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18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18)
―정신 차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야말로 섬광이 스친 찰나의 순간에 투란은 ‘들었다’
자신의 외침이지만 자신이 외치지 않은 강한 마음의 소리였다.
쩌렁거리는 그 메아리와 함께 머리가 시원해졌다.
시원해진 생각이 더듬이처럼 활동했고, 이 메아리치는 소리가 가슴에서 울려 나온 것임을 파악했다. 때문에 근심과 염려가 벼락처럼 찾아들기도 했다.
과연 가슴속에서 외치는 이 녀석은 어떤 놈인가!
―자신을 무엇이라 생각하지?
돌연 던져진 물음이 투란의 생각을 잡아끌었다.
길잡이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말투랑 비슷했다.
대답은 반사적으로 나왔다.
‘몬스터 로드, 투란!’
쓴웃음이 느껴지는 듯하더니, 물음이 이어진다.
―너는 괴물이냐? 괴물이 네가 되는 건가?
‘사람…… 사람이다!’
그 순간, 뭔가가 투란의 깊은 곳에서 매듭지어졌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람으로서 ‘넌 뭐냐?’ 혹은 ‘넌 누구냐?’ 하는 질문을 던지려는데…….
―너란 건 없다. 우리도 아니다. 오직, 투란만이 있다.
간결하고 명확한, 매듭지어진 것이 무엇인지를 선언하는 듯한 세찬 외침이 먼저 투란을 깨닫게 했다. 이 깨친 바를 정리하려면 아무래도 하나씩 더듬어 봐야 할 듯싶었다.
‘……어?’
투란은 손목에 매달려 허공에서 덜렁거려야 할 실이 공중에서 구불거리며 정지된 것을 알아차렸다. 아니, 정지된 것처럼 느껴졌다! 절대로 정지되어 있지 않은데 그렇게 느껴진 까닭은 간단했다.
생각이 엄청나게 빨라졌다.
그냥 넘길 수 없는 기회가 주어진 셈이잖은가?
투란은 몸 상태, 주변 상황부터 알 수 있는 만큼 알아보기로 했다.
먼저 따질 것은 왜 생각이 이토록 빨라졌는가였다.
눈동자 속에서 맥동하다가 투명한 줄기를 뻗은 작은 악마의 심장, 그것이 뇌수에서 강하게 맥동해 준 덕분이었다. 지금 투란은 순간적으로 주변 모든 것이 멈췄다 여겨질 만큼 빨리 생각하고, 빨리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생각이 빨라진 것일 뿐, 주변은 여전히 움직이던 대로 움직였다!
다음으로 의아한 것은 어떻게 그런 맥동을 했는가였다.
‘심장이 심장을 삼켰어!’
눈동자 속 악마의 심장이 투란의 의지와 호응하면서, 투란을 배신하고 방패 삼으려 한 악마의 심장은 확실하게 새로 뻗은 투명한 넝쿨과 줄기에 흡수되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의 심장이 지닌 힘을 얻은, 눈동자 속의 뿌리가 세찬 맥동으로 생각의 속도에 간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투란은 덧붙여진 위험이 뭔가도 바로 알았다.
이대로 계속 빠르게 머릿속을 자극해서 생각을 거듭한다면, 뇌수가 짓물러지고 녹아 버릴 수도 있다는 것!
너무 빠른 생각은 불길과 같고, 불길은 지나가는 자리에 재만 남기니까.
악마의 심장이 녹아 버린 부분을 ‘재생’한다 해도, 그 안에 담긴 투란의 일부는 녹아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다!
짧은 시간 동안, 세상이 멈춘 것처럼 느리게 느껴질 정도로 생각이 빨라진 이 틈에 투란은 더 많은 것을 파악하고 대비해야 했다. 이 위험한 곳에서 곧 일어날…… 아니, 이미 일어나서 밀려오는 저 거대한 파동, 고요한 폭풍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래야 했다.
‘이 실은……?’
늪에 휩쓸려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투란이 미처 의식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샤오콴 마을의 중심이 되는 고목(古木)의 줄기에서 추출한 수액을 이용해 겨우 만들 수 있는 실, 가늘고 튼튼하면서 아무리 세게 조여도 사람의 살갗을 절대로 파고들지 않는 실. 무엇인가를 몸에 지니기 위해 묶어 두려 할 때, 이 실보다 좋은 것은 없었다!
투란이 샤오덴 할배의 일을 봐주면서 얻은 실이었다.
그리고 샤벨투스의 이빨을 그 실로 손목에 묶어 두었다.
‘아직 있었네.’
실과 함께 샤벨투스의 이빨도 여전히 손목에 매달려 있었다.
샤오콴 마을에서 태어난 가늘고 튼튼한 실은 투란과 함께 끊어지지 않고 버텨 온 것이다. 찢어진 옷, 부러진 뼈, 갈려 나간 살갗 따위와 같은 처지로 부대끼면서도.
