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32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32)
찰랑.
발목에 살짝 닿는 물살, 발등과 발가락 사이로 가늘고 촘촘하게 살랑이는 넝쿨의 실 가닥이 힘차게 물을 마시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들이마신 물결은 몸속에서 작은 파문을 일으키며 혈관을 따라 차오르고, 악마의 심장이 고동치게 했다.
‘피가 모자라.’
느리게, 겨우 몸을 움직일 정도로 맞춰진 듯한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투란은 알 수 있었다. 가죽을 자르기 위해 잠시 샤벨투스의 이빨 사이로 스며들게 했던 몇 방울의 피도 모조리 회수되었다.
그리고 지금 몸을 움직이는 데는 피보다는 흡수한 물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이는 제대로 된 사람의 몸이라면 견딜 수 없는 가혹한 상태이겠지만, 온몸에 악마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넝쿨이 더 많은 투란에게는 체력소모를 줄이면서 더 오래 버티게 해 주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핏줄 속으로 피보다 더 많은 물이 흐르는 시점에서 죽었거나 반쯤 죽은 채가 되겠지만, 어쨌든 투란은 이를 체력 소모를 줄이고 피를 아낀다는 쪽에서 받아들이고 움직였다.
‘더 물을 채워야 해.’
본능처럼, 투란은 알고 있었다.
가죽을 삼킨 만큼 약간 보충이 되었지만 몸이 필요한 양분은 아직 한참 모자랐다. 이를 대신할 물조차도 작은 웅덩이 안에서, 발아래에서 들이쉬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이 필요했다. 피 대신 물을 몸에 흐르게 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몸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물을 흡수해야 했다.
물을 많이 들이켤수록 악마의 심장은 보다 안정적으로 줄기를 키워 내고, 그 키워 낸 줄기가 투란의 몸을 지탱해 준다.
때문에 투란이 슬슬 말라 가는 얕은 물웅덩이에서 벗어나 흘러드는 물의 원천을 찾아가는 것은 당연했다.
‘아, 굴러다니는 고깃점도 없네.’
혹여나 근처에 쓰러져 죽어 있을 짐승이라든가, 몬스터라든가 하는 것도 기대해 봤지만 냄새도 흔적도 없었다.
있는 것은 그저 졸졸 흐르는 좁은 물줄기.
절벽의 파괴된 틈새에서 벗어나 투란은 회백색 바위 언덕을 넘으며 계속 걸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나오기를 기대하며 조금씩 짙어지는 안개의 장벽을 가로지르고, 좀 더 굵어지는 물줄기를 따라갔다.
그렇게 해서 잠시 뒤 도달한 곳에서 투란은 은근히 기대한 것과 만날 수 있었다.
고무쇠.
그것의 이름이었다.
어떤 나무, 투란에게는 가물거리는 이름의 나무를 베고 짜내서 얻은 즙, 수액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나무의 피 같은 것을 끓이고 말리고 뭉쳐서 만들어 낸다고 하는 것이 고무.
그 고무가 쇠처럼 단단하게 뭉쳐진 꼴이라고 해서, 그 이름이 고무쇠.
몬스터였다.
‘이게…… 죽었나?’
기억을 더듬으면서 투란은 우선 긴장했다.
물을 밟으며 바닥을 핥는 기분으로 걷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드러누운 몬스터, 투란이 보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몬스터 고무쇠를 만난 것이다. 가장 먼저 몸에 떠오른 반응은 위험에 대한 쪽일 수밖에 없었다.
‘안 움직인다?’
반사적으로 웅크렸던 몸을 조금 펴면서 투란은 슬슬 물줄기를 따라 몇 걸음 더 다가갔다. 푹 파인 물웅덩이에 고무쇠가 퍼져 있었다.
둥글둥글한 몸, 고무 가죽 살갗, 바람 빠진 주머니 같은 꼴이었다.
예전에 샤오콴 마을에 찾아왔던 몬스터 로드, 고무쇠를 지닌 자가 보여 줬던 그 이상한 모양과 꼭 닮았다.
볼록한 나무통을 닮은 뭉툭한 체형, 좁은 어깨로부터 흘러내리는 듯하면서 점점 넓어지는 팔, 그냥 손톱만 툭 튀어나온 듯한 뭉툭한 손, 둥글둥글한 몸 아래 깔린 무릎처럼 보이는 다리와 역시 손처럼 뭉툭하게 생겼고 손톱과 똑같이 생긴 발톱이 툭툭 튀어나온 몰골.
