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22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22)
얼음의 감옥에서 풀려난 심장은 강하게, 침착하게 뛰면서 따스함을 퍼뜨렸다.
투란은 배꼽 위가 적당히 따뜻해진 것을 느끼고서 배와 허리를 감고 있던 가죽 복대를 풀었다. 원래 두꺼운 한 장이 아니라 손가락 세 개 굵기 정도의 가죽띠를 나란히 묶은 모양으로 만든 복대였다. 엮은 끈을 풀고 늘어놓으니 긴 가죽띠가 넷 정도 나왔다.
먼저 묶고 있던 끈, 이것도 가죽이니까 가볍게 삼키고 가죽띠들을 쪼르륵 마시듯이 목구멍으로 넘겼다. 작은 마디도 아니고 길고 굵직해서 보통 사람이라면 삼키다가 구역질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목구멍 가득 깔린 악마의 심장 줄기는 그런 낭비를 허용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위장 안으로 흡입했다!
‘허리띠는 남겨 둬야지.’
슬그머니 손이 닿은 가죽 허리띠를 만지작거리면서 투란은 사람의 품위, 그 마지막 단계는 지키기로 했다. 아직 먹어 치울 가죽이 더 있었다. 장화 말이다. 그러니 바지를 뜯어 먹는 일은 나중으로 미룰 만하잖은가?
허리 위가 얼어붙은 상태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나서야 투란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너무 엎어져 있거나 누워만 있었는지 앉는 것만으로도 핑 도는 느낌이 났지만, 곧 멀쩡해졌다.
‘후아, 어디 보자…….’
엉덩이랑 허리 아래는 잘려 나가도 일단 사는 데 지장이 없다는 이유로, 아직 감각조차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매우 이성적인 판단이었고, 투란이 의식하지 못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투란은 이를 알아차린 다음에도 화들짝 놀라거나 끔찍해하지 않았다.
샤오콴 마을을 오가는 험악한 몬스터 헌터들이 자주 주고받는 이야기가 있잖던가.
“다리병신, 팔 병신, 어느 쪽이 더 낫지?”
뭔가 병신 같은 질문이라고, 몸이 멀쩡한 경우에는 황당해할 수 있었다.
자기가 팔다리 병신 될 일이 없다 여기면, 질문답지 않은 헛소리로 취급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몬스터 헌터들은 이를 아주 진지하게 고민했다.
몬스터를 사냥하다가 팔다리 날아가는 경우는 그리 희귀한 일이 아니니까.
가능한 한 피하고 싶은 상황이지만, 그래도 만약 내줘야 한다면 팔다리 어디를 내줘야 하는가를 놓고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주는 김에 제대로 한 방 먹이겠다는 생각으로, 팔다리의 장비에다가 몬스터를 태울 수 있는 작염통(灼炎桶) 같은 것을 붙여 놓기도 했다!
그런 몬스터 헌터들이, 투란이 엿듣는 와중에 내린 결론은 다리병신 쪽이 낫다는 것! 발로 손을 대신하는 것보다는 손으로 발을 대신하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하다는 이유였다.
‘실뜨기도 손으로 하는 게 훨씬 뛰어나다니까.’
투란은 천천히 다리를 주물러, 얇게 덮였지만 얼어서 제 기능을 못하는 덩굴줄기의 실그물을 깨우면서 장화를 살살 벗겨 냈다. 장화와 엮이고 꼬인 덩굴줄기는 투란의 손길과 맞닿아 회수되면서, 장화 속의 맨발 살갗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이 꼴을 보며 투란은 조금 갸웃했다.
실그물이 장화에 붙어 떨어지는 경우가 없었다.
아주 잠깐 몸에서 떼어지면 금세 스르륵 흐르면서 투란에게로, 맨살로 돌아온다.
‘신기하네. 잠깐 몸에서 떼어 놓고 어떻게 하나 보고 싶은데.’
