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79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79)
투란은 고요해졌다.
생각도 멈추고, 심장도 고요함 속으로 파고들 듯이 그 두근거림을 가라앉혔다.
어디서 어떻게, 왜 갑자기 자신의 곁으로 이 하얀 녀석이 왔는가 알 수 없었다. 아니, 이 녀석이 정말 어딘가에서 자기 곁으로 왔는가조차도 투란으로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 투란이 보고 느낀바, 그건 걸음을 멈추지 않고 걷다가 갑자기 길을 돌아서는 순간에 세상의 풍경이 확 바뀐 듯한 상황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하자면, 투란이 지금 카프리곤이 있던 곳으로 가는 중이었고 이 하얀 녀석은 애초에 카프리곤을 쫓던 녀석이니 만난 것일 수도 있었다. 여전히 하얀 녀석이 카프리곤을 쫓는 중이었다면, 어쩌다 이렇게 맞닥뜨릴 수는 있잖은가?
하지만 그 냉정한 생각 깊은 곳에서 투란은 드라고니아조차 침묵하게 만드는 이 상황의 이상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던 곳, 사라진 아빈가의 숲에서 여우가 보여줬던 공간 도약의 느낌조차 없이 하얀 녀석이 바로 곁에 툭 튀어나온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악마의 심장’이 지닌 감각조차 닿지 않는 영역이 바로 곁에 있었다는 듯!
붉은 호수 쪽에서 뜨거운 바람이 몰려왔고, 이끼가 누릇한 빛깔을 띠면서 검은 돌을 타고 오는 듯한 차가운 바람은 초원에서 흘러와 투란의 발목으로 감겨 오는 듯했다.
그르륵, 크릉.
하얀 녀석이 동글동글한 머리의 아래편을 찢듯이 열었다.
호(弧)를 파듯이 드러난 열린 틈새로 톱니를 구부려 넣은 듯한 가지런한 두 줄의 날카롭고 하얀 뼈 같은 것이 보였다.
‘이빨?’
투란은 조금 늦게 그 두 줄이 하얀 녀석의 입과 이빨인 것을 깨달았다.
마치 투란의 생각이, 감각이 모두 느릿하게 움직이는 느낌이 기괴했다.
세상이 느려지는 듯한 풍경을 몇 차례 봐왔던 투란은 지금 이 상태가 정확하게 그 반대란 것을 금세 깨달았다.
주변은 모조리 가속한 듯이 살랑거리는 바람결이 허공을 채색하듯 흘러가고, 이끼 틈새로 간간이 보이던 풀잎은 수레바퀴가 돌듯이 흔들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투란을 더디게 만든 것은…….
크릉, 그르르!
목젖을 울리며, 사냥감을 포획했다고 웃는 듯이 입을 연 하얀 녀석이었다.
투란은 하얀 녀석이 앞발―두 손―을 올리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손톱이 없는 그저 삐죽한 손가락 끝이 하얗고 날카롭게만 보이는 채로 갈고리 모양을 한 채로 할퀴고 베어 왔고, 삐죽하니 살랑대는 토끼 귀처럼 보이기도 부드러운 뿔처럼 보이기도 하는 긴 머리의 돌기가 그 끝으로 투란을 겨냥했다.
열두 가닥이 분명한 여우 꼬리도 투란을 겨냥했다.
반쯤 몸을 일으킨 채로, 두 무릎은 분명히 굽혔지만 좌우로 벌린 허벅지가 굵고 넓은 다리 사이로 새하얀 거죽이 타고 올라가 보슬거리는 가슴과 목을 채우는 몸통은 어딘가 가늘고 길게 마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투란은 하얀 녀석의 두 손이 교차하는 대각선의 궤적으로 자신의 몸을 긋는 것을 보면서, 그 두 어깨에 나선의 흐릿한 무늬와 텅 빈 하얀 가슴의 양 끝에 얼룩처럼 자리 잡은 회색의 무늬도 봤다.
