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213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204)
“저기…… 그게 말이죠.”
투란은 격렬하게 열댓 번 눈을 깜박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매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한껏 드러낸 채로.
“사실, 내 기억이 좀 이상하거든요. 어, 그러니까…….”
하지만 어색한 웃음으로 마무리 짓고 싶다는 듯이 말끝이 흐려졌다.
홀시딘은 얼굴 한구석이 파르르 떨리며 울화를 참는 듯이 입술을 깨무는 이빨이 사납게 드러났다.
그 모습에 움찔하면서도 투란은 재빨리 소곤거리듯 이야기를 잇는다.
“어…… 그러니까 기억이 나는 일은 이야기하겠지만 기억 못 하는 일은…… 음, 오락가락해서 헷갈리는 일도…….”
“알아, 아니까 그냥 너 아는 대로 이야기해 봐. 일단 에테온의 괴물 왕자님 이야기부터, 아는 대로 기억하는 대로 그 만남에 대해서 몽땅 이야기해.”
결국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듯이 홀시딘이 주섬주섬 이어지려는 투란의 변명을 자르고 말았다. 언더섀도우에서 일어났던 일, 프릿에게서 투란이 그동안의 일을 어떻게 삭제했는가에 대해 들은 바가 있기에 어느 정도 참작할 수밖에 없었다.
“상아탑의 마스터,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지만 당신에게는 괜찮다고 하더군요. 당신은 투란의 모든 것을 비밀로 하고 지켜줄 수 있다고 말이죠. 아, 투란이 바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어요. 나름대로 열심히 돌려서 이야기한 결론이 그랬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마스터 홀시딘에게는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조금 긴 이야기를 마음껏 들려줄 수 있다…… 이런 겁니다. 뭐, 그것도 요약하면 간단해요. 투란이 왜 언더섀도우에서의 기억을 지웠는가, 그 이유일 뿐이니까요. 마스터 홀시딘, 언더섀도우에 대해서 잘 모르시죠? 상아탑에서 여러 번 도전했지만 시간 괴리로 인해서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점만 확인했지요? 정보를 얻고 축적하려면 언더섀도우에 몸을 담는 수밖에 없으니까, 상아탑으로서는 그 이상 어찌해 볼 도리도 없었을 테고……. 훗, 물론 알지요. 상아탑이 지켜야 하는 영역이 춤추는 산맥, 그 외부의 일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판단이 설 때에 한정해서 알아본다…… 그런 정도는 나도 알아요. 아무튼 투란은 기억을 지우고 나가려는 이유로 일단 ‘시간 괴리로 인해 언더섀도우 밖의 지인(知人)들에게 자신이 이상하게 비칠까 봐.’라는 표면적인 변명을 마련해 뒀지요. 하지만 사실은…….”
언더섀도우,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대륙이 드리운 그림자 아래.
그 미지와 신비, 불가사의로 가득 찬 영역은 짙은 그림자가 어둠으로 물든 세계가 펼쳐져 있다. 시간의 흐름조차 달라지는 그 세계에서 무엇을 만나고 어떤 일을 겪을 수 있는가.
아무도 기억할 수 없는 고대(古代), 잊힌 옛날마저도 현세(現世)로 만날 수 있으며 악몽(惡夢)이나 다름없는 신화나 전설과 격돌할 수도 있다. 그 때문에 언더섀도우 바깥세상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잊혀 분석은커녕 분석할 대상으로도 여기지 않는 유물이 당연하다는 듯이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 언더섀도우의 심부(深部),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수십 년을 버티고 살아 돌아온 몬스터 로드가 투란.
그 안에서 투란은 몰라도 될 일을 알아 버리기도 했고, 알고 싶지만 알 길이 없었던 일 또한 알게 되었다. 세상 밖으로 내보내서는 안 되는 신화와 전설, 그 살아 있는 악몽의 범람까지 겪고 살아남았다.
프릿도 그 전부를 모를 지경이었다.
