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207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207)
만약 ‘천칭’인 채였다면…….
뭔가 아쉬움이 투란의 갈등 속에서 망상처럼 피어나며 상상하게 했다.
아마도 몬스터의 형상을 유지하는 지속시간의 한계 따위를 몸으로 느끼는 대신에 저 변해버린 지형을 한 바퀴 싸돌아다니면서 뭐가 나타났는가를 헤집고 다녔을 터였다.
덤비고 싶은 녀석 있으면 다 덤비라고, 호기롭게 이 마그마 로드의 형상을 들이대고 있었을 자신이 넘쳐나는 투란이었다.
하지만 황금매의 문장은 지금 찌릿거리면서 더 이상 마그마 로드인 채로 있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보통 문장이라면 아리송한 감각으로 그런가 아닌가 했겠지만, 황금매의 마법은 투란에게 분명하게 ‘인식(認識)’을 심어주고 있었다.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어차피 이 형상이 해체될 수밖에 없다고!
그런데 이 경고에 대해 투란은 지금 아주 심한 의혹을 품고 있었다.
망상이 아닌, 아주 현실적인 의혹이었다.
이 주변의 지형이 변할 수 있다 하더라도, 용암의 호수라는 중심이 사라진 탓이라 하더라도 저 정도 변화는 며칠 사이에 일어날 수가 없다. 몇 달이라면, 아주 빠른 변화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결코 이곳은 며칠 사이에 저리 변할 곳이 아니라고 투란은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투란의 느낌, 샤오콴 마을에서의 경험을 부정하듯이 변화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즉…….
‘며칠이 아닌 거였다면, 나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마그마 로드인 채로 마그마 로드랑 낑낑거린 거야?’
투란이 몬스터의 형상을 유지하는 지속시간의 한계를 완전히 돌파했다고 저 지형이 변화를 통해 알려주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 한계의 끝에 지금 도달해서 몬스터의 형상을 해체해야 하는 것이고!
의혹은 곧 투란에게 복잡한 생각을 떠올리게 했고, 한순간 머리 한구석을 핑 돌게 했다.
‘젠장, 졸려! 며칠 못 잤는…… 아니, 이게 며칠 아니라면 정말 오래 못 잔 거라고! 젠장, 자야 하는데…… 생각을 나중에 해야 하는데…… 여기서 자야 하는데!’
휘아아아―!
바람결이 스윽 잘라낸 바위조각, 큼직한 돌덩이를 들어 올려 저 멀리 날려보냈다. 그리고 남아 있는 바위 뿌리를 더 할퀴며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투란은 졸음이 더 심해지는 것을 느꼈고, 결정을 내려야 했다.
바로 투란의 손이 바위를 후벼팠다.
바람결 따위는 상대도 안 되는 거친 손짓은 잘려나가는 바위 속에 작은 구덩이를 만들어냈고, 투란은 바로 그 구덩이에 들어가 자리 잡았다. 몸이 위로 스쳐 가는 바람에 닿지 않는 것을 확인하면서, 투란의 입이 불티와 재를 뿜어내며 작게 주문을 외웠다.
“에어 넷.”
스쳐 가는 거센 바람결과 다른 바람의 얇은 막이 생겨나며 구덩이를 덮었다.
그 얇은 막 속에서 투란의 몸이 조금 더 작아져 갔고, 마그마 로드의 형상이 사라져갔다.
“소일…… 커버.”
투란의 핏기 어린 입술이 제대로 사람의 목소리를 토해내며, 배틀 그림모어에 기록된 잠복(潛伏)을 위한 주문을 외웠다. 구덩이를 만들기 위해 파였고, 바람의 그물에 살짝 걸려 있던 흙먼지, 티끌이 끈적한 그물처럼 엮이며 투란의 몸을 덮고 감싸왔다.
흙으로 된 이불, 몸을 덮는 두꺼운 장막 속에서 투란은 오랜만에 온전한 사람의 몸이 되어 잠들 수 있었다.
