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33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33)
“이크?”
잠깐 딴생각을 하다가 투란은 미끄러져 뒹굴어야 했다.
가죽벽이 밀려오고 있었다.
옆으로 굴러 피하려고 잠깐 몸을 움찔하다가 투란은 관뒀다.
옆에서도 가죽벽이 밀려오는 중이잖은가.
―쉬운 생각이군. 그냥 가죽으로 파묻을 작정이잖아.
한숨 같은 드라고니아의 말이었다.
투란은 그 소리보다는, 잠깐 떠올랐던 드레이크의 기억을 보다 생생하게 느껴야 했다. 지금 몰려드는 저 가죽으로 똘똘 뭉쳐진 벽은 쉽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저 검은 진창이 그 속에 숨어 있는 한, 끝없이 가죽이 갈라진 틈새를 채우면서 몰려나올 것이다. 그리고 드레이크의 체격을 지니지 못한 투란은, 드레이크조차 파묻어버릴 듯한 이 거대한 암벽 속에 가득한 검은 진창의 가죽 생산력을 감당할 리가 없었다.
‘앞발에 끼어 스며든 것만으로도 그 고생을 했었지…….’
분명히 드레이크의 ‘삶’에서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 투란은 그때와는 다르다.
몬스터 로드이며, 드레이크가 멈출 수가 없었던 검은 진창의 활동을 돌처럼 멈춰 세울 수가 있었다.
보이기만 한다면…….
‘아, 망할! 저게 제대로 꾀를 부리네!’
보이지 않는다면, 세 방향에서 조여오는 가죽벽에 밀릴 수밖에 없고!
―흠, 과연…… 벽을 치고 눈빛을 차단한단 말이군. 꽤나 깊이 생각했네.
드라고니아가 태평한 소리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 이유를 투란은 금세 알았다.
가죽벽은 투란이 처음 염려한 것처럼 파묻을 작정이 아니었다.
계속 투란을 밀어내서…… 쫓아낼 작정이었다.
‘아니, 그러고 보니 파묻어도 딱히 죽지는 않겠네.’
고르고니아의 황금빛 모피는 파묻힌다 해도 그 압력에 짓눌려서 투란이 죽을 일은 막아줄 터였다. 그리고 별빛 뿔을 이용한다면 구멍내고 빠져나오는 것도 딱히 어렵지는 않을 것인데…… 문제는 그게 버티는 것이지, 투란이 작정한 대로 뚫고 들어가 저놈을 잡는 일은 절대로 아니란 것!
슬슬 어이없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투란의 마음에 스며왔다.
저 아르곤을 닮은 놈이 공격적으로 나올 때는 이쪽에서 방어를 해야 했고, 다행스럽게도 투란에게는 당당함을 넘어서 도도하게 막아줄 몬스터가 있었다. 그러나 그 공격과 방어의 입장이 바뀌게 되니………….
‘저놈도 장난 아닌데.’
독가루를 펄럭대며 털어내는 그림모스의 가죽, 그게 벽을 만들어 밀어붙일 정도로 두꺼워서 저 너머의 검은 진창은 아예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아무리 고르고니아의 눈빛이 무섭다 하더라도, 저렇게 두꺼운 벽을 넘어 볼 수는 없다는 점이 철저하게 약점이 되고 있었다. 눈깔꽃처럼 산을 꿰뚫는 힘은 없는 것이 고르고니아의 눈빛이잖은가.
찌이익.
투란은 발가락을 두껍게 하고, 발톱을 세웠다.
‘악마의 심장’이 기억을 더듬어서 손톱과 발톱이 굵고 두껍게 휘어졌고, 잿빛바위 그랑츄의 두껍고 무거운 발이 가죽바닥을 긁기 위해 엄지 둘에 바싹 힘을 넣었다. 거친 마찰음이 다시 울렸고, 투란은 떠밀려야 했다.
검은 진창은 눈빛을 피하기 위해서 스며나오지 않는 듯했으니, 그랑츄의 바위덩이 같은 발이 물렁해질 일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좋아도, 잘 휘어진 굵은 발톱이기는 해도 그랑츄의 발은 그림모스의 가죽을 갈기갈기 찢으면서 버티지는 못하고 있었다.
