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216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207)
“투아란, 아직도 미운가?”
“미워, 다 죽여 버릴 거야! 다 멸망시킬 거야!”
“……언제나 같은 대답이었지. 인간들 앞에서, 또 다른 살아 있는 것들 앞에서 거짓으로나마 웃을 수 있게 되었을 때도 투아란이 내게 보인 진심은 한결같았고 변함없었다.”
“증오의 화신이 아니라 그냥 증오인가……. 에잇, 몰라! 그보다, 투아란이 너와 닿을 수 없는 경우라면 스스로 보이드를 키워 내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단 말이지? 그리고 넌 그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
대마도사의 울화가 섞인 말은 추억에 잠기는 듯하던 백금의 거인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금방 끝났다.
“그래, 나는 투아란의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지난 1만 년 동안 그대가 노고(勞苦)를 통해…….”
쿠웅, 텅!
말하던 거인의 백금 머리통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허공에서 투명하고 커다란 손이 나타나 주먹질을 한 때문이었다.
그 손은 카엘의 한쪽 손과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고, 곧 울분이 섞인 목소리가 왜 때렸는가를 말한다.
“1만 년 아니야, 이 멍텅구리 드래곤아! 겨우 8천 년 지났거든! 내가 말했지, 진짜 1만 년 넘기면 그냥 너 죽이고 간다고!”
포악한 말투에도 백금의 거인은 딱히 성난 듯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갑자기 마력의 손에 맞아 삐딱해진 머리를 바로 세우며, 차분하고 담담하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하던 이야기를 이어 나갈 뿐이다.
“8천 년이나 계속된 그대의 노고로 끌어모은 모든 문장이 증명하고 있잖은가? 몬스터 로드가 자신의 결손(缺損)을 통해 보이드의 속성을 심상에 투영한다 한들, 그것은 그저 파편도 못 되는 흉내일 뿐이라고. 증명은 그대가 했다, 카엘, 이계의 대마도사여.”
“있는 것만 확인했지, 몬스터 엠블럼이 변이된 경우까지 모두 확신할 수는 없다고도 했잖아. 애초에 문장 안에 소망을 이루는 대마법이 섞여 있으니까. 모든 가능성이 열린 채라서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어.”
“그래서 변이의 가능성을 조금 더 부추겨 보도록 했지. 그러고 보니 그 실험은 어떻게 되었지? 3천 년이면 적어도 서너 번은 확실하게 새로운 형태로 변이된 문장이 나타났을 만도 한데?”
호기심이 거인의 백금빛 눈동자 속을 굴러다녔다.
카엘은 그 눈동자를 마주하고 짜증이 가득 어린 한숨을 길게 내쉰 다음, 대답한다.
“아주 추잡스럽게 끝났어. 내가 설정해 놓은 마법은 매번 엉뚱한 녀석이 걸려서 허튼수작으로 끝났지. 내가 키웠는데 네가 이상하게 뿌려 버린 마도서에 영향을 받은 놈은 황금매라는 괴이한 결과물을 내놓았다만, 황금매를 품은 놈이 계승된 문장을 가진 녀석에게 시원하게 맞아 죽었고. 그 전에 온갖 사고를 다 치고 다닌 바람에 거의 수습이 안 될 지경이라 그냥 둬 버렸다니까.”
“수습이 안 돼? 지금까지?”
문득 묘하다는 듯이 거인이 고개를 숙이며 몸을 기울인 채로 묻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덩치는 4, 5미터이지만 그 안에 담긴 존재력만큼은 드래곤인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그 형상을 향해 카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변천(變天)이 이뤄지지 않았으니까. 그 영향력으로 이래저래 색다른 방향으로 시대가 변화해서 이전과 꽤 다른 상황이 이어졌지. 그런 상황 중에는 너의 꼬맹이들이 삼켜진 일도 있어. 그러니까…… 난 재림의 가능성을 높이 두겠다.”
“변화가 그리 극심한가?”
거인의 물음은 단순했다.