다만 그 일부를 알게 된 것만으로 프릿은 질릴 대로 질렸다고 했다.
그래서 프릿은 찬성했다.
“그딴 기억, 덮을 수 있다면 무조건 덮어야죠. 그래서 찬성했어요. 가능한 한 오래, 정말 싹 없애 버릴 수 있다면 두 번 다시 기억날 단서조차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지워 버리라고 적극 권했어요, 내가.”
홀시딘도 그 말을 하는 프릿을 보며 마법사로서의 호기심이 저절로 접혀 버리는 것을 느꼈다.
깊이 알려고 하면 오히려 불행과 절망만이 남겨질 이야기이고, 그런 이야기를 간직한 곳이라고 바로 판단할 수 있었다.
“투란에게는 언더섀도우 밖에서 할 일이 있어요. 반드시 해야 할 일이죠. 자신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를 지키는 일이라서 말릴 수도 없어요. 음…… 복잡한 사연은 빼고 간단히 알아야 할 부분만 짚자면, 일단 투란은 자신이 태어났던 곳을 찾아가 봐야 할 거예요. 그리고 가능하면 잃어버린 신분을 되찾아야 해요. 아, 고아에게 남겨진 재산이나 유물이 아니고 신분, 부모가 누구냐 알아내고 자신이 이어받은 핏줄을 확인하는 정도죠. 뭐, 그 정도로 큰일이 날 리가 없잖아요? 굳이 캐묻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몰래 들러서 확인만 할 겁니다. 기억을 지우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앞으로 할 일에 대한 방향성을 세워 둔 여행이니까요. 그다음에는 알드바인으로 돌아갈 겁니다. 당신 곁으로, 마스터 홀시딘과 함께하는 보금자리로 말이죠. 그리고 그 몰래 다녀온 여행의 흔적을 지우려 할 겁니다. 그러니 시침 떼고 지워 버리도록 도와주세요. 이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언더섀도우의 프릿이 상아탑의 대마법사에게 정식으로 의뢰하는 일입니다. 자, 여기 정련된 마석 한 주머니 받으시고…….”
‘상등품이었는데. 좋은 사람이었잖아, 프릿! 그런데 왕은 아니지, 여기 고대왕국의 혈통을 그대로 물려받은 왕은!’
홀시딘은 투란이 원하는 바를 최대한 지원해 줄 생각이었다.
프릿이 넘겨준, 최상등품이라 불러도 무방한 대량의 마석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가 아는 것만으로 위험한 오해에 시달리기 쉽고 이런저런 귀찮은 일이 한가득 몰려올 수 있는 몬스터 로드이기 때문도 아니었다.
홀시딘이 보기에 투란은 어딘가 알드바인과 닮아 있기 때문이었다.
몬스터가 가득한 땅에 홀로 남겨진 도시.
갓 태어나 몬스터가 가득한 산맥을 안식처로 삼아야 했던 아이.
결국은 몬스터를 사냥해 자원으로 삼음으로써 존속할 수 있었던 도시, 몬스터의 정수로 강해지고 자신의 존재 목적을 분명히 하는 몬스터 로드.
조금 뒤틀린 감성이라고 누가 욕할 듯하지만, 홀시딘에게는 닮아 보였다.
그래서 홀시딘은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투란을 지지하기로 결심했다. 거기에 필요한 것이 더 있다면, 프릿이 추가로 마석 보내 줄 테니까 아낌없이 쓰라고 하기도 해서 재정적인 부담도 없다! 이러니 적극 돕지 않을 까닭이 없잖은가?
하지만 속으로라도 절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왕은 숨어 지낼 수가 없다고!’
그러므로 홀시딘은 투란이 아는 바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일은 물론이고 투란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도 주변에서 벌어져 영향을 끼치겠다 싶은 일은 모조리 알아 둬야 했다.
그런데 거기에 갑자기 괴물 왕자라니!
에테온을 갈아엎은 반역왕의 아들은 그냥 왕의 아들이 아니잖은가!
