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312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313)
―뭐긴, 마법이지.
드라고니아가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너무 간단하고 분명해서 투란은 어이가 없었다.
다른 때라면 어쩌고저쩌고 말이 많았을 텐데?
이런 투란의 속내에 답하듯, 드라고니아의 시원한 소리가 바로 울린다.
―말하면 알아듣기는 했냐?
‘알아듣게 얘기를 하라고! 머리 한 대 맞은 것처럼 말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또박또박 말하게 해주는 마법이라니, 드라코눔에는 바보를 똑똑하게 해주는 마법도 있었던 거야?’
―이성(理性)을 부여하거나 지능(知能)을 향상시켜주는 마법이 없지는 않지. 하지만 네키아에게 쓴 주문은 그냥 인간의 언어체계를 건네주는 마법일 뿐이야. 네키아가 지닌 본래의 지능, 성격 따위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네키아는 조금 전까지 인간의 방식으로 말하는 법을 몰랐고 내가 알려준 거란 말이다.
‘오?’
주르르, 다시 이전처럼 흘러나오는 듯한 설명에 투란은 잠깐 납득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기분은 금세 사그라들고 말았다. 당장 주변의 풍경이 달라진 꼴을 보니, 대체 말만 하게 해준 마법으로 왜 네키아가 이런 장벽을 쌓아올리는 것인지 설명이 전혀 없잖은가!
네키아의 물방울이 맴도는 입술이 움직였고, 다시 투란을 향한 말이 흘러나온다.
“이름은 소중한 것이며 함부로 알려지면 안 되는 것. 네키아는 당신의 진정한 이름을 원해요. 하지만 다른 이가 듣게 하지 않을 거예요. 네키아의 안에서, 네키아에게만 진정한 이름을 알려줘요.”
잠깐 투란은 눈을 껌벅거렸고, 들은 말을 되새겼다.
결론은 굳이 되새기지 않았을 때랑 똑같았다.
‘에, 이게 무슨 소리야?’
또박또박 말을 하고 있기는 한데, 대체 무슨 뜻인가 투란이 알 수 있는 소리가 아니잖은가!
설마 정령이라면서 세상 사람들처럼 ‘투란? 진짜 이름은 뭔데?’라고 묻는 것인가?
설마 정령 사이에서도 투란은 너무 흔해 빠진 이름이라 본명을 숨기기 위해 사용하는 가짜 이름의 대표격으로 알려졌단 말인가!
―아냐! 잠깐 닥치고 있어! 생각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드라고니아가 결국 살짝 울컥한 소리를 투란의 뇌리에 박아 넣고 말았다.
그리고 곧 ‘네키아’를 향한 물음이 윌 라이트를 통해 울려 나온다.
―네키아, 너의 계약자는 어디 있느냐?
‘네키아’의 표정 위로 작은 파문이 번졌다.
투란에게는 그 파문이 마치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물의 정령은 드라고니아의 물음을 예상한 듯했고, 그 예상이 맞아서 기뻐하는 듯하다?
“네키아는 계약자가 없어요. 하지만 네키아에게 세상을 가르쳐준 마법사는 있어요. 네키아가 세상에 홀로 서려면 이곳에서 성장해야 한다고 알려준 마법사에요. 하지만 홀로 서기 전에 이곳에 찾아온 누군가가 있다면…… 그와 계약을 해도 된다고 했어요. 계약을 기억한다면 네키아가 스스로 생각해서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이라고 했어요.”
“음.”
투란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하는 시늉을 했다.
마치 ‘네키아’의 말을 깊이 생각해 보는 듯!
―아무 생각 없으면서 아는 척하지 마!
드라고니아가 투란을 향해 좀 더 울컥한 외침을 토했다.
‘가만있으라며! 생각하지 않고 가만있는 거잖아!’
―못 알아듣겠으니까 생각없는 멍청이처럼 아는 척하는 거잖아! 누굴 속이려고!
‘쳇.’
투란은 소리 없이 드라고니아에게 투덜대는 시늉을 하며 입술을 삐죽였다.
‘네키아’가 물방울 눈동자 위로 찰랑이는 파문을 뿌리면서 묻는다.
“네키아는 드라코눔의 아이를 만났어요. 이곳에서 아주 만나기 힘든 사람을 만났어요. 계약하고 싶어요. 계약해서 여기서 떠나고 싶어요. 그러니까…….”
―네키아, 잠깐 기다려. 너에게 확인해야 할 일이 있고, 너에게 알려줘야 할 것도 있다. 계약을 서두르지 말라는 이야기도 분명히 들었지? 지금 네키아는 서두르고 있어. 그러니까, 조금 더 이야기를 하자.
“그래요, 이야기해요.”
물방울이 맴도는 입술을 조금 전 투란처럼 삐죽이며 ‘네키아’가 대꾸했다.
순간 투란은 미묘하게 물결치는 ‘네키아’의 얼굴 속에서 문득 하고 싶은 대로 되지 않으면 성질내고 투덜거리던 이웃집 소녀 티아를 떠올릴 수 있었다. 얼굴이나 생김새는 완전히 다른데 어째서인가 분위기가 비슷하다?
