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71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71)
Chapter 35. 초원에서
잠시 모든 기억이 흔들거리는 듯했다.
‘어?’
투란은 문득 자신이 어디에 있는가,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부터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숲이 요동을 치면서, 아빈가의 숲이 그 안에 담겨 있다는 신비한 힘을 다시 깨우고…… 순전히 투란이 무너진 폐허 아래, 지하의 밀실에서 꺼내온 갑옷 속에 숨겨져 있던 이상한 단검 탓에 깨어난 힘이 숲을 흔들었고…… 드라고니아는 숲이 엘페룬이란 저 먼 곳에서 여기로 옮겨온 것처럼 다시 어디론가 가려 한다고 했었다.
그래서 여기가 정말 싫다는, 드레이크―아눙 드라클의 기억에 완전히 동조하며 날개를 펼치고 힘차게 날아올랐었는데…… 지금 대체 자신이 무슨 꼴을 하고 있는 것인가, 어떻게 된 것인가부터 투란에게 의혹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때로부터는 시간이 좀 흐른 듯했고, 살랑거리는 풀잎이 가득한 들판의 짙은 냄새가 주변에 가득했다. 투란은 그런 냄새가 비어 있는 구덩이에 푹 빠진 듯한 꼴인데…….
‘구덩이? 구멍?’
지워진 듯한 기억의 한 끝자락이 퍼뜩 투란에게 되돌아왔다.
이 구덩이, 초원에 푹 파이려 하다 만 듯한 구멍이 되다 만 패인 구덩이는 투란 자신 때문에 생긴 것이다. 아주 높은 곳에서 그대로 처박히며, 어떻게든 버티려고 몸부림치다가 이 땅을 갈아버리는 꼴로 박힌 탓에 구덩이가 파였다!
‘왜 떨어졌지?’
날개를 펼친 기억과 추락한 기억의 틈새를 메우기 위해 투란은 열심히 생각했다.
드레이크의 날개, 비록 아직 어린 누앙 드라클의 것이었지만 사람의 작은 몸 정도는 큰 드레이크의 날개보다도 더 잘 띄우고 날릴 수 있는 강인한 것일 텐데…… 투란은 저 까마득한 높은 하늘의 구름 틈새에서 떨어져야 했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대체 무슨 일이었던가?
생각해내려는 마음에 금이 간 듯이 벌어져 있던 틈새가 조금씩 다시 뭉쳐들면서, 투란은 또 한 조각의 기억을 되찾았다.
‘날개가 오그라들었지! 아, 지워지듯이 사라졌어!’
누앙 드라클, 어린 드레이크의 날개는 형체를 잃고 말았다.
단숨에 투란을 까마득한 저 높은 곳, 구름조차 가르고 지나간 자리까지 올려놓은 드레이크의 날개는 몬스터 엠블럼, ‘천칭의 문장’이 억제됨과 동시에 그 형체를 유지하는 마력을 잃고 사라지고 말았다.
투란은 그 기억과 겹쳐지는 또 다른 기억을 바로 떠올렸고 확신할 수 있었다.
‘키린이 오러 몽거를 지울 때 같았어.’
다만 이번에는 키린의 성스러운 힘을 간직한 불꽃이 아니었다.
거대한 숲, 아빈가의 숲이라 일컬어지는 영역 전체를 휘감는 힘의 흐름…… 드레이크가 기분 나빠하며 싫어했던 눈동자의 형상을 만들어낸 힘의 흐름에 따라 일어난 바람결, 그 바람 속에 담긴 성령목의 영기(靈氣)였다.
그 느낌은 마치 오러와 비슷했고, 키린에게서 느꼈던 성스러운 힘과 닮아 있었다.
그 결과도 거의 똑같았고…….
‘그래, 그래서 떨어졌지. 그 높은 곳에서!’
죽는 줄 알았다.
투란은 새삼 날개가 사라진 순간에 온몸에 찾아들었던 전율(戰慄)을 다시 느낄 수가 있었다. 바위라든가 쇳덩이라도 내리박히면 박살나는 게 당연한 높이에서 맨몸으로 떨어져야 했다.
