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209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200)
따당, 타다당.
인장이 박히는 소리는 요란하면서도 묘한 박자를 갖추고 있었다.
와글거리는 수많은 이들의 발걸음도 그 박자에 맞춘 듯이 차분하면서도 명쾌하게 섞여 들었다.
높은 성벽이 둘러쳐진 왕성의 안쪽은 임시로 만든 듯한 천막으로 지붕과 가림 벽을 꾸며 놓았는데, 몰려오는 이들을 단숨에 분별해서 빠르게 일 처리를 하려는 의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구조였다.
펠러한 자작은, 죽고 난 다음에 강철의 기사란 영명(英名)을 얻은 자신을 주눅 들게 하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오싹함을 느꼈다. 과연 원래 2군단의 대장인 백작이 여기서부터는 너 혼자 가라고 등 떠밀고 뒤돌아 도망칠 만한 풍경이 아닌가!
저 가림 벽을 세운 자들, 자리에 앉아서 서류를 훌훌 넘기며 왕실에서 공문서에 찍는 인장을 칼부림하듯, 망치질하듯 휘둘러 대는 자들은 모두 영령(英靈)이었다.
산 사람을 굳이 찾으려 한다면 이 왕성 한구석에 들어오기 위해 열린 문턱 좌우로 서 있는 경비병이 고작일 듯했다.
그야말로 삶과 죽음을 가르는 전장에서 돌아온 이들을 맞이하여 서류의 전장을 펼쳐 보이는 광경이니, 살아서 문서랑 별로 친하지 않았던 펠라한 자작으로서는 죽어서도 오싹함을 느끼게 하는 그 광경을 어찌 평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잠시 우두커니 관람하듯이 서 있는데, 희미한 유령이 또렷한 펠러한 자작을 스쳐 가는 순간 서류를 휘두르며 외치는 이가 있었다
“다음! 거기, 펠러한 자작? 이리 와요! 길 막고 서 있지 말고! 어이, 거기 남작! 영체로 지나다니지 말라고! 누굴 놀라게 하려고 유령 흉내야! 아…… 그래, 이미 유령이기는 하지만…… 하지 말라고! 펠러한 자작, 얼른 와요! 새치기당하기 싫으면!”
그 외침에 희미했던 유령이 산 사람처럼 변하더니 펠러한 자작을 흘깃하며 혀를 차는 시늉까지 한다!
“쳇, 얼른 일 보시죠? 새치기하면 쫓겨날 것 같은데, 제가 좀 급합니다.”
“어, 알았네. 서두르도록 하지.”
펠러한 자작은 남작이라 불린 이가 얼핏 자신을 알아보는 듯한 눈치인지라 어정쩡한 대꾸를 하며 앞으로 나가야 했다. 서류를 흔들던 이의 자리로 다가가자, 자작 앞에 의자가 나타났다.
마법이라면 마법이겠지만, 죽은 자를 위한 것처럼 의자 또한 영력을 품은 듯하다는 점이 자작을 놀라게 했다.
“자, 봅시다. 자작님, 살아서 남긴 후손에 대해서인데…….”
“음, 난 후손을 둔 기억이 없소만.”
펠러한은 죽은 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표정, 뒷머리를 긁고 싶다는 듯한 태도로 상대의 말을 자르며 대꾸했다.
성문을 넘자마자 군단장이 ‘너, 후손 정리 좀 해라.’ 하더니, 어리둥절한 강철의 기사를 보고는 이곳으로 데려왔다. 오던 중에 더한 말은 ‘가서 들어. 굳이 나한테 듣고 또 들을 필요가 있나.’가 고작이었기에 대체 무슨 까닭인지 아직도 얼떨떨할 뿐이었다.
“기억은 없지만 행적은 분명합니다. 입대하신 날, 군단으로 출두하기 전에 사창가 술집에서 정신 줄 놓을 때까지 퍼마신 일은 기억하시겠죠?”
“……깨어났을 때는 이미 군단 막사였지.”
