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25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25)
콰르르!
검게 물든 폭포가 피어나지 않는 꽃봉오리를 잔뜩 품은 채로 시끄럽게 떨어져 내렸다. 폭포의 격류에 휘말려 그냥 으깨지는 꽃봉오리가 있는가 하면, 으깨지기 전에 봉오리를 열고 잠깐 눈알을 굴리며 속을 보인 녀석도 있었다. 그러나 눈알은 시커먼 격류에 물들며 아무것도 못한 채로 그냥 깨져 나갈 뿐이었다.
폭포가 떨어져 내려 이뤄진 웅덩이는 주변으로 번지고, 여러 갈래를 따라 꽃봉오리를 실은 물을 흘려 보냈다. 길고 긴 여행을 대비하는 듯, 무사히 격류를 타고 떨어져 내린 꽃봉오리는 단단히 꽃잎을 조인 채로 작은 뿌리와 줄기를 흔들면서 헤엄치는 듯한 꼴을 보이고 있었다.
투란은 잠시 공중에서 이를 내려다보다가, 웅덩이 주변을 울타리처럼 둘러친 바위 하나를 골라 내려섰다. 하루를 꼬박 펼쳤던 드레이크의 어린 날개를 접는 순간, 등이 짜릿한 느낌이 찾아왔다. 날개는 거뜬한데, 정작 그 날개에 매달려 있던 몸—사람의 몸—이 욱신거리는 꼴이었다.
‘아오, 그냥 꼬리까지 쭉 다 바꾼 채로 날 걸 그랬나.’
잠깐 낑낑대는 생각부터 하고, 투란은 일단 자신이 선 바위와 크게 파인 웅덩이, 거기서 고였다가 흘러 나가는 물과 꽃봉오리를 다시 둘러봤다. 위에서 내려다볼 때와 다른, 웅덩이의 거대함이 새삼 느껴졌다.
멀리서 볼 때보다 훨씬 크고 굵고, 높은 산의 아래편 한쪽인 것을 자랑하듯 웅덩이는 투란에게 어느 정도는 호수에 가깝다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떨어져 내리는 검은색의 폭포는 거의 구름을 몇 층으로 꿰고 올라간 산의 허리 어름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보였으니, 눈에 보이는 광경과 귀로 스며드는 물소리가 새삼 몸으로 느껴졌다.
잠시 투란은 흘러가는 꽃봉오리를 바라보면서, 소리와 다른 여러 가지 감각에 주의를 기울였다. 주변에 특별히 이상한 것은 없는가, 위에서 내려다봤을 때와 다른 점은 없는가.
폭포의 격류가 일으키는 소용돌이에 으깨지는 꽃봉오리가 생각보다 많았고,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보라색 안개, 간간이 터지는 작은 빛줄기가 물에 삼켜지는 광경 등이 조금 심하게 보일 뿐이었다.
‘하아…… 이거 또 날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쉬어!
‘에?’
—하루를 꼬박 난 것이 처음이다. 아무리 드레이크의 날개라 해도, 다 자란 것도 아닌 어린 녀석의 날개를 썼잖아. 무조건 쉬라고!
‘흠…….’
투란은 드라고니아의 제안에 머리를 긁적이기부터 했다.
여기 오는 것을 굉장히 달갑게 여기지 않는 낌새는 충분히 느끼게 해 준 드라고니아였다. 아무래도 투란이 말썽의 한복판을 향해 쳐들어가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기는 듯했다.
‘뭐, 어차피 이 산을 넘으려면 일단 쉬기는 해야겠지. 날개는 몰라도 난 확실히 힘드니까.’
투란은 바위에 앉으며 고요하게 숨을 골랐다.
바위는 높았고, 발아래로 몇 미터 아래쪽에서 물거품이 피어나며 물이 흐르는 축축함이 느껴졌다.
—이 산을 넘는다고?
투란이 쉬고 나서 조금 있다가 나온 드라고니아의 물음이었다.
‘응? 어, 넘을 거야.’