‘어째서?’
그리고 새로운 의문이 투란의 마음을 울렸다.
그렇게 몬스터 엠블럼이 억제당할 때를 대비해서, 아주 친절하게…… 혹은 끔찍하게 키린은 투란을 준비시켰다. 오러를 이용하라고, 오러로부터 이끌어낸 힘의 형체를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한데 투란은 그냥 추락해야 했다.
아빈가의 숲이 새로이 그려낸 거대한 눈동자는 투란의 오러까지도 억제했다.
‘근데 살아 있네?’
문득 투란은 현재 자신의 상태에 대한 의문을 품어야 했다.
여기가 어딘지, 어떻게 여기 있는지 궁금해하다 보니 지금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과 초원의 어딘가란 점이 새삼 마음을 두드리고 있었다.
도대체 지금 몸은 어떤 상태인가?
살아 있기는 한데…….
우두둑, 꽈드득.
팔다리를 움직이려고 하니 돌로 뭉쳐진 듯한 괴팍한 소리부터 났다.
돌로 된 도구를 억지로 비틀려 하거나, 맞물려 움직일 때나 날 듯한 소리였다.
그리고 이는 바로 투란 자신의 상태이기도 하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작은 돌?’
돌이라는 특성을 지닌 몬스터, 투란은 자신이 지닌 몬스터 중에서 먼저 작은 돌을 떠올렸다. 어쩌면 떨어지면서 작은 돌의 힘으로 몸을 감싼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 충격을 견뎌낸 것이 아닐까?
‘아니야. 이건 다른데?’
투란은 자신을 향해 짧게 던진 물음을 금세 스스로 부정해야 했다.
작은 돌이었다면 지금 몸이 느끼고 있어야 할 것은 늪이었다.
이 구덩이를 이미 짙고 끈적이는 늪으로 채워 몸을 방어하려는 것이 작은 돌의 성질이었고…… 투란에게는 아주 확실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구덩이는 어딘가 습기 없이 마른 느낌인 데다가 주변의 풀내음만 짙을 뿐이었다. 늪의 정경(情景)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몸이 돌과 같은 상태란 것도 분명했다.
‘숨도 안 쉬어지네?’
새삼 투란은 팔다리뿐 아니라 가슴과 목, 머리로 이어지는 모든 부분이 돌처럼 느껴지는 것을 깨달았다. 한데 숨이 가쁘거나 막혀서 괴롭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마치 깊은 숨을 들이쉰 채로 잠시 멈추면서, 그저 포근하기만 한 순간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이는 곧 투란에게 살짝 여유롭게 상황을 다시 점검하게 했다.
‘눈, 귀는 아직 안 보여. 하지만 냄새와 몸에 닿는 것의 감촉은 분명하고…… 아씨, 진짜 어떻게 된 거야?’
다시 투란은 조각나 흩어진 채로 마음속을 맴도는 기억을 더듬기로 했다.
지금 주변의 상태로 봐서는 딱히 위험한 느낌은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부터 파악한다면, 모든 것이 확실해질 듯한 예감만 짙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투란은 다시 기억을 더듬었고…….
‘소울테이커!’
유일하게 몬스터 엠블럼에서 벗어난 것처럼 형성되어 있는 몬스터를 알아차렸다. 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릴 때, 아빈가의 숲이 뿜어내는 성스러운 영기 속에서 몬스터 엠블럼이 억제당하는 그 순간에 불쑥 튀어나와 투란의 배꼽을 감싼 무늬 속으로 소울테이커가 깃들었다!
순간, 짜증과 울화가 투란의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올랐다.
마치 이렇게 구덩이에 처박힌 꼴이 된 탓이 소울테이커 탓이라는 듯, 소울테이커가 그렇게 제멋대로 튀어나와 날뛰지 않았다면 보다 산듯하게…….
‘어? 아! 맞아! 그랬어!’
울화 속에서 피어난 기억이 투란을 깨우쳤다.
