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27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27)
드레이크가 본능 속에 각인했던 기억의 한 자락이 치솟아 올랐다. 투란에게는 아련하게 멀고 까마득하니 스쳐 갔던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는 듯이 생생하게 마음을 울리며 밀려들어 왔다.
드라고니아가 외치는 소리는 뇌리에서 아련하게 멀어지듯 느껴졌다.
‘이 안에 들어올 때부터 뒤틀려 있었네.’
이제 투란은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단정하지 못한 감각, 이상하게 물렁거렸던 발, 느닷없이 약해져 버린 듯한 ‘악마의 심장’ 껍질까지!
다 자란 드레이크의 정수를 잃었고, 그 능력은 이제 씨앗이나 다름없는 어린 드레이크의 정수를 통해서 서서히 오랜 시간에 걸쳐 키워야 했다. 하지만 어린 드레이크와는 무관하게 투란은 정신 깊이 각인된 드레이크의 ‘삶’을 기억할 수 있었고, 이는 본능처럼 치솟는다.
‘이거 겪은 적이 있었네.’
드레이크의 발톱과 발가락 사이를 휘감으며 비늘 사이로 스며들던 끈적이는 검은 것, 물에 담가 떨치려 해도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불꽃으로 으스러뜨리려 했지만, 잠시 약화되었다가 다시 커지는 괴상한 흐물거림…… 이를 떨쳐내기 위해서 아주 특별한 늪까지 찾아갔고, 그 늪에 온몸을 담가야 했었다. 오래 몸을 담그고 있으면 드레이크의 비늘마저 벗겨내고 녹여낼 늪이었고, 거기까지 가서야 끈적대며 흐물거리는 검은 것은 위축되듯이 뭉쳤다. 그다음에 드레이크는 자신의 온몸을 휘감는 불꽃을 며칠간 계속해서 불어냈다. 플레임 버스터와 버닝 미스트의 되풀이되는 불길을 통해 겨우 떨쳐냈던 끈적임과 끈질긴 것…….
그것이 바로 지금 투란이 만난 이 검은 진창이었다.
이 녀석의 특징은 일단 스며든 다음에는 말랑거리며 억센 가죽처럼 변하면서 파고든 자리를 지키며 버틴다는 점이기도 했다.
투란이 지금 선 바닥처럼, 가죽인 부분을 형성해서…….
‘다른 가죽이다. 하지만 같은 꼴이야.’
드레이크가 겪었던 검은 진창의 가죽은 보라색이었고, 어떤 도마뱀의 것처럼 독성까지 품었다. 드레이크에게는 별로 효과가 없는 독이었지만, 스며든 다음에 가죽으로 막아 버티는 것은 상대하기 꽤나 까다롭다.
그렇게 한바탕 고생한 다음, 드레이크는 이 가죽으로 변할 줄 아는 검은 진창에게는 가까이 가지 않았다. 알을 낳고 새끼를 성장시키는 이 보금자리 주변에서는 검은 진창을 본 적이 없었다.
굳이 눈깔꽃의 출처를 따지지 않아서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드레이크로서는 간혹 눈깔꽃 중에서 특이한 품종, 봉오리진 꽃잎이 보라색이면서 검은 테가 파문처럼 맞물린 꽃잎 끝에서 번져 나오며 줄기와 닿은 부분이 온통 새까만 저런 것만 조심하면 되니까.
‘지금 저것!’
드레이크조차도 조심하는 검은 진창과 눈깔꽃 품종 앞에 투란은 던져져 있는 셈이었다. 드라고니아의 경고, 외침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상황이라 여겨졌다.
푸싯, 파앙!
꽃이 피어났고, 보라색 눈동자가 선명한 눈알이 검게 충혈된 듯한 핏줄을 뿌리처럼 띄운 꼴로 나타났다. 눈동자의 동공이 흔들렸고, 먼저 옅은 보라색 안개와 함께 눈알이 동그랗던 형상을 잃으며 꺼져갔다.
보라색 안개는 점차 짙어졌고, 투란의 주변을 채울 무렵에는 검은빛의 가닥이 보라색 안개 틈새를 스며다니는 연기처럼 보였다.
안개가 몸에 닿는 순간, 투란은 살갗이 녹듯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악마의 심장’이 움찔했고, 이 안개가 습한 것이 아니라 뜨겁다는 것을 확연하게 깨달았다. 뜨겁게 스며와서 아주 간단하게 ‘악마의 심장’ 넝쿨을 으스러뜨리는 열기를 품은 안개였다.
