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39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39)
눈이 감겼고, 잠시 후에 다시 떠졌다.
“크에에!”
투란의 입에서 바로 신음과 비명의 어중간한 외침이 터졌다.
세상이 변한 것처럼 보였다.
멀리 보이는 그랑츄가 매달린 풍경이 바로 손에 닿을 듯이 보였고, 그 풍경과 투란 자신이 서 있는 곳 사이의 광대한 배경도 선명하게 보였다. 두 눈은 서로 다른 초점으로 사물을 포착하며 사람의 눈이 할 수 없는 짓을 해보이고 있었다.
―그린다크 블러드의 그랑츄인가…….
투란이 변해버린 풍경에 놀랄 때, 드라고니아는 그랑츄의 품종에 대해 놀란 낌새를 드러내고 있었다.
‘뭐? 저 그랑츄?’
잿빛바위와는 다른 색채를 지닌 그랑츄 무리…… 깨알만 하게 보일 때는 그저 윤곽과 색채만 분명했던 것이 그 살갗 속에 꿈틀거리는 녹색 근육과 검은 핏줄의 자태까지 훤히 보이고 있었다.
―녹암혈(綠暗血)의 일족이라고도 하지. 녹색의 피부와 검은 피가 노골적인 그랑츄다. 그랑츄 중에서는 괴력으로 유명하고…… 잘 터져.
‘괴력까지는 알아듣겠는데, 터지는 거는 무슨?’
투란은 손을 내밀면서, 거의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랑츄의 살을 더듬으려 해봤다. 하지만 닿을 리가 없었다. 두 개의 초점, 그중에서 저쪽과 이쪽이 어마어마하게 먼 거리를 보여주는 풍경 속에서 자기 손이 꼼지락거리는 것만 제대로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랑츄의 녹색과 검은 핏줄, 짙은 녹색 살갗 탓에 검은색이 바랜 듯한 채로 불끈거리는 핏줄에 감긴 듯한 주먹이 높이 치솟는 광경을 봤다. 힘을 꽉 준 탓인지 그랑츄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고, 세차게 매달린 줄기를 내리찍었다.
줄기가 찢겨나갔고, 주먹이 깊이 파고드는 과정이 세세하게 보였다.
투란이 슬쩍 다른 쪽으로 또 하나의 초점을 맞춰보니, 잿빛바위 그랑츄는 물어뜯고 할퀴고 패도 겨우 줄기에 자국을 남기는 정도였다. 그런 줄기를 주먹질로 뚫어 파낼 정도면 과연 그랑츄 중에서 손꼽히는 괴력이라 할 만했다.
‘근데, 터지는 게 뭐야?’
이 한 대목만 납득이 가지 않는데…….
―금방 보게 될 거야.
드라고니아는 담담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대로 투란은 금세 볼 수 있었다.
하늘 높이 치솟는 거목(居木)처럼 보이는 줄기 곳곳에서 주먹질을 하던 녹색의 그랑츄가 갑자기 팔을 잃은 채로 검은 피를 뿌리는 광경이 먼저 보였고, 그 곁에서 같은 종류의 그랑츄가 주먹을 꽉 움켜쥐다가 팔이 터지는 광경이 뒤를 이어 보였다.
‘왜 저러는 거야?’
―몸의 내구력이 감당할 한계를 넘어선 탓이지. 자신의 근육이 쥐어짜내는 힘을, 자신의 몸으로 버티지 못한다. 뼈와 살이 갈라지고 흩어지는 셈인데, 본 것처럼 그냥 으스러지고 터져.
‘아니, 그렇게 터지는 몸으로 그런 힘을 낼 수는 있고!’
어이없어 투란은 보면서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경우에도 무리해서 힘줄이 끊어지거나 뼈가 부러지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특정한 동작을 지나치게 반복하거나, 감당하기 힘든 무게를 억지로 버티려고 하거나 그런 것 아닌가. 저렇게 주먹 쥐다가 터지는 꼴은 도대체가…….