모든 갈등과 의혹을 일단 접어둔 채로…….
부스럭.
몸을 꿈틀거리면서 잠자리를 뒤척이려는 듯하던 투란이 갑작스럽게 눈을 크게 떴다. 눈앞을 가리고 있는 것은 엷은 흙으로 이뤄진 막이었고, 투란의 눈길은 그 흐릿한 흙의 막 너머를 향해 쏘아졌다.
‘누구? 뭐가?’
갑자기 눈을 뜬 채였지만, 투란은 머리가 맑고 몸이 상쾌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잠이 들자마자 깬 것인가 싶었지만 넉넉히 잠을 자고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왠지 이대로 좀 더 자도 괜찮을 듯싶은데…… 뭔가 투란을 자극했고, 깨어나게 했다. 누군가 투란을 엿보는 듯한, 엿보기 당하는 것이 아주 불쾌한 느낌이었다.
‘또?’
이전에도 비슷한 것을 느꼈었고, 그때 투란은…….
* * *
금빛 별처럼 가득한 격자(格子)는 보다 맑고 밝게 빛나며 문을 가득 채울 듯이 번져 있었다. 그 맑고 밝은 금빛이 은근히 트리니티 히엔나와 붉은 그랑츄마저 반짝거리게 하는 듯했다.
그리고 하얀 녀석의 무늬로 채워진 바닥…… 붉은빛이 찰랑이며 일그러진 벌집무늬 아래에서 노골적으로 스며나오는 바닥이 문으로부터 투란을 향해 차례대로 놓인 금색 반구의 방…… 이전보다 훨씬 넓고 높아진 풍경이 또렷했다.
이 금빛 가득한 풍경 어디에도 회색의 반점 따위는 비집고 들어온 틈이 없었다. 회색의 얼룩은 오직 저 금빛 격자 무리 안에 갇힌 채, 결코 투란을 엿볼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투란은 이 풍경을 지켜보는 자신의 자리 앞을 바라봤다.
다채로운 줄무늬가 둥글게 번져가는 파문처럼, 이 자리―왕좌(王座)라는 느낌이 풍성하게 깨우쳐지는 자리 앞에 반원의 무늬로 그어져 있었다. 줄무늬 속에 채워진 무늬는 읽을 수 없지만 보자마자 주문인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이었고…….
그 주문의 무늬 속에서 투란은 시야를 흐리게 하고, 자신을 감추는 주문을 찾아냈다. 황금매가 본능적으로 사용하게 해주는 주문과 살짝 경계를 둔 채로, 기억해내려 애써야 하는 영역에 새겨진 주문이라고, 찾아내는 순간 투란은 알았다.
‘제2 계층의 주문이라…….’
마력을 보다 많이 사용하는 주문이었고, 좀 더 세련되고 높은 수준의 주문이었기에 몸이 지닌 반사능력에 기반해서 쓰기에는 곤란한 주문이 2계층으로 분류되어 감춰져 있었다. 황금매가 몬스터를 더 많이 삼키고 강력해진 다음에 드러나도록!
마그마 로드의 거대한 규모를 삼킨 지금, 투란은 그것이 거기 있는 것을 알 수 있었고 필요한 이 순간 볼 수 있었다.
* * *
“섀도우, 베일.”
입이 나직하게 속삭임을 토해내는 순간, 투란을 덮고 있는 흙의 껍질이 바스러지며 사라져 갔다. 몸을 감싼 껍질이 사라지면서 투란은 느릿하게 일어나 앉았다. 여전히 생존을 위한 주문은 투란을 감싸고 있었지만, 이제는 얇은 흙더미 속에 숨어 있지 않은 그런 모습이었다.
