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208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199)
비는 한참을 내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바람결에 살짝 이슬방울이 흩어져 섞인 듯한 티끌처럼 내렸다.
티끌이 조금 가느다란 물방울처럼 굵어졌고, 하루가 지날 즈음에는 굵직한 화살이 뭉툭하게 두들기는 것처럼 거세졌다.
서서히 드러나는 폭풍의 조짐은 그렇게 굵고 억센 화살 비를 한층 더 사납게 보채고 있었다.
로그람 왕도의 북쪽 성문에 기사(騎士)가 나타난 것은 하늘에 폭풍을 맞이하려는 먹구름이 가득 채워진 오후였다.
먹구름이 해를 가리고 저무는 풍경마저 숨길 무렵, 기사는 섬뜩한 몰골로 성문 앞에 말을 몰고 왔다. 그리고 단계별로 준비된 성문이 기사와 기마를 통과시키기 위해 열렸지만, 그대로 서서 지나치지 않았다.
대신 기사는 성문지기에게 물었다.
“군단을 통과시킬 만큼 열어 주지 않겠나?”
* * *
렉스는 오십이 다 되어 가는 나이에도 문지기였다.
그 나이에 어울리는 적당한 점포를 내거나 자기 사업을 하지 못했으니 보통은 험하고 여유 없이 살았구나 싶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렉스가 관리하는 문이 로그람 왕도의 북쪽을 책임지는 성벽에 붙어 있기에 그렇게 보는 이는 없었다.
성문지기는 공적인 신용과 사적인 신뢰를 모두 얻은 이에게 허용되고,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용맹조차 증명한 이들에게 맡겨지는 중요한 직위인 때문이었다. 하물며 그 성문이 왕국의 중심인 왕도의 성벽에 붙은 것이라면 책임은 한층 더 막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렉스는 다양한 가문의 문장을 외우고 있었고, 여러 군단의 휘장을 그릴 줄 알기도 했다. 오가는 상인들의 표기, 신표 따위까지 분별했고 헌터 길드가 발행하는 통행증도 시기별로 분류할 수 있을 만큼 렉스는 자신의 직분에 충실했다.
거기에 더해 렉스는 지난 백 년간 사용된 통행증과 변화된 가문의 문장까지도 부지런히 찾아 눈에 익혔다. 성실한 문지기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렉스만큼 부지런한 경우는 아마 없을 터이다. 하루하루 성문을 지나는 이들을 맞이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쭉쭉 빠져서 보통은 해가 지기 전에 쓰러질까 말까 하는 수준에 이르니, 렉스처럼 부지런하기도 어려웠다.
어찌 보면 굳이 백 년 동안 사용된 문장, 통행증, 신표를 찾아보는 것은 별 의미도 없고 하지 않아도 좋을 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춤추는 산맥에서 문지기 노릇 하는 이들 사이에 백 년에 몇 번씩 실현되는 전설이 있었으니, 렉스에게 쓸모없는 일을 한다는 이는 없었다.
그 전설은, 어느 날 갑자기 삼십 년 전을 어제라 부르면서 삼십 년 전의 통행증, 공민을 증명하는 신분증 따위를 들이미는 이들이 문지기 앞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헌터이고 어떤 이는 행상(行商)이고, 어떤 이는 병사이기도 한…….
옛날 증명서를 갖고 장난하는 얼간이들이었다면 웃고 넘길 일이지만, 춤추는 산맥의 불가사의(不可思議)에 휩쓸린 이들에게는 결코 웃지 못할 충격적인 사건이고 피해였다. 그들은 정말로 어제 나갔고, 오늘 돌아왔는데 삼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고…… 때로는 오십 년이 지난 상황을 겪는 중이었으니까.
나라마다 백 년에 한두 번은 나타나는 사건이었기에 각 왕국의 마도청, 마법부에서는 그런 때를 대비해서 문장을 기록하고 대조하는 특별한 서책까지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마법의 서책이 렉스 같은 문지기에게까지 지급될 리는 없었다.