호기심이 돋아났지만, 투란은 이를 뒤로 미뤘다.
단단해 보이는 장화를, 아무래도 목구멍으로 넘어갈 리가 없는 크기인 것을 어떻게 삼킬지부터 생각해야 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이빨로 씹어 조각내서 삼키는 것이지만, 그렇게 체력을 소모하는 일은 좋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체력을 아껴야 할 때였다. 이 수상한 곳에서 벗어나려면.
‘아, 이빨!’
투란은 오른손을 봤다.
입속의 이빨은 아니지만, 뭔가 조각내기에는 좋다.
단지 그러려면 피가 좀 흘러야 하는데…….
두근.
심장이 가볍게 울렸고, 투란은 곧 방법을 알았다.
굳이 살갗을 찢고 혈관을 갈라서 피를 흘릴 필요가 없었다.
원래 샤벨투스의 이빨에서 한 점의 피조차 남기지 않고 뽑아냈던 덩굴줄기, 말랑해진 채 바람만 먹고 있는 이빨에서 그 바람마저 완전히 빼 버린 악마의 심장 줄기가 있잖은가!
‘그렇게 크지 않아도, 장화만 적당히 찢을 수 있을 정도면 되지.’
엄청나게 아까운 짓을 한다는 듯, 하지만 되돌릴 수 있으니 괜찮다는 듯한 느낌이 피어올랐다.
엄지와 검지 사이, 손등 쪽으로 조금 단단한 감각이 생겨났다.
이빨이 스윽 살갗의 주머니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얇고 날카롭게, 살갗을 가르듯이 나와 엄지 크기 정도로 길어졌다.
그 과정에서 투란은 느낄 수 있었다.
이빨 안쪽에 그물처럼 퍼져 있는, 피를 마시는 대롱. 아마 샤벨투스의 미세한 혈관이 있던 그 자리로 덩굴줄기가 파고들어 방울방울 아끼면서 피를 흘려 넣고 있었다. 피가 흘러가는 영역에 따라 이빨이 두꺼워지거나 얇아지고 길어지는 것이 결정되었다.
‘과연, 이러니까 실과 바늘로 확대경까지 쓰면서 세공하는 거구나.’
미처 알지 못했던 일을 깨닫고 나니 신기했다.
이제는 투란도 샤벨투스의 이빨을 가공할 수 있게 된 것일까?
‘그럴 리는 없지.’
마음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투란은 가볍게 포기했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세공을 누가 원하겠는가?
악마의 심장, 그 미세한 줄기가 직접 닿아야 가능한 일인데!
이렇게 만들어진 것은 투란, 혹은 투란처럼 바보짓을 해서 악마의 심장을 다룰 수 있게 된 몬스터 로드가 아니면 제대로 못 쓸 터였다.
조금 더 길어져 검지의 크기에 맞춰지고 적당히 손바닥에 쥘 자리까지 생겨난 샤벨투스의 이빨이 장화를 가르기 시작했다. 두꺼운 밑창부터 갈라지고 잘려 투란의 입안으로 들어갔고, 이내 조각난 장화의 가죽 파편마저 사라졌다.
꼬물꼬물, 꼼지락꼼지락.
투란은 두 발을 내려다보면서, 장화 한 켤레를 완전히 벗어 버린 맨발을 움직이며 관찰했다.
‘이제 다 녹았나?’
아직 감각이 미묘했다.
움직이는 발가락, 발목을 보면 제대로 걷는 데 무리는 없을 듯했다.
하지만 그 주변을 맴도는 감각, 악마의 심장으로부터 부여된 감각은 여전히 뿌옇게 가려진 시야처럼 모호했다.
투란으로서는 조금 더 확실했으면 좋겠다 싶기만 했다.
두근, 쿠웅.
그때, 묵직하게 심장이 울렸다.
발가락 사이로 따스함이 흐르는 듯했고, 투란은 발등부터 허벅지까지 투명한 줄기가 도드라진 힘줄처럼 돋아나는 것을 보고 느꼈다.