하지만 카엘은 잠시 턱을 긁적이며 생각을 하고서야 대답한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춤추는 산맥 이외의 곳에서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해서 딱히 큰 변화가 없다고 해야겠지. 하지만 춤추는 산맥의 변화는 아주 격렬해. 그 격렬함이 그림자 아래에 이를 정도로 말이지.”
“그쪽으로는 그대가 소환한 일족이 방벽 노릇을 하는 것 아니었나?”
“했지. 했는데도 격변하더라고. 무엇보다…… 에테온에 아주 희한한 반역자가 나타났다는 점이 특별하다고 할까? 도적의 보물을 이용해서 왕실의 고대 마법을 속여 왕이 된 경우는 전에 없었으니까. 그로 인해 그 아들마저도 특별해진 듯하고……. 에테온의 변화는 춤추는 산맥과 그 주변에 크게 영향을 끼쳤어. 그래서 이전과 같은 범람도, 괴변도 없어진 것 같고…… 브로큰 킹덤 쪽을 덮쳐야 할 사육자의 가축들이 중간에 뛰쳐나와 도륙당하기도 했고…… 아, 사육자도 도살당했지.”
“사육자가? 몇 번의 변천에도 항상 버텨서 상수(常數)로 여겨졌던 그 괴물이 도살을 당해? 변이해서 바뀐 것이 아니고 정말 죽어 버렸다고?”
“어.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거대한 몸뚱이에 세균 한 마리 투척해서 병사(病死)시킨 꼴이었지. 그 세균이 커져서 잡아먹었다는 점은 제법 특이한 상황일걸.”
“그럼 그대가 세워 둔 울타리는? 사육사를 지켜보고 변화를 줄이기 위해 배치해 놨던 것은?”
“음…… 실은 내가 거기서부터 이상한 점을 잔뜩 찾아냈거든. 박살 내거나 죽이거나 한 것이 아니라 그걸 삼켜 버렸더라고. 정말 기대도 안 한 특이 현상이었잖아. 그래서 그걸 쫓았는데…….”
“잠깐!”
거인이 백금빛 손바닥을 지붕처럼 카엘의 머리 위로 드리우면서 말을 멈추게 했다.
얼핏 보면 바로 찍어누를 듯한 그 손바닥을 카엘이 찌푸린 낯으로 올려다보는데, 거인이 눈동자를 요동치며 휙휙 굴리다가 웅장한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다시 입을 연다.
“이계의 마도사여, 그건 분명히 아르고누스이지 않았나? 천안(千眼)의 왕으로 소환해 그대가 정밀하게 세공한, 그 규격에서 벗어난 이단의 몬스터가 누군가에게 삼켜질 수 있던가?”
“그러니까 특이 현상이라고 했지. 나도 기대 안 했다니까. 한 번도 없었던 일이라 예측도 못 했고.”
어깨를 으쓱하며 카엘은 다시 팔짱을 끼고 고심하는 백금의 거인을 올려다봤다.
4, 5미터의 그 체격 안에 무수한 빛이 명멸하는 것이, 백금 거울에 온 세상이 담겨 반짝이는 듯한 기묘한 모습이었다. 이제는 단순히 드래곤의 사념체가 아니라 백금의 거인 그대로의 실체라는 느낌이 짙게 피어났다.
카엘이 가만히 기다리는 사이, 거인은 복잡한 생각을 겨우 매듭지은 듯이 입을 연다.
“아르고누스는 용의 문장이 아니면 수용 불가능한 것으로 알았다. 그대가 소환해 배치했으니, 그 또한 가로막고 있던 사육자처럼 상수일 수밖에 없다고 여겼지. 몇 번의 변천 속에서 그런 상황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응, 그러니까 난 재림이라고 보는 거야. 드래곤 네가 말한…… 무한한 가능성을 실현시킨 자, 몬스터 로드로서 드래곤의 예상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면 투아란이어야 한다며? 그건 네가 직접 한 이야기야. 너의 상상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투아란이라고 했지.”
