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200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91)
Epilogue 1. 샤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샤오…… 노인(老人)은 눈을 떴다.
눈을 뜬 이후에 노인은 입술을 달싹이며 자신을 향해 속삭였다.
“샤오……덴, 내 이름은 샤오덴.”
속삭임을 끝내고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앉은 후, 두 발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노인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슬슬 ‘덴’ 대신에 다른 끝마디를 만들 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노인의 어깨를 무겁게 한다.
그럭저럭 ‘샤오덴’으로 팔십 년쯤 뭉개 왔으니까.
인간이란 백 년 가까이 사는 것만으로 주변의 눈길을 끄는 법이다.
슬슬 다시, ‘빨리 늙은 오십’ 세 정도의 나이라고 우기려면 이름을 뒤틀 필요가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수십 년 동안 마을을 거쳐 간 놈들이 ‘그 동네에 백 살쯤 먹은 노인네가 살지.’ 같은 헛소리를 퍼트릴 수 있으니까.
호기심을 따라 찾아오는 녀석들에게 그런 늙은이 없다고 잡아떼고 쫓아 버리려면 미리 준비를 좀 해야 했다. 이름을 살짝 고치고, 외모도 이미 퍼져 나갔을 소문과는 다른 특징으로 꾸며 둬야 했다.
그러면 앞으로 또 한 오십 년은 주목받지 않고 조용히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당분간 슬쩍 모습을 감추고 사연을 꾸밀 시간이 필요해지는데…….
부스럭.
노인은 새로 들려온 소리에 낯을 찡그렸다.
나무껍질로 만든 거적문 너머에서 누군가 꼼지락거리는 것이 분명했다.
아마 잠을 깨운 부스럭거림도 그 누군가 때문이잖겠는가.
노인이 깨어나는 소리에 잠시 가만있다가, 나서지 않는 상황을 보고 다시 배짱을 부리는 듯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날이면 날마다 있는 일도 아니었다.
대략 수십 년에 한 번 정도? 처음 마을에 들어와 자리 잡기 전인 얼간이들이 촌장이라 불리는 노인의 물건을 탐내는 경우는 가끔 있었다.
제대로 된 마을이나 도시나 나라에서라면 재물을 훔치려는 도둑이겠지만, 샤오콴이라 불리는 이 마을에서는 대부분 옷가지라든가 식량을 탐내는 경우였다. 이 마을이 춤추는 산맥의 깊은 곳과 닿은 탓이었다.
그렇다고 저런 좀도둑을 그냥 둬야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노인은 짜증을 담은 표정을 지으며 거적문을 열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란이 한층 더 또렷한 소음으로 다가왔다.
식인목의 껍질을 무두질해서 만든 거적문이라 방음이 너무 잘된 탓(?)일까, 노인은 자신을 깨운 작은 소리가 사실은 집 전체를 발칵 뒤집어엎은 난동의 결과물이란 사실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게 무슨…… 네놈 누구……?”
자연스럽게 집주인으로서, 이 마을의 규율을 지키는 촌장으로서 뭐라 하려던 노인은 난동을 일으킨 범인의 뒤통수를 보며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분명히 어디선가 본 뒤통수였으니까.
기억이 노인의 뇌리를 쿡쿡 찔렀다.
일 년, 이 년, 삼 년…… 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도 노인은 저 뒤통수가 그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느낌만 받을 뿐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랜만에 샤오콴 마을에 찾아온 놈인가?
이렇게 당당하게 노인 앞에서 소란을 피울 수 있는 녀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기에 조금 짜증이 나는 노인이었다.
“그만하지 못해!”
그래서 일단 목소리를 높였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저 망할 놈이 비상식량을, 마을이 심각한 기근(饑饉)에 빠질 때를 대비해서 비축해 둔 식량을 모조리 먹어 치울 기세가 아닌가!
벌컥벌컥 들이붓는 식수 또한 비상시를 대비한 비축분!
노인은 일단 놈이 마을에 대놓고 해코지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을 인정해야 했다.
물론 이 또한 노인이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
자랄 때 머리통을 열심히 두드려 놓고 보면, 덩치 좀 커지고 머리통 굵어진 다음에 늙어서 쇠약해졌을 것이라 외치며 노인에게 앙갚음하러 오는 녀석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덤으로 노인에게 두들겨 맞는 자신을 비웃던 마을에 대한 복수심도 좀 풀어 보려는 녀석들…….
다만 방금 노인의 잠을 깨우는 소란을 피운 저놈은 어딘가 좀 이상해서 미묘한 느낌을 부추겼다.
자신감이야 있겠지만 우선 덩치가 그리 크지 않았다.
굵직하고 우람한 몸집은 전혀 아니고, 어쩐지 소년기의 끝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는 듯한 체구, 그럼에도 뒤돌아 앉은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장비는 꽤나 고급스럽게 반질거리지 않는가.
아직 덜 자란 듯한데, 갖춘 장비만큼은 이미 베테랑이라 해도 좋은 수준이라니…….