그 광경은 아빈가의 숲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크고 거대한, 숲의 곳곳을 가로지르는 힘의 흐름은 바람을 일으켰고 그 바람이 짓이기고 지나간 거대한 궤적이 대체 뭘 그리고 있었는가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봤을 때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다.
폐허의 사원을 동공(瞳孔)으로 삼은 듯한 거대한 눈동자.
성령목이 자라나면서 뿜어낸 힘에 자극받은 폐허의 사원이 영기로 그려낸 형상은 눈동자였다. 그 눈동자가 허공을 쏘아보는 듯했고, 그 순간에 맑디맑은 창공(蒼空)을 향해 뿜어져 나온 성령목의 영기가 투란의 몬스터 엠블럼을 억제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주 짧은 동안에 투란이 날아오른 높이는 저 뾰족한 산보다 더 높았고, 날개를 잃었다 해도 떨어져 내리는 시간은 결코 순식간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투란은 떨어져 내리면서, 죽는가 하는 위기감에 몸을 떨면서도 제대로 봐야 했다. 아빈가의 숲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한곳에 집중되어 모여들다가 휙 지워지듯 사라지는 광경을!
더불어 하늘 높이 치솟아 오던 성스러운 숲의 힘도 사라졌다.
그때 투란은 드레이크의 날개로 도달했던 높이의 절반 정도까지 떨어져 내렸을 뿐이었고…… 몬스터 엠블럼은 조금 느리기는 했지만 제대로 다시 맥동하려는 듯했다. 그러니까…….
‘왜 갑자기 튀어나와 버린 거야, 이놈이!’
소울테이커가 배꼽에서 느닷없이 번져 나오며 투란의 몸을 돌로 변환시키는 일이 없었다면, 투란은 다시 드레이크의 날개를 펼치든가 아니면 오러의 불꽃 날개 형상을 끌어내서라도 제대로 땅에 내려올 수 있었다.
비록 그러다가 땅을 길게 파는 흔적이야 남길 수 있었겠지만, 이렇게 크고 넓은 구덩이를 만들며 처박히는 꼴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두둑, 빠드득.
손가락을 억지로 움직이려 하면서 투란은 거듭 생각했다.
문장 속에서 철저하게 보이드의 피막으로 감싸 제어했다고 여겼었는데, 소울테이커는 한순간에 뛰쳐나왔다. 그리고 다른 몬스터보다 우선해서 투란의 몸을 점거하며 자신의 기능을 발휘했다.
왜?
‘죽음?’
투란은 어렴풋이 소울테이커의 동인(動因)을 떠올렸다.
소울테이커가 배꼽에서 확실하게 그 존재를 뿜어낸 까닭은 투란이 느낀 죽음에 대한 위기감 때문이었다. 살기 위해서라면 뭐든 해야 한다고 느끼고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 순간…… 소울테이커가 움직였다.
몬스터 엠블럼이 억제되었는가, 오러가 억제되었는가 따위에는 전혀 상관없이 소울테이커는 그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그 능력, 기능은 순식간에 투란의 몸을 돌로 만들었고…….
‘빨려드는 느낌이었지?’
어느새 투란은 그때의 감각을 완연하게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몸이 돌이 되면서, 투란은 그 돌덩이에서 자신이 벗어나는 듯했다.
벗어나 어디론가, 보다 안전하게 ‘자기’라 불리는 것을 보관한 느낌…….
‘몬스터 엠블럼! 천칭의 문장을 느꼈어!’
소울테이커는 투란을, 투란이라는 ‘자기’를 몬스터 엠블럼 속에 챙겨넣은 듯했다.
그리고 몸은 언제라도 버릴 수 있고, 다시 키울 수 있는 낡은 옷처럼 돌로 변환시켜 버렸다.
그래서 투란은 아빈가의 숲이 빈자리를 채우러 몰려들어 온 초원의 일부에 처박히는 꼴이 되었고!
‘내 몸 돌려놔!’
왜 몸이 돌처럼 느껴지는가, 투란은 확실하게 자각했다.
돌이 된 것이다, 소울테이커에 의해서!