카엘이 대마도사다운 말투로 단정 지었다.
거인은 백금빛 형상을 한층 더 반짝이며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 또다시 깊은 검토와 사고가 이뤄졌다.
그리고 다시 거인이 입을 연다.
“용의 문장은 깨어나지 않았다. 광휘도, 흑암도 정적만을 유지한다. 나의 투아란이 재림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투아란은…… 그 혼이 심연의 각인과 닿기만 하면 반드시 용의 문장을 깨울 터이니. 하지만 카엘, 나는 투아란이 그런 조건에서 벗어났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가 없다. 어이없다 여길지 모르겠다만, 난 투아란이 내가 부여한 모든 제한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진실을 부정할 수가 없어.”
“옳은 판단이야. 자폭해야 할 분신인 너에게서 진정한 드래곤의 본질을 일깨운 녀석이잖아. 분신으로 원형이 정한 규율을 따라야 할 너를 일깨워서 자폭을 막고 드래곤으로서 본체를 능가하게 했으니, 그 시점에서 네가 열심히 꾸려 둔 마법의 배려마저 피해 나갈 수 있다고 증명한 셈이지. 그렇잖아?”
“그래, 분명히 그렇지…….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어? 어…… 그게 좀 애매해.”
백금의 거인이 고개를 숙이며 지그시 대마도사를 내려다본다.
“마도사……여?”
그 가늘어진 눈길이 저 아래 흐르는 금빛의 강과 닮은 듯한데, 그보다 먼저 거인의 백금빛 눈알이 뚝 떨어져 인간인 대마도사를 찍어 뭉갤 듯한 분위기였다.
카엘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이고 저 아래, 너무 거대해서 이제 살짝 뜬 실눈만으로 수 킬로미터의 강이 놓인 듯한 몰골이 된 드래곤을…… 그래 봐야 결국 눈꺼풀 언저리에 불과할 범위를 손짓하며 말한다.
“너 못 움직이지? 이젠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지?”
“……그렇다. 변천으로 이 세계의 시공을 역전시킬 수 있어도, 시간을 되돌려 세계를 다른 방향으로 인도해 되풀이할 수는 있어도, 내 몸의 성장을 되돌리거나 멈출 수는 없다. 이런 상황을 예상했기에 그대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대마도사여.”
“사념체도 함부로 밖으로 못 빼지?”
“그래, 내 존재력을 담은 것은…… 이제 이 세상 어디에도 함부로 내놓을 수 없게 돼 버렸지.”
묻는 족족 순순히 인정하는 거인이었다.
그때마다 대마도사는 얼굴이 실룩이며 울화와 짜증이 늘어나고 있었지만, 백금빛 거인에게 미안한 낌새는 티끌만큼도 없었다. 그저 담담하게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인다는 듯했다.
결국, 울분을 못 참은 카엘이 거칠게 말한다.
“그러게 왜 자꾸 띠룩띠룩…… 젠장, 가장 쉬운 방법이 널 끌고 가서 덜렁 그 특이한 녀석 앞에 내놓는 거잖아! 변천할 때 그 몸뚱이 좀 줄일 궁리를 해 놨어야지! 아, 정말!”
“투아란은 내가 드래곤으로서의 본질을 잃지 않기를 바랐다. 시공의 역류에도 성장하며 모든 시간 속에서 하염없이 성장해 저절로 세계를 파괴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엄청 좋아했지. 내게 결코 성장을 멈추지 말아 달라고 거의 1년을 쉬지 않고 매일 간원할 정도였어.”
“이봐요, 드래곤! 그런 걸로 날 납득시켜려고 하지 마!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고! 열받아 뒈질 것 같단 말이야! 그 바람에 내가 대체 얼마나 골탕을 먹는데! 변천까지 저절러 놨으면 최소한 탐색이 끝날 때까지…… 아니, 혼이 돌아와 완전히 안정될 때까지만이라도 성장을 멈췄더라면 이거 처음 1천 년이 끝나기 전에 마무리 지었을 일이라고! 아오, 다시 생각해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짜증 나!”
