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217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218)
‘상쇄(相殺)가 아니야. 이 느낌, 분명히 언젠가 겪어본……! 설마 심연(深淵)의 포식(捕食)?’
오래된 기억이 아겔페스의 뇌리에서 되살아났다.
고대(古代)의 마법을 탐색하며 연구하던 시절…… 몬스터 엠블럼이란 것이 생겨난 것보다 더 오래된 옛날의 기묘한 마법의 각인(刻印)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그 각인은 살아 있는 것에 새겨지게 되면 그 생명력을 갉아먹으며 효과를 발휘하는, 벌써 오래전에 금지된 형태의 마법을 담고 있었다.
아겔페스는 그 각인이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궁금했다.
어떤 목적으로 생명을 기반으로 그런 마법이 짜였나 알고 싶었다.
그래서 작은 쥐에게 각인을 부여했다.
작은 생명력을 제공함으로써, 그 마법의 효과만 보고 멈출 생각이었다.
만약의 경우에 대한 대비도 철저하게 했다.
마법이 미쳐 날뛸 경우까지 고려해서, 소소하나마 성물(聖物)까지 준비해뒀다.
마법의 장벽으로 막을 수 없다면, 아예 마법을 정지(靜止)시키기 위한 철저한 준비였었다.
모두 소용없는 짓이었다.
쥐의 생명을 소모(消耗)시키며 효과를 발휘한 각인은 이 세상의 경계까지 허물어 버린 듯, 끝도 없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 하는 심연을 만들어냈다.
마법도, 성물도 상관없이 모조리 집어삼키는 깊고 깊은 늪…….
아겔페스의 생명조차도 각인에 휘말렸고, 아겔페스는 죽을 뻔했다.
하지만 그날 아겔페스는 죽지 않았다.
―어떤 얼간이야? 누군데 다룰 줄도 모르는 심연을 열었어?
크게 화난 소리를 내며 나타난 마도사, 상아탑에서조차 불확실한 소문으로만 듣던 대마도사가 아겔페스를 살려줬다. 그리고 그날 이후…… 아겔페스가 살아가는 목적이 바뀌었다.
마법에 대한, 끝이 없을 것이 분명한 탐색과 연구에 대한 갈망이 아겔페스의 마음에서 사라졌다. 궁극(窮極)의 경지에 도달한 대마도사의 모습이 그 갈망의 자리를 차지했다.
스스로 연구해서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 순간, 아겔페스는 대마도사를 쫓았고 그에게서 모든 것을 배우고자 했다. 다행히 대마도사는 아겔페스를 얼빠진 녀석이라 부르면서도 사람으로서 대해줬고, 아겔페스가 걸어야 할 마법의 길에 대해서 알려줬다.
―길에서 벗어나지 말고, 포기하지 않고 가다 보면 결국은 흔히 말하는 대마도사가 될 거야. 너 스스로도 인정할 수 있는 대마도사가 될 테니까, 길에서 벗어나지 마.
오랜 세월, 아겔페스는 그 말을 따르며 충실하게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빌어먹을! 닥쳐! 꺼져라!”
아겔페스는 연상(聯想)을 멈추기 위해 고함쳤다.
황금의 육면체가 각각의 면을 더욱 밝은 금빛으로 번뜩거리는 광경을 보여줬다.
아겔페스의 앞쪽에 늘어선 채로 한 면을 채우며 문지기처럼 서 있던 네 사람의 황금상도 더욱 밝은 금빛을 번쩍거렸다.
순간 아겔페스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캐슬링의 큐브, 정련된 황금의 마력을 여과 없이 훤히 드러내며 아겔페스를 보호하는 풍경 안에서 아겔페스의 손에는 회색의 끈이 감긴 채였다. 마력으로 이뤄진 끈은 지팡이로 이어져 있었고 지팡이가 이를 여과시켜 황금의 마력을 통제한다.
아겔페스의 마음 깊은 곳에서 강한 반향(反響)이 치솟았다.