—여기 있는 뭔가를 찾는 것이 목적 아니었나?
‘뭐, 그것도 있지만.’
투란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넓고 커서 하늘까지 올라가는 기둥 같은 산을 바라봤다. 저 멀리서 볼 때는 꽤나 가늘게 올라가서 바늘처럼 뾰족한가 싶었던 것이 지금 앞에 와 있으니 정말 큰 기둥이란 점은 새삼 신기했다. 그것도 그냥 기둥이 아니라 중간에 울퉁불퉁한 형상,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폭포의 기묘한 줄기가 꾸불거리며 위로 잔뜩 이어지는 꼴…….
분명히 드레이크의 기억 속에 남겨져 있는 경계의 기둥산이었다.
‘이 산을 거쳐야 이 늪이랑 숲, 강에서 벗어날 수 있거든.’
—이 산을 거쳐야?
‘응. 드레이크의 기억에서 엿봤어. 이 산을 거쳐야 계속 변하지 않는 땅, 골짜기, 숲이 있는 곳으로 나가. 내가 지나온 곳은 여기까지, 계속 쉴 새 없이 변해서 거리가 늘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는 느낌이었는데…… 이 산을 지나면 그 느낌이 굉장히 느리게 변해. 드레이크가 기억하는 느낌이 그랬어.’
—그렇군. 단지 호기심 때문에 온 것은 아니란 말이군?
‘아니,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야.’
—지나야 할 곳이기도 했으니 일단 왔고 말이야.
‘그래.’
살짝 투란은 한숨을 쉬다가 바위에 몸을 누였다.
축축한 기분이 등을 덮었다가 곧 상쾌함으로 바뀌었다.
오롯하게 악마의 심장만을 형성한 채로, 투란은 잠시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가에 살짝 구름을 관통하는 산의 광경이 비췄다. 위에서 아래를 볼 때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 솟아났다.
시끄러운 물소리가 다른 것들을 모두 잡아먹는 속에서 투란은 드레이크에 대해 차분하게 되새겼다.
‘너네는 골드 드레이크를 광금룡이라고 불러?’
문득 떠오른 궁금함이 바로 물음으로 튀어나왔다.
—골드? 골든 드레이크라고 하지 않던가?
의아해하는 되물음이 나왔다.
‘그거나 그거나…….’
살짝 투란의 입술이 삐죽거렸다.
—루미널 골든 드레이크(Luminal Golden Drake), 인간 마법사들이 붙여 놓은 정식 품종 명칭이다. 연금술 쪽에서는 ‘광금룡’이라고 하는 것 같더군. 그쪽이 드레이크의 품종 분류로는 더 많이 쓰이는 것 같던데…….
‘루미널?’
—반짝이는 빛의 속성을 지녔다는 의미다.
‘어? 골드…… 골든 드레이크가 빛의 속성을 지닌 거였어?’
—그래, 그중에서도 다른 골든 드레이크 품종보다 더 짙은 반짝이는 빛의 속성이라는 말이야.
‘엥? 다른 골든 드레이크 품종은 또 뭐야?’
—너희에게 잘 알려진 것으로는 강금룡(鋼金龍)—메탈릭 골든 드레이크—의 일족라든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경금룡(鏡金龍)—미러드 골든 드레이크—의 일족 같은 것도 있지.
‘골든 드레이크가…… 전부 내가 만나고 삼킨 것처럼 생겨 먹은 거 아니었어?’
—뭐? 투란, 반짝거리는 금빛이라고 다 똑같은 놈인 줄 아는 거냐?
‘난 딴 거 본 적이 없다고!’
—비슷하게 생겼어도 특성이 아주 다른 놈들이다. 품종 명칭이 다른 이유도 그 때문이지. 네가 삼킨 광금룡의 일족은 경금룡의 일족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보기 힘든 품종이다.
한숨을 쉬는 듯한 드라고니아의 말이었다.
투란은 멍하니 하늘을 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무슨 차이가 있는데……?’