간단하다 여겨지지만 마법의 서책은 꽤나 복잡한 아티팩트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마법사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꽤 비싼 아이템이라 함부로 내돌릴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기에 렉스는 자신의 손으로, 눈으로, 머리를 쓰고 시간을 소모해서 여러 가문과 상인, 헌터 길드가 시기별로 발행하는 문장, 표기, 증명서를 외우고 익혀야 했다. 그렇게 하고도 모르는 것이 나오면 그때야 마법 서책의 도움을 청할 수 있으니까.
그런 렉스였기에 아직 경험이 부족한 신입, 견식이 모자란 중견 문지기는 모르는 것을 바로 그에게 물을 수 있고, 묻기를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처럼 이상한 기사가 나타나 이상한 요구를 한 경우에도 이 시간의 담당 문지기는 자신의 무지와 모자란 견식을 바로 인정하며 렉스를 부를 수 있었다.
그래서 렉스가 당황한 표정을 짓고 놀라는 모습을 보였을 때, 함께 근무를 서고 있던 문지기 모두가 당황했다. 게다가 렉스는 그 놀랍고 당황한 심정을 감추지 않고 목소리를 높여 꺼내 놓기까지 한다.
“그, 로브의 문장은…… 기사님, 당신 가문의 문장입니까?”
“그렇다네.”
“정말……? 아, 죄송합니다만 제가 아는 한 그 문장은……어, 그러니까…….”
“놀랍군, 그대는 정말로 내 가문의 문장을 아는가?”
“네…… 이백 년 전, 강철의 기사 가문의 문장이라고…….”
“강철의 기사? 나는…….”
“아, 강철의 기사께서 돌아가신 다음에 그렇게 불리게 되었지요. 가문의 진명은 펠러한, 그 문장은 펠러한 자작가의 것이었습니다.”
“……맞네, 이 문장은 펠러한 가문을 상징하지.”
기사가 씁쓸하니 되뇌었다.
빗방울이 어루만지고 더듬는 기사의 로브가 그 안쪽에 받쳐 입은 은색 철갑과 백금 장식을 살짝 틈새로 엿볼 수 있게 팔락였다. 로브의 겉면에는 작은 나무의 형태가 활짝 펼쳐진 채로 드리워진 문장이 수놓아져 빗방울에 도드라져 보였다.
렉스는 얼굴에 빗방울이 세게 들이박는 것도 잊고 기사 앞으로 다가갔다.
기승한 상태인지라 한참을 올려다봐야 하는 기사, 그 은색 철갑 틈새로 살짝 엿보이는 짧은 수염과 짙은 갈색 눈동자가 선명했다. 기사는 가까이 다가와 더욱 자세히 자신을 살피는 문지기, 렉스를 향해 서글픈 음색으로 묻는다.
“이백 년 전의 문장이라…… 하면 펠러한 가문은 사라졌는가?”
렉스는 당황했다.
“어, 그건 저도 잘…… 펠러한 자작께서 강철의 기사라 불리게 된 대전투 이야기는 들었지만…… 음, 그 뒤에 자작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그 전투로 인해 남겨진 전설 때문에 렉스는 문장을 보고 기억해 냈던 것이다.
영원히 돌아올 리가 없다는 문장…….
“그런가……. 그렇겠군, 후계를 정해 두지 못한 채 군단에 복무하러 가서 죽어 버렸는데 다른 이가 가문의 일을 어찌 알겠는가. 이백여 년이 지난 다음에야 이렇게 돌아온 망령의 사정에 불과하니…….”
기사의 중얼거림은 빗방울 소리에 거의 파묻혀 지워질 정도로 낮고 여렸다.
하지만 렉스는 한 발 더 다가서서 똑똑히 귀에 담았고, 목청껏 소리쳐 묻고 있었다.
