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32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32)
파삭.
투명한 조각이 으스러지면서 흩어져 버렸다.
투란은 두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마음속으로 문장의 풍경을 불러냈다.
그곳에서는…….
* * *
검은 진창, 그 속이 반짝거리는 빛의 실그물로 채워진 진흙 늪의 한 덩어리로 새까맣게 보이던 것이 얌전히 뭉쳐진 물방울처럼 보였다. 그리고 아무런 반항도, 저항도 없이 투명한 톱니바퀴의 무늬를 지닌 거품에 감싸인 채였다.
너무 얌전해서 뭐든 시키는 대로 할 듯한…….
고요하게 ‘천칭의 축’으로부터 작은 빛의 실 가닥이 흘러나왔고, 톱니바퀴 무늬가 맴도는 투명한 거품에 닿았다.
검은 진창이 빛의 실그물과 칠흑(漆黑)의 파문을 일으키며 바로 빛의 실 가닥에 감기며 흘렀고…….
* * *
투란은 손바닥을 폈다.
손바닥 금을 따라 작게 스며나온 넝쿨줄기가 보였다.
얌전하게 손바닥 위에 얹힌 채로 맥동하는 줄기였다.
‘나와라.’
쿨쿨 자는 자신의 한 부분을 느끼면서, 활짝 깨어 있는 정신으로 투란은 불러냈다.
줄기에 틈이 생겨났고, 그 틈으로부터 시커먼 핏방울이 솟아났다.
투란은 느릿하게, 가늘게 뜬 눈으로 지켜보면서 시커먼 핏방울이 맺힌 손바닥을 천천히 굳어진 검은 진창에 갖다 댔다.
검은 진창 속에 굳어졌던 신경유체의 빛줄기가 맹렬하게 번뜩였고, 시커먼 핏방울 속에서도 실그물 같은 빛의 가닥이 반짝했다. 소리 없이 시커먼 핏방울이 으스러지는 것처럼 사라졌다. 돌처럼 굳어졌던 검은 진창이 그 순간을 노리듯이 꿈틀하면서 시커먼 핏방울이 맺혀 있던 투란의 손바닥을 향해 튀어올랐지만…… 바로 다시 돌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투란의 눈매가 활짝 열린 채로 금색의 눈동자를 훤히 드러낸 탓이었다.
한순간 깜짝 놀란 듯, 투란은 잠들어 있던 정신까지 깨어난 상태였다.
‘뭐였지, 지금?’
의아함이 저절로 마음에 의문을 맺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벌어진, 눈에 보이는 광경과 다른 강렬한 폭풍 같은 감각을 투란은 분명히 느꼈다. 시커먼 핏방울과 검은 진창이 닿는 순간, 눈에 보이는 풍경과 전혀 다른 크고 넓게 퍼져 있는 색다른 주변을 알아차려야 했다.
그 색다른 주변 풍경 속에 가득했던 것은…….
―의지로군. 그 검은 진흙늪을 채운 의지, 그게 방금 작은 몬스터 한 방울을 통해서 네게 스며오려 한 것이다. 고르고니아의 단단한 정신방어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잡아먹힐 뻔했어.
드라고니아의 설명이 웅웅거리면서 투란의 뇌리에 전해졌다.
‘어, 그래?’
투란의 대꾸는 애매했다.
―못 알아듣냐?
드라고니아가 바로 발끈했다.
‘음, 그런가?’
다시 애매하게 대꾸하는 사이에 투란의 호흡이 깊어졌다.
다시 정신의 한편이 잠들고, 한편은 활발하게 깨어 있는 채로 투란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면서 손바닥 위에 다시 시커먼 핏방울을 뽑아올렸다. 이번에는 검은 진창에 닿지 않게, 잔뜩 오므린 손바닥 위에서 시커먼 핏방울을 올려놓은 채로 투란은 침착하게 감각을 더듬었다.