그럴 수 있었던 이유도 명확했다.
‘보호했군!’
투란이 입고 있는 옷은 위아래 가릴 것 없이 찢겨 너덜거렸다.
옷보다 더 튼튼한 가죽으로 만든 장화 두 짝도 온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과 함께 주인에게 달라붙은 채로 여기까지 왔다. 악마의 심장이 넝쿨로 실그물을 자아내 덮은 영역 안에 옷과 장화, 실과 이빨까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투란이 모르는 사이에 소중하다 여긴 영역을 알아서 덮어 감싸는 기특한 짓을 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어쩔 수 없는 위협 앞에 서는 순간, 악마의 심장은 냅다 숨어 버렸다.
투란을 배신했다.
‘찢어졌어도 챙길 만큼은 챙기자. 벌거숭이로 지내고 싶진 않잖아. 게다가, 급하면 가죽은 입에 물고 씹기만 해도 도움이 된다니까.’
투란은 자신을 다독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악마의 심장이 누더기 옷과 장화에 뻗은 실그물까지 모두 말라 버리게 했다.
투란의 몸마저 내팽개쳤으니 옷이나 장화 따위를 유지할 이유가 없었다.
상황을 돌아보면 확실히 쓸모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직 쓸모가 있어 보이는 샤벨투스의 이빨도 함께 버렸고, 투란이 고생해서 손에 넣은 샤오콴의 고목 실도 함께 내팽개쳤다. 투란을 버린 것과 똑같은 짓을 한 것뿐이다.
잠깐이나마 악마의 심장을 왕처럼 생각했는데…….
두근!
머릿속에서 가벼운 맥동이 예고처럼 울렸다.
투란은 그 의미를 바로 알아차리고 대비했다.
생각을 잠시 늦춰야 했다.
뇌수가 녹아내리다 못해 타서 재가 되지 않도록.
손목에 이어져 공중에서 구불거리는 채로 오그라든 샤벨투스의 이빨에 묶여 있던 실 가닥이 흔들거리며 움직였고, 엄청나게 팔랑대는 꼴이 보였다.
투란은 손을 감듯이 휘둘러 이빨을 낚아챈 다음, 가슴팍에 댔다. 비어 있는 왼손도 들어 밖을 향해 방패처럼 팔뚝을 세운 채, 세차게 숨을 들이쉬었다.
멀리 보이던 고요한 폭풍이 순식간에 세상을 반으로 접은 것처럼 다가와 있었다. 투란 따위는 정말 한 톨의 먼지로 보이게 하는, 거대한 파동이었다.
‘빨리!’
투란은 다시금 생각을 재촉했다.
두근!
맥동과 함께 폭풍이 한 번 더 멈춘 것처럼 보였다.
그는 겨우 무릎을 펴는 자세가 되어 있었다.
냉정하게 돌아보면 그저 엉거주춤하니 주저앉은 자리에서 일어난 꼴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뛸 준비가 된 셈이었다.
그런데 어디로 뛸 것인가?
올라온 비탈을 다시 내려가, 그래도 안전할 듯한 구멍 속에 숨을까?
이 생각은 떠오르자마자 포기해야 했다.
절벽을 통째로 무너뜨린 폭풍을 앞에 두고 그런 짓을 하면, 이번에는 아예 생매장당할 수도 있잖은가!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좋은 일은 여기서 벗어나는 거지만, 훨훨 날아갈 수도 없…… 응?’
답답함 속에 더듬던 생각은 투란에게 기묘한 발상을 띄워 줬다.
지금 이 폭풍에 휩쓸려 간 앞의 풍경이 알려 준 바이기도 했다.
불꽃의 구름, 얼음의 번개, 허공을 나는 바위, 허우적대는 나무줄기, 세세하고 괴상한 꼴로 거대한 재앙을 피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들은 생략하더라도 폭풍에 맞서는 규모가 제법 큰 반항들을 보라!
‘저런 것도 날잖아!’
날개가 없어도 허공에서 둥실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바위 같은 것이!
물론 날개 없이도 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걸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폭풍은 고요하게 그 모든 것을 밀어붙이고 절벽도 쓰러트릴 정도로 과격한 놈이다. 그 앞에서 투란은 분명히 티끌!
저 폭풍에 올라타 날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가?
아니, 지금은 무조건 휩쓸리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적극적으로 휩쓸리는 쪽이 더 좋지 않은가?
그래 봐야 바뀐 것이라고는 그 자신의 기분뿐일지도 모르지만!
‘조금은 더 안전하겠네.’
투란은 이것이 단지 기분만의 문제가 아닌 것을 금방 깨달았다.
악마의 심장이 파고든 시체, 다 죽었거나 거의 죽은 것들을 처리할 때 불에 태워서 정리하는 이유가 뭐였던가?