펠러한은 문득, 막사에서 깨어난 다음에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시종으로 배치된 병사는 고참병이었는데, 막 정신이 든 펠러한을 아주 능글맞게 바라보며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아이고, 우리 백부장님! 씨앗 털릴 뻔한 거 기억하쇼? 아, 뭔 이야기인가 전혀 모르시나? 하하하, 정말 엉뚱한 친구분들을 뒀어요. 뭐, 그 친구분들이 좋은 일을 한 건지 패악질을 한 건지는 나중에 알게 될 테지만…… 그걸 알려면 군역부터 마치셔야 하거든요. 군역의 시작은, 백부장이시니까 먼저 군단장님부터 뵈어야 하고 말이죠.”
죽을 때까지 펠러한은 그게 무슨 이야기인가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저 어리둥절했을 뿐이고, 군단 막사에서 눈을 뜬 날부터 급증하는 몬스터 무리에 맞서 가며 전투를 겪어야 했기에 홀랑 잊어버렸다. 연이은 나날은 모두 전투로 채워졌다.
그러다가 백작이 솜털 애송이라 부르던 펠러한에게 군단장 노릇을 위임하고 자신은 상위 기사들과 함께 결사대를 꾸려 돌격하는 날을 맞이했다. 너 같은 솜털 애송이는 아직 남아 있는 군단 병력을 이끌고 피난민을 보호하며 후퇴하라는 명령도 그 위임과 함께였다.
강력한 기사와 숙련된 병사, 백작은 그렇게 꾸린 돌격대만으로 시간을 끌어 주려 했지만 펠러한을 임시 군단장으로 맞이한 2군단은 아무런 여유도 얻지 못했다. 돌격대가 나서자마자 키클롭스 무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키클롭스 무리의 우두머리는 단순히 동족만 이끈 것이 아니라 다른 종의 몬스터들마저 가축처럼, 휘하의 병졸처럼 부리고 있었다.
때문에 백작과 돌격대는 그 체계를 파괴해야 했는데, 격돌하는 순간에 끝장이 나고 말았다.
키클롭스 무리도 군단장의 돌격대도, 펠러한과 후퇴를 준비하던 군단 앞에서 불벼락과 폭풍에 휘말리며 분쇄돼 버린 무서운 상황이었다.
애초에 목숨을 걸었으려니 생각은 했지만 설마 백작씩이나 되는 군단장이 선별한 상위의 기사들과 병사들 모두를 폭사시켜 몬스터 무리와 함께 죽을 줄은 몰랐기에 펠러한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충격에서 벗어나게 해 준 이가 펠러한 곁에 백작이 남겨 둔 고참 병사였다. 백작가의 비전 마법은 인간의 목숨을 희생시켜 괴물을 갈아 버리는 불벼락의 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야기도 그에게서 들었다.
그 마법의 문제점은 희생되는 목숨의 숫자와 질에 따라 위력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백작은 선별한 기사와 병사 들을 단번에 날려 버릴 작정을 한 것이 아니었지만, 지휘 체계를 갖춘 키클롭스가 이끄는 몬스터 군단을 확인하자마자 그런 결단을 내려야 했다는 이야기였다.
펠러한으로서는 간신히 이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몬스터 무리가 지휘 체계를 갖추고 군단과 닮은 형태로 인간의 영토에 파고들 경우, 그런 대응책을 사용할 수가 없게 된다. 거기에 인간과 싸우면서 지혜를 키울 수 있는 괴물이라면 더욱 위험할 터이니 일격에 해치울 수 있을 때 반드시 멸절시키는 편이 최선인 것이다.
하지만 냅다 그런 수단을 질러 버린 백작이 곱게 보일 리는 없었다.
그래서 펠러한은 백작을 놀리는 구호를 만들고 말았다.
솜털 애송이답게, 바로 그 자리에서 쌍욕을 섞어.
그래 놓고 펠러한은 그 자리에서 명령대로 퇴각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작, 다른 생각 하지 마요. 망념에 빠지면 일 처리가 늦어집니다!”
까닥까닥, 따닥따닥.
마법이 섞인 듯한 손가락 움직임과 두드리는 소리, 거기에 미묘하게 짜증을 담아 던진 몇 마디가 펠러한을 기억의 풍경에서 끌어냈다.