다리의 감각이 선명해지고, 발등 위로 투명한 살갗이 한 겹 더 덮였다.
넝쿨의 실그물에 덮인 살갗 속으로 곧장 더 짙은 따스함이 밀려들었다.
‘……어?’
투란은 눈을 조금 가늘게 하고 위를 바라봤다.
여러 개의 황금색 태양, 낮게 떠 있는 뭔가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태양들의 광채가 확실히 악마의 심장이 써먹을 빛이 되어 주고 있었다. 서리를 깔아 덮은 호수의 안개와는 완전히 나쁜 사이인 것처럼…….
‘설마…… 이것들 몽땅 몬스터인데 싸우고 있는 건가?’
막연하게 이런 생각까지 떠올랐지만, 투란은 곧 스스로 도리질을 치며 부정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그건 너무 무서운 이야기 아닌가!
해처럼 높은 곳에 둥실거리며 떠 있는, 태양처럼 빛나는 몬스터라니!
저 넓은 호수를 가득 덮은 서리 안개의 몬스터라니!
투란에게는 그냥 이곳이 아주 특이한 장소라고 여기는 편이 훨씬 속 편했다. 몬스터 두 마리가 엉겨 서로 물어뜯는 상황, 그 입속에서 멀뚱거리는 꼴인 자신을 생각하면 너무 비참하잖나!
숨을 조금씩 고르게 들이쉬면서 투란은 엉덩이를 뗐다.
‘으큭!’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엉덩이를 꽉 깨문 차가운 갈고리에서 살을 억지로 빼는 듯한 느낌으로 아팠다. 얼음판에 달라붙은 살점을 떼는 느낌이 이럴까?
‘이건 뭐야!’
조금 화가 난 투란은 엉덩이를 왼손으로 문질렀고, 푸석거리며 흩어지는 것이 악마의 심장 넝쿨 가닥임을 알아차렸다.
돌의 차가움이 얼려 버린 탓에 감각이 마비되어 몰랐던 부분이다. 그 차가운 가닥들이 엉덩이 쪽에서 떼어지자 예측 못 한 자극을 준 셈이었다.
결과를 깨달은 투란의 손이 조금 급히 움직였다.
‘바지는!’
멀쩡했다.
바지 표면까지 뻗어 나간 덩굴줄기의 얇은 그물은 찢겼지만, 거기에 보호된 바지는 아직 찢어지지 않았다.
“흐흠, 바지가 가죽이군. 그럼 마지막까지 소중히 여겨야지! 사나이가 바지를 까고 맨살을 드러낼 정도로 몰렸다면, 그야말로 위태롭고 위험한 순간이다! 가죽 바지는 그 위험한 굶주림을 메꿔 주는 최후의 만찬인 거야!”
정신 나간 놈이라고 다들 어이없어하던 몬스터 헌터의 주장이었다.
가죽이 아닌 다른 옷감은 먹을 수가 없다며 옷을 모두 가죽으로 맞춰 입고 다니는 작자였는데, 지금의 투란으로서는 그 말을 아주 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미리 빛을 끌어넣어서 녹였으면 괜찮았을까?’
조심스럽게 위를 보며 투란은 온몸으로, 넝쿨의 극세한 줄기가 뻗어 나가기를 염원했다. 그리고 저 태양들의 빛을 퍼뜨려, 더 이상 서리 안개의 차가움에 뜯겨 나가는 곳이 없기를 바랐다.
곧 따스함이, 조금 더 간절하게 빛을 원했다가는 몸이 구워지지 않을까 싶은 열기가 몸에서 피어났다. 때문에 투란은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으로 깨닫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거…… 사실은 굉장히 위험한 빛인가?’
아무리 열심히 햇빛을 쏘인다고 해도, 아무리 몇 개의 태양이라 해도 서리가 가득 물어 버린 몸이 이렇게 순식간에 뜨끈해질 수 있나?