이 느린 구근은 불꽃만으로 모조리 박멸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저 폭풍에 실려 오는 불티, 이글거리는 구름의 잔해는 단숨에 투란을 재로 만들 수도 있었다. 거대한 폭풍 속에서 가늘게 보이는 노란 바람줄기, 거기 휩쓸려도 투란은 가루가 될 터였다!
그런 것보다는 차라리 얼어 버리는 쪽에 어디선가 녹을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조금 있잖은가? 가장 좋은 쪽이라면 저 먼 곳에서도 아주 굵게 보이는 나무줄기가 이리로 날려 오면 거기 엉겨 붙고 파고들어 숨는 것인데, 심록의 색채는 모두 그의 반대편으로 날아가는 중이었다.
투란을 향해 밀려오는 것은 불꽃과 얼음, 황토색 바람줄기!
선택할 수 있을 듯 보이지만,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두근!
투란은 더 이상 빠르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바로 발을 구르며 몸을 날려 최대한 회피해서 그나마 안전한 쪽에 붙어야 했다.
그렇게 차가운 낌새가 느껴지는 곳에 닿으려는 찰나, 갑작스러운 돌풍이 투란을 덮쳤다.
‘에?’
전혀 감지하지 못한 것이 먼저 투란을 찾아온 것이다.
우드득.
방패로 내밀고 있던 왼팔이 그대로 당겨져 펼쳐졌다.
억지로 버티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투란의 팔을 비틀고 펼친 돌풍은 곧 누렇게 물들어 갔다.
갑작스러운 돌풍의 형색이 가늘고 뚜렷하게 저 먼 곳으로 이어져, 황색의 질풍이 되었다. 투란에게는 아주 좋지 않은 광경을 보여 주고 사라져 간 거대한 물고기를 으스러뜨리고 산산조각 낸 질풍!
투란의 왼팔은 순식간에 황색 질풍에 물린 꼴로 끊어졌다.
어깨 바로 아래에서, 강제로 뒤틀리다가 얇은 나뭇가지가 부러지듯 잘려 나간 것이다!
그렇게 떨어져 나간 한쪽 팔은 곧 멀어졌다.
투란이 발을 허우적대는 사이에 차가운 얼음 번개의 영역으로 몸을 밀어 넣는 데 성공한 것이다.
‘아, 언다.’
잘 왔다는 듯, 환영한다는 듯이 차가운 기운이 그를 휘감고 얼려 갔다.
그나마 기대한 대로, 그 번개 치는 듯한 얼음은 투란을 삼킨 채로 고요한 폭풍에 밀려났다.
얼음 속에서 한 점 티끌이 된 투란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몸을 굽히고 무릎을 가슴까지 당기며 버티는 것뿐이었다.
남은 오른팔을 가슴에 팔꿈치부터 꽉 붙인 채로!
오른손 안에 샤벨투스의 이빨이 말라 버린 채 쥐인 것을 느끼며 투란은 흐릿해져 가는 의식 속에 마지막 의문을 던져 넣었다.
과연 언제까지 몬스터 악마의 심장을 유지할 수 있을까?
투란은 더 생각할 수가 없었고, 격렬하고 거대한 규모의 대격변 속에서 작은 티끌처럼 희미한 희망을 품은 채로 날려 갈 수밖에 없었다.
‘꿈?’
몽롱한 기분이었지만, 꿈은 아니었다.
기억이 자잘하게 조각난 채로 부유하다가 희미한 의식에 닿은 것뿐이었다.
손에 쥔 샤벨투스의 이빨에 대한 기억이었다.
“왜요, 뭔데요?”
“이제 너도 열여섯이잖아. 엄마가 선물 주려고.”
“선물?”
“그래, 선물. 자, 이걸 목에 걸어 봐.”
“이거 발톱이에요? 아니, 손톱?”
“이빨이야. 샤벨투스의 이빨.”
“응? 귀한 거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투란, 이제 더 이상 알킨의 보석을 탐내지 마라. 그건…….”
“그건 내 거예요.”
“투란!”
“어, 아버지가 부르네요. 이건…… 좋은 선물이니 잘 받죠.”
‘한심하군.’
영악하지 못한 자신을 향해 투란은 한숨이 나오는 듯했다.
격한 분노에 휩싸인 꼴을 고스란히 드러내 버렸다.
좀 더 영리하게 행동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투란은 그 보석이 얽힌 경우에 한 번도 냉정하고 영리하게 행동한 적이 없었다.
‘정말 저주일까?’
기억을 더듬어도, 투란이 그 보석을 목에 건 적은 없었다.
언제나 보석은 알킨의 목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왜 투란은 보석이 자기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을까?
왜……?
아련한 꿈을 꾸는 듯, 투란은 기억을 더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