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243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244)
“나는 아직 너의 호의에 대해 제대로 답하지 않고 있었군.”
금빛 안개가 입김처럼 흐르면서, 세란드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투란의 귓가를 울렸다. 멀리서 외쳐도 크게 들릴 것처럼 또렷한 목소리였고, 그 안에 담긴 의지가 얼마나 분명한가를 가슴 깊이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살짝 드라고니아의 소리가 얹힌 듯이 투란의 뇌리를 한 번 더 울린다.
―키린 흉내 낸 보람이 있네?
‘쳇.’
투란은 세란드에게 보이지 않게, 마음속으로만 살짝 혀를 차는 소리를 떠올렸다. 드라고니아가 조금 전의 진지하게 꾸민 태도 속에서 키린을 기억해낸 것은 당연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티 안 나게 따라 한 것인데 바로 들키다니!
―나는 네 마음을 통해 그 기분을 그냥 느끼거든?
드라고니아는 한 번 더 피식 웃는 듯이 말했다.
투란이 거기에 뭐라 하기 전에 세란드의 목소리가 이어져 나오며, 바로 관심과 주의를 끌었다.
“투란, 너에게는 내 동생들을 도울 의무도…… 어떤 사연도 없었지. 오히려 나와 내 동생들 때문에 쫓기는 꼴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를 도와줘서 고마워. 그런데도 나는…… 이런 몰골인 나도, 괴물인 채 숨어버린 나도 너에게는 별 보답을 못 했어. 그러면서도…… 또다시 생각 없이 떼를 쓰며 오히려 동생들에게 위험한 짓을 하려고 했다니…… 한심하다, 정말…….”
금빛 안개의 손으로 머리를 긁적대는 세란드의 모습은 투란에게 아주 기묘한 느낌으로 보였다. 금빛의 채광(採光)이 흩어지고, 안개가 금빛으로 휘날리며 사라지는 것은…….
‘으와, 씻지 않아서 머리에서 먼지 날리는 것 같은데!’
이런 생각부터 하게 했지만, 뭔가 반짝거리는 모습이 꽤나 멋져 보이잖는가!
마치 어린 시절 누군가가 한 말이 저절로 맞아떨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람은 금전(金錢) 주머니를 차고 금박(金箔)을 씌우면 멋져 보이는 거야! 빈 주머니를 차고, 며칠 굶어서 해쓱한 꼬락서니를 하면 정말 못생겨 보인다고!
주변에서 수군대기로는 돈독이 오른 미친놈이었고, 돈주머니만 아니면 상대도 하지 않을 거라고 짜증을 내게 만든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린 투란은 봤다. 사람들은 자기 입으로 뭐라고 험담을 하든, 그 사람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가 여는 금전 주머니에 눈을 번뜩이는 꼴을!
조금 크고 난 다음에도 그 사람이나 주변 사람들의 태도는 투란에게 매우 이상하게만 여겨졌다. 실제로 그 사람 주머니에 금전보다는 은전(銀錢)이 많은 탓도 있었고, 그 사람이 금박이 어쩌고 했지만 정말 몸에 금색 문신 따위는 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지금 보니 세란드는 그냥 금가루로 만든 진짜 금덩이 모습 아닌가!
‘헤에, 그게 이런 소리였나?’
어쩌면 그는 이런 모습이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아니거든! 절대 아니라고!
드라고니아가 기겁한 소리를 투란의 뇌리로 바로 찔러넣었다.
‘너, 사람 사는 곳에 대해 잘 모르잖아?’
―잘 알아! 너보다는 잘 알 거다! 절대로, 방금 네가 떠올린 추억이랑 세란드의 모습은 겹쳐지는 바가 없다고!
‘쳇.’
투란은 생각을 접고, 세란드가 잠시 숨을 돌리는 모습을 보이다가 잇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지금 나는, 이 모습인 나는 다른 모든 것보다 무조건 내 동생들을 우선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 따위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으니까…… 하지만 갈라선 괴물인 나는 다르다. 그쪽은…… 죽이기 위해서, 죽이고 살기 위해서 괴물이 되는 것을 감당한 세란드…… 진짜 몬스터 로드에 가까운 쪽은 숨은 그 녀석 쪽이야.”