으르렁거림이 뒤섞인 투덜거림을 가만히 듣던 거인이 마도사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고정한 채 간략하게 대꾸한다.
“그대가 나를 죽이면 아마 수천억만 년을 노력해도…….”
“알아! 나도 못 돌아가겠지! 내가 온 곳으로, 내가 소중히 여기는 세상으로 나도 귀환 못 할 꼴이 되니까 그거 피하겠다고 널 돕는 중이잖아! 그러니 협력 좀 하라고, 협력! 정말 그렇게 계속 키워야겠어? 차원 폐쇄해 놓고 자꾸 질량을 처높이는 탓에 세계가 계속 흔들거린단 말이야! 그러니 변천으로 시공을 되돌려놔도 너란 변수가 모든 상황을 계속 망가뜨린다고 몇 번을 얘기하냐!”
“……카엘, 그대는 나란 변수에도 불구하고 찾을 수 있잖은가. 내가 투아란과 행한 맹세를 지키도록 도울 수 있잖은가.”
“그래. 돕는데, 계속 훼방을 놓고 계시죠! 가장 좋은 방법에 이렇게 협력을 못 해 주겠다니, 어쩔 수 없이 두 번째 이야기로 넘어가겠어. 그 여자, 못 찾아?”
화아앗!
한숨과 여유로 툭 던져진 물음, 카엘이 말끝에 살짝 붙인 간단한 물음은 백금의 거인이 온몸을 떨게 만들었다. 그 서슬에 백금 광채가 환하게 번져 나가 거대한 공동이 얼마나 광대한가를 드러내 주었다.
그리고 확고한, 너무나도 고집스러운 대답이 거인의 입에서 툭 떨어져 나온다.
“찾고 싶지 않다. 찾을 수도 없다.”
카엘은 분노를 가득 머금고 억누르며 자제하려 애쓰는 거인을 가만히 바라봤다.
지금 거인의 표정은 드래곤이 아닌 순수한 인간에 한없이 가까웠다.
비탄을 머금어 분노하고 원한을 지울 수 없어 고통스러워하는…….
“그 여자는 투아란의 파편과 닿으면 바로 움켜쥘 수 있잖아. 그 파편만 추적할 수 있었어도…….”
“불가.”
“고집쟁이, 멍텅구리, 얼간이! 바보!”
“불가!”
“너, 암컷이지?”
“……카엘, 드래곤에게 성별 따지는 바보짓을 어디서 배웠는가? 이전에는 하지 않던 짓인데…… 설마 그대 또한 특이 현상에 휩쓸렸는가? 이계의 마도사여, 그대 괜찮은가?”
“괜찮을 리가 있냐! 어우, 짜증 나아아앗!”
카엘은 머리를 쥐어뜯고 흔들고 벌러덩 누워 발로 허공을 걷어차며 발광하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이는 아주 잠깐이었고, 곧 발딱 일어나 똑바로 앉으며 순식간에 진지하고 근엄해진 표정과 태도로 말을 잇는다.
“좋아, 안 되는 일에는 매달리지 말자! 그러니까 투아란의 순수한 호감과 호기심을 배신하고 냅다 심장에 칼을 꽂아 혼백을 흩어 놔서 혼령조차 못 찾게 만든 그 못된 여자를 이용한다는 두 번째 방법도 폐기하자고! 그렇지, 그래야지?”
“카엘, 충분히 불쾌하다. 그 여자 얘기는 그만 멈춰 다오. 그대에게는 이미 세 번째 안이 있잖은가? 뭔가, 그 세 번째 수단은? 이 특이한 시대에 어울리는 세 번째 수단을 어서 말해 보라.”
거인의 다독이는 목소리에는 한껏 유혹하는 마력도 실려 있었다.
카엘은 헛웃음과 함께 손짓으로 그 마력을 흩으며 대답을 꺼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