세상이 온통 빠르게 움직이는 와중에 느릴 대로 느려진 투란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모든 광경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뿐이었다. 몸이 토막 나면서 흩어져 내릴 때까지, 정신이 캄캄하게 물들며 감각이 사라질 때까지!
그리하여 투란의 정신으로 깊은 어둠과 정적이 찾아왔을 때…….
‘얼레?’
* * *
“살아 있나?”
중얼거리는 소리를 일부러 내면서, 투란은 자신이 문장의 풍경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확인했다.
“살아 있다.”
또렷한 대답이 별빛 무리로부터, 신중한 말투로 튀어나왔다.
“어떻게?”
투란은 드라고니아를 향해 일부러 소리를 내며 되물었다.
분명히 문장 밖, 몸의 모든 감각이 정적과 어둠으로 채워졌다.
때문에 투란의 마음, 정신 또한 그런 정적과 어둠만을 자각할 뿐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문장 속 풍경에 덩그러니 놓인 듯한 상황이라니!
“소울테이커.”
드라고니아가 담담하게 대답해왔다.
그 순간, 이미 투란은 ‘천칭’의 정상에 자리 잡은 소울테이커의 형상을 볼 수 있었다. 고고(孤高)하고, 당당하게 소울테이커가 꽉 닫힌 마개 아래에서 천칭의 정상에 놓인 크고 넓은 원형의 받침대 위에서 둥실거리며 떠 있는 모습이었다.
두 개로 나눠진 물방울과 구슬의 형상이 살랑거리며 빛을 잔뜩 머금은 모습.
한숨처럼 투란은 다시 중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박살났다는 거네, 내 몸.”
“죽는 게 당연할 정도로.”
드라고니아아 찰랑이는 별빛 무리 속에서 더 담담하게 보태는 소리를 울렸다.
손발도, 팔다리도, 머리도 몸도 없이 문장을 둘러보는 꼴이 된 것을 자각하면서 투란은 다시 중얼거렸다.
“소울테이커가 아니었으면 죽었을 상황이라고? 삼키라고 권한 네 덕분에 산 건가?”
삐죽대면서 심술궂은 말투가 이뤄낸 소리였다.
별빛 무리가 부드러운 빛의 군무(群舞)를 흘리면서 담담하고 고요한 대답이 나온다.
“아니. 섀도우 하트가 그렇게 쉽게 널 죽게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거다. 거기에 샤머닉 트롤의 심장도 있잖나? 소울테이커가 이 상황을 다루는 것이 더 유리해서 선택된 것일 뿐이지……. 그 두 개의 심장만으로도 손톱만큼 남은 너의 살점에서 너는 완전히 몸을 재생성할 수 있었다.”
이 풍경이 아니었다면, 몸을 움직이는 상황이었다면 틀림없이 자신이 머리를 긁적댈 것이라는 점을 느끼면서 투란이 묻는다.
“소울테이커가 이 상황에 유리하다는 것은 뭔 소리야?”
“너도 느낄 수 있잖아. 그 하얀 녀석은 네 몸을 아주 미세한 단위로 으깨놨다. 미묘하게 꿈틀거리거나 움직이는 부분이 티끌만큼도 남지 않게 말이야. 그런 조건이라면, 아예 돌멩이처럼 꿈쩍도 않는 소울테이커가 유리한 거지. 섀도우 하트, 악마의 심장이라면 줄기조각이 계속 움직이며 어딘가에 처박혀 숨으려 했을 테고 하얀 녀석은 그것마저 계속 짓이기려 했을 테니까. 조금 불리한 셈이다.”
“음…… 그렇게 가루가 되도록 흩어지면 악마의 심장으로는 어떻게 안 되는 거 아니었어? 트롤의 심장도 일단 모양이 갖춰진 다음에나 두근거렸을 텐데…….”