‘나는 더 이상 금색(金色)의 마도사가 아니다! 나는…… 황금매의 창조자야!’
다짐과 함께 아겔페스는 금빛을 번뜩이며 회색을 지운 채인 그랑츄, 체격과 형상이 통상적으로 알려진 그랑츄를 압도한다는 엘리트 그랑츄를 노려봤다.
이제 아겔페스에게는 저것이 어떻게 ‘심연의 포식’을 사용했는가는 문제가 아니었다. 저것이 어떤 수단을 쓰든, 어떤 요술을 발휘하든 아겔페스는 황금매를 수확할 것이고…… 설혹 이 몸으로 실패한다 하더라도, 완성된 황금매에 대한 자료, 정보를 확보할 수 있다!
* * *
투란은 바빴다.
저쪽에서 마법사가 당황해하는 것을 그랑츄의 눈을 통해 확인했지만, 바로 쳐들어가서 목을 비틀 수는 없었다. 가로막고 있는 마법의 벽이 여전히 찬란한 금빛인 탓도 있었지만, 투란과 마법사 사이에 벽과 함께…… 정면의 벽에 박힌 모습으로 버티는 시알라 남매도 문제였다.
마법사를 비틀려면 남매 넷을 먼저 으깨듯이 헤집어야 할 상태인데, 지금은 투란이 마법사나 남매를 먼저 처리할 때가 아니었다.
저들이 나타나면서부터 떠들기 시작한 ‘세란드’ 때문이었다.
아무 반응도 없이 침묵하는 몬스터를 품고 있기보다는 그냥 불평불만이라도 쏟아내는 쪽이 뭔가 해볼 수 있는 상태이니까.
하지만 저 마법사나 남매가 보다 심각한 위험이 된다면, 투란은 서서히 깨어나면서 분위기 잡고 있는 마그마 로드를 거둬들이면서 단숨에 저들을 박살낼 것이다! 뒷일이 어쩌고저쩌고 따지는 것은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살아남은 다음이니까.
그래서 투란은 아주 바쁘게, 고리 안쪽의 황금 가득한 풍경을 열심히 뒤지듯이 살피면서 하늘에 정신을 떠맡긴 채였다.
‘옥좌, 처음 이 풍경을 바라보던 자리…….’
‘세란드’가 알려준 단서는 아주 간단했다.
하지만 그 간단한 단서를 짚어내는 것은 투란에게 상당히 까다로웠다.
마치 두 눈 부릅뜬 채로, 자기 뒤통수를 보려 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거울의 도움을 받더라도 어려운…… 두 장 혹은 세 장의 거울을 놓고 겨우 볼 수 있는 뒤통수를 거울 없이 보려는 짓처럼 불가능하다는 기분이 먼저 투란의 마음에 깊이 드리워질 지경이었다.
눈알을 열심히 굴려보지만, 아슬아슬하게 시야(視野) 끝에 걸려서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려 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아, 뭐 이러냐고!’
성질이 저절로 뻗쳐 오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투란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처음에 봤던 광경, 이 황금의 풍경 속에서 가장 먼저 봤던 것을 기억에서 더듬어내고…… 하늘을 품은 고리가 그 풍경 어디에 있었는가를 되짚고…… 이제 고리 너머 하늘에 머문 채로 다시 안을 들여다보는 자리에서 어떤 방향으로 눈을 돌려야 하는가를 확인해서…… 본다!
보이지 않았다.
‘크아악!’
화난 소리를 거침없이 뿜어내는 자신을 상상해버린 투란이었다.
그리고 고리가 거기에 호응하듯 묘한 떨림을 흘려냈다.
그 떨림에 반응하듯, 투란이 삼킨 몬스터의 정수가 하나씩 선명하게 투란의 마음속으로 자신들의 형상을 전해왔다.
‘세란드’만 빼놓은 채로!