‘과연…… 섬멸이란 의미가 이런 거네.’
안개처럼 번지고 있지만, 실상은 불로 이뤄진 것.
섬광을 뿜어내거나 가시를 뿜어내거나 하는 희귀종으로 꼽히는 눈깔꽃의 경우가 아닌, 흔한 품종처럼 독을 뿜어낸다. 하지만 그 독이란 것이 안개처럼 번지면서 불의 속성을 뿜어내는 괴이한 위력을 발휘한다니.
드라고니아가 놀라는 꼴을 봐서는 그 일족에게도 꽤 먹힐 듯하잖은가.
‘드레이크에게는 확실히 부상을 입혔지.’
스스로 내뿜는 플레임 버스터의 불꽃은 드레이크의 파동장벽을 어쩌지 못하지만, 이 스며오는 안개 속에 숨은 불꽃은 드레이크의 몸에도 화상을 남길 정도였다. 그러고 나면 저렇게 시들어 없어진다…… 때문에 드레이크가 상처 입고 성질을 부리려 해도 부릴 곳이 없게 만들기도 하는 것, 성질 돋워 놓고 사라지는 몹시 짜증나는 꽃봉오리였다.
투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악마의 심장’이 검은 진창에 으스러질 때보다 더 빠르게 껍질을 파괴당하고 있었다. 껍질을 통해 스며온 안개로 인해 넝쿨줄기마저도 시들고 있었다. 줄기에 담긴 예리한 감각은 그리 으스러지는 조직의 파괴가 남기는 미세한 잔향을 선명하게 잡아 투란에게 전해주며 사라졌다.
―투란!
드라고니아가 조금 더 다급하게 재촉하는 외침을 터뜨렸다.
멍하니 선 채로 자기 상태를 관측만 하는 투란이 무방비이고 무대책인 것에 항의하며, 여기서 도망칠 것을 재촉하는 외침이었다.
하지만 투란은 간단히 대꾸할 뿐이다.
‘괜찮아.’
―뭐?
의아해하는 드라고니아에게 설명하지 않고, 투란은 가슴 깊은 곳에서 ‘작은 늪’을 더 강하게 불러냈다. 심장 속에서 뿌리를 지키기만 하면서, ‘악마의 심장’이 걸러낸 채로 피가 되어 온몸에 흘러가던 ‘작은 늪’이었다. 하지만 이제 부름에 호응해서, ‘작은 늪’은 말라가는 투란의 살갗, 핏줄을 향해 강하게 몰려나갔다.
걸러지지 않은 채로, ‘작은 늪’이 처음 태어난 그대로!
‘악마의 심장’이 물러선 곳에서 ‘작은 늪’은 치고 나갔다.
투란은 감각을 보다 섬세하게 키웠고, 자기 몸이 거대한 산처럼 보일 정도로 세밀하게 시각화한 몸의 풍경을 관찰했다.
스며든 보라색과 검은 무늬의 안개, 그 미세한 영역을 ‘작은 늪’이 격류가 되어 밀려나갔고 안개 속에서 흘러나오는 불길에 대항했다. 불길이 ‘작은 늪’을 증발시키며 더욱 투란의 몸을 으스러뜨리려 했다. ‘작은 늪’은 연이어 몰아붙이는 진한 물결을 통해 이에 대항했고, 부스러져가는 넝쿨줄기를 다시 되살려냈다. 넝쿨줄기가 다시 살아난 자리에서는 살갗과 살점이 다시 채워지고…….
우뚝 선 채로 투란은 몸의 곳곳에서 벌어지는 회복과 파괴를 관찰하며, 한편으로는 가죽이 꿈틀거리는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다. 투란의 정신은 확실하게 두 가지 관찰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두 방향으로 정확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파악해내갔다.
‘몸은 버틸 수 있어. 내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늪이 멈치지도, 줄지도 않을 테니까.’
‘돌의 힘은 저 끈적이는 것 말고, 안개의 뜨거운 독도 버텨내는데…… 더 이상의 상처는 생기지 않겠네.’
―투란? 지금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하는 거냐?
드라고니아의 물음이 달라지고 있었다.
투란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발밑이 다시 무너지거나, 이 가죽의 바닥이 요동칠 경우에 대비했다.