하지만 움직일 수 있는 돌이었다.
강한 의지만 품었다면, 소울테이커는 이 돌조각을 움직인다!
저 드레이크의 일그러졌던 괴상한 석상처럼!
‘내 몸!’
투란은 다시 자신을 향해 외쳤고, 크륵거리는 목젖의 움직임과 함께 숨결이 느릿하게 트이는 것을 느꼈다.
“……몸!”
이번에는 확실하게 소리가 입술 사이를 넘어갔다.
혀가 부드럽게 움직였고, 입술을 까칠하게 더듬었다.
이명(耳鳴)이 벽을 울리는 소리처럼 천천히 찾아들었고, 뿌옇게 시야가 다시 느껴지기 시작했다.
‘기막혀서, 이게 제어가 되는 상태였어?’
투란은 앉은 채로 손발을 내려다보며 어이가 없었다.
팔다리, 손발과 등, 가슴 언저리에는 살이 패이고 갈라져서 붉은 속살이 벌려진 틈으로 고스란히 드러난 채였다. 그럭저럭 멀쩡한 곳은 머리에서 허리로 이어져 내려가는 등뼈의 주요한 부분과 가슴, 배 속의 내장 부분 정도였다. 잘려나가거나 패여서 생명에 직접적인 위협은 아닌 부분은 상처가 깊게 남은 채였다.
이 상처의 생김새는 딱 돌이 갈라진 틈새 모양이었고, 소울테이커에 의해 돌이 된 채로 깨진 모양 그대로였다. 그 돌의 형상을 강한 의지로…… 사실상 투란의 억지로 피와 살, 뼈로 된 몸으로 되돌리자 그대로 벌어진 틈새가 상처인 꼴로 남은 결과가 이 모양이었다.
이는 투란에게 소울테이커의 본능이 뭘 꺼리고 있었는가를 아주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소울테이커는 이 몸을 완전히 봉합할 때까지 물러나려 하지 않은 것이다. 완전히 봉합한 다음에 다시 피와 살, 뼈로 되돌리려 한 것이다.
죽음을 회피하기 위해서 돌이 되게 했고, 그 돌이 다시 상처 없는 원래 몸으로 돌아갈 때까지 버티는 성질…… 바로 소울테이커의 본능이었다.
투란은 조금 전에 그 양보할 리가 없는 본능을 꺾었고, 억지로 돌의 상태에서 벗어났다. 그 결과는 꽤나 망가진 상처로 가득한 꼴을 내려다보며 새록새록 짙어지는 아픔 속에서 ‘악마의 심장’과 샤머닉 트롤의 심장을 형성시켜 얼른 상처를 회복하려 하는…… 약간 모자란 모습이 된 자신이었다.
만약 소울테이커의 본능을 따랐다면, 분명히 몸이 완전히 틈을 메운 다음에 돌의 상태에서 벗어났을 것이 너무 분명했다.
하지만 투란은 후회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도 몸이 제 모습을 못 찾으면, 이놈 그냥 움직이잖아.’
소울테이커가 반쯤 사라진 드레이크의 모습으로, 그저 돌로 나머지 몸을 채워 넣은 꼴로 어슬렁거리던 광경이 아직 눈에 선했다. 완전한 드레이크의 형상을 복원시키지 못하고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으면 그렇게 된다!
‘어째서?’
문득 투란은 고개를 갸웃했다.
소울테이커가 ‘자기’를 완전히 끌어당겨 보관하듯이 지키려 했던 감각이 떠올랐다.
만약 그때 소울테이커가 투란을 완벽하게 보관하지 못했다면 그렇게 반쯤 망가진 꼴이 되는 것일까?
이 몬스터가 소울테이커란 이름을 갖게 된 까닭이 영혼을 잠식해 잡아먹는다는 탓이라고 했었다…… 그렇다면 그때 투란이 느낀 감각이 바로 영혼이 잠식당하는 상태였던가?
‘먹힌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도 대답하지 않은 의문이 새록새록 투란의 마음속에 쌓여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