이런 느낌이 불쑥 투란의 입을 열게 했다.
“왜 내 이름이 투란인데, 투란이 아니라고 하는 거야?”
이 소리는 이상하게 물의 장벽 안을 울렸고, 넓고 깊이 퍼지는 듯했다.
드라고니아도 이 소리에 놀란 듯, 혹은 투란의 물음이 적절했다는 듯이 ‘네키아’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네키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투란보다 조금 더 작은 체격으로 뭉쳐들면서 다가서는 움직임 속에 대답을 한다.
“네키아는 거짓말을 엿볼 수 있어요. 그런데…… 거짓말을 하지 않는군요? 투란은 진짜 이름이 아닌데…… 투란이라고 알고 있군요?”
물방울과 물결로 이뤄진 눈동자가 반짝거렸고, 한껏 깊어진 호기심과 흥미를 뿜어냈다.
투란은 당황했다.
‘어이, 얘 대체 뭐라는 거야? 말만 또박또박하고 여전히 어디가 좀 이상한 거 아냐?’
어쩔 수 없이 드라고니아를 향해 이런 물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드라고니아는 투란의 당황하는 상태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이 ‘네키아’를 향해 묻는 말을 꺼낸다.
―네키아…… 이 녀석과 투란이란 이름으로 계약할 수 없느냐?
“진짜 이름이 아니잖아요. 계약자는…… 네키아와 계약하려면 진짜 이름을 말해줘야 해요. 그래야 정령의 마법이 맺어지고 계약이 돼요. 네키아는 진짜 정령이니까. 마법사가 조립한 엘레멘탈 구조체가 아니니까, 진짜 이름을 들어야 한다 했어요.”
맑고 깨끗하게 흘러나오는 ‘네키아’의 말을 어딘가 즐거운 느낌을 솟아나게 했다.
투란은 저절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신을 깨달았지만, 그 말에 담긴 의미를 느끼면서 한층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뭔 소리야? 얘가 지금…… 내 이름이 투란이 아니라고 하는 거야?’
―살아오면서 다른 이름으로 불린 기억이 있어?
‘뭐? 아니, 없어! 잠깐, 너 설마……!’
뭔가 속 깊은 곳에서 살짝 부글거리며 울컥하는 기분을 느끼며 투란은 잠시 눈을 감아야 했다. 한창 즐거운 ‘네키아’에게 화내는 눈빛을 뿜어내는 것이 왠지 꺼려진 탓이다. 하지만 일단 눈을 감은 다음, 아련한 ‘천칭’이 풍경을 떠올리면서 드라고니아를 향해 뿜어내는 성난 기분은 멈추지도 아끼지도 않았으니…….
‘야! 내 속에 있으면서 내가 거짓말하지 않는 거 알면서 왜 그래!’
‘천칭’의 풍경 속으로 흡사 태풍과 벼락을 뿌리는 듯한 느낌으로 소리 없이 외쳐보는 투란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드라고니아의 대답은 고요하고 단호하면서도 냉정하게, 아주 또박또박한 말투로 나온다.
―투란, 너의 기억에 다른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다 해도…… 너에게는 다른 이름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 너에게…… 네가 전혀 기억할 수 없는 어떤 시기에 진정한 이름을 부여해놨을 수도 있다는 거야. 대부분의 경우라면, 어릴 때 부모로부터 얻는 이름을 자신의 이름이라고 인지(認知)하는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진정한 이름으로서 영혼(靈魂)의 각인(刻印)이 이뤄지고, 그것이 진정한 이름으로 쓰인다. 하지만…….
‘그만.’
투란은 드라고니아의 말을 끊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하던 기분이 사라졌고, 그 대신에 아주 차갑고 깊은…… 투란이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분노가 가슴에 맴돌았다.
―투란?
드라고니아는 투란이 단순히 기분을 전환시킨 것이 아니란 것을 바로 알아차린 듯, 가만히 침착하게 부르고 있었다. 이는 투란을 진정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알아, 화내지 않아. 이제 와서 화내 봐야…… 여기서 화내 봐야 아무 쓸모도 없고…… 네키아에게 보여주고 싶지도…… 에?’
투란은 얼굴 가까이 느껴지는 시원함에 눈을 떠야 했고, 바싹 붙어서 닿을락 말락 한 간격으로 찰랑이는 물결의 형체를 봐야 했다.
‘네키아’가 어느새 투란의 앞에 바싹 붙은 채로 호기심이 왕성한 눈빛을…… 물빛으로 가득 채워진 눈동자를 들이대고 있었다. 뭔가 투란을 샅샅이 흩어서 더듬어 보고 싶어 하는 듯한 분위기였고, 투란에게는 다시 샤오콴 마을에서 질리도록 들었던 이야기…… 물의 정령이 포옹으로 일으킨 온갖 비극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저절로 숨이 욱 조여드는 기분이었지만…….
‘아니, 난 빠져 죽는 일은 피할 수 있지!’
