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43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43)
‘블러드 크러시.’
하마터면 범람에 맞먹을 정도로 대참사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는, 그나마 소소한 피해로 그쳤다고 하는데, 그 작다는 피해가 경계도시 두 곳을 전멸시켜 버린 사건이었다.
―투란?
희미한 기억에 헝클어진 투란의 뇌리로 드라고니아의 낮은 소리가 세게 울렸다. 정신 차리라는 듯, 자신이 한 말을 기억하라는 듯!
‘응? 아, 넌 모르겠구나. 오십 년도 안 된 일이라니까. 수십 년 되기는 했지만…….’
―뭐가 말이냐?
잠시 먼 풍경의 난동을 지켜보다가 투란은 정리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샤오콴 마을에서 보기 드물게 큰 화톳불을 피우고 큰 목소리로 떠들던 어른들 틈새에서 들었던 이야기였다. 세상의 끔찍한 일에 대해서, 어떤 사건이 정말 끔찍했는가를 경쟁하듯이 마법사, 사제 등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북적거리던 밤에 졸면서 듣다가 놀라서 잠을 잃은 채로 투란이 들은 이야기였다.
블러드 크러시(Blood Crush).
시작은 작은 한 방울의 피, 딱 그렇게 생긴 이름 모를 꽃의 열매 혹은 씨앗을 누군가 채취하는 것으로부터였다. 그 채취를 한 이는 왕국의 방벽 안쪽, 춤추는 산맥 안쪽의 몬스터를 막기 위해 세워진 방벽의 안쪽을 수색하며 경계하는 일을 맡기 위해 채용된 상아탑 마법사였다고 하는데…… 사실은 상아탑의 인장(印章)을 위조(僞造)한 로그 메이지였다는 설명이 붙는다.
진짜 상아탑의 마법사가 아니고 위조된 인장으로 왕국의 수색대로 채용된 용병 틈새에 숨어 있는 로그 메이지라는데, 그가 상아탑 소속인가 아닌가를 놓고 논쟁이 좀 있기도 했다. 책임 소재를 따지는 사람 사이에서 말이다. 하지만 마도(魔道)의 정상(頂上)에 도달했다는 상아탑은 매우 호쾌하게 어찌 되었든 자신들의 인장이라고 인정받은 것이 쓰였다면 자신들의 책임이라며 나서서 사건을 정리해 버렸다는데…… 덤으로 거의 일, 이 년 동안 춤추는 산맥의 로그 메이지들이 광범위하게 상아탑의 추적을 받고 사냥당했다는 소문이 이야기에 항상 덧붙여졌다.
이 대목에서 이야기는 무능한 주제에 호기심 많은 로그 메이지에 대한 쌍욕으로 흐르거나, 그런 상황을 핑계로 로그 메이지를 사냥하고 포획해서 강제로 상아탑의 규율을 각인시킨 상아탑의 마도사들의 포악함에 대한 맹렬한 비난으로 이어졌었다.
하지만 그 쌍욕과 비난의 마무리는 왕국의 경계를 넘어, 그나마 안전한 영역인 경계도시 쪽으로 그 채집물을 들고 나가는 로그 메이지를 잡아 죽이는 일은 당연하고 공평하다는…… 뭔가 조금 이상한 결론으로 끝났다.
옆으로 샌 이야기의 결론이 그리 이상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역시 그 호기심에 의해 채집했던 한 방울의 피, 그 모양새의 열매 탓이었다. 그 열매가 일으킨 두 도시의 몰살, 그건 그저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정도가 아니었으므로! 피가 흐르고 살아 움직인다고 여겨지는 것, 도시에게 키우던 가축과 도시 근처의 야생에서 살아가던 짐승까지 모두 죽었다. 전멸한 도시 두 곳에서 피가 흐르는 모든 것이 전멸한 것, 그것이 블러드 크러시라 일컬어지는 사건이었다.