“당신은, 정말, 펠러한 자작이십니까! 이백 년 전 로그람 2군단을 이끌고, 사망한 군단장을 대신해 북방의 범람을 막기 위해 전멸할 때까지 맞서 싸운 강철의 기사, 펠러한 자작 본인이 맞습니까? 말해 주세요!”
콰릉!
폭풍이 벼락을 쏘아 냈다.
기사가 로브의 두건을 젖히며 은색 면갑도 함께 젖혔다.
벼락이 흘려 낸 광채 속에서 렉스의 눈에는 온전하지 못한 유골(遺骨)이 먼저 보였다. 눈동자도, 턱수염도 산 사람의 것이나 그 나머지는 온전하지 못한…….
기사의 말 엉덩이 뒤로 빗방울을 튕겨 내는 형체들이 나타나고 있기도 했다. 투명한 빗방울이 줄줄 흘러내리는 그 형체들 역시 온전하지 못한 유골, 어딘가 훼손된 채로 땅속에 파묻혀 오래전에 썩어 사라졌어야 했을 법한 유해(遺骸)가 덜그럭거리는 몰골로 줄줄이 서 있는 광경이었다.
그 선두에 선 기사가 잦아드는 천둥소리를 잇듯이 렉스의 물음에 답한다.
“내가 자작 펠러한, 배덕자라네. 귀환을 약속하고 지키지 못한 채, 영토를 빼앗기고 병사들을 몰살시킨 어리석은 자이지. 왕의 자비가 그 영토에 미쳤기에, 이런 몰골로 나는 살아서 지키지 못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돌아왔다네. 문지기여, 문을 열어 주겠나? 죽어서 돌아온…… 배덕자를 따른 가련한 병사들의 귀환을 맞이해 주게나.”
콰르릉!
렉스의 답을 대신하듯 또 다른 벼락이 하늘을 울렸다.
빗방울의 난타로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는 군단, 그 병사들의 모습에 색채가 입혀지기 시작했다.
렉스는 그 모습을 보며, 며칠 동안 왕도를 떠돌고 나라 전체로 퍼져 나간 소문이 저절로 뇌리를 채우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노인이 소년이 되어서 자기 장례식을 봤다며?”
“어, 노인의 형이 망령 꼬마가 되어 돌아왔다네.”
“와아, 가족들 참 난감했겠는데!”
“그랬겠지? 노망난 할배가 죽었는데 금방 멀쩡한 꼬마가 되어 자기 장례식을 치르는 상황이니까.”
“그래서 망령이 되어 같이 산대?”
“뭐? 무슨 미친 소리를!”
“장례식 끝나니까 손잡고 가 버렸다잖아. 말을 끝까지 안 들었냐?”
“소문이 제멋대로니까 끝까지 듣기도 힘들지.”
“그런데 그 집안, 귀족이 아니라며?”
“그냥 군역만 마치면…… 다 망령이 되는 건가?”
“아, 다 늙은 형제를 찾으러 왔던 꼬마 망령은 군단병이 된 적이 없을걸.”
“그럼, 대체 뭐야? 어떻게……?”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이는 없었다.
누군가는 나타났고, 누군가는 그냥 죽은 채였으니까.
누군가 직접 겪고 있는 괴이한 일이라도 건너 듣는 이에게는 그래서 뭘 어쩌란 것인가 알 수 없는 소문일 뿐이니 자세히 캐고 다니는 이가 있다면, 마법사 정도가 고작일 터였다.
렉스의 경우에는 오랜만에 여러 가지 문장, 인장을 성실하게 둘러보고 그 틈새에 귀환할 수 없었던 전설적인 이들과 연관된 이야기를 심심풀이로 한 번씩 더 봐 뒀다. 덕분에 백 년 내에 쓰인 적이 없는 강철의 기사 문장을 보고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알아보고도 진짜인가 묻고 말았지만…….
문장이 명확했고, 산 자의 눈과 죽은 자의 유골을 한 몸에 지닌 기괴한 모습일망정 그 기사는 자신의 가문을 밝혔다.