“아, 미안하오. 음, 그러니까…… 군역이 시작되는 날을 축하한다고 내 친우들이 주점에서 날 퍼마시게 한 그날, 내가…… 혈육을 남기는 짓을 했다, 이런 이야기입니까?”
“이해하셨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뭐, 자손이 드문 귀족의 혈육을 얻는다면 사창가까지 떨어진 여인에게는 운명을 반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을 테니…… 아마 그런 일에 휘말렸던 거겠지요. 어쨌거나, 그 때문에 펠러한 가문의 혈통은 남았어요.”
“……가문은?”
펠러한은 서류를 펼쳐 놓고 설명을 늘어놓는 이를 보며 짧게 되물었다.
설명하는 이 또한 영령인 듯한데, 그 분위기와 말투에서 유독 ‘혈통’을 강조하고 자작 가문에 대해서는 불운한 사건을 엮으려는 의도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작가의 재산과 직위는 나라에 환수(還收)되어야 했지요. 공식적인 계승자도 혈족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요. 아이를 밴 여자 몇몇이 펠러한 가문의 계승을 원한다고 신청하기는 했지만, 혈통을 증명할 수가 없었어요. 그 무렵 왕가의 상황이 꽤 좋지 않아서, 공식적인 계승자를 두지 않은 경우에는 재산과 직위를 환수하고 증명을 외면하는 책략을 쓰고 있었답니다.”
“책략……입니까?”
살짝 속이 쓰린 기분을 담아 펠러한은 최대한 담담한 태도를 지키며 물었다.
쓰윽, 서류 하나가 펠러한 앞으로 밀리고 답이 나온다.
“로그람의 역대 왕이 모두 현명하고 용맹하지는 않았잖아요. 선조의 유훈을 외면하기도 하고, 그저 혼미한 폭군이었던 경우도 적잖게 있지요. 자작의 시대는 그런 시절이었던 겁니다. 뭐, 그 때문에 신하란 작자들이 냅다 왕을 도살해서 제물로 바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
“뭐라고요?”
“아, 말실수! 잊어요. 지금 자작에게 중요한 일은 후손! 어찌 되었든 자작에게는 후손이 있고, 그 후손을 통해 가문을 복구할 수 있어요. 작위의 복권, 환수되었던 재산의 회복 또한 이뤄집니다. 다만, 자작이 그 후손의 혈통을 확인하고 가문의 회복을 바라야 이뤄지는 일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나랑 자작이 마주하고 면담을 하게 된 거고요. 자,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담담하게 그러나 총명하고 강렬한 영령의 눈빛이 펠러한을 꿰뚫을 듯한 기세로 쏘아지면서 나온 이야기였다.
펠러한으로서는 잠시 멍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본 적도 없지만, 생각해 보려 해도 그조차 쉽지 않은 후손이라는 존재…….
아마도 펠러한이 모르는 사이에 태어난 자식이 성장하여 자손을 이어 나간 끝에 남겨진 핏줄일 터다.
그 후손은 펠러한 자작가에 대해서 알고 있을까?
강철의 기사란 이름을 남기게 된 펠러한 가문의 비전 마법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을까? 가훈이라든가, 가문의 초라하지만 실속 있는 영지에 대해서…… 아니, 가문의 그런 재산이 이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 있기는 할까?
펠러한은 이곳으로 오던 중에 귓가에 닿았던 소문, 현세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영령으로 돌아와 후손을 작살내 버렸다는, 귀족 가문의 섬뜩한 이야기였다.
“어떤 아이…… 아니, 아이가 아닐 수도 있겠군요. 후손이 어떤 성품을 지녔는지 조금이라도 알고 나서 결정할 수 있을까요?”
잠시 고민 끝에 펠러한은 이렇게 되묻고 말았다.
후손을 인정하고 가문을 복원한다면, 강철의 비전 마법 또한 전하게 될 터였다.