요즘 샤오콴 마을에, 노인을 두고 소소한 복수심을 불태우는 녀석들 중에서 저런 녀석이 있던가?
결코 없다고 노인은 단정 지을 수 있었다.
저 정도 나이면 아직은 노인의 손맛을 기억하는 등짝이 따끔거리고 머리통도 둥둥 울릴 때이니까.
그렇다면 밤과 새벽 사이에 마을에 찾아온 낯선 놈일 텐데…….
그런데 아직도 고개를 돌릴 기미가 없다?
살짝 두통이 일어나는 느낌 속에 노인은 제대로 저 불청객을 다뤄 줘야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거적문을 열고 나와 모습을 드러낸 지금까지도 돌아볼 낌새 없이 식량과 식수를 거덜 내는 중이니, 적당히 말로 할 놈은 분명히 아니니까!
“말을 못 알아듣는 놈이라면…….”
허공을 쥐고 흔드는 마력이 움직였다.
양손에 식량인 마른 뿌리와 식수를 담은 항아리를 각각 쥐고 안은 녀석이 앉은 자세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이변을 겪게 되면 자기 실력을 과신하는 대부분의 녀석들은 당황해서 주섬주섬 예의를 갖추고 공손해지기 마련이라, 노인이 제대로 한번 힘을 써 보인 것이었다.
……아삭, 아삭. 벌컥벌컥.
하지만 돌아서서 낯짝을 드러낸 녀석은 오히려 손에 든 식량을 더 빠르게 입에 욱여넣었고, 씹지도 않고 삼키려는 의지를 과시하듯이 안고 있던 항아리를 입가에 기울이며 폭포처럼 식수를 들이켰다!
그 광경 그리고 불청객의 드러난 얼굴에 노인은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너…… 너, 너어!”
십 년을 넘어 이십 년을, 그도 모자라 거의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을 기억 속에서 더듬으며 노인은 말투까지 더듬고 말았다.
와작.
“할배, 오랜만! 나 살아 있었어! 할배도 살아 있었네? 와, 역시 할배가 숨겨 둔 육포랑 뿌리는 정말 맛있어!”
녀석은 들고 있던 마을의 비상식량을 입에 욱여넣고 순식간에 부풀어오른 볼을 좁혀 삼키면서 또랑또랑하게 말하고 있었다.
노인이 그 목소리, 그 말투를 기억과 대조하며 잠시 당황한 사이에도 식수 항아리 하나가 바닥을 보였다. 그야말로 식량과 식수를 번갈아 입안에 처넣는 광경이 지독하기 이를 데 없다!
“그만……해라, 투란.”
겨우 노인은 입을 열었고, 저절로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말해야 했다.
아작아작아작아작…….
벌컥벌컥벌컥벌컥…….
들은 척도 않고 처먹는 투란을 노인은 찌푸린 눈길로 가만히 지켜봤다.
노인이 기억하는 소년은 반쯤 돌아 버릴 정도로 성질부릴 때 저런 모습이었다.
그래 봐야 노인의 주먹 한 방에 바닥에 쭉 늘어져서 잠들고 마는 애교에 불과했지만.
그때 소년의 모습과 지금을 비교하니,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기에 저리도 당당하고 대담한가를 바로 느낄 수가 있었다.
“너…… 그 목걸이…….”
그중에서 가장 도드라지고 유난히 반짝이는 보석을 매단 목줄을 보며 노인은 입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인의 일생과 엇갈리는 왕가의 보석이 본래의 광채를 완전히 되찾은 채로 투란의 목줄에 걸려 있다니…….
게다가 그 보석 안에서 적의(敵意)를 불태우며 노려보는 존재, 노인을 분명히 기억하는 왕가의 수호자였다.
어떻게 되찾았을까?
세월을 두고 주인에게서 벗어나게 교란시켜 놨다.
그 때문에 수호자를 몰아내야 했고.
수호자가 다시 깃들게 하려면 보석의 뒤틀림, 교란을 복구시켜야 하는데 그런 마법은 오직 진정한 혈통을 잇는 왕이어야 겨우 가능했다.
로그람에는 왕이 없었고, 여전히 없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왕의 마법을 살려냈을까?
어떻게 노인이 그림 존에 담그고 십수 년을 조작해서 교란시킨 보석이 다시 올바른 주인을 인식하도록 했을까?
설혹 왕이라 해도 몬스터 로드가 발휘하는 그림 포스의 영향력을 그리 쉽게 해제할 수는 없을 텐데?
노인은 두서없는 의문이 똑같은 부분을 계속 짚으며 뇌리를 번잡하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굳이 홀로 생각할 필요가 없는데도…….
“할배, 똑바로 말해. 말을 하다 말고 우물쭈물하면 무례해 보이고 멍청해 보이잖아? 이거 할배가 해 준 말이라고!”
투란이 이죽거리며 하는 말이 노인을 한숨짓게 했다.
마을을 떠날 무렵에 슬슬 기어오르는 말투가 되더니, 돌아온 지금에는 완전히 자리 잡은 꼴이잖은가.