눈알이 새로 흐느적거리는 진창의 흐름 속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눈깔꽃이 아니었고, 투란을 지켜보려는 듯한 눈알이었다.
슬쩍 투란이 발로 진창을 밀어서 눈알을 덮어버렸다.
그리고 재빠르게 몇 걸음 옮겨가니, 이번에는 바닥에서 솟아난 삐죽한 돌을 감싼 가죽에서 눈알이 나타났다. 마치 벽에서 눈알이 우르르 몰려나왔던 것처럼, 눈알은 여러 개가 동시에 떠오르며 투란을 보려 했다. 이 눈알 무더기는 끈적임보다는 윤기가 흐르는 가죽에서 솟아난 탓인지, 눈꺼풀도 갖추고 있었다.
‘헐? 깜박거리기까지 하네?’
어처구니없는 기분이 솟아났다.
눈꺼풀 없을 때, 눈알이 원래 어떤 녀석의 것이었는지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한데 지금 눈꺼풀이 나타나고 보니, 어떤 것은 도마뱀의 비늘처럼 보이고 어떤 것은 복슬복슬한 털투성이였다. 거기에 온갖 빨간 살갗, 파랗게 오돌토돌한 것까지 보고 있자니…… 투란에게는 저절로 의혹이 피어난다.
‘그 아르곤이라는 거, 눈꺼풀도 덤으로 챙기냐?’
아무리 봐도 이건 눈알만 챙긴다기보다는…….
―눈을 유지하는 조직 전체를 이식한 상태겠군. 눈꺼풀이라는 것은 눈알을 유지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하니까. 그런데…… 왜 이리 많냐고! 몬스터 눈알에다가 물고기 눈알까지 섞여 있잖아!
‘어?’
투란은 바쁘게 보이는 눈알들을 훑어봤고, 그중에 눈꺼풀 없는 물고기 눈알도 찾아냈다. 정말 퀭하니 물 밖에서 죽어버린 물고기 눈알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물고기 눈알은 물 밖이라도 이리저리 눈길을 옮기며 투란을 보는 중이다.
‘몬스터 눈알이란 거는……?’
개나 고양이, 소, 말, 토끼 따위의 짐승을 떠올리게 하는 눈알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눈동자의 경계가 무너진 듯한 몬스터의 눈알은 바로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눈동자가 동그랗지 않고, 세모와 네모가 복잡하게 섞인 듯한 해괴한 것만 먼저 보였다.
이렇게 바닥에서 솟은 돌 하나를 스쳐 가니, 부러진 기둥 같은 또 다른 돌이 가죽에 쌓여 온갖 눈알을 굴리는 꼴이 바로 보였다.
천장에서도 삐죽하니 내려오는 돌이 가득 보였고, 바닥에서 솟구쳐 오른 돌도 가득하게 투란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그 돌을 덮은 가죽과 진창은 계속해서 투란을 향해 눈길을 던지는 눈알을 드러내고…….
‘이 안은…… 완전히 저놈의 영토로군.’
투란은 가죽 위에 흐르는 검고 끈적한 진창이 계속 자신의 주변을 맴돌며, 언젠가는 쓰러질 것이라 자신하는 듯이 섬멸의 안개를 뿜어내는 눈깔꽃을 피우는 꼴을 다시 쳐다봤다.
‘작은 늪’은 절대로 저기에 질 리가 없었고, 그 도움을 얻은 ‘악마의 심장’은 보다 본격적으로 안개의 독을 이겨내기 위해 맥동하고 있었다. 이 상태라면, 다시 돌아나가서 물의 장막을 넘어 도주하는 데는 별문제가 없었다. 폭포가 떨어져 내리는 입구를 향해 그냥 날개를 펴고 힘차게 몸을 던지기만 하면 된다. 처음과 다르게, 이 광장처럼 넓은 굴의 형태는 드레이크의 날개를 펄럭이며 날기에 충분한 상태였다.
사악, 사악.
발바닥으로 가죽 바닥을 문지르면서 투란은 잠깐 생각을 해야 했다.
반복적으로 투란의 발을 꾸미고 있는 돌무늬에 진창이 삼켜지자, 이제는 진창이 멀찍이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고 거기서 피어난 눈깔꽃의 독안개만 밀려왔다. 바닥을 채운 두꺼운 가죽은 폭신하고 말랑한 느낌으로 윤기를 드러내며, 간혹 볼록한 눈꺼풀을 열고 눈알을 들이대는 꼴이었다. 한데 발 가까이 있으면 밟힐 것을 예상하는지 눈꺼풀을 연 눈알은 모두 간격을 둔 채였다.