그런데 그 후손이란 놈이 불리한 상황에서 홀로 도망치는 성격이라면, 펠러한 가문의 마법은 의미가 없었다. 기왕 후손이 가문을 잇는다면, 강철의 기사란 이름 또한 부끄럽지 않게 할 녀석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꽤나 소소하면서도 큰 욕심이란 것을 바로 깨달았지만, 강철의 기사 펠러한은 어째서인지 이 한 가지 욕심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죽음을 겪으면서 후손에 대해 떠올렸을 때 언뜻 스쳐 갔던 망념(妄念), 만약 자신에게 자식이 있다면 반드시 강철 같은 놈으로 키우리라 다짐했던 욕심이 무럭무럭 커지는 듯했다.
자신을 솜털 애송이라 부르던 군단장, 백작이 들었다면 큰 소리로 비웃지 않았을까?
떠오른 생각에 한숨이 나올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펠러한은 서류를 뒤척이는 영령을 바라봤다. 살아서도 서류나 뒤척였을 듯 자연스러운 모습인데, 어떻게 저리도 밝고 힘찬 영기를 뿜어내는 영령이 되었을까?
펠러한이 그렇게 맥락 없는 의문을 떠올리는 사이, 서류의 영령이 답하고 있었다.
“가능할 듯하군요. 선대 펠러한 자작께서도 당신을 유복자로 남기고 전장에서 사망했지요? 당신을 키운 이는 가문을 떠났다가 교육을 위해 돌아왔던 백부…… 가문의 비전을 갖고 나가 몬스터 헌터가 되었다고 의절당한 분이고. 음, 그분이 남긴 공적이랑, 강철의 기사로서 자작이 남긴 공적이랑 합산해서 보상을 정하려면…… 두 달 정도는 걸릴 겁니다. 그러니까 왕의 마력이 당신에게 허용되는 한, 그때까지 결정을 내리면 됩니다.”
“아…… 그렇군요.”
펠러한은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망령군단으로 일어났고, 돌아와 영령으로서의 형태를 갖추었다.
죽음의 순간에 품었던 망념, 반드시 군단을 귀환시키겠다는 의지로서 싸웠으나 몰살에 이르러 자신을 따랐던 이들을 아무도 돌려보내지 못했다는 자책이 죽어서도 버릴 수 없는 한(恨)으로 남았다.
그 때문에 펠러한은 로그람의 영토가 회복되고 망령군단으로 일어서기가 무섭게 왕도를 향해 돌아왔다. 영문도 따지지 않고 그저 죽음과 함께 품었던 망념, 한을 풀기 위해서.
돌아와 성문 앞에 서고 나서야 펠러한은 온전한 사고가 가능한 영령으로 자신의 형태를 갖출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영령으로서 온전하게 생각하고 활동할 수 있는 신비(神祕)에는 왕의 마력이 소모된다.
서류의 영령, 왕가의 전령 노릇을 하는 이는 펠러한 같은 영령들에게 왕의 마력이 얼마큼 허용되는가를 결정해서 전달하는 중이었다.
후손과의 만남, 죽은 다음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 하는 이들이 대부분일 테니까. 어떻게든 정리가 필요하기는 할 터이고, 이렇게 서류를 다루는 영령이 나타나는 수밖에!
“어…… 자작님, 끝나셨나요? 제가 다음 차례입니다만.”
불쑥 들려온 말에 펠러한은 아까부터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이를 돌아봤다.
서류의 영령이 새치기하지 말라고 질책하던, 남작이었다.
꽤나 조급해하는 모습, 불안해 보이는 눈빛이 펠러한처럼 두 달가량의 여유를 얻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고 이렇게 잠시라도 소모되는 시간조차 아쉬워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거참, 보채지 말라니까! 펠러한 자작, 다른 궁금한 일은 없나요?”
서류의 영령이 남작에게 한차례 으르렁거리고는, 금세 친절한 말투로 포장해서 펠러한에게 다시 묻고 있었다. 그 모습에 펠러한은 문득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낯선 영령이지만 어째서인가 꽤 중요한 역할을 하는 듯한 모습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니, 그 정체가 알고 싶어진 것이다.
서류의 영령은 싱긋 웃기만 했고, 남작이 급하다는 듯이 대신 답하고 있었다.
“여제의 손자 되시는 지혜왕이시잖소! 아, 전 공적이 적어서 급하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