머리라 할 부분은 그냥 반으로 자른 공을 붙여 넣고 뾰족한 토끼 귀를 씌운 듯, 모양이 특이한 몬스터 고무쇠가 축 늘어진 주머니처럼 물이 고인 곳에 좌악 퍼진 채로 늘어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녀석 성질이 어떻다고 했지?’
예전의 투란은 몬스터 로드가 보여 주는 그 모양이 너무 신기해서 구경하느라 바빴다. 그래서 보고 알 수 있었지만 보자마자 놈의 성질이 어떤가를 바로 떠올리기는 어려웠다.
‘민감해! 맞아!’
쇠처럼 단단하면서 고무가 지닌 탄력을 그대로 지닌 기괴한 놈이라 했다.
고무쇠의 몬스터 로드는 그러면서도 이놈의 감각이 꽤나 섬세하다고 자랑했다. 그래서 간지럼도 잘 타고, 바람결조차 더듬듯이 느낀다고 했다. 그러니까 자신을 채용하라고 떠돌이 연금술사를 꼬드긴다고.
투란은 뾰족하고 길게 샤벨투스의 이빨에 피를 밀어 넣고 살짝 고무쇠를 찔러 봤다.
피를 머금고 날카로워진 이빨이 고무쇠의 살갗을 누르는 자국이 생기고, 은근히 파인 흠집이 났다.
‘좀 더 피를 먹이면 쇠라도 가를 텐데.’
피는 한 방울, 한 방울이 귀했다.
고무쇠가 반응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이빨에서 피를 빼서 몸속으로 되돌려 넣는 악마의 심장이었다. 아주 잠깐 피 몇 방울을 핏줄에서 빼는 것만으로 현기증 같은 느낌과 굉장히 아깝다는 기분이 가득했다. 그러니 재빠른 심장의 반응은 투란의 마음에 들었다.
“횡재? 왕끗발?”
갈라진 목소리가 저절로 투란의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모두 도박판을 구경하다가 배운 낱말이었다.
조금 고상한 품격을 갖췄다고 자신 있어 하는 내기꾼들은 ‘횡재’란 말을 좋아했고, 도박에 그런 게 어딨냐며 이겨서 따는 것이 최고의 품격이라고 외치는 내기꾼들은 왕처럼 재수 좋은 끗발이라고 ‘왕끗발’이란 말을 더 많이 썼다.
어느 쪽이든 투란에게는 엄청나게 운이 좋은, 한 번쯤은 확실히 손에 쥐고 싶은 행운을 표현하기에 넉넉한 말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 딱 맞는!
투란은 잠시 머리가 복잡해졌다.
도대체 이 이상한 곳에 떨어진 다음, 텅 빈 몬스터 엠블럼을 품고 추락한 이후에 뭔가 아는 것을 본 적이 있던가! 이렇게 느닷없이, 사냥 난이도가 중급 중에서는 상위로 매겨진다는 귀한 몬스터를 만나게 되다니, 그것도 사냥할 필요가 전혀 없이 알아서 쭉 뻗어 있어 주다니!
투란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이 기쁨을 좀 더 즐기고 싶은 듯한데.
‘어, 악마의 심장도 아는 놈이었고 물구리도 만난 적 있고…… 에, 이빨거머리도 보자마자 알기는 했네.’
냉정하게 솟구친 생각이 먼저 투란의 뇌리에 자리 잡았다.
모르는 것을 잔뜩 만나기는 했다.
전혀 상상도 못 한 꼴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중에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행운에 머리가 돌아서 끼지 말아야 할 도박판에 낀 멍청한 내기꾼 같은 생각을 잠시 했던 것이다. 투란으로서는 바로 반성할 일이었다. 여기는 그렇게 실수하고서 웃고 넘어갈 곳이 아니잖은가!
잠깐 행운으로 달아오른 머리를 식히고, 투란은 좀 더 냉정하게 기억나는 이야기를 더듬어 고무쇠의 몬스터 로드에 대해서 회상했다.
‘아, 그 헤엄치던 용병 여자도 고무쇠로 제련한 갑옷이랑 방패를 가지고 있었구나!’
그러자 깜박 놓쳤던 것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분홍색처럼 느껴지는 밝은 빨강 머리카락의 용병은 여자이기 때문에 근육을 잔뜩 키우거나 두꺼운 철갑옷을 입는 대신에 좀 얇고 부드러워 보이는 가죽 갑옷을 입었고, 방패 역시 가죽에 쇠테를 두른 것을 썼다. 얼핏 보기에 따라서는 그냥 여자니까 근육과 힘이 모자라 그 정도 챙겨 입을 수밖에 없다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갑옷과 방패의 가죽이 모두 고무쇠를 재료로 써서 만들어진 것, ‘몬스터 아머’였다.