으스러지면서, 햇살에 오그라들고 사라지는 그림자처럼 지워졌던 첫 번째 한 방울은 드라고니아가 의지라 부른 저쪽의 힘에 저항했다. 그 때문에 그렇게 사라졌다. 이 두 번째 방울 속에도 저쪽이 보였던 의지인가 하는 힘과 비슷한 성향의 힘이 담겨 있었다. 이는 분명하게 투란 자신의 일부란 것을 명확하게 해주는 힘이다.
‘이건 나의 의지겠지?’
드라고니아의 말을 되뇌면서 투란은 느릿하게 걸음을 쉬지 않고 옮겼다.
고르고니아의 눈빛이 닿는 범위 안에서는 멈춰 있는 검은 진창이지만, 꾸준히 꾸물거리면서 그 범위 밖에서는 활발하다 싶을 정도로 요동치고 있었다. 시커먼 핏방울이 이를 분명히 감지하며, 그 속에 담긴 ‘투란이 아닌’ 느낌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 느낌은 큰 흐름을 간직했고, 어디를 향해 있는가도 분명했다.
‘저쪽이란 거지.’
투란은 두어 걸음 더 나아갔고, 잠깐 멈췄다.
굳어진 검은 진창이 벽처럼 서 있는, 원래는 장막처럼 흐르는 영역이었다.
길이 막힌 자리를 바라보며 투란은 고민했다.
‘멀지 않은데…….’
조금 전에 놀라서 고르고니아, 스테노아가 눈을 번쩍 떴을 때 ‘악마의 심장’은 분명하게 느꼈다. 스테노아의 심장 속에서 별빛의 힘이 꿈틀거렸고, 여차하면…… 정말 그 순간에 방향만 명확했다면 별빛의 뿔을 돌출시켰을 것이라고!
그 과정에서 투란은 ‘악마의 심장’이 스테노아의 심장 주변에 자리 잡은 것, 그 심장의 맥동을 보조하며 잠든 상태를 유지하는 것과 새롭게 이뤄진 골격에 맞춰 전혀 다른 맥동으로 몸의 활동력이 되는 것도 깨달았다. 만약 ‘악마의 심장’이 스테노아의 심장과 융합했더라면, 그냥 지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쿨쿨 자버릴 수도 있다는 점도 함께 깨달은 바였다.
‘이 정도 축적된 별빛이라면, 분명히 닿기는 할 텐데.’
망설임, 아쉬움…… 주저함이 투란의 정신을 물들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멈춰선 투란을 잠깐 지켜보는 듯했던 드라고니아가 물어왔다.
‘심장 뚫린 오러 몽거.’
―뭐?
어째서 지금 이 순간에 그런 것을 생각하는가 한껏 의아해하는 낌새가 드라고니아로부터 흘러나왔다.
‘여기라면, 이 굴을 가득 채운 놈의 코어를 관통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면…… 이건 중요한 정수를 잃은 채로, 그 의지인가 뭔가를 잃은 채로 여기서 들어오는 것만 녹이고 먹어 치우는 꼴이 될 거야. 눈알은 만들지 못할 테고…… 더 이상 눈깔꽃을 피워 폭포에 실어 떨구지도 못하겠지.’
손바닥 위에서 꿈틀거리는 시커먼 핏방울, 그 본능을 느끼면서 투란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안에 의지를 뿜어내는 뭔가가 없다면, 이건 그냥 질척대는 식성 좋은 검은 늪이 될 뿐이라고.
―그렇다면 그건 투란, 네가 여기 들어온 목적을 달성하는 셈 아닌가? 이놈의 정체가 뭐든 그냥 두지 않겠다고 여기 온 거잖아?
‘어, 그렇지…… 그런데…….’
―이놈을 가지고 싶어졌나?
‘음…….’
투란은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맴도는 애매모호한 느낌이 너무 선명한 탓이었다.
분명히 이 검은 진창, 눈깔꽃을 마구 피우고 눈알을 닥치는 대로 뽑아내며 괴상망측한 힘을 과시하는 몬스터를 어떻게 하고 싶기는 했다. 그런데 이 기분은 꼭 몬스터 로드로서 욕심부린다고 할 수가 없었다. 마치 오래전에 검은 진창이 발톱에 끼어서 시달린 드레이크의 화풀이 같기도 했고, 이 망할 놈의 눈깔꽃에 휩쓸려서 고르고니아에게 잡혀버린 새끼 드레이크의 일에 대한 보복을 바라는 듯도 했다.