궁금함이 폭포의 소음 속에서도 또렷하게 피어올랐다.
—포톤 거스트, 이건 광금룡만의 특징이지. 그리고 강철보다 더 강한 비늘, 그게 강금룡만의 특징이다. 그리고 백금의 비늘에 황금의 윤곽을 씌운 듯한 비늘 가죽을 지닌 것이 경금룡의 특징이다. 경금룡의 일족은…… 자신을 은폐하고 감추는 데 아주 뛰어나다. 시각적은 은폐는 거의 모든 시야에서 자신을 감출 정도라더군. 쉽게 말해, 안 보이는 놈이란 이야기지. 이게 가장 큰 특성의 차이이고…….
선득선득, 눈가를 스쳐 가는 안개의 습기를 느끼면서 투란은 드라고니아의 길고 긴 잔소리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골든 드레이크, 그 품종 셋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데 드라고니아는 꽤나 길게 늘어놓고 있었다. 투란으로서는 과연 그런 녀석들을 만날 일이 있을까 의아한 상황이었다.
‘다른 드레이크라고 해 봐야, 불그스름한 놈 하나 겨우 만난 적 있는 것 같은데…….’
쏟아지는 졸음 속에서 투란은 뚱하니 생각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드레이크의 삶 속에서, 동류 혹은 동족이라 할 법한 다른 드레이크를 만난 일이 거의 없었다. 기억 속에 선명한 것은 붉은 드레이크 한 마리를 놓고 앞발로 후려 팬 정도가 고작이었다.
‘음, 슬슬 남이 잡아 놓은 먹이에 입을 대려던 놈이었지.’
이 산 너머 저편, 평원과 숲의 틈새에서 있었던 일이다.
알이 생겨나기 전, 꽤나 오래전에.
돌연 투란의 눈이 크게 떠졌다.
뒷덜미가 따끔거렸고, 바위에 댄 몸의 곳곳에 엉겨 붙은 느낌이 찾아왔다.
‘어라?’
곧 투란은 몸에서 거둬지는 덩굴줄기를 느꼈다.
자는 동안 바위에 찰싹 들러붙게 흘러내린 악마의 심장 줄기가 회수되는 중이었다. 즉, 투란은 방금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이 아니란 듯이다.
‘얼마나 잔 거야?’
여전히 소란스럽고 웅장하게 쏟아지는 폭포, 거기 함께하는 꽃봉오리, 주변은 딱히 변한 꼴이 없었다. 몇 년이 지나도, 몇십 년이 지나도 이 모습일 듯이 보였다.
—여섯 시간 정도 잤다.
드라고니아가 대답을 꺼냈다.
‘그렇게나?’
투란은 멋쩍고 어이없었다.
잠깐 드레이크의 품종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천천히 일어서며 투란은 팔다리를 뻗어 봤다.
이제 다시 날아오를 때다.
콰르르르르, 콰앙!
물소리 사이로 거센 드레이크의 날갯짓이 섞였다.
‘음, 다른 드레이크도 이렇게 날려나?’
한껏 부풀듯이 배어 나오는 부양력을 느끼면서 투란은 갸웃했다.
잠결에 흘려들었던 이야기가 슬그머니 투란의 뇌리로, 가슴에서 치솟아 밀려든다. 드라고니아의 목소리가 왠지 아련하게 멀었던 이전처럼 울렸다. 지금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말한 것을 되새기는 중임을 알려 주듯이.
—광금룡의 일족은 빛을 바람처럼 내뿜고 흡수한다. 하지만 강금룡의 일족은 번개처럼 한 번에 쏘아 내는 볼트 플래시를 뿜는다. 일격의 파괴력이란 측면에서는 강금룡 일족의 볼트 플래시가 훨씬 자극적이고 강하지만, 포톤 거스트는 그걸 그대로 맞받아 흩어 놓을 수 있다. 반면, 강금룡 일족의 비늘은 금괴 같으면서도 금보다 훨씬 높은 강도를 지녔지. 그들의 발톱이나 이빨도 마찬가지라, 달라붙어서 격돌하거나 할 경우 광금룡 일족이 그야말로 뼈와 살이 갈라질 거다. 하지만 날개에 담긴 특성 때문에 강금룡 일족은 광금룡 일족보다 느려서 그렇게 싸울 일은 없을 거야.”