―검은 피. 그게 원인이라고 추정된다더군. 근육이나 골격 쪽에서 발생하기 어려운 힘이 이상하게 검은 피 속에서 발생하고, 몸 안에 집약된다는 거야. 때문에 버티지 못한 근육과 골격이 파괴되어 흩어지고…… 물론 그러려면 평소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대상이 앞에 있어야 하기는 하지.
투란은 설명을 들으면서 눈으로 보면서 한층 더 어이없었다.
저건 쉽게 말해서 거의 자멸형 몬스터라 할 만하잖은가.
‘눈깔꽃이 그랑츄가 된 꼴이네.’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하지만 저놈은 눈깔꽃처럼 단발로 끝나지는 않아. 보통 때도 괴력을 지녔고, 저렇게 거대해서 당해내기 어려운 상대 앞에서만 터진다니까.
‘결국 못 이기는 거네, 평소 힘을 넘는 상대는……’
―온몸이 터져 박살나니까. 이기기 전에 자살하는 셈이라 할 수도 있겠군. 그러고 보니, 그것도 눈깔꽃과는 다르군.
‘켁, 그런가.’
쓴웃음과 함께 투란은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뿔수리의 눈동자는 사람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게 해주고 있었다. 이를 저편의 풍경 하나만 보기는 좀 아깝잖은가…….
그래서 투란은 새롭게 볼 수 있었다.
조금 전에는 그저 재처럼 보이며 벌레처럼 울던 것들이 섬세한 날개와 여러 개의 다리를 가진 까만 털이 돋은, 제대로 된 벌레 모양으로 보였고 번개와 벼락의 폭우에 검게 타고 그을린 곳에서는 여전히 뭔가 꿈틀거리면서 움직이려는 것을 봤다.
‘다른 매도 이런 식으로 보려나?’
멍하니 새롭게 보이는 풍경을, 두 가지 초점을 둔 채로 겹쳐진 멀고 가까운 광경을 동시에 바라보면서 투란은 궁금해했다.
―글쎄, 다른 매의 눈동자를 얻어보면 알게 되겠지.
드라고니아가 약간 심드렁하니 대꾸해왔다.
‘어? 아, 그러네.’
문득 투란은 웃을 수 있었다.
기괴하고 이상한 능력의 눈알을 불러낼 수는 없었다.
이 뿔수리의 눈알 역시 조금 전에 얻은 것에 불과했다.
아르고누스가 보인 굉장한 힘은 어쩌면 완전히 손에서 떠난 것일 수도 있었다.
운 좋게 아무 눈알이나 꺼내보다가 대단한 것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보이는 세계는 투란의 마음에 여유를 갖게 해주고 있었다. 이 색다른 세상의 모습에 투란은 분명하게 웃음 지을 수가 있었다.
―저 난장판을 만들어놓고 좋으냐?
불쑥 튀어나온 드라고니아의 말은 웃던 투란을 움찔하게 했고, 표정을 굳게 했다.
‘뭐? 그게 뭔 소리야?’
―허어…… 투란, 너 지금 뭘 보고 있는 거냐? 저 대난동이 벌어지는 곳이 어딘가 모르겠어? 키린이 몇 년을 머물렀던 곳이고, 네가 지나온 곳이잖아.
어째서 모르냐는 듯한 긴 한숨이 섞인 말이었다.
투란으로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소리였으니…….
‘그야, 그렇지…… 그게 지금 저 난리가 난 게 나랑 뭔 상관이 있다고?’
당연하게 되묻는 말이 나왔다.
좀 더 깊은 한숨과 함께 드라고니아의 넋두리 같은 소리가 슬슬 투란의 뇌리에 울려 퍼진다.
―여기서 흘러가는 물줄기, 그게 지금 난리가 벌어지는 모든 곳에 골고루 퍼져가는 것은 보이냐? 네가 이 산의 높은 구멍으로 나올 때만 해도 저런 난리가 아니었다는 것은 기억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어떻게 진행돼서 저런 난리가 벌어졌는가 이해가 가질 않아?
‘에, 설마 내가 아르고누스를 삼켜서 저런다고?’
―아닌 줄 알았냐!