‘가죽이 바뀐 것은 다른 놈이란 뜻인가.’
투란은 드레이크의 기억을 통해 추측해봤다.
이 가죽은 검고 윤기가 맴돌며, 두껍다.
하지만 드레이크가 겪은 검은 진창을 배어나오게 하는 가죽은 독을 뿜어내는 도마뱀…… 드레이크가 보면 그대로 발이나 꼬리로 쳐서 짓이겨 버리는 놈의 껍질이었다. 상당히 질기고 거친 가죽이라서 발톱이나 이빨로 찢기는 힘들었던 도마뱀의 껍질…….
‘이 녀석 설마 눈알뿐 아니라 가죽도 딴 놈 것을 이식해 쓰나?’
드레이크의 기억에 있는, 발로 짓이긴 도마뱀의 껍질과 가죽을 그대로 뿜어내던 진창이었다. 그렇다면 이
두껍고 탄력 있는 가죽도 그렇게 다른 뭔가의 것일지도 모르잖나. 눈꺼풀까지 고스란히 옮기는 꼴을 본다면, 그럴 가능성은 충분해 보였다.
‘그럼, 이건 대체 무슨 가죽이야?’
독을 뿜어내는 도마뱀의 가죽을 이용해 독을 뿜어냈다. 그렇다면 이 검고 윤기 있는 가죽도 뭔가 효용이 있을 것 같은데…….
―그림모스의 껍질이다. 그림모스가 뭔지 모르지? 알면 바로 그 껍질 가죽인 것을 알았을 테지. 간단히 말하자면, 네가 변했던 미쳐 날뛰던 드레이크보다 조금 더 큰 덩치의 새카만 나방이다.
날갯짓을 하면, 검은 구름이 피어나는 것처럼 독가루를 뿌려대는 놈이다. 새카만 티끌, 먼지 같은 그 독가루는 웬만한 생명체는 그대로 마비시키고 자빠뜨리지. 저 끈적이는 것을 밟아 없앴을 때, 나오던 그거야. 너한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헐? 새카만 먼지, 티끌? 그게 이미 독을 쓴 거였어?’
진창이 마르면서 그냥 흩어지는 까만 먼지가 아니었단 부분은 투란을 조금 어이없게 했다. 몸에 닿은 그 검은 티끌은 ‘악마의 심장’ 살갗에서 가볍게 처리되었고, 별다른 느낌이 없어 잊어버렸다.
―투란, 이 아르곤을 닮은 놈은 공격 강도를 높이고 있다. 조심해야 한다.
‘그러고 있…… 저게 뭐지?’
투란은 드라고니아의 잔소리를 느끼면서 주의하다가
한편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꼴을 봤다. 붉은 눈동자의 눈알이 다른 것보다 조금 더 크게 가죽에서 솟아나 있었다. 눈꺼풀은 따로 없는 듯, 검은 가죽이 끔벅대는 꼴이었다. 한데 그 붉은 눈동자의 붉은 광채가 동공에서 더 짙게 흘러나오며 눈알 전체를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껌벅거릴 때마다 눈알이 점점 더 커지기도 했다.
대체 왜 저러는가?
―설마, 저거 블러드 레이(Blood Ray)? 피해라!
드라고니아의 외침이 끝맺어지기 전에 이미 투란은 한쪽으로 뛰고 있었다. 저 커진 붉은 눈알, 그 동공에서 불그스름한 뭔가가 뿜어져 나오는 꼴을 이미 봤으니까 어떻게든 중간에 돌 하나라도 끼고 있는 게 좋으려나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 불그스름하고 탁한 빛줄기는 가로막는 큰 석순을 그대로 관통하며 투란의 어깨를 스쳐 갔다. 스쳐 간 자리는 순식간에 붉게 부풀었고, 터져버리며 피와 살이 뒤엉킨 상처가 돼 버렸다. 투란은 바로 알 수 있었다.
‘광압(光壓)이 아니야. 이거…… 핏줄기잖아!’
반사적으로 거울처럼 반질거리게 만들었던 어깨였다.
하지만 두껍고 강한 압력은 그 어깨를 찢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