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215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206)
Epilogue 4. 꿈꾸던 드래곤의 어느 날
“일어나!”
거대한 울림이 공동(空洞)을 채웠다.
공동 또한 거대했기에 울림은 잔잔한 메아리처럼 금방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찾아온 침묵을 향해 낮고 깊은 맥동이 아주 느릿하게 퍼져 가는데…….
“일어나라고, 이 게으름뱅이 잠꾸러기 드래곤아!”
파아앗!
거대한 섬광이 뱀처럼 꼬이며 공동을 가르고 치솟았다.
섬광은 공동의 중심을 관통할 듯한 기세로 뻗어 올라갔으나 금방 어딘가에 부딪쳐 장렬하게 산화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산화한 파편이 공동의 벽 한구석에 닿았을 때다.
콰르릉!
뇌성벽력이 벽을 후벼 파내며 거대한 흔적을 새겼다.
쩌적, 벽에 균열이 번져 갔다.
공동의 높디높은 천장에 균열이 닿는 순간, 커다란 지붕이 떨어지듯이 천장 한 귀퉁이가 무너지며 그대로 추락했다.
그러나 추락은 공동의 중심에 닿지 못했다. 천장 귀퉁이가 어느 높이에 이르자 섬광이 그랬던 것처럼 튕겨 나 허공을 주르륵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공동의 아래쪽에 거대한 틈이 열렸다.
금색의 광휘로 이뤄진 틈은 그 거대함을 고려하지 않고 바라본다면 무엇인가가 실눈을 뜨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 눈은 끝까지 떠지지 않았고 가느다란 틈만 열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 거대함으로 인해 공동 바닥에 마치 금색의 광휘가 강을 이루며 흘러가는 듯한 광경이 새겨졌다.
―이계(異界)의 마도사, 카엘. 만나기로 한 날은 아직 1천 년쯤 더 남지 않았나?
“뭐래, 이 미친 드래곤 님이!”
대놓고 질러 버린 욕설은 그냥 말뿐이 아니라고 증명하듯 또다시 거대한 섬광을 동반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허공이 아니라 저 아래에 새로 흐르게 된 금색의 광휘를 향해 섬광이 찔러 갔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금색의 광휘가 잠깐 퍼져 가는 파문을 머금었다.
―찌르지 마라,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 찌르면 눈이 따갑다.
“일어나라고 했잖아! 더 큰 벼락 마법은 여기 무너질까 봐 못 쓰겠다만, 아예 바닥을 무너뜨려 줄까? 3천 년 전에 그랬던 것 같은데…… 한 번 더 겪어 볼래? 그때보다 덩치가 더 커졌으니, 더 깨끗하게 잠에서 깰 것 같은데?”
―카엘…… 그건 2천 년 전이 아니었던가?
“그래, 이 얼빠진 잠꾸러기야! 벌써 3천 년이라고! 일어낫!”
―으흠…….
쿠르릉, 쿠우우웅.
묘한 굉음과 공동 전체가 뒤틀리는 듯한 진동이 이어졌다.
그리고 금색의 광휘 속에서 백금의 가닥이 튀어 올랐다.
커다란 강에서 갑자기 물고기 한 마리가 튀어나온 듯한 광경, 그 결과는 수십 미터의 백금색 거인이 공중에서 팔짱을 낀 모습이었다.
그렇게 튀어나온 거인은 바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난감한 표정을 또렷하게 띠면서 웅장한 목소리를 울려 낸다.
“카엘…… 어딨나?”
“……가지가지 한다, 진짜.”
거인의 육중한 목소리와 비교할 수 없는 작은 투덜거림이었다.
하지만 거인은 곧바로 백금의 형체를 휙 돌리며 공동의 한쪽, 제법 높은 곳에 돌출된 작은 바늘 같은 바위에 올라선 이를 찾아냈다.
“오랜만이군.”
백금의 거인이 허공을 둥실거리며 다가와 한 말에, 이계의 마도사는 짜증과 울화를 가득 담은 대꾸를 한다.
“잠…… 덜 깼냐?”
백금의 거인이 잠시 눈을 껌벅거리는데, 눈알이 번개처럼 구르고 흔들거리는 꼴이 잠시 정신이 어디론가 외출해 버린 듯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내 눈알이 움직임을 멈추고 그 시선은 2미터도 안 되는 작은 인간, 이계의 마도사에게 고정된다.
“카엘, 정말로 3천 년이로군. 나에게는 겨우 2천 년 쯤…….”
“닥치고, 검토 결과는?”
카엘은 백금의 거인을 향해 침이라도 뱉는 듯한 말투로 보채고 있었다.
거인이 인간의 흉내를 내듯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는다.
“검토?”
“뭐야, 검토도 안 한…… 검토할 부분이 없었다고?”
카엘이 짜증을 더하려다가 흠칫하며 성난 외침을 터뜨렸다.
백금의 거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도하게, 당당하고 명쾌하게 답한다.