조용히 듣던 투란은 문득 느낄 수 있었다.
금빛의 세란드는 완전히 하얗다가 새카만 어둠 속에 숨어버린 괴물 세란드랑 완전히 갈라졌다고…… 이제는 완전히 다른 조각이라고.
세란드가 금빛 안개로 된 입술을 조금 더 움직여 말을 잇는다.
“하지만 녀석도 몬스터가 되었을 뿐이지. 몬스터 로드인 네게 삼켜졌고…… 나는 그 일에 대해서 절대로 비밀로 해두고 싶다. 그리고 녀석도…… 같은 기분인 걸 알 수 있어. 어쨌든 우리는 실패한 자들이니까. 그래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투란, 우린 너에게 기대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네게 원하는지도 모르겠어. 조금이라도 받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받고 싶어 하는…… 너와 어떻게든 거래를 하고 싶은 기분이라고 할 것 같군. 그걸 이제 나는 그만두겠다. 그 증거로…… 요술은 그냥 넘기도록 하지. 여러 가지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모두 너 스스로 판단해서 조절하면 되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네게 모두 넘겨 맡길게. 대신, 부탁한다. 내 동생들을…… 사람 사는 곳까지 데려다 다오.”
“음, 어째 처음 그대로인 것 같잖아!”
투란이 잠깐 눈을 껌벅이다가 푸욱 한숨을 쉬며 대꾸하고 말았다.
세란드의 얼굴 위로 금색의 선명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 웃음이 가득 밴 명랑하고 즐거운 목소리가 안개와 함께, 주변의 물소리, 바람 소리와 엮이면서 투란에게 노래하듯이 전해온다.
“아니야, 투란. 변했다. 아주 많이! 지금의 나는…… 너에게 감사하는 나이고, 내가 받은 것을, 내가 지닌 것을 너에게 아낌없이 줄 수 있는 나이며…… 그저 너에게 부탁을 하는 자, 가디언으로서 자각한 나다. 부탁한다, 너에게 이 스펠 리스트까지 넘겨줄 테니…… 제발!”
“제발이라면서 그렇게 웃냐!”
투란은 머리를 박박 긁어대면서 웃는 세란드를 향해 쏘아붙였다.
하지만 금빛 안개의 세란드는 그저 두 손을 모아쥐는 자세로 웃었다.
그 마주한 두 손 사이에서 금빛 안개가 엉겼고,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냈다.
투란의 눈매가 조금 가늘어졌다.
네모나고 단단한 테두리를 지닌…… 온통 금색으로 울퉁불퉁하면서 얇게 쪼개질 듯한 옆면…….
“책?”
“그래, 바인더(Binder)야. 마법사가 황금매의 마력용량으로 처리할 수 있는 주문을 모아두고, 선별한 목록이 담겨 있지. 우리가 옴니앙에서 찾아냈고, 참고해서 새로운 배틀 그림모어에 써먹었다. 하지만 투란, 너라면 우리와 다른…… 마법사와도 선별을 하고 이용할 수 있을 거야. 여기에…… 아까 말한 요술도 기재되어 있다. 이건 그저 보답으로 주는 거야. 거래가 아니고, 조건도 없다. 그러니 받아줘. 나는 단지 부탁만 할 뿐이니까…… 이걸 받는 일에 부담은 느끼지 않아도 돼!”
“이보셔!”
투란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생글거리는 세란드가 내미는 금색의 덩어리 같은 굵고 두껍고 큰 책은 이미 투란의 가슴에 와닿으려 하고 있었다. 엉겁결에 투란이 손을 올렸고, 금빛 가죽으로 감싼 듯한 환영의 책자는 손에 닿자마자 사라졌다.
―받았다, 투란.