“투란, 겸손해하는 거냐? 아니면 모르는 거냐? 샤머닉 트롤의 심장은 작은 씨앗만으로도 몸 전체를 재생시킬 수 있다. 악마의 심장이 내놓는 씨앗은 티끌이 된다 해도 적절한 환경까지 바람결에 흘러가서 다시 발아(發芽)하고 성장할 수 있고 말이지. 물론 그렇게 흩어진 채로 제각각 재생된 몸은 한자리에 만나서 융합해야 온전한 너로 되돌아올 테니까…… 이럴 때는 소울테이커가 적절하고 유리한 선택인 거야. 당연히 말이지. 그러니까, 소울테이커 때문에 목숨을 구했네 어쩌네 할 필요는 없다. 내게 감사하는 척도 하지 말고!”
“쳇, 알았어. 그렇다면…….”
슬슬 드라고니아를 추켜세우면서 놀려먹을까 하던 투란은 곧 그런 낌새를 싹 치우고 진지하게 생각하며 묻는 소리를 꺼낸다.
“대체 뭔 수작이었지, 저 하얀 거? 어떻게 했길래 내가 뭘 제대로 느끼지도 못한 채로 박살난 거야? 잉크조차도 제대로 반응할 여지가 없었다고.”
가속하는 ‘패러블랙 잉크’의 신경망이 지닌 반응 속도는 ‘악마의 심장’을 확실히 압도했다. 분명히 여러 개의 눈을 꺼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몸 안에 잉크가 상당히 흐르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하얀 녀석이 곁에 나타나는 순간, 그 모든 것이 전부 느려진 채로 당하고 말았다.
“생체파동. 녀석을 감지하는 게, 녀석의 출현을 알아차리는 순간에 제대로 방어하지 못해서 녀석이 흘리는 생체파동에 완전히 압도당했던 거다. 카프리곤은 쉴 새 없이 자신의 몸을 파동장벽으로 지키니까 그런 상황을 피해 달아난 것이고…… 몬스터 로드인 너는 드레이크를 형성하거나 고르고니아를 꺼낸 채가 아니었으니까.”
“음, 적어도 둘은 막아낼 수 있었다는 거네.”
투란은 씁쓸하게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삼킨 몬스터로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뭘 어찌 해보기도 전에 몸이 굳어 쓰러진 셈이었다. 정신은 아주 말짱한 채로 그 광경을 모조리 감상하는 상태가 돼 버렸고!
“하얀 녀석의 수준이 꽤 높았다. 키린에게서 물려받은 오러 가드조차 확실하게 압도당했으니까.”
“에? 아! 나, 오러 가드 하고 있었구나!”
“당연하지!”
뒤늦게 깨달은 듯한 투란의 대꾸는 드라고니아를 살짝 발끈하게 한 모양이었다. 이는 곧 투란에게서 실실 웃음 짓는 소리를 끌어낸다.
“아니, 왜 네가 화난 소리를 내? 당한 거는 나라고.”
“넌 최소한의 대책도 없이 구경만 하다 당한 게 아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아. 문제는…… 투란, 그 하얀 녀석이 사용한 능력을 되새겨봐라. 그건 한 종류 몬스터가 지닌 능력이 아니야. 그 꼬리는…… 정말 아빈가의 여우처럼 널 묶는 공간장벽을 만들어냈다. 그 귀인지 뿔인지 모를 털뭉치 더듬이는 엄청난 지각능력으로 네가 형성한 몬스터의 구조를 파악했어. 못 느꼈나? 녀석은 철저하게 그 순간의 널 간파하고 묶고, 산산조각을 낸 거다.”
진지한 드라고니아의 말은 투란에게 분명히 그 의미를 전했다.
“마치 몬스터 로드 같았다고?”
“그래.”
“하지만 몬스터 로드는 아니었다니까.”
투란은 다시 한 번 분명하게, 하얀 녀석이 흘리는 느낌을 되새기면서 말했다.
드라고니아도 이에 동의하듯, 별빛 무리 속에 살짝 흔들리고 혼란스러운 반짝임을 드러내면서 소리 낸다.