그저 화풀이나 보복이라면, 잠깐의 잠을 통해 축적된 별빛의 뿔로 단숨에 이 검은 장막, 벽 너머를 관통하는 걸로 충분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과연 이놈을 그런 식으로 없앨 수 있을까? 남아 있는 이 검은 진창 속에서 놈이 다시 원래 힘을 되찾는다면…… 예전에 드레이크가 했던 것처럼, 다시 보면 지겨워서 피하는 꼴이 될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또다시 새끼 드레이크의 일처럼 꼬인 상황에 휩쓸릴 수도 있었고…….
‘이놈은 눈알을 탐내는 거지?’
의문이 뒤죽박죽인 생각 속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드라고니아는 애매한 투란의 기분을 느낀 듯, 담담하고 신중하게 답한다.
―아르곤을 본보기로 판단한다면, 그렇다고 해야겠지. 아르곤은 자신의 시각을 강화하는 일에 적극적이니까. 강화된 시각, 포획한 눈알의 특별한 힘이 바로 아르곤이 자신을 지키는 수단이었다. 이놈에게서 딱 나타나는 성향이지.
‘그러니까, 이놈이 고르고니아의 눈을 노렸다고 해야겠지? 어떻게든 눈깔꽃으로 쓰러뜨리고…… 눈알을 뽑아가겠다고 말이야.’
―그럴 수 있겠군.
조금 의외란 듯이 드라고니아가 대답했다.
고르고니아를 싣고 있던 작은 섬, 클레이 웜은 여기서 멀었다.
그 멀리까지 눈깔꽃의 피지 않은 꽃봉오리를 흘려내면서 노렸다고 하기에는…… 뭔가 좀 많이 생각도 없고 진짜 그랬을까 의심할 여지가 많았다.
‘바보니까, 혹은 저 멀리 있더라도 쓰러뜨린 순간에 이 시커먼 진흙탕으로 뭔가 할 수 있을 수도 있었겠지.’
투란은 손바닥에 맴도는 시커먼 핏방울을 보면서 확신했다.
괴물인 늪의 성질, 뭔가를 잡아먹고 성장한다…… 이 시커먼 핏방울 속에는 분명히 그런 성질이 있었다. 작은 돌이 이를 알아차린 것이고…….
‘이게 세상에서 단 한 마리일까? 아르곤은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고 했지? 그럼, 여러 종류로 많이 있다는 말인 거고.’
―그렇다. 이놈이 과연 아르곤의 일종인가는 상당히 의문스럽지만.
‘그러면…… 고르고니아의 눈을 탐내는 이 녀석을 여기서 한번 찔러 죽이는 걸로는 부족하네. 나중에 또 이놈이랑 같은 품종인 괴물이 나온다면…… 그 녀석도 단 한 마리뿐인 스테노아의 눈을 노리고 날 공격하겠다고 눈깔꽃을 잔뜩 뿌릴 수 있잖아.’
투란은 마음을 굳혔다.
여기서 이놈을 그저 시원하게 한번 박살내는 정도로는 부족했다.
다시는 이놈에게 시달릴 일이 없도록, 보다 확실하게 파악해야 하고 더 강한 같은 힘으로 맞설 수 있어야 했다.
후우욱…….
투란을 숨을 크게 들이쉬었고, 드라고니아의 잔소리부터 들어야 했다.
―그런 생각을 여기까지 와서 한 거냐? 그런 건 여기 들어오기 전에 생각했어야 할 일이잖아!
‘응? 아니, 여기 있는 놈이 뭔지도 모르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일단 한 걸음 디디면서 투란은 반박했다.
―없앨 것인지, 패고 물러설 것인지 정도는 저 폭포를 넘기 전에 결정을 했어야 할 것 아냐! 어떻게 이놈의 중심에 다 와서야 그딴 결정을 내리냐고!