투란이 밀려나는 사이에 가죽벽이 점점 더 두꺼워졌고, 세 방향은 어느새 꽉꽉 메워진 채로 투란의 앞쪽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이대로 투란을 이 암벽 내부 공동에서 밀어내겠다는 꼴이었고, 뒤편은 딱 그러기 위해 정리된 모양으로 폭포가 떨어져 내리는 구멍까지 길게 늘어진 가죽이 바닥을 다진 꼴이었다!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불끈 투란은 몸에 힘을 넣고, 두 눈을 부릅떴다.
가죽벽에는 아무런 반짝임도 없었고, 그냥 저편 너머에서 계속 두껍게 쌓이는 것만이 예민해진 감각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스테노아의 시각은 완전히 차단된 셈이군. 재미있는 일이다. 그림모스의 가죽이 이렇게 겹으로 쌓여서 웬만한 상대는 척추 속 신경망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눈빛조차 막아내다니…….
드라고니아가 한층 더 한가해진 소리를 투란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투란이 밀려나는 것이 기분 좋은 꼴이 아닌가?
후우으으!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투란은 앞을 노려봤다.
잠을 자던 반쪽의 정신도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이놈, 잡는다!’
자신에게 되뇌면서, 투란은 맹렬하게 생각을 했다.
이 몰려오는 가죽의 물결, 사람 하나를 가볍게 내몰아버릴 수 있는 가죽의 범람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어떻게 또 다른 눈알이 튀어나와 보일지도 모를 기괴한 힘에 대항할 것인가…….
집중된 생각은 잠시 주변의 흐름을 아주 느릿하게 느껴지게 했다.
보다 빠르게, 투란은 더욱 맹렬하게 생각을 했고…… 결정했다.
‘쓸 수 있는 것은 모두 쓴다!’
투란의 발부터 새롭게 변하기 시작했다.
금색 비늘이 잿빛바위의 살갗을 대신했고, 여전히 뭉툭한 느낌이지만 보다 강력하고 사나운 느낌의 발톱이 자리 잡았다. 발목은 살짝 가늘어졌고, 발가락은 새와 도마뱀의 형상을 뒤섞은 듯한 모양이 된 채로 바닥의 가죽을 움켜잡았다.
발목과 다리까지, 보다 굵고 거대해진 형상이 되며…… 사람의 몸 따위는 가볍게 수십 미터를 날려 보낼 듯한 하반신이 되었다. 그 기괴해진 변화를 금빛 모피가 흐르듯이 덮는 와중에 조그마한 꼬리가 살짝 돋아나면서 살랑거리기도 했다.
‘좋아, 드레이크 아기라도 이 정도면 사람 몸 하나쯤은!’
곧이어 등 쪽이 꿈틀거리면서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조그마한 금색 비늘가죽의 날개가 생겨났다. 황금빛 모피 안에서 벗어나지 않은 작은 날개였지만, 가볍게 펄럭이는 순간 투란의 몸을 수 미터 앞으로 밀어내는 추진력을 아주 쉽게 뿜어냈다.
퍼억!
드레이크의 발과 날개를 이용해 격돌하면서, 투란은 두 손을 활짝 펼쳐서 가죽벽에 찍었다.
후으으…….
깊은 숨결과 함께 투란의 손끝, 손바닥에서 시커먼 핏방울이 물컹거리는 느낌으로 스며나왔다. 시커먼 핏방울 속에서는 섬세한 넝쿨의 실 가닥이 꿈틀거리며 맴돌기도 했다. 그리고 두 손바닥에는 작은 돌이 자리 잡으며, 그물무늬를 이루며 번졌다.
―야! 그거 하지 말라니까!
드라고니아가 한가한 시늉을 버리면서 버럭 외쳤다.
투란은 당연히 이 소리를 무시했고, 거침없이 괴물의 오러를 끌어내서 시커먼 핏방울에 담았다. 작고 검은 소용돌이가 큰 압력을 손바닥에 전해왔지만, 작은 돌의 그물무늬는 바로 이를 걸러내줬다.
‘간다!’
투란의 외침이 자신을 향해 거칠게 터져 나왔다.
