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75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75)
터덜거리면서 걸어간 투란이 바라본 것은 흙덩이가 잔뜩 굴러다니는 폐허였다. 사원처럼 석조건물이 무너져 쌓인 돌더미가 있지는 않았지만, 패이고 뭉쳐진 흙덩이들이 큰 더미가 되어 쏠리고 쌓인 꼴은 딱 폐허의 분위기로 넘쳐나 있었다.
그 뒤엉키고 갈린 흙덩이들을 툭툭 발로 차고 헤집으면서 투란은 살펴봤다.
“이래서는 남은 게 없네.”
얼마 뒤, 툴툴거리는 불평이 투란의 입에서 새 나왔다.
―뭘 찾는 거였는데?
드라고니아가 의아한 듯이 묻고 있었다.
투란은 입을 다물고 대답한다.
‘붉은 그랑츄.’
―붉은 놈에게 뭔 볼 일이 있나?
한층 더 의아한 듯한 드라고니아의 물음이었다.
‘응? 그랑츄는 몸 색깔이나 생김새에 따라서 전부 다른 놈들이라고. 이를테면 잿빛 바위는 단단하고 녹색 나뭇잎 빛을 띤 놈은 잘 안 죽는 끈질긴 놈이고…… 붉은 그랑츄도 뭔가 있을걸. 내가 살던 곳에서는 보기 힘든 색이라고 했고…….’
웅얼거리며 생각하는 투란이었다.
곧바로 드라고니아에게서 어이없어하는 잔소리가 새 나온다.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호기심에 와본 거냐!
‘부지런한 거라고! 일단 와봐야지! 혹시나 뭔 건질 것이 있으면 좋잖아! 아, 그런데 붉은 그랑츄가 무슨 성질인지 몰라?’
툴툴대며 묻던 투란은 드라고니아가 아주 심하게 짜증을 품었다는 것을 느꼈다. 문장 속 풍경을 본다면 분명히 별빛무리가 요란하게 화내는 듯한 꼴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투란은 모르는 척, 문장 속 풍경이 아닌 갈아엎어진 주변을 열심히 바라보면서 마음을 채웠다.
카프리곤의 대결, 붉은 그랑츄 무리의 돌격과 하얀 녀석이 도달할 때까지…… 수백 미터에 영향을 끼치면서, 그 중심지는 다시 봐도 역시나 폐허였다. 작은 풀잎까지도 잘게 찢기고 흩어져서 흙투성이 속에 섞여 있을 지경이었니!
결국 이런 투란의 낌새에 질렸다는 듯이 드라고니아가 대답을 꺼낸다.
―불꽃이다. 살갗이 붉은 그랑츄는 화염(火焰)의 특성을 잘 받아들여. 아마 이 근처에 분화(噴火) 중인 화산(火山)이라든가, 땅이 갈라진 틈새로 용암(鎔巖)이 흐르고 있을 거다. 붉은 그랑츄가 주로 서식하는 지역은 대부분 그런 환경이지.
‘아, 그럼 이놈이 바로 불을 먹고 강해진다는 그랑츄인가 하는 놈들인가?’
―먹어? 비슷하기는 하지만, 먹는다기보다는 견뎌내는 쪽이겠지. 뭐, 불꽃을 뒤집어쓰면 쓸수록 내화(耐火)의 역량이 상승하니까 어떤 면에서는 불을 먹고 강해진다는 말이 맞을 수도 있겠군.
‘헤에, 환한 불꽃 색이라고 해서 그냥 좀 빨간 녀석들이라 아닌가 싶었는데…….’
기억을 더듬던 투란의 눈썹 사이가 살짝 좁혀졌다.
샤오콴 마을에서 얼핏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다 보니, 드라고니아가 꺼낸 화산이란 말과 엮이면서 드레이크의 기억이 불쑥 튀어나오고 있었다.
‘있구나. 이 근처에 화산, 용암이 흐르는 곳.’
―뭐?