첫 번째 도시가 전멸할 때는 그 상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그 첫 번째 경계도시와 교류하던 두 번째 도시가 전멸하는 과정에서 상황이 알려졌다 했다. 그나마 첫 번째 도시가 조금 구석진 지역에 위치해서, 직접 교류하던 다른 도시가 한 곳이라서 피해가 적었다고 하는데…… 만약 직접 교류하는 도시가 주변에 여럿 있었다면 블러드 크러시는 두 도시의 전멸로 끝날 리가 없다고도 했다.
그 원인이 되는 한 방울의 피처럼 생긴 열매, 그 열매는 진짜 피와 가까이하면 작게 반짝이기 시작했고 피와 닿는 순간, 닿은 피를 오염(汚染)시키며 스며든다. 그리고 오염된 피가 지배하는 자는, 살이 갈라지고 온몸이 핏빛 살점으로 덮인 괴물이 돼 버린다. 괴물은 곧 동류를 늘려가기 위해 날뛰고…… 희생자는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곧 넷이 돼 버리는 속도로 진행되어 도시 하나가 전멸하는 데 하룻밤도 길다 할 정도로 빠르다고 했다.
그런 블러드 크러시가 두 번째 도시를 전멸시키는 상황에서 끝난 까닭은, 두 번째 도시 사람들이 자신들의 도시를 폐쇄하고 더 이상 오염시킬 피가 없도록 막아내면서 밖으로 편지를 날린 채로 죽어갔기 때문이라 했다. 오염된 채로 밖으로 탈출하지 않고, 그 안에서 죽어간 두 번째 도시 사람들 덕분에 세 번째로 전멸하는 도시가 생겨나지 않고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오러클 워리어는 평소와는 다른, 아주 냉소적인 말을 흘려서 투란이 기억하게 했다.
“평원이었다면…… 저 잘난 제국이나 거기 기대 사는 평원의 왕국에서 블러드 크러시가 터졌다면, 제국 절반이 뭉개지거나 평원 왕국 몇 개가 날아갔을 거야. 거기 놈들이라면 귀족(貴族)이든 공민(公民)이든…… 자기가 오염된 상태든 아니든 제 살길 찾는다고 도망쳤을 테니까.”
투란에게 이상하게 들린 이야기였다.
샤오콴 마을에서도 흔히 보고 듣는 일 아니던가?
사냥갔던 파티에서 혼자 돌아오거나 하는 이들이 종종 있었고, 맨날 제 살길 찾아 혼자 도망치는 놈이네 아니네 하며 싸움질하는 꼴도 자주 볼 수 있는데 딱히 평원 쪽 사람들이 그런다고 뭐라 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나중에 투란은 오러클 워리어, 그냥 오러클 아저씨라 부르기도 했던 그가 혼자 숨은 채로 술 한 병을 몰래 마실 때 물어봤다. 평원 사는 사람들은 특별히 더 잘 도망 다니냐고.
그 물음은 잠깐 오러클 아저씨를 사레들린 모양으로 기침하게 했고, 눈물을 찔끔거리는 채로 대답하게 했다.
“미안, 투란. 아직 너한테는 잘 모르는 이야기였구나. 음, 그러니까 그게…… 나중에 어른이 되고 말이다, 세상을 좀 더 많이 구경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그 때는 너도 알게 될 거야. 이 춤추는 산맥에서 사는 사람들은 겁쟁이처럼 보이고, 겁쟁이처럼 행동해도 진짜 겁쟁이는 아니란다. 나는 그걸 착각했었지. 그리고 누군가에게 아주 힘들게 배웠다…… 넌 내가 미리 얘기해줬으니까, 좀 쉽게 배우길 바라마.”
블러드 크러시의 이야기를 꺼낼 때의 이상한 냉소와 다른, 오러클 아저씨가 이상하게 울고 있나 싶은 말투였기에 투란은 그 이야기를 똑똑히 기억했다. 누군가에게 배웠고, 투란이 배우길 바란다면 그때 그냥 가르쳐줘도 괜찮은 거 아닌가 해서 뭐라 또 물은 기억도 있었다. 그 말이 오러클 아저씨를 좀 웃게 했는데, 투란에게는 우는 듯한 모습으로 보였었다. 그리고 대답도 분명히 들었다.
