 그냥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아리엔의 이야기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이기도 하지만 거기 자신이 빠진 일과 어떻게 연관된다는 말인가 납득할 구석이 없잖은가?
뭔가 많이 아는 녀석이 얘기라도 해 주면 좋을 텐데, 지금 모닥불의 왕과 어울리기 바쁜 드라고니아 그람벨크는 투란의 상황을 돌아볼 여력도, 말할 틈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저 투란 홀로 어리둥절하고 맹하니 눈만 깜박이면서 아리엔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잠깐 고요해진 틈에 아리엔의 품 안에서 작은 여우 아리아가 몸을 뒤척이며 끼잉 하는 소리를 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이 아리엔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내가 살았던 시절에는 아직 춤추는 산맥의 형태가 고정되어 있질 않았어. 때문에 그 중심으로 반격해 볼 생각도 할 수 있었지.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혼돈의 영향력, 거기 휩쓸린 마수나 괴수, 괴물을 직접 처리하는 것보다 되돌려 넣으면 저 깊은 곳에서 저절로 줄어들 것이란 얄팍한 계산도 있었고. 지금까지 긴 세월을 확인하고 돌이켜보면 참 순진하고 멍청했다고 해야겠지만…… 아무튼 그때 그런 발상으로 대상을 삼키는 소용돌이를 품은 정령의 문을 구상했지. 그래, 로그람만이 아니고 다른 왕국도 힘을 합쳐서 연구한 일이야. 성공은 했고, 아직도 그 유산이 춤추는 산맥의 곳곳에 남아 있잖아? 어, 뭐…… 지금 세대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괴현상이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아무튼 그 연구 성과를 응용해서 보다 강력하게 혼돈의 힘을 소모시킬 대책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 궁리를 했거든. 그게 혼돈의 늪이야, 제멋대로 흘러나오는 혼돈의 힘을 한곳에 모아 상잔(相殘)시키고 상쇄(相殺)시켜서 줄일 만큼 줄이고 뽑아내서 쉽게 처리하자는 목적이었지.”
“그랬군요.”
아리엔이 어딘가 슬픈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췄기에 투란은 움찔하면서 슬쩍 추임새를 넣을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가는 여전히 갈피를 못 잡았지만.
“거의 완성시킨 마법이었지만 내 대에는 실행하지 못했어. 어떻게든 빼려고 한 한 가지 조건이 반드시 들어갈 수밖에 없는 마법이었고, 난 그 조건을 갖춰서 마법을 실행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래, 왕족이 제물로 바쳐져야 혼돈의 늪은 제 기능을 발휘해. 바쳐지는 왕의 혈통이 갖출 조건은 성인식, 정식이든 약식이든 성인식의 의례를 마친 다음이어야 했지. 자라지도 못한 아이를 제물로 바친다면 의미가 없는 마법이기도 하니까……. 제물로 바쳐진 자는 춤추는 산맥의 중심, 완전한 중심은 아니더라도 중심 가까운 곳으로 전이(轉移)되니까 딱히 제물이 아니라고 우기는 멍청이들도 있었어. 그 멍청이들이 내 다음 세대에 등장해서 결국 혼돈의 늪을 뚫어 버린 거야. 너는…… 그 악습으로 인해 수십 년 전에 거세지던 혼돈의 파문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거기 던져진 거였어.”
“네?”
투란은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알킨의 아비, 이름마저 두룩칼로 바꿨던 그 작자가 그런 숭고한 대의로 투란을 거기 빠뜨렸을까? 그런 일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리가 없는데? 알고 있었다면 한껏 으스대며 나불거렸을 텐데?
“아가야, 너는 정식으로 왕가의 성인식을 거치지 않았어. 하지만 누군가가 약식으로 왕가의 성인식을 너에게 베풀었단다. 너의 이름이 새겨진 너만의 무구(武具), 넌 분명히 그런 것을 받았어.”
아리엔이 엄격하게 하는 말, 이번에는 그 소리가 귓가에 꽂히자마자 투란은 되뇔 수가 있었다.
“샤벨투스의 이빨.”
홀시딘이 새겨진 글귀를 확인해 줬다.
그나마 잔정이 남은 알킨의 어미도 알려 줬다.
몬스터의 잔여물을 가공해서 만들어진 병기, 샤벨투스의 이빨은 알킨의 아비도 모르는 사이에 투란의 목에 걸려 있었다.
반드시 투란에게 전해져야 했던, 그 당시 투란이 몸이 지닐 수 있었던 유일한 무기였다.
“샤오 할배는…….”
저절로 이어지는 생각에 투란은 입을 열다가 말을 흐리며 멈추고 말았다.
작은 여우 아리아가 매섭게 눈을 부릅떴고, 아리엔이 그런 여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독이는 채로 말을 잇고 있었으니까.
“이백 년은 넘은 것 같고, 삼백 년은 아닐 거야. 그즈음 왕가의 희생에 대해서 알아 버리고 왕의 마법을 부정하며 떠난 아이가 있었어. 어? 그래, 이백몇십 년 전쯤에 말이야. 하지만 왕의 마법이 입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사라질 리가 없지. 그래서 그 아이는…… 몬스터 로드가 되었어. 모든 마법을 부정할 수 있는 몬스터 엠블럼에 자신을 맡긴 거야. 덤으로, 자신으로부터 새로운 왕의 혈통이 이어져 제물로 끌려가는 것조차 막아 버린 셈이었지. 그래, 이백여 년 전에 샤오는 그렇게 왕가의 모든 것을 부정하며 왕궁을 떠났어. 그리고 많은 일을 겪었지. 왕의 혈통을 잇는 갓난아이를 수호자까지 쫓아내며 단순한 고아로 키워 놓고는 다시 혼돈의 늪에 제물로 담가 버릴 정도로 많은 일을…….”
입만 벙긋거렸지만 투란은 황당하고 어이없는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우렁차게 ‘그게 뭔 짓거리야! 미쳤나!’라고 외치는 듯한 낯빛을 얼굴 가득히 채워 넣고 있었다.
오래 산 늙은이들이 가끔 희한하다는 것이야 투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희한함은 세월이 흐르거나 말거나 고집스럽게 자신이 살아온 방식을 지키려 해서 생기는 성질머리 아니었던가?
삼백 년은 못 넘었다지만 그 가까이 살아온 샤오 할배도 그러려니 했는데, 아리엔의 말을 듣다 보니 전혀 아니다! 심지어 자신이 겪은 일에 지금 들은 이야기를 끼워 넣어 보아도 역시 아니다!
‘변덕쟁이 미친 할배였냐! 아니, 잠깐…… 왕족이었어?’
골 한쪽이 욱신거리며 아프게 울리는 느낌이었다.
두룩칼, 알킨…… 그 욕심꾸러기 일가보다 한층 더 짜증 나지 않느냐는 느낌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얗고 작은 여우 아리아가 다시 킁킁거리며 투란을 향해 애처롭게 낑낑거렸다.
아리엔이 그런 아리아를 조금 더 깊이 품으면서 이야기를 잇는다.
“처음에는 샤오가 자신처럼 너를 키워 보려 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성인식의 의례를 약식으로 처리하고 너를 혼돈의 늪에 떨어지도록 유도하더구나. 네가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가 로그람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지. 그저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을 뿐이야. 그런데 네가 돌아왔단다, 아가야…….”
말소리가 잦아들며 조심스럽게 살피는 눈길이 뒤따랐다.
후웃, 숨을 몰아 내쉬고 투란은 머리를 움켜쥐듯이 긁적이며 물어야 했다.
“나도 몬스터 로드가 되었는데 어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