투란도 ‘세란드’는 제친 채로 그 형상을 마음속으로 더듬듯이 음미했다. 뭔가 작은 휴식처럼…… 몬스터의 정수를 얻는 과정이 마음을 스쳐 지나간다.
히엔나, 트리니티 히엔나를 갖추려고 뭔 짓을 했던가!
그랑츄, 붉은 그랑츄가 파이로-칸이 되기 위해 미쳐 날뛰는 상황을 구경하다가 시체줍기를 했다. 여전히, 그랑츄는 투란에게 파편이 된 시체로 다가온다!
그리고 마그라 로드, 대체 거기 얼마나 시간을 쏟았는가 여전히 궁금하잖은가!
그다음에 쫓기는 느낌을 받는 채로 붉은 그랑츄의 부락을 덮쳤다.
‘아, 파이로-칸은 삼켜놓기만 했네.’
그르륵거리는 울림, 목과 가슴에서 바로 뿜어져 나올 듯한 뜨거운 불꽃의 흐름을 느끼면서 투란은 자신의 쓴웃음을 깨달았다. 쫓아오는 누군가에 맞서기 위해서, 지나치게 위험한 형상을 숨기려고 하며 검은 돌 울타리로 위장할 수 있는 마그마 로드를 내놓은 채로 파이로-칸의 형상은 써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파이로-칸을 삼킨 다음인데도 붉은 그랑츄를 형성한 채였다.
이래저래 잔뜩 삼킨 덕분인지 붉은 그랑츄의 형상도 꽤 크고 강력해진 듯한 체격이었다.
불끈불끈한 근육의 파이로-칸은 붉은 그랑츄와는 질량의 수준이 다른 강대함을 투란에게 느끼게 해준다. 핏줄과 힘줄조차 뜨겁게 달아오른 듯하고, 등을 타고 흐르는 듯한 불길의 감각은…….
‘어? 아니, 잠깐! 내가 왜 계속 보려고 했지?’
투란은 정신 깊은 곳에서 세차게 내리치며 번뜩거리는 ‘지각(知覺)’을 깨달았다.
이 풍경을 늘 ‘보기’ 때문에 지금도 ‘본다’는 의도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풍경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저 투란이 가장 편하게 상황을 둘러보는 감각이 ‘시각’이기 때문에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애초에 이 풍경 속에서 투란은 몸이 없다.
팔다리, 눈, 코, 귀, 입…… 어느 것도 없다.
오직 ‘지각’뿐이었다.
‘뒤통수에 뭐가 부딪히면 손으로 더듬잖아?’
새로운 깨우침이 투란을 찾아왔고, 바로 이용되었다.
투란은 보려고 했지만 보이지 않던 광경, 처음에 이 풍경의 입구를 바라보던 자리에서 바닥을 움켜쥐는 ‘촉각’을 상상했고 그 촉감을 바탕으로 시야를 강제로 돌리는…… 몸이 있다면 두 손으로 바닥을 움켜쥐고 몸을 홱 돌리는 듯한 상황을 상상하며 집중했다.
쉽지 않았다.
매우 강력하고, 거센 저항이 먼저 투란의 ‘지각’을 흔들었다.
‘젠장, 그냥 눈으로 보기 힘든 게 아니었네.’
시각으로 상황을 파악할 수 없던 이유가 보다 분명해졌다.
애초에 ‘세란드’가 간단히 말한 그 단서는 투란이 오직 이 풍경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앞만 보도록 강요하는 ‘힘’을 갖춘 것이다.
하지만 보려고만 하려다가 다른 감각을 이용하기 시작한 ‘지각’은 확실하게 방향을 잡았고 투란의 의지는 확고했다.
줄다리기처럼 보려는 자와 거긴 뒤통수니 원래 보이지 않는다는 듯한 세력의 팽팽함이 잠시 이어졌다.
‘이건 내 심상이라고! 내 마음대로 하게 하란 말이다!’