드라고니아의 말이 바로 투란의 뇌리를 울렸고, 투란은 그 속에 담긴 호기심을 느낄 수 있었다. 드라고니아는 아겔페스, 금색의 마도사가 대체 황금매에 어떤 주문을 담으려고 했는가 굉장히 궁금해하는 낌새였다.
책을 넘긴 세란드는 뒤로 물러섰고, 고요한 웃음을 보인 후에 사라졌다.
투란은 주변에서 물방울이 튀고, 바람이 살짝 거세지는 것을 느꼈고 저편에서 가녀린 불씨가 휘날리는 광경을 봤다. 딛고 있는 흙은 조금 더 단단해진 듯하면서 발가락이 빠져드는 포근함을 느끼게 해줬다.
잠시 눈을 깜박거리다가 투란은 입을 열고 한마디 토해야 했다.
“헐?”
한참 조르고 조르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제는 훌렁 사라지다니!
도대체 세란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새삼 궁금해지잖는가!
설마 이 꼴은 마치 미끼를 던져놓고 투란이 덥석 물기를 바라는 것일까?
하지만 괴물이든 망령이든 세란드는 아직 투란의 문장, 황금매의 풍경 속에 그대로 있을 텐데…… 저런 짓에 의미가 있을까?
―없을 거야, 투란. 세란드가 말했잖아. 자신은 이제 석상처럼 될 거라고. 망령으로서의 에센스, 기본적인 형태는 남아있겠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장식품 정도만 남은 채로 괴물이 아닌 세란드는 네 안에서 희미해져서 없는 거나 마찬가지일 거야.
드라고니아가 투란의 의혹에 대해 차분하게, 조금 자세한 말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투란으로서는 도무지 무슨 소리인가 어리둥절하게 하는 내용이었다.
‘그게 무슨…… 에잇, 보면 알겠지!’
투란은 깊이 생각하기보다는 먼저 문장 속의 풍경으로 마음을 옮겼다.
다커 블랙과 섹스탄트 크로스로 자신을 숨긴 괴물이 있는 풍경으로…….
* * *
수평과 수직의 교차하는 금빛이 여섯 개의 별처럼 나란히 빛나며 박힌 어둠은 완연한 새장 분위기를 띤 우리 속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 안에 숨은 괴물이 하얗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저렇게 깊은 어둠 속에 전혀 흔적이 없는 것이 굉장해 보일 뿐이었다.
금빛 안개로 이뤄졌던 세란드의 형상은 그 새장 앞에, 풀린 자물쇠가 문턱에 떨궈진 것처럼 놓여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투란은 곧 그 형상이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던 금빛 안개가 아니라, 완전히 금덩이를 주물러서 만든 채로 반짝거리기만 하는 조각상이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우뚝 서거나 한 모습이 아니라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한쪽 무릎은 가슴에 댄 채로 웅크린 듯한 세란드가 바닥을 더듬으며 쉴 곳을 찾고 있는 듯한 자세였다.
묘하게도 등에는 배낭까지 둘렀고, 배낭을 가로지르며 양쪽으로 흘러나온 금사슬이 어둠을 품은 새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자물쇠는 풀렸으나, 여전히 그 자리에 놓인 채로 다시 조이고 걸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듯한 꼴이었다.
“세란드……?”
투란은 뭔가 가라앉는 기분을 느끼면서 고요함 속으로 물음을 던졌다.
나란히 어둠 속에 박혀 있던 별이 이에 답하듯 움직였다.
어둠 너머로 흘러가는 듯한 둘, 앞으로 나오려는 듯한 둘, 그 중간에 선 둘…… 투란 쪽으로 사다리꼴의 모양을 꾸미듯이 여섯 개의 별이 수평과 수직의 교차선을 선명하고 날카롭게 끝을 세우면서 투란을 향했다.
“갔다.”
조금 먼 곳에서 울려오는 메아리 같은 소리로 대답이 나왔다.
투란은 되물어야 했다.
“가다니?”
메아리가 다시 웅장하게 울리며 답한다.