새삼 자신에 대해 되새기면서 투란은 숨을 몰아내쉬었다.
아주 가까운 숨결을 받은 ‘네키아’의 얼굴 위로 색다른 파문이 번졌다.
그리고 짧은 물음이 맑고 깨끗하게, 한편으로는 아주 시원스럽게 나온다.
“누구에요?”
“응? 누구?”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투란 안에 누가 있잖아요. 네키아에게 말도 하는…… 누구에요? 하나인데, 왜 둘처럼 이야기해요?”
‘네키아’의 물음은 격류처럼 터지고 있었다.
그대로 두면 그 격류에 떠내려갈 듯한 낌새를 투란이 느끼는 순간…….
―아칸. 나는 드라코눔의 아칸. 사연이 있어서, 여기 투란과 하나인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드라코눔의 아칸이다. 그래서 투란의 정신 속에서 독립된 채로 너에게 말을 할 수 있지. 네키아, 이해할 수 있느냐?
드라고니아의 담담한 말이 윌 라이트를 통해 울려 나왔다.
‘네키아’의 고개가 소녀의 분위기를 그대로 뿜어내듯이 바로 까닥여졌고, 투란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아, 진짜.’
왜 정령도 이해하는 말을 투란 스스로는 잘 알아듣지를 못하고 있을까!
아무래도 드라고니아가 문장 속에서 머무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 같은데, 정작 드라고니아를 품은 투란에게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몬스터 로드에게 삼켜진 몬스터라면 그 형상을 끌어낼 수 있어야지 하는 것이다. 이렇게 골을 울리는 잔소리를 지껄이게 두는 것이 아니고!
이제 와서 딱히 드라고니아의 형상이 꼭 필요하다고 하기도 뭐 하지만, 그래도 투란에게는 꽤 아쉬운 일이었다. 도대체 드라코눔의 아칸이 뭔데…….
“이 녀석이 내 안에서 뭘 하는지 정말 알아?”
심술궂은 기분을 품은 채로 투란은 ‘네키아’에게 묻고 말았다.
딱히 제대로 된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충동적인 물음이었는데, ‘네키아’가 바로 조금 전처럼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답을 하다!
“알아요. 네키아의 안에도 있어요. 수많은 물결이 맴돌면서, 네키아 안에서 네키아와 하나이면서도 네키아와 다른 소망을 떠들고 있어요. 모두 제멋대로 날뛰고 싶어 하지만, 네키아가 허락하지 않으니까, 그냥 네키아 안에서만 맴돌아야 해요. 하지만 네키아가 허락한다면…….”
촤아…… 쏴악!
말을 하면서 ‘네키아’가 팔을 뻗었고, 그 물로 이뤄진 가는 팔 속에서 뒤틀린 파문과 함께 물줄기가 뻗어나왔다.
이 물줄기는 뱀처럼 생긴 그대로 꿈틀거렸고…… 그 머리에는 뿔이, 열린 입에는 물빛으로 번뜩이는 이빨이 보였다. 가는 팔뚝에서 튀어나왔지만 팔뚝보다 굵기도 했고…… ‘네키아’에게서 흘러나왔지만 맹수의 짙은 흉포함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게 보여질 수 있어요.”
‘네키아’가 방긋 웃는 얼굴로 말을 맺었고, 사납던 물줄기가 순식간에 가는 팔뚝으로 다시 말려들어갔다.
투란은 잠깐 맹한 표정으로 가는 소용돌이…… 허공을 맴도는 구름을 휘감은 회오리처럼 보이던 것이 ‘네키아’의 팔뚝 속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구경만 해야 했다.
어떻게 보면, 물로 이뤄진 ‘네키아’가 물을 이용한 또 다른 형상을 만든 것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몬스터 로드로서 투란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조금 전에 나왔던 뿔달린 머리통과 촘촘한 이빨이 박힌 입을 활짝 열었던 녀석은 분명히 물의 정령일 수는 있지만, ‘네키아’는 아니다!
따로 떨어져 나오면 그냥 물로 이뤄진 괴물이 분명했다.
“넌…… 대체 뭐야?”
새삼 투란은 ‘네키아’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봐야 했고, 자신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이에 대해 ‘네키아’는 아주 태연하게 물결로 이뤄진 웃음을 머금은 채로 대답했다!
“네키아.”
그 모습에 투란은 느낄 수 있었다.
‘얘…… 날 놀리는 거지, 그렇지?’
이미 말했던 이름을 되풀이해주는 ‘네키아’에게 투란은 확실하게 드라고니아가 가끔 자신을 열받게 하던 짓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째서 이 물의 정령이 드라코눔의 아칸이랑 닮은 짓을 하고 있단 말인가!
혹시 아까 드라고니아가 건 마법 탓인가?
―아니야, 놀리는 거 아니다. 정령이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이 녀석…… 네키아는 투란, 너와 진짜 계약을 맺고 싶어 하고 있어. 다만…….
‘다만?’
다음에 이어질 말을 느끼면서도, 그로 인한 불쾌함을 금세 깨달으면서도 투란은 되묻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