“내게 그걸 가르쳐준 녀석은 열두 살이었고, 내가 그걸 배운 때는 그 열두 살짜리가 반 죽은 채로 칼을 든 여덟 살짜리 앞에서 방패를 들고 방벽 노릇을 할 때였지. 투란, 그때가 아니었다면…… 그 순간이 아니었다면 난 아직도 모르고 있었을 거야. 그러니까 언젠가 너도 그 때를 만나게 되면…… 아니, 넌 여기서 자랐으니까 필요 없으려나? 아무튼, 그 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될 거야.”
투란은 좀 더 알고 싶어 했지만, 마침 그 이야기를 꺼내려 하는 그 순간에 오러클을 향해 귀환술(歸還術)로 돌아오는 전투사제가 있었다. 어떤 파티에 끼여서 갔던 전투사제인데,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한쪽 팔과 다리가 뭔가에 씹힌 것처럼 너덜거리는 꼴로 간신히 끊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 지경이니 당연히 신전의 귀환술이 발동되어 돌아온 이였다.
투란과 떠들던 오러클 아저씨는 거꾸로 잡은 술병으로 그 귀환한 전투사제를 쳐죽이겠다는 듯이 두들겨 팼고…… 쇠망치랑 쇠몽둥이를 들고 뛰어온 샤오덴 할배에게 몇 대 맞으면서 도망갔다. 귀환한 전투사제는 샤오덴 할배에게 질질 끌려가서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는데…….
―투란!
‘어? 아차…….’
도리도리 투란은 고개를 저었다.
지난 일을 하나씩 더듬다 보니, 제대로 생각하기 위해서 좀 더 세세하게 기억하려다 보니 추억이 옆길로 새면서 질질 이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드라고니아가 그 흘러가는 투란의 생각에 간섭한 것이다.
그래도 투란은 오랜만에 그때 궁금하게 여겼던 일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떤 모자란 여덟 살짜리가 반쯤 죽은 몰골로 칼 들고 설치고, 어떤 얼빠진 열두 살이 그 앞에 방패 들고 섰을까? 다섯 살만 넘어도 칼과 방패가 필요한 급할 때 어른들 앞에 알짱대면 큰일 난다는 정도는 알 텐데 말이다.
아직도 투란은 오러클이 대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어디서 그런 바보 같은 애들을 봤는지 몰랐다. 오러클 아저씨는 그 뒤로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얼마 되지 않아 샤오콴 마을을 떠났으니까.
그리고 지금 투란은 그 오러클 아저씨의 일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 일을 기억나게 한 까닭, 투란이 세세하게 기억하고자 한 블러드 크러시의 요점에 집중할 때였다.
단 한 방울의 피, 그렇게 생겨서 정말로 다른 피와 섞이는 것.
피를 통해 번져가며 인간과 동물을 괴물로 바꾸는 것.
‘단 한 방울, 하지만 거기에 오염된 사람이나 짐승의 피는 또 다른 한 방울이 되고…… 강처럼 흐를 지경이라고 했었지. 그러다 더 번질 피가 없으면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면서 새로운 열매를 맺고…… 기다린다. 새로운 블러드 크러시를 일으킬 때까지, 기다린다.’
―블러드워커(Bloodwalker)의 재앙(災殃)이 있었나 보군.
투란이 기억을 정리하자, 드라고니아가 중얼거렸다.
‘응? 너 알아?’
―그래, 고대의 전쟁에서 뱀파이어의 저주라고 알려진 식물형 몬스터, 그게 블러드워커다. 피로 이어진 길을 걷는다고 말이지. 그게 한번 일을 저지르면 워낙 큰 규모로 피해가 나서, 재앙이라고 불렀지. 뭐, 정작 이성이 있는 뱀파이어를 붙잡고 물어보면 그런 풀이파리에 자기들 갖다 붙이지 말라고 으르렁거린다지만…….
‘음…… 뱀파이어라면, 저기 평원 도시 쪽에서나 나온다는 인간형 몬스터 아닌가?’
―그러고 보니 고대의 전승이 많이 살아 있는 이 산맥의 여섯 왕국 근처에서는 쉽게 볼 수가 없겠군. 낮이고 밤이고 온갖 몬스터에 대해 방비하는 곳인 데다가 뱀파이어건 뭐건 잡아먹는 괴물이 떼로 몰려다니는 탓에 녀석들은 이곳에 아예 오려 하질 않으니까.