“없었다. 왜 그러지? 마치 검토할 부분이 있는데 내가 놓쳤다고 말하고 싶은 모습이로군.”
“너…… 잠 덜 깼지? 지금 대충 잠결에 만들어 낸 정신체를 잔뜩 부풀려 놓기만 한 거지?”
잠깐 백금의 거인을 노려보던 마도사의 눈매가 험악해졌다.
백금의 거인은 흔들림 없이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당당하게 마도사를 마주 보는데, 카엘의 목소리가 나직하지만 아주 또렷하게 새어 나왔다.
“밑 장 좀 빼고 대화할까?”
그 말과 함께 카엘이 들고 있던 지팡이가 스윽 치켜 올라가기도 했다.
순간, 백금의 거인이 바로 팔짱을 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으로 급히 말한다.
“온전한 대화가 가능한 수준으로 내 의식은 분명히 확장되어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섭리의 그물이 흔들려서 좋지 않아! 지금 상태로도 검토하고 분별할 수 있다니까!”
마도사 카엘은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잠시 거인을 노려봤다.
반짝거리는 백금의 광채와 또렷한 표정이 자아내는 생동감과…….
“검토하고!”
카엘은 대마도사의 위엄을 담아 소리 높이 외치며 지팡이를 내리찍었다.
쿠웅.
“분별하는데!”
콰앙.
“왜 적합자를 못 알아봐!”
쿠쿵.
“그리고 너, 덩치 더 키우지 말랬지! 왜 점검 왔던 5백 년 전부더 점점 더 띠룩띠룩 부풀어 가냐고!”
콰릉.
지팡이가 바닥을 찍을 때마다 공동이 울렸다.
금이 번지고 균열이 더 심하게, 여기저기서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공동은 그 균열을 지지대처럼, 새로 생긴 안전한 그물망인 것처럼 견고하게 형태를 가다듬고 지키며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백금의 거인이 그 지팡이의 울림마다 찔끔거리는 기색을 보이며 크기가 줄어들었다. 결국 4, 5미터의 몸집으로 오그라든 다음에야 거인은 카엘이 씩씩거리며 말을 멈춘 틈을 타서 입을 연다.
“띠룩띠룩 부풀지 않았다. 내 몸에는 그런 특성이 없어. 어…… 본론으로 들어가지. 카엘, 쥴이 적합자가 아니란 것은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잖나? 몇 번을 전생(轉生)하더라도 쥴은 쥴일 뿐, 그는 내가 찾는 혼이 아니야.”
주섬주섬 나오는 이야기에 카엘은 노골적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노한 듯하지만 당황함을 그대로 담아 되묻는다.
“쥴 말고! 너 정말…… 아예 못 느끼는 거야?”
“이계의 대마도사여, 자세히 말해 보라. 그대는 대체 어떤 자를 적합자라 이르는가?”
어째서인지 백금의 거인이 비로소 진지해진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카엘은 한숨부터 쉬었고 지팡이를 곁에 그대로 꽂아 세우며 털썩 주저앉았다.
“드래곤, 네가 정말로 몰랐단 말이지. 그렇다면…… 그래, 더스크와 크리스털부터 짚는 것이 맞겠지. 우선 두 녀석, 문장에 삼켜졌는데…… 그건 알겠어?”
백금색 광휘가 거인의 눈동자에서 짙어졌다.
그리고 곧 거인의 입이 달싹이며 대답이 나온다.
“둘 다 어딘가…… 보이드의 영역을 찾아 들어가서 잘 쉬고 있다만?”
“뭐……?”
잠깐 대마도사는 할 말을 잃은 듯이 멍한 모습이 되었다.
그 모습에 백금의 거인이 갸웃거리며, 매우 인간적인 태도로 다시 말한다.
“틀림없다, 둘은 광대한 보이드의 영역을 확보하고 함께 머물……?”
매듭짓지 못하고 말이 멈춰졌다.
대마도사 카엘이 폭소한 때문이었다.
우선 입을 크게 열고 한 박자 늦게 토해 낸 탓에 웃음소리가 뒤늦게 퍼져 나오는 듯한 강렬한 폭소였다. 거의 숨이 막힐 지경에 이르도록 폭소가 이어졌고, 정말로 숨이 막힌 듯한 콜록거림과 함께 잦아들었다.
백금의 거인이 조금 불쾌한 표정을 지은 채 기다리다가 묻는다.
“왜 그러나?”
“적합자가 아니야! 하핫, 아하하핫!”
겨우 쥐어짜 낸 대답에는 다시 웃음이 어려 있었다.
백금의 거인이 한층 더 불쾌해진 표정을 지으며 카엘을 내려다본다.
5미터쯤 되는 몸집을 하고서 지그시 내려다보는 그 자세는 위압적이었고 노골적으로 어째서 웃을 일이냐고 따지는 듯한 태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카엘은 낄낄거리며 말을 잇는다, 조금 더 정돈된 호흡으로.