그렇다고는 해도 죽어서 돌아온 자들의 무리, 이 망령군단을 통과시켜도 되는가?
렉스는 자신의 권한을 되새겼고, 간신히 대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로서는 최선의 답이었다.
“기, 기다려 주십시오! 이 일은 궁정에 보고를…….”
콰릉, 콰르릉!
연이은 벼락이 렉스의 뒤통수 쪽을 밝히며 요란한 굉음을 울렸다.
폭풍이 이끌어낸 벼락과는 그 광채가 달랐고, 시야를 밝히는 상황으로 봐서 벼락이 내리찍었을 곳이 성문이었기에 렉스는 말을 맺지 못하고 돌아봐야 했다.
성문은 멀쩡하게 닫혀 있었다.
다만 벼락이 성문에 깃든 것처럼 번뜩거릴 뿐이었다.
어찌 보면 벼락으로 성문에 그림이라도 그리려는 듯한 해괴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성문 앞에 나란히 늘어서는 이들이 있었다.
“아이, 씨! 나만 고꾸라졌잖아요! 마법사 대우를 이따위로 할 겁니까? 너무하네, 정말!”
펄럭이는 로브 차림의 한 명이 주저앉으며 투덜거렸다. 나머지는 무거운 철갑에 로브를 덧댄 차림새로 펠러한 자작을 노려보고 있었다.
렉스는 그중 선두에 선, 얼굴을 가로지른 흉터 속에서 눈알을 부라리는 노년의 기사가 가장 성난 표정인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옆으로 비켜서고 말았다. 노년의 기사는 렉스가 비킨 자리로 성큼성큼 나아가며 외쳤다.
“이 솜털 애송이! 살아서도 명령을 거부하더니, 죽어서도 늦장 부리다가 이백 년이나 지난 다음에 돌아오나! 너 한 번 더 뒈져 보고 싶어?”
노기사의 펄럭이는 로브에는 또 다른 문장이 선명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렉스는 혼란스러웠다.
노기사의 문장은 백작가, 요즘에는 꽤나 쇠락했다고 알려졌지만 강철의 기사처럼 대가 끊어지지는 않은 가문이었다. 그런데 이 노기사는 대체 뭐라고 하는 것인가? 어째서……?
“군단! 군단장님을 향해 예를 표하라!”
강철의 기사, 펠러한 자작이 돌연 외쳤다.
순간, 그 뒤에 늘어서 있던 유골뿐인 군단이 섬광을 뒤집어쓴 듯이 일제히 한 손을 높이 치켜들고 합창했다.
“폭사(爆死) 군단장, 바보다! 저런 바보가 우리 대장님이다! 우웨에엑!”
노기사는 단번에 악귀 같은 표정이 돼 버렸다.
“야, 이 미친 새끼들아! 명령 불복종에다가 상관 모욕까지 저질러!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멋대로 버티다가 뒈져 놓고 감히 이 훌륭한 대장님한테 뭐가 어째! 이거 다 솜털 애송이 너 때문인 거 알지? 뒈졌다고 용서해 줄 줄 알아, 너 이 새끼들!”
군단병 수천이 지르는 것보다 더한 호통을 터뜨리는 기사였다.
렉스는 휘청거리며 물러선 채로, 이백 년 만에 재회하는 로그람 2군단과 2군단의 총사령관을, 총지휘를 물려받아 남은 군단을 이끌고 싸워 강철의 기사라 불리게 되었지만 군단 몰살과 함께 영토 침범을 막지 못한 결과를 낳은 이를 시야에 담았다.
분명히 그들은 패배했다.
패배했기에 몰살당했고 그들이 지켜야 했던 영토는 춤추는 산맥 안쪽으로 잠식되어 더 이상 로그람의 땅이라 불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렉스는 그로 인해 남겨진 전설을 들었다.
고작해야 이삼백 명에 불과한 피난민을 구해 내고 패해 버린 로그람 2군단의 병사들, 그들은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겨우 하나의 군단으로 대범람을 그 입구에서 봉쇄하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