‘아니, 어째서!’
―여기서 흘러나가던 눈깔꽃! 흘러가는 물줄기에 따라 이리저리 갈라져서 한참을 흘러가던 것들! 그동안에는 제어되고 있다가 다 풀려났잖아!
‘그, 그래 봐야 눈깔꽃이라고. 누가 건드리지 않으면 터지지도 않잖아! 그게 뭔 상관이야!’
투란은 억울했다.
딱히 억울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이곳에서 뭔 일이 생겼다고 해도, 무슨 문제가 될 리가 없다는 기분도 당연하게 투란의 마음에서 쑥쑥 자라났다.
―잉크가 사라졌잖아!
‘응?’
갑작스러운 외침은 투란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물에 섞여 흘러가던 잉크! 눈깔꽃이 머금고 가던 잉크! 멀리 갔다고 해도 제어가 되던 잉크 얼룩들이 제멋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해봐! 몇 년을 여기서 흘러가던 잉크가 몇 방울일 것 같냐? 그냥 늪에 퐁 하고 떨어져서 금세 희석돼서 사라졌을 것 같아? 제어를 잃어버린 잉크가 무슨 짓을 할지, 상상을 해봐!
“에…… 그건…….”
몰아붙이는 드라고니아의 거센 소리에 투란은 잠시 상상을 해봐야 했다.
이 ‘패러블랙 잉크’란 녀석은…… 투란이 품은 몬스터 엠블럼 속에서도 아르고누스의 본래 기억과 의지를 지키기 위해 맹렬하게 활약했다. 그걸 싹 날려버린 탓에 투란은 잠시 눈물을 짜내야 했고…….
여기서 투란에게 섭취되지 않은 채로, 원래의 아르고누스에게서 흘러나갔던 시커먼 잉크는 과연 지금 어떤 상태일까? 제어를 잃어버린 ‘패러블랙 잉크’란 대체 어떤 괴물인가?
이런 상상과 호기심은 자연스럽게 투란에게 ‘패러블랙 잉크’의 능력과 힘에 대해 더듬게 했다.
뿌득, 뽀드득!
투란이 맹하니 두 손을 내려다봤다.
상상과 호기심에 반응해서, 두 손을 감싸며 번져 나온 시커먼 핏방울로 보이는 ‘패러블랙 잉크’가 그 능력 한 가지를 확실하게 선보이고 있었다. 시커먼 가루가 풀풀 휘날리는 시커먼 가죽, 그림모스의 가죽이 투란의 손을 물샐 틈 없이 감고 있었다.
두껍고, 둔하게 느껴질 정도의 가죽 덩어리가 된 듯한 손에서 시커멓게 먼지처럼 가루가 피어올라 투란의 팔다리로 흩날렸다.
“으큭?”
짜릿하고 후끈한 느낌이 투란을 깜짝 놀라게 했다.
새삼 투란은 이게 독성이 강한 가루인 것을 느낄 수 있다!
한 박자 느리게, 살갗 위로 ‘악마의 심장’ 껍질이 솟아났다.
뿔수리의 눈으로 선명하게 보이며 짜이는 실그물이 퍼지는 듯한 순간, 독가루는 순식간에 혈관 속에서 지워져 갔다.
뽀득, 뽀드득.
투란은 손을 움직임에 따라 가죽 마찰음이 일어났다.
이것이 ‘패러블랙 잉크’가 가진 능력의 기본…….
‘이 가죽이 독하기는 한데, 저 늪 쪽에도 만만찮은 게 많단 말이지. 뱀가죽도 안쪽에서 당하면 갈라지고 상할 지경이었으니…… 아, 이 그림모스의 가죽은 안이든 밖이든 상관없나?’
그림모스의 가죽을 방패 삼으면서 잉크는 시커먼 진창이 되어 흩어진 채로 본능에 따라 움직일 터였다. 아르고누스로의 귀환이 없다면, 오로지 그 늪의 성질에 따라서 가죽을 뿜어내며 자기가 놓인 자리에서 제멋대로 움직이겠지…….
“어라?”