단기간에 춤추는 산맥을 뒤덮은 명성을 그냥 얻을 수 있을 리가!
심지어 괴물 왕자의 행적은 드라고니아의 광분 이후에 사라졌다!
그런 키린과 투란이 대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다는 말인가?
키린은 투란에게 무슨 짓을 했고, 왜 했는가?
마법사의 호기심과 의무가 홀시딘을 달달 볶으며 알아내라고 재촉했다.
숙련된 마스터이기에 홀시딘은 일단 투란에게 마음 놓고 이야기하라고 부드럽게 말할 수 있었다. 목을 조르지도, 밧줄에 묶어 매달고서 두들기며 빨리 토해 내라고 재촉하지도 않고!
투란도 그런 배려를 느낀 모양이었다.
“어, 그러니까 산맥 안에서 헤매다가 곤란할 때였는데…….”
차분히 기억을 더듬는데도 전혀 정돈되지 않은 그때의 이야기를 주섬주섬 흘려 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홀시딘이 상황의 앞뒤를 꿰맞추면서 이야기를 정리해야만 했다.
“흐음…… 그러니까 투란, 키린 왕자가 너에게 오러를 이용해 기억을 이식시켰고 그 덕분에 너는 몬스터 로드로서 오러를 활용하는 법을 배웠다, 이거지? 덤으로 왕가의 교양이라는 기묘한 지식도 생겼지만, 뭣 때문인가는 전혀 몰랐고 말이야. 그러고 나자 키린 왕자는 사라졌다, 넌 그대로 산맥 안에 남아 헤매야 했다……고.”
실속 없는 내용을 다 잘라 버리고 나니, 상아탑의 마법사에게 남은 것은 그 전후 사정을 추정해 보는 일뿐이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혹은 불행하다 싶게도 그 추정에 필요한 단서가 있었다.
그로 인해 홀시딘이 미묘하게 납득하는 듯한 표정을 흘리니, 투란이 바로 묻는다.
“뭔데요? 왜요?”
“……시공의 엇갈림.”
“네? 그게 뭔데요?”
눈을 껌벅이며 투란이 다시 물었다. 듣는 것만으로는 모르겠다는 듯이.
하지만 그 순간에 홀시딘은 투란의 눈동자가 살짝 옆으로 굴렀다가 제자리로 돌아온 것을 봤다. 처음에는 몰랐으나 다시 묻는 말을 꺼내는 사이에 뭔가 기억해 낸 모습!
혀를 차기는 했지만 홀시딘은 투란의 기억이 들쭉날쭉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고 말해 주기로 했다.
“오래전에 드라코눔에 탐방을 갔던 마도사가 있다. 상아탑의 관련자였지. 그때 그곳에서 드라코눔의 예언자에 대해 알아본 일이 있었어. 기묘하게도, 대를 잇는 그 예언자들은 춤추는 산맥으로의 순례를 통해 예지를 얻는다고 해서 말이야. 그리고 어렴풋이 그들의 예언이 시공의 엇갈림이라는 기묘한 장소와 연계된다는 점을 엿들었다고 했다. 그곳에 가서 미래의 자신과 만난다나? 구체적으로 어떤 상징을 이용한 은유적인 대화일 터이니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는 없다고 여태 그렇게 알고만 있었다만……. 투란, 네가 키린 왕자와 그곳에서 만났다면 상아탑이 그동안 축적해 놓은 왕자의 행적에 대한 기록들이 여러 가지로 설명이 되거든.”
“행적?”
“공식적으로 괴물 왕자는 드라고니아의 광분 이후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지. 하지만…… 그 뒤로도 수많은 음유시인들이 노래했잖냐. 괴물 왕자가 어디에 나타나서 무슨 위업을 세웠네 하면서 말이야. 너도 그런 모험담을 꽤 들었잖아! 아무튼 그중 어떤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몬스터 로드가 해냈지만 슬그머니 키린 왕자에게 그 공이 돌아갔네 싶은 것도 있어. 투란 네가 키린 왕자에게 그 모험담에 대해서 나불거렸다면, 키린 왕자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알고 거기 갔을 수도 있단 말이지.”