“여기에 묶어둔 마지막 매듭 같은 것을…… 풀고 떠났다고. 애초에 망령의 에센스를 이용해서 가디언의 맹약을 맺었잖아. 그리고 남아 있던 마지막 잔해, 매듭 같은 것이 조금 전에 풀렸다. 투란, 네 입장에서 말하자면…… 몬스터 에센스를 완전히 전이시켜 주고 남겨놓지 않은 꼴이겠지.”
“어? 아…….”
문득 투란은 느꼈고, 알아차렸다.
투란의 황금매 속에 있던 망령인 세란드가 자신을 쪼개서, 동생들과 마법의 맹약을 맺고 가디언으로서 자리 잡는다…… 그 의미는 투란 안에 담겨진 미련 가득한 망령의 정수, 망령으로서 세란드가 지녔던 몬스터 에센스가 소모된다는 뜻이었다.
마치 몬스터 로드가 다른 몬스터 로드에게 에센스를 전하듯, 투란은 자기 안에 담긴 망령의 정수를 소모해 그 가디언의 계약을 도왔다.
그 과정에서 남은 정수의 마지막 잔해…… 어떻게든 투란이 동생들을 돕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겨진 채였던 세란드의 마지막 부분이 떠난 것이다. 투란의 도움을 이끌어내기 위해 쥐고 있던 마지막 패를 그대로 넘긴 채로.
“나한테도 가디언이 유효하네 어쩌네 했는데?”
투란은 웅얼거렸다.
계약을 한다면, 투란에게도 가디언이 되어 주겠다고 했었다.
별빛 둘이 투란을 향해 가늘고 날카롭게 빛나며 웅장한 메아리의 대답이 나온다.
“그랬지. 거래 수단으로 애써 남겨놓은 부분이 있었고…… 어쨌든 기본적으로 너의 몬스터로서 여기 머물렀으니까, 새삼 너를 위해 움직이지 못할 것도 없다고 여긴 거지. 덤으로 시알라 녀석들을 위한 확실한 수단으로 널 확보하고 싶어도 한 것 같고…… 하지만 조금 전에 그 미련을 버린 모양이다. 애써 내게서 가져간 스펠 리스트의 바인더까지 포기하면서…….”
듣고 있던 투란은 새장 앞에 놓인 세란드의 금조각상을 살폈다.
고정된 표정, 말도 없고 듣는 시늉도 없는 그저 금덩어리로 빚어 놓은 듯한 형상…… 저건 대체 왜 남겨졌을까?
투란의 의문이 그대로 전해진 모양이었다.
웅장한 메아리가 어둠과 별빛 사이를 넘어 다시 답을 해온다.
“이 금상(金像)은…… 나의 기억이다. 내게 사슬이 걸린 그대로…… 내가 과거를 기억하는 단편이고…… 더 이상 내 안에 머물 수 없는 과거의 나이지. 망령의 파편과는 상관없는…….”
“너는 안 가?”
투란이 불쑥 물었다.
침묵이 어둠 속에서 짜릿하게 울려 나오는 느낌이 투란에게 찾아왔다.
으르렁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실실 웃는 것 같기도 했고…… 어쨌든 어둠 속에 숨은 하얀 괴물은 여기에 머물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는 듯했다!
한숨처럼 투란은 말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몬스터 로드 안의 몬스터이면서 꼭꼭 숨다니…… 대체 뭔 짓이냐고. 그러고 숨지 말고 내게 뭔가 능력을 쓰도록 해줘야 할 것 아냐!”
“원래 몬스터 로드는…… 삼킨 몬스터를 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하고…… 그 노력하는 과정에서 이래저래 고생도 하는 법이다. 알지, 투란?”
빠직!
투란은 이 풍경과 상관없이 몸에서, 이마에서 핏대가 솟구치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녀석은 망령이 아니긴 하지만, 역시 억지 부리는 세란드란 느낌을 팍팍 풍겨내고 있잖은가!
심지어 이놈은 여전히 고맙다거나 어쩌거나 하는 낌새도 없다!
‘아오오, 이 녀석을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