투란은 천천히 손을 뻗어 하얀 돌의 한쪽을 짚었다.
왼손이었고, 투명한 힘줄이 살갗 위로 슬쩍 도드라진 상태에서 손에 맺힌 빛을 하얀 돌에 댄다는 느낌을 쫓았다.
하얀 돌은 그의 손이 닿은 부분을 중심으로 까맣게 변했다.
투란의 마음속에 침묵이 찾아들었다.
까맣게 변한 돌의 주변에는 이슬이 돋아났고, 그의 왼손에 얽힌 투명한 살갗이 당장 그 이슬을 빨아들였다.
투란은 껑충 뛰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대신 몸을 조금씩 천천히 일으켜 두 발로 섰다.
위장 속에서 완전히 녹아 버린 장화의 영양분이 다리에 힘을 팍팍 실어 주는 것이 바로 느껴졌다.
마치 그의 기분, 여기서 얼른 떠나고 싶은 바람을 돕겠다는 느낌이다.
‘침착! 먼저 주변을 살피고!’
“잘 모르면, 먼저 잘 둘러보고 잘 들어야지. 무턱대고 날뛰면 죽는 거야! 몬스터가 팔다리를 씹어 댄다 해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면 우선 둘러보고 들어! 팔다리가 씹히는 동안에 살아날 틈이 있을 테니까!”
“글쎄…… 상처 때문에 죽는 경우보다는 상처 입은 데 놀라서 죽는 놈이 더 많을걸. 상처는 나중에 보면 별거 아닌 때가 더 많지. 중상이라도 사람이란 게 그리 쉽게는 안 죽거든. 근데 뭐가 스쳤다고 놀라서 발광하는 놈들, 정말 놀라서 죽더라고…….”
어렴풋이 언제 들었는지 모를 이야기를 떠올린 투란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며 주변을 둘러봤다.
‘저기랑, 저기!’
한쪽은 호숫가의 자갈밭이 끝나면서 노랗게 물들어 가는 이상한 숲으로 이어졌고, 한쪽에는 하얀 벽의 한 귀퉁이가 뚫린 것처럼 무너지고 그림자가 검게 드리워진 것이 보였다.
투란이 선 자리에서 가까운 곳은, 호수와 경계를 나누고 무성하게 자리 잡은 숲이었다. 너무나도 노랗게 물든 풍경이 마치 태양들의 색채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도 하지만, 어쨌든 숲이 아닌가?
자연스럽게 투란은 그리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발바닥을 누르는 하얀 돌, 자갈 위로 검은 흔적이 번지면서 이슬이 조금씩 돋아나다가 사라졌다. 느릿하고 침착한 걸음이었고, 발가락 사이로 이슬이 스며드는 듯이 보였다.
투란이 멈춘 곳은 이제 두 걸음만 더 가면 노랗게 보이는 숲의 영역에 발이 닿을 자리였다. 그 지점에 이르고 보니, 저절로 고민이 찾아온다.
‘땅도 노랗잖아!’
나무의 색도 노랗고, 나뭇잎도 노랗다.
한데 그 아래, 바탕이 되는 땅도 흙의 본래 색채가 아니라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투란의 눈길이 잠시 자신이 디뎠던 호숫가를 돌아봤다.
발을 디딘 자리가 다시 하얗게 물들어 가는 것이 보였다.
이슬의 흔적은 지워지고 서리의 빛이 번져 가는 꼴이었다.
호수의 표면을 덮은 안개는 중심에서 뭉클거리며 여전히 건재한 모습이었고, 그 위로 쏟아지는 햇살도 변함없이 서리와 안개를 두들겨 부수려는 듯이 보였다.
‘이 노란색도 정상은 아니란 거겠지?’
여기에 뭔가 투란이 아는 상식에 어울리는 것이 있으려니 하는, 그저 색깔만 노랗겠거니 하는 기대는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