‘아아, 있었어. 드레이크가 이 근처에서…… 아직 알을 낳기 전에 머물던 곳이 이 근처거든. 용암이 흐르고, 불꽃이랑 연기를 뿜어내는 갈라진 틈새가 있어. 거기다 마음에 안 드는 놈을 몰아넣기도 하고 집어다 떨구기도 하고 그랬지.’
머리를 긁적이면서 투란은 드레이크의 기억을 더듬었다.
드라고니아는 이에 대해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투란은 발끝으로 다시 흙더미를 툭툭 걷어찼고…… 흙덩이 속에서 꿈틀거리며 나오는 검은색, 붉은색이 뒤엉긴 지네를 봤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고, 사람 손가락 정도 굵기인 녀석들이 두꺼운 흙더미 속에서 와르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사아아, 사르르.
지네 수십 마리가 갑작스럽게 노출된 자신들의 상태를 깨달은 듯, 그렇게 만든 자를 응징하겠다는 듯이 투란의 발에 몰려들었고…….
와직, 와자작!
잿빛바위 일족 그랑츄의 발은 그런 지네 무리를 가차 없이 밟아 짓이겼다.
―그거 시체지네란 녀석이다만, 쇠도 갈아서 끊어내는 이빨과 발을 지녔지. 너무 무시하지 마라. 그래도 마수라 꼽히니까.
‘아, 그래?’
투란은 흙덩이를 발로 밟아 으깨서, 더 많은 지네가 한 무더기 튀어나오게 했다. 그리고 그 속에 아예 한쪽 발을 담그듯이 밀어넣었다.
시체지네 수십 마리가 성을 내는 듯한 움직임으로 투란의 발을 뒤덮었다. 그리고 바로 드라고니아가 한 말을 실행시키겠다는 듯이 이빨로, 수십 개의 발로 잿빛바위 그랑츄의 형상을 한 투란의 발을 긁고 갈아내려 했다.
물끄러미 이 광경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투란은 바로 결론을 내렸다.
‘역시 죽은 그랑츄만 먹을 수 있는 놈들이네.’
―주로 시체를 먹고, 시체라든가 잔해가 있는 곳에서 나온다고 시체지네라고 하는 놈이니까.
약간 떨떠름한 소리로 드라고니아가 덧붙였다.
‘뭐, 어차피 칼날도 안 박히거든, 이 그랑츄의 발은!’
조금 자신만만하게 대꾸하며 투란은 두 발을 모두 흙더미에 박아넣었다.
붉은 그랑츄의 갈려지고 터져버린 살점과 핏물에 물든 흙더미 속에서 잔뜩 모여든 시체지네가 바로 두 발, 다리를 향해 전쟁이라도 벌이겠다는 듯이 이빨과 발을 들이대는 것을 고스란히 느끼는 투란이었다.
―뭘 하려고?
뭔가 힘을 과시하려는 것이라면, 시체지네 같은 벌레에게 자랑하는 것은 뭔가 좀 아니잖느냐는 듯이 드라고니아가 묻고 있었다.
‘나도 먹어야지.’
―뭐?
어이없어하는 드라고니아의 반응을 느끼면서, 투란은 그대로 잿빛바위 살갗 위로 ‘악마의 심장’ 줄기를 키워나갔다.
시체지네의 이빨과 발이 새로 돋는 ‘악마의 심장’ 줄기를 절단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잔 줄기, 자잘한 조각이 시체지네 속으로 오히려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배 속에서 바로 크고 굵은 줄기로 성장해서 다시 그랑츄의 살갗에 달라붙었다. 살갗을 까칠하게 만들며 잔가시를 키워놓은 ‘악마의 심장’은 시체지네를 파먹으며 되돌아온 줄기를 받아들였다.
‘꽤 먹을 만하네.’
투란은 ‘악마의 심장’이 상당한 양분을 저장하는 것을 느끼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늑대의 팔과 트롤의 팔이 두툼해지고 모양과 색이 바뀌었다. 곧 투란은 조금 우쭐대는 표정을 지으면서 잿빛바위 그랑츄의 두 손을 움직였다.