고집스럽게, 억지 부리는 어린애처럼 투란은 자신의 의지를 더욱 날카롭게 가다듬으며 정신을 쏟아부었다. 너무 힘을 쏟은 탓인지 황금의 풍경이 일렁거리며 뒤틀리는 듯까지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투란은 뭔가가 뚝 끊어지는 듯한…… 목뼈가 강제로 확 돌아가서 자기 등을 내려다보게 된 듯한 섬뜩함을 느꼈다.
‘켁? 아, 젠장― 나 몸 없다고, 이건 내 심상이라고!’
그 순간, 놀라면서도 투란은 자신에게 되뇌었고 금방 알 수 있었다.
옥좌가 거기 있다는 것을…….
벽을 잘라 만든 평판(平板)을 엮어 놓은 듯한 돌의자, 가장 먼저 투란이 그 모양새에서 느낀 바였다. 황금으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어딘가 소박하고 단순해 보이면서 크기는 꽤 컸다! 사람이 아니라 뭔 거인을 앉혀놓을 의자라고 느꼈으니…….
하지만 곧 그 크기는 투란의 생각에서 벗어났다.
돌의자의 등받이, 황금의 평판에 새겨져 있는…… 혹을 뚫린 듯한 구멍으로 보이는 낙서 같은 무늬가 투란을 사로잡으며 다른 생각을 모두 앗아간 탓이다.
‘저거…… 사람 그린 낙서?’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낙서에 대한 추억이 투란의 마음을 헤집었다.
작대기 하나 쥐어주고 사람을 그리라면, 어린애라도 쉽게 동그라미를 머리라고 그리고 그 아래로 길게 선 하나를 그어 몸을 삼는다…… 그다음에 머리 아래쪽 몸이라는 선에 대고 옆으로 금 둘을 그어 팔이라 하고, 그보다 훨씬 아래에다가 새로 금을 둘 그어서 다리라 한다.
하지만 조금 더 커서, 어린애 낙서라는 놀림에서 피하려고 할 때에는 그림이 조금 달라진다. 여전히 머리를 위해 동그라미를 그리지만, 여전히 그 아래로 주욱 내리그은 선을 몸이라 하지만…… 동그라미 아래로, 몸이라 하는 선과 수직이 되도록 평평하고 긴 선을 그어 활짝 펼친 팔이라 하게 되고 몸이란 선의 맨 아래쪽에 마찬가지로 수평으로 그어진 작은 선을 한 번씩 꺾은 듯이 아래로 긋는 모양으로 다리를 조금 세련되게 가다듬는다.
옥좌의 등받이, 황금의 평판에는 그 조금 세련된 낙서처럼 파여 들어간 구멍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낙서보다는 훨씬 세련되고 성숙한 것을 과시하듯, 머리를 이루는 동그라미 한복판에 황금의 가면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검은 구멍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아, 그래. 그렇지, 머리에는 눈이랑 입도…… 코랑 귀도 달아놓기는 하지.’
조금 늦게 투란은 머리를 그린 동그라미 안쪽을 채우던 버릇을 기억해냈다.
물론 저 가면은 그보다 훨씬 정교하게, 대체 누구 얼굴인지 분별할 수 없는 사람의 것이란 점만 강조한, 어떻게 보면 황금의 해골 같아 보이는 꼴을 하고 있기는 했다.
그 해골의 눈구멍 속에서는 시커멓게 깊은 뭔가가 있어 보였고, 투란은 자신도 모르게 그 눈구멍 속을 들여다봤다. 얼굴을 맞대고, 두 눈을 마주 보는 듯한 느낌으로 그 속을 보려 했다.
‘아!’
뭐라 할 수 없는 깊은 것이 투란의 정신으로 흘러왔다.
그 속에는 쩌렁거리는 소리도 살짝 섞여 있기도 했다.
―투란! 투으으으라아아안! 정신 차려어어어! 거기서 벗어나아아앗!
깊은 울림을 지닌 드라고니아의 잔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