‘그거 인간형이고 말도 한다니까, 몬스터 로드에게는 별로 재미없는 놈이라던데…….’
투란은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을 하고 나불대는 녀석은 삼키지 않는 게 좋다, 그 이유를 지금 나불대는 드라고니아를 통해 매우 깊이 느낄 수 있잖은가. 새삼 뱀파이어가 투란 앞에 나타난다 해도, 투란은 삼킬 의욕이 없었다.
―몬스터 로드라면 그냥 피 한 방울만 얻어도 대강 그 능력을 다 발휘할 수 있을 텐데. 심지어 놈들에게는 치명적인 햇살이 내리쪼이는 상태에서도 몬스터 로드는 그 능력을 꺼내 쓸 수 있다고, 오히려 좋아하는 거 아니었냐?
‘뭐? 진짜야!’
―몰랐냐?
‘본 적도 없고, 자세히 들은 적도 거의 없어. 그런데 햇살이 치명적이라고? 그냥 은밀하게 싸돌아다닌다고 밤에만 움직이는 놈 아니었나?’
―햇빛 쏘이면 잘 탄다. 피의 순도가 높은 놈일수록, 햇빛에 격렬하게 반응해서 더 잘 타지. 물론 피의 순도가 높은 뱀파이어라면 이성을 갖추고, 자신의 피를 제어하는 놈일 테니 햇빛에 대해 특이한 저항력을 키우는 경우가 많아서 쉽게 타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다.
‘그 다크 리저드랑 닮았네. 돌이 안 되고 타버리는 것만 다른가. 으, 잠깐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야, 자꾸 딴 데로 새게 하지 마!’
툭툭, 투란은 손에 든 뱀의 주둥이에 이마를 가볍게 박으면서 다시 기억과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 드라고니아에게서도 조금 민망해하는 듯한 낌새가 흘러나왔다. 저 앞의 거대한 난동을 놓고 외치다가 투란의 이상한 추억에 빠져들어서 괴상한 소리를 꺼내 들며 어울리고 있는 자신을 반성하듯…….
―대체 무슨 궁리를 하려는 건데?
엿듣고 엿보기는 때려치웠다는 듯이 아예 대놓고 묻는 드라고니아였다.
투란이 살짝 쓴웃음을 입가에 걸고 반짝이는 눈웃음을 띄운 채로, 격렬하게 난동이 벌어지는 풍경을 바라봤다.
‘저게 결국 아르고누스를 잃어버린 잉크 탓이라면, 한 방울의 잉크로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 블러드 크러시 같은 사고를 여기서 저 티탄 클래스의 영역 몬스터를 놓고 저질러 보겠다고?
‘음, 비슷해. 한 방울, 한 방울의 잉크가 제대로 된 역할만 해낸다면…….’
투란은 다시 깊이 생각에 빠져들어갔고, 드라고니아는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 뭔가 깊이 감동해서 동요하는 듯한 묘한 낌새가 좀 섞여 있는 듯했지만 투란의 집중된 생각은 이를 모조리 외면한 채로 한 가지만 더듬고 다듬어갔다. 오직 한 방울의 잉크, 끊어지지 않는다면 주변을 모조리 휘감으며 번져가는 한 방울로부터 시작되는 재앙…….
투란의 눈길이 지평선 너머를 향했다.
여기보다 더 깊은 곳, 이 산맥의 가장 깊은 곳의 풍경이 투란의 마음에 어른거렸다. 그곳에서 봤던 것, 겪었던 일…… 거기서 벗어나며 봐야 했던 것, 겪어야 했던 것…….
“티탄 클래스라고, 과연 덩치가 크고 넓다고 버틸 수 있을까.”
돌연 투란의 입에서 히죽거리는 웃음과 함께 중얼거림이 흘렀다.
뱀의 바싹 마른 머리통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 위에 걸터앉으면서 투란은 가만히 자신의 두 손을 모으며 중얼거림을 마친다.
“딱 한 방울, 한 방울만 보태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