“드래곤, 정말 모르겠어? 적합자가 아니고 재림이라고! 전생이 완성되었단 말이다! 더스크 라이더와 크리스털 가드는 보이드의 영역을 찾아내서 은신한 것이 아니야! 몬스터 로드에게, 몬스터 엠블럼에 삼켜졌다고! 그 녀석들을 삼키고도 여유가 있어서 보이드 영역을 드러낼 정도라면 증명된 거잖아! 엠블럼을 추적해 봐, 네가 기다리던 녀석이…….”
“카엘, 이계의 대마도사여. 드래곤의 광휘도 흑암(黑暗)도 기동하지 않았다. 드래곤의 문장은 그 꼬맹이들을 삼키지 않았어. 도대체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야? 인간이라서 1만 년도 못 버티고 정신이 붕괴되어 착란……은 아닌 것 같군. 으흠…… 이게 무슨 일이지?”
점잖게 카엘의 말을 자르고 토닥거리는 말투로 떠들던 백금의 거인이 살벌하게 풍겨 나오는 대마도사의 마력에 슬그머니 말을 줄이다가 멈췄다.
잠시 둘이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백금의 거인도, 대마도사도 인정할 수 있었다.
“네 정신은 온전하군, 카엘.”
“너 잠이 다 깬 모양이야, 드래곤.”
말을 뱉고 나서 또다시 둘은 침묵했다.
하지만 곧 백금의 거인이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짓고, 인간적인 몸짓으로 턱을 까닥였다.
그야말로 먼저 말해 보란 그 모습에 카엘이 앉은 자세 그대로 팔짱을 끼며 느릿하게 입을 연다.
“우선 확인부터 하자, 드래곤. 드래곤의 문장은 정말 기동하지 않았나? 광휘도, 흑암도?”
“그렇다. 드라코눔의 마도서조차 침묵하고 있다. 현세의 누구도 용의 문장에 닿지 않았어. 투아란의 문장은 반지 속에서 원형 그대로 침묵하고 있다.”
백금의 거인이 다시금 눈알을 빠르게 굴리며 진동시키고서 말했다.
진지한 태도 그대로 상황을 다시 한 번 검토하고 확인한 다음이었다.
카엘도 그에 못지않은 진지하고 신중한 태도로 말한다.
“더스크 라이더는 사냥당했고, 크리스털 가드도 조건이 맞은 것처럼 문장에 투신했다. 상아탑의 거울이 분명히 그 상황을 기록했지. 둘은 진짜로 몬스터 로드에게 삼켜졌어. 그렇다면…….”
“불가(不可). 몬스터 로드가 자신의 심상에 보이드를 투영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보이드의 속성을 지닌 심상을 엮고, 그걸 아예 심상 차원으로 끌어 올려 내가 제작한 꼬맹이들을 풀어놓는다? 투아란도 그렇게는…….”
단호한 말투로 부정하던 백금의 거인. 하지만 어느 순간에 그 표정 한구석이 슬그머니 무너지며 말이 흐려졌다.
대마도사가 그 훤히 드러나는 표정을 놓칠 리가 없었다.
“왜? 말해, 뭐가 걸리나? 뭔가 짚이는 부분이 있어?”
잠시 백금의 광채가 흔들렸다.
거대한 금색의 광휘가 공동 아래에서 꿈틀거렸다.
드래곤의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눈이 조금 더 뜨인 듯, 백금의 형상이 또렷해지며 조금 더 선명한 질감과 생동감을 머금었다.
그리고 느릿하니 거인의 입이 열리며 한층 더 굵어지고 무거워진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야기……한 적이 있다. 투아란이…… 장난처럼 한 이야기였어.”
어째서인가 머뭇거리는 듯한 말투에 카엘이 재촉한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
백금의 거인은 한숨을 쉬는 듯한 표정을 생생하게 드러내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야기를 꺼낸다.
“내가 자신의 곁에 없다면 투아란은…… 홀로 세계를 멸할 힘을 키우겠다고 했다. 내가 붙여 준 꼬맹이들이 쉴 곳이 되어 주고, 허무까지 움켜쥐고 흔들겠다고……. 비록 그림 폴의 비술조차 터득하지 못했지만, 투아란은 세계를 멸망시킬 허무를 쥐겠다고 했다. 그 허무를 자신의 심상계로 삼는 몬스터 로드로 성장하겠다고…….”
“걔는 대체 왜 그렇게 세계 멸망을 노래한 거야?”
카엘이 질린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백금의 거인은 물끄러미 그런 카엘을 바라보았다. 백금의 광채를 머금은 그 눈알이 구르는 꼴을 보고 카엘은 재빨리 말을 이어야 했다.
“투아란의 개인적인 사정을 잊었다는 얘기가 아냐! 시작은 그런 소망을 품을 만한 인생이었다는 거 나도 알아! 인정해! 하지만 너랑 만난 다음에도 그러고 있었다는 부분이 납득이 안 된다고, 납득이!”
백금의 거인, 드래곤의 사념체가 인간적인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다.”
그 또한 투아란에게 자주 물은 바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