정신이 완연히 집중되었고, 투란의 두 손에서는 시커먼 핏빛 소용돌이가 거침없이 피어나며 가죽벽을 깎고 녹여 삼켜나갔다.
파앙.
작은 날갯짓이었지만, 투란의 몸은 가죽벽이 파여 빈자리를 향해 수 미터를 단번에 파고들 수 있었다. 시커먼 핏빛 소용돌이는 새로 닿은 가죽벽도 바로 녹이며 갈아 삼켰다.
후으읏!
원래의 고르고니아라면 할 리가 없는 부지런한 숨쉬기와 함께, 두 눈을 한껏 부릅뜬 채로 투란은 더욱 빠르게 가죽벽을 관통하고 돌파해나갔다. 벽이 얇아진 곳에서 드러난 검은 진창은 고르고니아의 눈빛에 바로 굳어졌고 단숨에 몇 미터씩 갈아 삼키는 소용돌이에 휩쓸리며…… 시커먼 피의 일부로 삼켜지고 말았다.
‘시간 끌 수 없지!’
한 번 더 각오를 다지면서, 투란은 더욱 빠르게 발끝에 닿은 바닥을 박차고 작은 날개를 펄럭이며 추진력을 더했다.
가죽벽이 연이어 관통되면서, 투란은 처음 밀려나기 시작한 자리를 넘어서 더 깊이 파고들어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검은 진창이 굳어진 부분을 벽처럼 밀어붙이며 새롭게 큰 파도처럼 밀어내는 영역까지 도달했다.
이제는 가죽벽을 대신해서 그냥 검은 진창의 노도(怒濤)를 뿜어내는 것으로 투란을 밀어내려는 시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돌파당했다.
고르고니아의 외골격을 대신해 자리 잡은 작은 돌이 보다 짙고 강렬해진 검은 진창을 거침없이 집어삼키며, 투란의 의지에 복종하고 합류하는 시커먼 핏물을 마구 쏟아내서 괴물의 오러를 담은 소용돌이를 일으킨 때문이었다.
어느새 투란은 몇 종의 몬스터를 한 몸에 융합하고, 그 힘을 하나로 어울리도록 꾸미고 있었다.
그리고 이 상황은 몰아닥치던 검은 진창을 잦아들게 했고, 마침내 투란은 검은 진창의 영역을 넘은 자리에 도달했다. 희미한 빛이 저 높은 곳에서 흘려내려와 크리스털로 얇게 덮인 곳에…….
새카만 구체(具體)는 작은 원(圓)이 중심에 작고 긴 가시를 뾰족하게 내민 모양으로 가득 채워진 표면을 한 채로, 크리스털로 색칠한 듯한 바위 속에 둥실거리며 떠 있었다.
큰 바위는 그 중심이 선반처럼 파인 채로, 새카만 구체를 담았고 암벽의 끝이 여기라는 것처럼 웅장한 모습으로 자리 잡은 모양이었다. 까마득하게 높은 곳의 틈새, 얼핏 하늘이 작은 얼룩처럼 보이는 자리였다.
새카만 얼룩처럼 끈적이는 진창이 이 크리스털 동혈(同穴) 속의 곳곳을 그림자처럼 넘나들며 흘렀고, 한쪽은 울퉁불퉁한 바람에 휘날리는 장막처럼 덮고 있었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고요함이 가득한 이 풍경 속으로, 장막을 찢으며 거센 두 줄기 소용돌이가 쳐 들어왔다.
콰아아―!
고요를 파괴하는 바람의 포효가 소용돌이 속에서 울려 나왔다.
새카만 구체에서 뻗어나온 가시 몇 개의 끝에서 둥글게 새로운 구체가 솟아났다. 작은 원의 무늬도, 가시도 없이 솟아난 새로운 구체가 엷은 파문과 함께, 곧 침입자를 향해 눈알을 번뜩였다.
시뻘건 섬광(閃光)에 이어, 새파란 광망(光芒)이…… 허공에 동심원을 그려내는 색채 없는 파동이 여러 개의 눈알에서 제멋대로 뿜어져 나왔다. 모두 소용돌이를 노리면서 뻗어나는 중이었다.