작정하고 노인에게 성질내는 꼴로 봐서는 그동안에 꽤나 많은 것을 알아낸 것이 분명했다. 다만, 다른 많은 것을 아직 모른다는 점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전부 알았다면 노인이 꾸민 마을, 그림 존 안으로 들어와서 당당하게 까불 리가 없으니까.
“진짜 왕과 만났느냐?”
담담한 노인의 물음이었다.
보석이 노인의 물음에 성내듯이 일렁거리는 반짝임을 보였다.
투란은 노인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아작, 아작. 다시 마른 뿌리와 육포가 투란의 입안으로 사라졌다.
한마디 할 때마다 비상식량을 거덜 내고 말겠다는 의지가 또렷히 느껴지는 짓이다.
노인은 세월이 단련시켜 준 인내심을 발휘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항아리 하나를 더 꺼내서 반쯤 비운 다음에야 보답을 받았다.
“만났지, 그래서 많이 배웠어.”
“왜 돌아온 거냐?”
노인의 물음은 더 간결해졌다.
궁금한 일이 적은 때문은 아니었다.
단절되었다는 혈통에서 어떻게 새로운 왕이 다시 탄생할 수 있었는가?
에테온의 반역왕이 그런 경우라고 하더니, 로그람에도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 새로운 왕이 투란과 어찌 만난 것일까?
아니, 왕과 만나기 전에 투란은 대체 어떻게 살아 돌아온 것인가?
거의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다음에도 어제 떠난 것처럼 말짱한 점이라면 오히려 노인이 쉽게 납득할 수 있었다. 춤추는 산맥의 기괴한 몇 곳에 잘못 발 들였다가 이상한 세월을 겪었다는 이들은 드물지만 백 년이면 서넛 정도는 꼭 나왔으니까.
하지만 그 서넛의 본보기는 베테랑 헌터의 수준을 가볍게 뛰어넘으며, 상당한 기량을 지닌 경우에 한정되었다. 기괴한 시간의 영역 안에서는 기량을 키우지 못한다고 했다. 그저 빠져들었다가 간신히 살아 나와서는 너무 흘러 버린 세월에 놀라든가, 자신의 시간이 멎은 듯한 것을 깨닫든가 한다고.
어떤 경우이든 살아 돌아온 다음에 겪는 일이 이상해질 뿐이었다.
문득 노인은 투란도 그런 이상한 경우로 보석을 되찾은 것인가 생각해 봤다.
새로운 왕에게 살아 돌아온 투란은 춤추는 산맥 안쪽의 정황을 알려 주기 딱 좋은 경우가 될 수도 있었잖을까?
복잡해지는 노인의 표정을 보며 투란이 키득키득 웃었다.
“할배, 딴생각하네. 진짜로 뭘 묻고 싶은 거야?”
“……왜 돌아왔냐고.”
노인이 물음을 되풀이했다.
수호자가 깃든 보석을 되찾은 시점에서 투란은 이미 왕족의 신분을 회복했을 터다. 이런 척박하고 위험한 오지(奧地), 괴수와 마물이 가득해서 살아남는 일이 벅찬 곳에 돌아올 까닭이 있을까?
왕이 새로 등극했다면 로그람의 왕도는 왕족에게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곳이 될 터였다. 그 평안이 언제까지 지속되려는가에 대해서라면 꽤나 냉소할 수 있겠지만, 노인은 온갖 험한 꼴을 보고 겪으며 자란 투란이 어째서 신분을 회복하고도 이렇게 마을로 돌아와 심통이나 부리고 있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아삭.
조금 진지한 표정을 띠는가 싶더니 다시 마른 뿌리 하나를 통으로 삼킨 투란이 목젖을 꼴딱인 다음에야 대답한다.
“그런 거 안 물어봐도 뻔하지 않아? 당연히 할배에게 볼일이 있어 왔지!”
노인은 웃었다.
비웃음도 쓴웃음도 아니었다.
그냥 갑작스러운 꼬마의 재롱을 보고 터져 나온 웃음이었다.
“내게? 네가?”
“응, 할배한테, 내가.”
“……뭐냐? 말이나 해 봐라.”
“할배 유명하던데, ‘그림 로드 샤오’라고 말이야.”
고집스럽게 대꾸하다가 씨익 웃음 짓고 묻는 투란이었다.
한숨 쉬듯 응해 주던 노인, 샤오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백 년도…… 더 지난 옛날에나 듣던 이름이다. 기억하는 사람도 없어. 기껏해야 상아탑의 기록……. 너 정말 왜 돌아온 거지? 투란, 똑바로 말해. 두 달 치 식량과 식수를 먹은 값은 치러야지.”
“……두 달 치? 와, 두 배로 부르는 거 봐! 역시 망할 할배라니까!”
“투란, 그림 로드란 칭호만 듣고 왔니? 그림 로드가 성질 더럽고 흉악하단 이야기는 못 들었어?”
오랜만에 촌장의 위엄을 담아 채근하는 말이었다.
투란도 이제 더 미루지 않겠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이며 대답한다.
“벌주러 왔어. 할배를 위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