붉은 그랑츄의 잔해를 향해 몰려든 시체지네 떼를, 투란은 두 손 두 발로 파내며 ‘악마의 심장’ 줄기를 이용해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충분한 양분은 곧 투란의 몸으로 퍼져 나갔고, 팔다리에 아직 흔적이 남아 있던 상처가 지워지기 시작했다.
‘사람은 역시 없는 건가.’
먼 지평선, 산자락, 굽이치는 초원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투란이 떠올린 생각이었다. 배가 가득 채워진 다음에 천천히 하얀 녀석과 카프리곤이 움직인 방향으로 걸어온 것도 벌써 몇 시간이 지났다.
해가 기울어지는 광경, 밤이 다가오는 풍경이 펼쳐지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색다른 느낌이 짙어지고 있었다.
―사람? 여기서 사람을 찾고 있었나?
드라고니아가 이 무슨 바보짓이냐는 듯이 묻고 있었다.
‘찾는 거는 아니고…… 히엔나가 있고, 어쨌든 그랑츄가 있었잖아. 아빈가의 숲처럼 이상한 곳도 있고…… 마수인 여우가 마수인 채로 살 수 있는 곳이잖아. 그렇다면 몬스터 헌터의 사냥 파티가 여기까지 왔을 수도 있다고. 아무튼 히엔나가 버티고 살 수 있을 정도니까. 키린도 저 늪에서 벗어나면 슬슬 사람을 만날지 모르니까 대비하라고 했고…….’
조금 뚱하니 투란은 길게 늘어놓았다.
딱히 사람을 그리워하거나 찾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는 것…… 어쩐지 바보 같아 보이기는 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몬스터의 영역으로 악명이 자자한 춤추는 산맥의 깊은 곳이니까!
―여우는, 그놈의 숲이 통째로 옮겨진 탓에 덩달아 왔던 거잖아. 게다가 그 숲의 주인 노릇을 하던 요정의 일족조차 전멸했다. 여우도 네 앞에서 다 죽었지. 화산이 가까이 있는가 잘 모르겠다만, 제법 날뛸 줄 안다는 붉은 그랑츄 녀석들은 그냥 구경하러 왔다가 시체지네의 먹잇감이 되었잖나. 히엔나 녀석들은 아예 근처에 다가오지도 않고 도망치느라 바빴고…… 네가 여기 있다고 해서, 다른 인간들이 이 근처에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걸. 너도 안에 떨궈진 탓에 여기 있는 거지, 밖에서 여기까지 뚫고 들어온 건 아니라고.
뭔가 투덜대는 듯도 하고, 뭔가 진지하고 신중하게 경고하는 듯도 한 드라고니아의 긴 말이었다.
‘알아, 나도 알아…….’
씁쓸하니 일그러진 입매로 투란은 대꾸했다.
확실히 히엔나는 조금 사정이 좋다 싶으면 상대가 꽤 세다는 것을 알아도 덤벼드는 포악한 몬스터 패거리라 했었다. 그런 놈들이 도망 다니면서 살아남는 이곳에 들어오는 짓은 확실히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없다는 말이 맞았다.
―투란, 벗어나고 싶다면 바로 벗어날 수 있잖나?
문득 생각난 것처럼, 살짝 위로하는 것처럼 드라고니아가 짚고 있었다.
투란에게는 그 의미가 분명했다.
‘응? 아, 날개로?’
―그래, 넌 자유롭게 날 수 있다. 이 근처 지형에 대해서도…… 좀 변한 구석이 있을지는 몰라도 어느 정도 알고 있잖나?
‘그렇기는 하지.’
이번에는 시원하게 쓴웃음을 지으면서 투란이 대꾸했다.
―그런데?
드라고니아가 조금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긁적, 긁적.
투란은 샤머닉 트롤의 손으로 뒷머리를 긁으면서, 뒷머리 가득 채워진 잿빛바위의 살갗과 그 속에 맥동하는 ‘악마의 심장’ 줄기를 느끼면서 느릿하니 대답을 꺼낸다.
‘나, 여기 다시 오고 싶지 않거든.’
―뭔 소리냐?
쓴웃음이 좀 더 짙게 투란의 입가에 매달렸다.