“자, 잠깐요! 잠깐만요!”
투란이 손을 내밀며 두 눈을 꼭 감았다.
홀시딘은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봤다.
잠시 후, 생각을 정리한 듯한…… 혹은 누군가에게 조언을 듣고 확답을 얻은 듯한 투란의 입이 열렸다.
“와아악! 이런 썩을! 그럼 나랑 괴물 왕자님이랑 오십 년이나 엇갈린 채로 현실에서 만난 거란 말이잖어어어! 우아악! 그럼 키린, 설마…… 나한테 들은 자기 전설을 진짜로 만들고 다닌 거야? 으아아아!”
홀시딘은 경악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자기 두 볼을 두 손으로 꼭 누르기까지 하는 투란을 향해 천천히, 느긋하게 다시 말문을 연다.
“그렇지. 그러니까 투란 네가 키린 왕자에게는 미래를 알려 준 예언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야. 음, 음유시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면 엄청난 무훈시(武勳詩)를 단숨에 짜내려나?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알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안다고 해도, 그 난관을 피하지 않고 역경에 그대로 맞서는 일은…….”
“역경? 잠깐만요, 뭔 역경? 난관? 그게 무슨 말이에요?”
투란이 예민하게 짚어 묻고 있었다.
홀시딘은 그 예민함이 ‘난관’과 ‘역경’을 말하면서 꿈틀거린 자기 표정 때문이란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에테온을 떠난 후에 떠돌이가 된 왕자의 공훈담이라고, 들은 적 있잖아?”
“어, 있죠. 있는데…….”
주춤, 투란이 움찔거렸다.
홀시딘은 씁쓸한 표정으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을 잇는다.
“전설적인 괴물 왕자님을 만났기에 이것저것 다 물어봤다며? 그러면서 정말로 키린이 한 일이 무엇이냐고 어떻게 했느냐고…… 얼마나 이야기했는가도 제대로 기억 못 할 정도로 많이 떠들었다고 했지? 그 모든 이야기가 키린 왕자에게는 예언이고, 예지이며, 자신의 운명을 알려 주는 지침이 되었을 거야. 그래, 그런 일을 미리 알았다고 위험한 일이 안전한 일이 되는 경우는 드물지. 특히나 괴물 왕자의 모험담은 강력한 몬스터 로드라 할지라도 간단히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 대부분이니까. 그걸 알면서도 굳이 거기 부딪치는 일은…… 뭐, 너나 나도 그렇고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피했겠지만 괴물 왕자 키린은 아니지. 투란, 네가 좋아하는 키린 왕자의 이야기에 늘 박혀 있는 서두가 뭐더냐?”
“……에테온의 괴물 왕자님은 용맹하시니, 죽음과 공포를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영웅이라네.”
“그래, 키린 왕자의 이야기는 그 용맹한 영웅이 어떻게 끔찍한 마물을 무찌르고 그 해악을 세상에서 지워 버렸는가, 그런 이야기잖냐.”
“홀시딘…… 그럼, 내가 그런 이야기를 안 했으면…….”
“해야 했을걸.”
“네?”
“미래의 정보를 쥔 얼간이랑 만났는데 그냥 넘어간다? 에테온의 반역왕이 몬스터 로드이든 아니든 첫째인 괴물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했던 이유를 들은 적 없니? 키린 왕자는 늘 자신의 주변을 살폈고 낯선 몬스터조차 철저히 조사해서 대처하는 진정한 사냥꾼이었어. 너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미래의 정보에는 밝혀지지 않은 몬스터의 특성, 약점도 있는데 안 물어봤겠냐?”
“어, 그러면…… 그러니까…….”
“투란, 키린 왕자는 애송이도 아니고 얼간이도 아니야. 스스로 선택하고 그 역경과 난관에 격돌할 수 있는 용기를 품은 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