투란은 뿔수리의 눈을 크게 뜬 채로 암벽의 가장자리로 갔다.
아래쪽에서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낙하하는 폭포가 코앞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보다 더 아래쪽에서 꿈틀거리는 시커먼 진창으로 보이는 잉크.
분명히 드라고니아의 말처럼, 잉크는 아르고누스의 제어를 잃은 채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주변을 삼키고, 제멋대로 가죽을 뿜어내며!
투란은 돌연 문장 속에서 작은 울림을 느꼈다.
‘투란-아르고누스’가 보내는 신호였다.
잉크는 발생하는 순간부터 자신을 낳은 존재에 충실하며, 절대적으로 그 의지에 따른다는 지식이 퍼뜩 투란의 뇌리로 스며왔다. 그리고 한번 내려진 명령은 의지를 통한 새로운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유효하며, 아르고누스의 존재가 지속되는 한 지켜진다.
‘라고 한다면, 저 잉크는 지금 완전히 제멋대로 날뛰는 몬스터?’
투란이 내린 결론은 드라고니아가 지적한 그대로였다.
잠시 투란은 아래쪽에서 흘러가는 시커먼 진창, 잉크의 행적을 찾아 눈알을 굴렸다. 뿔수리의 눈알은 듬성듬성한 잉크의 자취를 재빠르게 훑었고…… 폭포 아래쪽에서부터 정말 먼 곳까지 광범위하게 잉크의 흔적이 퍼져 있었다.
“진짜네…….”
그 잉크의 흔적들은 여기저기서 꿈틀거리며, 때로는 눈깔꽃을 터뜨리고 때로는 주변을 삼키거나 스며들면서 멈추는 것이 뭔지 모른다는 듯이 활동하고 있었다. 원래 아르고누스의 부재(不在)를 너무나도 잘 느끼는 듯!
털썩, 투란은 암벽 가장자리에 앉았다.
멀리서 굵은 줄기 속에 파묻힌 채로, 날카로운 푸른 수정빛을 휘두르는 분홍색 털뭉치들이 보였다. 꽥꽥대는 그 모양새는 투란이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늪의 바닥에 사는 줄기를 건드렸냐고 성질부리는 모습…….
‘음, 그러니까 내가 아니긴 한데 말이지.’
투란은 혀를 날름거렸다.
저 녀석들한테 미안할 이유는 없었다.
만나자마자 사람 잡아먹겠다던 녀석들이니!
하지만 다른 쪽을 흘깃하니, 투란의 담대하고 뻔뻔한 마음에도 살짝 미안한 기분이 생겨난다.
그쪽에는 잿빛바위 그랑츄 무리가 사투(死鬪)를 벌이는 중이었다.
녹암혈인가, 그린다크인가 하는 그랑츄랑 다르게 몸이 터져 나가는 일은 없지만 굵고 거친 줄기를 바로 찢거나 꿰뚫는 일도 없이 싸우고 있었다. 그 단단한 몸으로 버티면서 누가 더 오래가나 보자는 듯이 줄기를 패고 물어뜯고 있었다.
투란은 저 녀석들이 붉은 털의 웨어울프랑 싸워준 덕에 이것저것 많이 챙겼는데…… 지금 이 대난동 속에서 험악한 꼴을 당하는 원인이 되어 줬다!
뽀드득, 뽀득.
손에서 나는 소리에 투란은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본래 자신의 눈동자를 드러내며 투란의 눈길이 손에 닿았다.
손가락이 서로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가죽은 두껍게 손을 조이듯이 덮고 있었다.
‘조금 얇게, 감촉은 뱀가죽처럼…… 아니, 그냥 뱀가죽을 만들 수는 없나?’
투란의 상상과 호기심이 방향을 바꿨다.
―야……!
드라고니아가 기막혀하는 소리가 울렸다.
‘어? 아, 저쪽이야 내가 뭘 어쩔 수가 없잖아?’
투란은 아주 현실적이면서 냉정한 말을 던지며, 다시 손에 맺힌 그림모스의 가죽을 바라봤다.
―야,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