“키마이라 따위도 아니었지. 녀석은 철저하게 몬스터 수준의 능력을 보였다. 마수라든가, 짐승을 뭉친 힘이 아니었어. 대체 녀석은 뭐지?”
“엥? 아, 그야 몬스터지.”
픽, 웃음 짓는 말투로 투란은 간결하게 말했다.
별빛 무리 사이로 번개처럼, 벼락처럼 울컥하는 듯한 빛이 흘렀다.
천칭이 고요하게 그 빛을 받으며 깊은 저 아래를 향해 꽂힌 기둥처럼 느릿하게, 그 안에 가득 채워진 톱니바퀴를 굴리는 느낌이 전해왔다.
“그런데 대체 지금 내 몸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계속 이렇게 깜깜한 채로 있어야 하나?”
투란은 새로운 호기심을 드러냈다.
다시 별빛 무리가 가볍게 일렁였고, 담담해진 대답이 나온다.
“소울테이커에 집중해봐. 이전에도 느꼈잖나. 이번에는 억지로 소울테이커의 상태에서 벗어나려 하지 말고. 완전하게 몸을 재생할 때까지 기다려봐. 몬스터 로드의 몬스터로서 소울테이커는 네 영혼을 어찌하지 못하는 모양이니까 참고 기다리라고.”
“알았어.”
간단히 대답하면서, 투란은 소울테이커의 형상에 집중했다.
* * *
후우으으.
바람결이 우는 소리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귀로 듣는 것은 아니었고, 눈으로 보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지각(知覺)하고 있을 뿐이었다.
투란에게는 어느 정도 익숙한 감각이었다.
‘악마의 심장’을 통해 겪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악마의 심장’은 움직이는 줄기가 있기라도 했다.
소울테이커의 작은 알에는 그런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오롯하게, 돌로 된 작고 작은 알인 채로 투란은 자신이 어딘가에 놓인 것을 느낄 뿐이었다. 뜨겁고, 차가운…… 사람이라면 살갗에 닿는 느낌만으로 충분히 소름 끼쳐 하든가 땀을 흘릴 듯한 곳에서 하늘 높은 곳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햇살을 느끼며 어딘가에 놓인 작은 알…….
투란은 그 알 속에 자신이 갇힌 듯하다는 것을 느꼈고, 조금 불편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얌전히 참고 기다리기로 했다.
금방 소울테이커의 본능이 부드럽게, 평온하게 투란의 감각을 덧씌웠다.
‘아, 이거 햇빛에서 양분을 얻나?’
햇살 속에서 소울테이커는 힘을 얻고 있었다.
한순간에 알을 깨고 나갈, 온전한 몸을 만들어낼 양분을 축적하고 있었다.
한순간의 꿈틀거림도, 털끝만큼의 낭비도 없이 오로지 파괴된 몸을 단숨에 생성할 힘을 축적하며 기다리는 것, 이것이 소울테이커의 본능이었다.
햇살 아래 작은 알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투란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불쑥 궁금해졌다.
‘얘, 돌인 채로 움직일 수 있지 않았나?’
―망가진 몰골이었잖아!
드라고니아가 투란의 호기심에 바로 대꾸해왔다.
‘음…… 그러고 보니 그런 몬스터 있지 않았나? 돌인 채로 가만히 있다가 스윽 움직이면서 마법사의 집을 지킨다든가 하는 그런 거……. 그것도 돌이면서 움직이는 놈이라던데…….’
―모빌 스톤 말이로군. 가르골이라는 몬스터도 낮에는 돌, 밤에는 가죽에 덮인 짐승처럼 돼서 움직인다.
투란의 호기심을 누르려는 듯한 대답이 이어 나오고 있었다.
‘그래? 흐흠.’
투란은 감각을 보다 넓히려 하면서, 더 주변을 둘러보려 하면서 일단 참고 기다리기로 했다. 찢어진 몸이 아닌, 온전한 몸으로 돌로 된 알을 깨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