‘가만있어도 날개에서 떠오르는 힘을 뿜어내는 것은 광금룡 일족뿐이라 했지.’
투란은 기억해 냈다.
빛과 바람을 품고 발휘하는 능력은 광금룡—루미널 골든 드레이크—의 것이라고.
강철보다 강한 금색 비늘과 이빨, 뿔, 발톱을 지녔고 인간에게 가장 잘 알려진 놈은 강금룡—메탈릭 골든 드레이크—이었다.
파아아아아!
경금룡 일족은 다시 한 번 날갯짓을 하며, 투란은 생각을 멈춘 채로 눈앞에 주의했다.
—저게 뭐지?
투란보다 먼저 드라고니아가 당혹스러운 물음을 토해 냈다.
‘너도 몰라?’
슬그머니, 많이 아는 드라고니아에게 기대고 싶었던 투란은 조금 삐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서 생각을 끊고, 눈길을 확 잡아끈 것!
더 높은 곳에서 은색을 머금은 것처럼 반짝이며 쏟아져 내려오는 물의 장막 속에서 시커멓게 꾸물거리며 꿀렁대는 듯이 움직이는, 보기만 해도 끈적끈적한 덩어리가 꽃봉오리를 툭툭 뿜어내고 있었다.
한 번에 하나씩도 아니었고, 꿀렁꿀렁하는가 싶으면 수십 송이가 한꺼번에 물에 뒤섞이면서, 시커먼 색과 함께 은색의 폭포를 물들이면서 저 아래를 향해 낙하하는 광경이었다.
어떻게 보든, 일단 눈깔꽃을 질질 흘려 내는 것은 저 시커멓게 꿀렁대며 끈적끈적해 보이는 덩어리였다.
‘흠, 눈깔꽃은 이렇게 생겨나나.’
투란은 일단 떠올릴 수 있는 생각부터 해 봤다.
물론 드라고니아가 바로 발끈했다.
—아니거든! 눈깔꽃은 식물 계통이고, 포자를 통해 바람을 타고 번져서 땅에 씨앗이 닿은 다음에 뿌리내리고 보통 꽃처럼 자란다! 도대체 저게 뭐야!
‘너도 모른다며. 내가 알겠어?’
투란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고, 드레이크의 어린 날개가 꼿꼿하게 펼쳐지면서 푸르스름한 눈이 되어 갔다. 딱히 올라오면서 뭘 자세히 볼 필요가 있을까 했지만, 이제는 이 물의 장막 너머를 다가가기 전에 봐 둬야 했다.
시커먼 덩어리, 물의 장막 너머에 자리 잡은 것의 뒤로 보다 깊게 열린 공간이 보였다. 사람의 눈으로는 물을 관통해서 제대로 볼 수 없던 헝클어지는 광경이 드레이크의 눈동자에는 아주 선명하게, 입체적인 구조를 확인할 수 있게 보였다.
‘꽤 깊어 보이네?’
—들어갈 거냐?
드라고니아는 다 제치고, 일단 투란의 다음 행동부터 염려하는 물음을 던졌다.
혀를 날름하고, 투란이 날개를 살짝 좁히며 기울였다.
쏴아아아아!
귓가를 덮치는 은색 장막을 넘어, 투란은 시커먼 덩어리가 꾸물거리는 어둡고 깊은 동굴 속으로 쏘아지듯 들어갔다.
드라고니아를 향한 대답은 뒤늦게 투란의 마음에서 크게 울려 나오니.
‘제대로 이상한 놈이 있잖아! 먼저 시비건 놈이라고, 이놈이!’
영토를 침범당했지만, 어린 드레이크 때문에 참아야 했던 어른 드레이크의 분노가 투란의 외침 속에서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