느릿하게, 초원의 구릉(丘陵)을 걸으면서 투란은 차분한 생각으로 드라고니아의 물음에 답을 한다.
‘늪을 벗어날 때, 날개를 썼었잖아. 그리고 완전히 벗어났을 때는…….’
―아르고누스를 사냥했지.
‘응. 그리고 봤잖아. 늪에 퍼져 있는 녀석들…… 내가 만나지 못한 녀석들, 만났더라면 얼른 잡아 삼켰을 녀석들…… 꽤나 강해졌으니까, 충분히 사냥할 만했고, 삼킬 수 있었어. 그런데 후딱 벗어나는 바람에 나중에 구경만 했지.’
―거기 계속 머문다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었잖나?
‘맞아. 그래도 내가 기회를 버린 거잖아. 그리고 난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어. 도망친 그곳으로…… 정말 다시 못 뛰어들겠더라고. 생각해봐, 다시 들어갔다고 해도 난 다시 빠져나올 수 있었어. 아르고누스까지 얻었으니까, 보이드도 제대로 깨달았잖아. 그런데 진짜 못 들어가겠더라고.’
―그러니까, 여기서도 한번 나가면 다시 올 생각이 없으니까 있는 동안 천천히 둘러보겠다고?
‘응. 키린이 남긴 편지에도 가능한 한 많이 보라고 했어. 혹시 다른 사람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라고도 했고…… 드레이크도 옛날에 이 근처를 돌아다니는 사람을 본 적이 있어. 직접 마주친 일은 없는 것 같지만, 서로 보고 피해간 그런 일이 어렴풋이 기억나거든.’
소리 없는 답을 하던 투란이 눈을 가늘게 하다가 곧 이마를 문질렀다.
뿔수리의 눈이 검은 가죽빛으로 물든 눈썹 위에서 뜨였고, 멀리 보이는 아스라한 풍경 속에 모락모락 연기와 열기가 피어나는 광경이 보였다.
‘음, 저기가 땅이 갈라진 곳이네.’
투란의 걸음은 그쪽으로 향했다.
아련하게 보이는, 거의 지평선과 투란 사이의 중간 정도로 보이는 곳에서는 작고 붉은 점이 올망졸망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뿔수리의 눈으로조차 아직 그 점들의 세세한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투란은 그 붉은 점들이 그랑츄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카프리곤이 싸우는 곳까지 찾아왔던 무리…… 정찰대 혹은 탐색대처럼 보이던 그랑츄 패거리의 본거지가 저 근처일 것이다.
걸으면서 투란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캥캥거리는 히엔나의 울음, 그런 히엔나를 사냥하겠다는 듯이 빠르게 움직이는 큰 도마뱀처럼 보이는 짙은 그림자, 그런 녀석들의 움직임에 휘둘리듯이 찰랑이며 바람결에 휘날리는 듯이 보이는 길게 자란 풀이 가득한 초원의 풍경을 놓치지 않고 봤다.
드레이크, 알을 낳기 전의 아랄 드라클이 사냥을 하고 여유롭게 얽혀 살아가던 곳이 바로 이 초원인 듯했다. 다만 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 드레이크, 누앙 드라클에게는 위협적인 녀석들도 함께하는 초원이었으니…… 알을 품게 된 드레이크가 잠시 떠난 것이 당연해 보였다.
‘뭐, 찾아간 늪도 결국은 그리 안전하지는 못했지.’
씁쓸한 기분이 다시 가슴 깊은 곳에서 기억으로 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투란은 붉은 점들이 연기와 열기가 얽힌 곳을 향해 움직이는 것을 봤다. 그 붉은 점들이 향한 곳에서 까만 점, 그랑츄보다 조금 크고 높이 치솟는 까만 점이 하나 섞여 있는 것도 보였다.
‘얼레?’
검은 카프리곤도 용암이 흐르는 땅의 틈새 근처에 서식하는 모양이었다.
하얀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묘한 두근거림 속에서, 투란은 마그마가 연기와 열기를 뿜어내는 곳을 향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