그리고 소용돌이는 이 모든 빛의 향연을 뒤틀고, 삼켰고…… 선명하고 찬란한 금색의 눈동자를 들이댔다.
새카만 구체의 가시에 매달린 새로운 구체가 파문을 멈췄고, 눈알들은 돌연 뒤틀리면서 제각각 터지고 일일그러지거나 뭉개지며 쏟아져 내리고 말았다.
거친 소용돌이는 새카만 핏빛을 일렁이며 바로 구체를 향해 덮쳤고, 그 속에 담긴 기괴한 힘은 작은 원의 무늬를 샅샅이 훑어…….
콰앙!
짧고 굵은 폭음이었다.
“아우으! 뭐야, 이것도 돌이었어?”
투덜대는 소리가 폭음의 여파에 파묻혔지만, 그래도 투란의 입에서 나왔다.
우으으으―!
투란의 두 손이 금빛 모피와 작은 돌의 그물무늬에 휘감긴 채로 격렬한 힘을 토해내면서 울었다. 때문에 투란은 움찔하며 놀랬다.
‘얘가 왜…… 진짜 동족인가?’
작은 돌은 자신과 닮은 힘을 지닌 상대를 만나 좋아하는 듯했다.
저 시커먼 구체에서 작은 원을 그리다가 방금 삼켜진 검은 진창의 정수(精髓)에 취한 듯도 했다. 이제껏 맛보며 건너온 것은 너무 엷고 얕은 맛이었고, 지금 겨우 진짜 그 맛을 봤다는 듯…….
둥실거리며 떠 있던 시커먼 구체는 이제 다른 모양이 되어 있었다.
작은 원의 무늬, 가시를 내밀던 시커먼 껍질이 벗겨졌고 그 안에 세기 힘든 작은 면으로 가득 찬 수정(水晶) 덩어리를 드러낸 채였다. 그 수정 속에 여전히 새까맣게 흐느적거리며 끈적이는 진창이 담겨 있기는 했지만, 이제는 작은 돌 앞에 그 실체를 더 노출시킬 낌새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수정의 껍질은 희미한 빛 속에서 혼탁한 백색(白色)을 일렁이면서 작은 돌의 힘에 대항하는 격렬한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크리스털 셀(Crystal Cell)? 이게 무슨…….
드라고니아은 당혹스러워하는 기척과 영문 모를 말을 꺼냈다.
투란은 거기에 신경 쓰기보다, 이 상황에서 뭘 해야 하는가를 바로 결정했다.
주변에 깔린 크리스털의 색이 이 덩어리에 호응하며 본격적으로 울어대기 전에, 재빠르게 행동해야 했으므로!
‘안을 수 있겠네!’
두 팔을 길게 뻗어, 손을 깍지 낀 둘레…… 투란은 이 시커멓다가 수정이 된 덩어리의 크기를 가늠하고 빠르게 품에 안는 듯이 덮쳤다.
작은 돌의 힘과 맞서는 진동이 주변 크리스털로부터 치솟으며 투란을 으스러뜨리려 했지만, 금빛 모피가 그런 것 따위는 모른다는 듯이 싹 흘려내버렸다.
그리고 투란의 가슴, 외골격의 돌무늬 사이에서 작은 톱니바퀴 모양의 검은 얼룩이 돋아났고…… 붉은빛으로 물들며 느릿하게 돌기 시작했다.
까득.
손이 깍지를 끼는 소리가 돌이 마찰하는 거센 기척을 드러냈다.
돌과 돌을 이어, 한 덩이로 뭉치며 투란은 힘껏 가슴을 수정 덩어리를 향해 들이밀었지만…….
우우우웅.
격하게 틈새를 메우는 진동이 투란을 밀어내려 했다.
금빛 모피에 흘려나가면서도, 이 진동은 수정 덩어리에서 흘러나와 보이지 않는 손처럼 투란에게 거세게 저항하는 형세를 이뤄냈다. 얼마나 거센지 수정의 표면조차 가루가 되어 넘실거리면서 투란의 가슴 언저리에 닿을 지경이었는데…….
핏빛의 톱니고리가 얇은 실 가닥처럼 번지며 투란의 가슴에서 수정을 향해 그물처럼 뻗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