‘그러니까, 이게 뭔지 알아야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잖아!’
쀼루퉁하니 대꾸하며 투란은 마음을 좀 더 깊이 가라앉히며 한 걸음 더 디뎠다.
드라고니아의 잔소리는 집중된 마음 저편으로 소음이 잦아드는 것처럼 물러섰고, 투란은 손을 내밀었다.
시커먼 핏방울에 조그마한 파문이 피어났고, 작은 돌이 파문의 중심에 불쑥 튀어나왔다. 어린아이의 입에서 뽑혀 나온 이빨처럼 작은 돌은 시커먼 핏방울의 파문을 더 세차게 일렁이게 했다.
시커먼 핏방울 하나가 작은 돌과 파문을 머금은 채로 굳어진 검은 진창의 벽에 닿았다. 작은 돌이 울었고, 시커먼 핏방울이 확장되며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진창 속으로 그 소용돌이가 스며간다 싶은 순간…….
화아악!
투란은 진창 속에 가득한 빛의 그물 같은 것, 신경망이 맹렬하게 요동치며 저항하는 것을 느꼈다. 처음 느낀 것보다 더 강하고 포악하게 반발해 오는 힘―의지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투란도 처음처럼 움찔하고 놀라지 않았다.
잠든 정신의 반은 여전히 잠든 채로, 투란은 더 거칠게 손을 내밀며 작은 돌의 힘을 키워 올렸다. 소용돌이 속으로 스며든 작은 돌의 힘은 저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의지를 검은 진창과 함께 뭉개버렸다.
시커먼 핏방울의 소용돌이가 크게 번졌고, 어느새 투란의 상반신 정도 크기가 되었다. 이대로라면 소용돌이가 더욱 확장되면서 검은 진창을 모조리 작은 돌의 힘 아래 둘 듯한데…….
뿌드득! 뿌득!
가죽이 거칠게 마찰하는 소리가 울려 나오면서 질척거리고 끈적대던 검은 장막의 질감이 바뀌었다.
‘어?’
투란은 시커먼 핏방울이 저쪽의 힘에 대항해서 똑같이 맞서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그런데 그 결과는…….
검은 가죽으로 세워진 두꺼운 벽이 저쪽의 감각을 흐리게 한다!
후우웃.
거센 고르고니아의 호흡 속에서, 깨어 있는 반쪽의 정신으로 투란은 잠깐 당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작은 돌에 집중했다. 소용돌이가 멈추고, 작은 돌은 다시 시커먼 핏방울을 부풀리며 지원하던 힘을 거뒀다.
―저놈도 가죽을 만들고, 너도 가죽을 만들었군. 아주 두꺼운 가죽이 두 겹으로 벽이 되었어.
드라고니아가 어이없어하면서도 키득대는 듯한 말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투란은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바로 시커먼 핏방울에 마음을 모았고…… 작고 시커먼 가죽, 그림모스의 가죽이 파문 속에서 쪼그맣게 조각으로 피어나는 것을 봤다.
‘에, 그러니까…….’
이 검은 진창은 신기한 눈알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가죽도 뿜어낸다.
눈알로 안 되면, 가죽을 쌓아 버티는 것인가?
지금 상황은 딱 그런 꼴을 보이고 있었다.
두껍고 질기며, 독가루도 풀풀 휘날리는 괴물의 가죽이 벽이 되어 앞을 가로막고 있잖은가.
‘없앨 줄도 알잖아?’
투란은 갸웃하면서 손바닥을 보며 살짝 염원했다.
파문 속에 피어난 그림모스의 가죽 조각이 사라졌다.
시커먼 핏방울 속에 녹아 없어진 듯이.
‘그러고 보니, 이게 예전에는 도마뱀 가죽이었지.’
문득 투란은 드레이크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 검은 진창은 여러 가지 눈알뿐 아니라 여러 가지 가죽도 만들어내는가?
호기심이 새록새록 피어나며 투란의 깨어 있는 마음을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