그러나 투란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감싼 여리고 넓은 마력, 직접 다가와 가까이 선 것에게는 잘 보이고 잘 들리고 냄새도 확실하게 맡게 해주지만…… 어느 거리 밖에서는 투란이 이 세상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어떤 수단으로도 알 수 없게 해주는 그림자 마법이었다.
‘아무 짓도 안 한 것 같네.’
그래도 역시 이 주문은 당장 주변에 어떤 현상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라, 투란으로 하여금 밋밋하고 맹한 기분으로 머리를 긁적이게 한다!
긁적.
한두 번 머리를 손가락으로 들쑤시다가 투란은 문득 깨달았다.
누군가에게서 받고 있던 불쾌한 눈길이 사라졌다.
섀도우 베일, 이 그림자 마법을 펼치자마자!
‘역시 뭐가 있기는 있단 건데…….’
그 뭔가는 황금매와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괴물이 된 채 망령까지 깃든 하얀 녀석이랑도…….
휘아아앙!
두껍게, 넓게 밀려오는 바람이 투란의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을 통째로 잡아 뽑겠다는 듯이 스며왔다.
잠들기 전에는 칼날 같던 바람이 이제는 그 성질을 완전히 바꾼 낌새라니!
“변덕쟁이냐.”
투덜대면서도 투란은 일단 몸을 감싸는 ‘에어 넷’을 강화시키려 했다.
아케인 포스가 자연스럽게 방사(放射)되며, ‘에어 넷’은 촘촘하고 두꺼운 갑주처럼 투란의 온몸을 덮었다. 바람의 그물이 갑주가 되자, 몸은 포근하고 따스한 느낌에 물들어갔다.
조금 더 잠을 자고 싶다는 기분이 슬그머니 다시 치솟았지만, 투란은 숨을 고른 다음에 주변을 보는 것을 먼저 해야 했다. 자고 일어난 사이에 주변의 지형이 또 한 번 격렬하게 변해 있다면…….
“그대로네.”
실망이 가득한 한마디가 바로 투란의 입가에서 새 나왔다.
왼쪽에는 늪이, 앞쪽에는 숲이, 오른쪽에는 들판의 풍경이 그대로였고 등 뒤로는 검은 암석투성이가 넓게 펼쳐진 것을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투란이 앉은 높이 솟은 절벽의 정상은 주변을 내려다보는 암산(巖山)의 정점처럼 자리 잡았지만, 바로 곁에는 땅속 깊이 파고들어 가서 용암의 강이 까마득한 아래편에 붉은빛을 일렁이는 광경이 보였다. 뭔가 너무 깊이 저 날카로운 틈새를 만들어낸 탓에 반발로 치솟은 절벽인 듯한 느낌이 가득할 뿐이다.
꽤 깊은 잠을 잤지만 투란은 자신이 고작해야 일곱 시간 정도 잔 것을 알고 있었고, 며칠 사이에 지형이 바뀔 정도인 곳이라면 그 시간 동안에도 눈에 보이는 변화를 보일 수 있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변화는 없었다.
그렇다면…….
‘지속시간의 한계를 그런 식으로 넘길 수가 있었나?’
투란은 자신이 용암의 호수를, 거대한 마그마 로드를 작고 견고한 마그마 로드로서 삼켜 제압하는 과정에서 몬스터의 괴이(怪異)한 힘을 잔뜩 들이켰고, 그 힘으로 자신을 더 단단히 다져가며 버텨낸 것을 기억해냈다.
몬스터 로드가 자신의 고유 마력이 아닌, 융합하는 동종(同種)의 몬스터가 지닌 힘을 통해 지속시간을 연장(延長)한 셈이었다. 그런 소리는 투란이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혹시 이게 그 소리인가?’
어렴풋이 들었던 늪의 몬스터 로드에 대해서 투란은 깊은 생각 끝에 기억해냈다. 늪의 형태를 한 괴물을 삼킨 몬스터 로드 중에는 몇 날 며칠을 늪처럼 지낼 수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한 소리였다. 늪이란 특성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모르겠지만, 늪의 몬스터 로드는 다른 몬스터 로드와 다르게 그 늪을 몇 배로 더 오래 지속할 수 있다고 말이다.
다들 헛소리라고 했던 이야기였는데…….
만약 늪의 몬스터 로드가 자신이 삼킨 늪과 같은 늪에 뛰어들어서, 그 늪을 삼키면서 그 형상을 유지하고 지속시간을 몇 배로 늘린 것이었다면…… 투란이 겪은 상태랑 같은 꼴인 셈이었다.
혹은 늪 중에서는 다른 늪을 삼키는 경우도 있으니, 아예 다른 늪을 삼키면서 오래 버틸 수 있었는지도 모르잖는가?
‘애매한데?’
투란은 자신의 심장에서 맴돌던 ‘작은 늪’을 떠올리며 낯을 살짝 구겼다.
이제는 없는 ‘천칭’에 대한 아쉬움이, 그 속에서 잔소리하던 드라고니아에게 묻고 싶다는 기분이 짙어진 때문이었다. 드라고니아라면 이런 상황에 대해서 뭔가 그럴듯한 설명을 해줄 듯한데…….
‘없는 건 없는 거고!’
투란은 한 번 더 세차게 머리를 긁적인 다음, 눈을 부릅뜨고 일어섰다.
이 절벽의 정상에서 계속 변해가는 풍경을 구경만 할 수는 없었다.
어찌 되었든, 투란은 지금 원하던 것을 얻은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제 다음에 할 일은…….
“구경 좀 해볼까!”
여전히 구경이기는 했다.
다만 그저 풍경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이 풍경 속에 깃들어 있거나 숨어다니거나 으르렁거리며 활개 치는 녀석들에 대한 정찰이었다. 이제 급할 경우라도 뭐든 때려잡고 버틸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어느 정도는 마음 편히 구경할 수도 있고!
그래서 투란은 일단 기울어진 절벽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용암의 강이 엿보이는 까마득한 틈새에서 멀어지듯…….
꾸우, 꿰에에에!
너덜거리는 사냥감, 너무 갈기갈기 찢기고 망가져서 원래 뭐였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삐죽하니 생겨서 바닥에 뒹구는 이빨이 멧돼지랑 비슷해 보이니까 멧돼지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었지만…… 그런 이빨을 촘촘히 박은 입을 활짝 연 채로 눈이 없는 둥근 머리통을 두리번거리며 뚫린 여러 개의 구멍을 쉴 새 없이 킁킁거리며 냄새를 탐색하는 놈이 그 사냥감을 입에 쳐바르고 있다면, 멧돼지가 아닐 수도 있었다.
이 이상한 놈은 허리 아래는 애벌레처럼 생겼고, 윗몸은 곰이랑 비슷하면서 손가락이 셋뿐인 두 팔도 지닌 채였다. 그 애벌레 같은 아래 몸은 늪의 잔해를 슬쩍 묻힌 채였고, 길게 늘어진 흔적이 늪에서 숲으로 사냥 나온 것을 알게 해줬다.
숲에 살던 짐승도 쉽게 잡힌 꼴은 아닌 듯, 상당히 격렬하게 주변을 할퀴고 물어뜯고 한 흔적이 보였다.
‘한 마리 잡은 게 아닌가?’
투란은 이 살육(殺戮)과 사냥의 흔적을 보다가 갸웃했다.
몸의 반이 땅을 기는 꼴인 녀석이었지만, 윗몸 반을 일으킨 것만으로도 2미터는 되는 놈이었다. 털이 없는 살가죽이 딱 늪이 아니더라도 물가에서 사는 짐승과 친해 보이는, 왠지 맛있어 보이는 몬스터!
‘응? 배가 고파?’
어째서 저 녀석이 투란의 냄새를 맡으며 입맛을 다시는데, 투란도 배가 고플까?
투란은 고민하는 대신에 입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