몬스터를 재료로 써서 만들어진다는 칼날, 갑옷 따위의 도구들. 헌터나 용병 사이에서는 꽤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는 것들이었고 몬스터를 상대로 하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갖춰야 할 장비로 꼽히는 것들이기도 했다.
그 여자 용병은 고무쇠의 몬스터 로드랑 함께 왔다.
몬스터 로드가 고무쇠를 얻은 것처럼, 그 여자 용병 역시 몬스터 고무쇠의 조각을 얻어서 그걸로 자신의 갑옷과 방패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녀의 몬스터 아머는 어지간한 타격이나 충격 따위는 그대로 집어삼키는 기괴한 갑옷이고 방파였다. 고무쇠의 몬스터 로드가 내리찍는 주먹질조차도 그 방패 앞에서는 무력해질 정도였으니.
고무쇠를 직접 삼킨 몬스터 로드보다 여자 용병의 장비가 더 좋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몬스터 로드는 고무쇠의 것으로 변한 팔과 다리로 정말 훨훨 날아다니듯이 튀어 오르고 구르는 모습을 보여 줬다. 통통 튀는 그 움직임은 아무리 좋은 장비를 갖춘 헌터라도 미리 함정을 파 놓지 않으면 절대로 잡을 수 없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고무쇠는 헌터가 정하는 사냥 레벨이 중급 중에서 상위로 꼽힌다고.
‘근데 이 녀석 대체 왜 여기서 이렇게 바싹 말라 납작해져 있는 거야?’
투란은 주변을 좀 더 주의 깊게 둘러봤다.
걸어 올라온 곳의 비탈로 물줄기를 조금 넓고 얇게 퍼져 흘리는 물웅덩이, 이 물웅덩이를 향해서 조금 흘러오는 저편의 물줄기, 흘러오던 시내가 잠시 머무는 듯한 곳이었다.
그리고 저편을 확고하게 틀어막은 듯한 절벽, 반대 방향으로 산자락이 굽어지면서 슬그머니 숲의 풍경이 보일 듯 말 듯도 했다. 하지만 뭔가 살아 있는 듯한 생기는 없고, 나무가 있어도 다 허옇게 말라 버린 듯한 느낌이 살벌하게 전해진다.
‘아무것도 없는데…….’
투란은 천천히 고무쇠의 꼼짝 않는 형상 위로 올라가 앉았다.
단단함보다는 부드러운 느낌이 더 깊이 고무쇠에 닿은 손발에 느껴졌다.
잠시 투란은 무슨 카펫 위에 올라앉은 것처럼 그 감촉을 즐겼다.
깔고 앉은 탓에 슬쩍 물 아래로 내려앉은 가죽 위로 물결이 넘실거리며 채워졌다.
앉은 채로 숨을 쉬고, 물을 살갗으로 마시면서 투란은 잠시 궁리하고 고민했다. 그 내용은 꽤나 간단했다.
‘어쩌지?’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 물음일 뿐.
여기가 아닌 곳, 샤오콴 마을 어귀라든가 익숙한 산맥의 어딘가라면 딱히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그 여자 용병과 몬스터 로드가 했다는 시체 줍기, 스스로 사냥하지 않고 얻은 몬스터의 잔해를 이용한다는 짓을 투란이 거리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안 되면 그냥 잘라 먹을 수라도 있겠지.’
투란은 조금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상할 정도로 주변이 고요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이 여전히 숨을 못 쉴 곳이라고 단정 짓는 것도 섣부르지 않나?
어쨌든 고무쇠가 있을 곳이라면 숨을 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과연 피 냄새가 먼저 느껴졌다. 콧속에 짜인 가는 실그물을 거두기 무섭게 코피가 터진 것이다. 그리고 콧속으로 쑤욱 뭔가 밀려오는 느낌이 이어졌다.
바로 악마의 심장과 이어진 혈관의 넝쿨이 반응했고, 뚝뚝 손바닥으로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며 투란은 피 냄새 나는 숨쉬기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망할.’
그러나 여전히 마음 놓고 숨을 쉴 수는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손바닥에 고인 핏방울을 향해 물방울이 달려들고 있었다.
통통, 튀는 물방울은 먼 곳에서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고무쇠가 담가진 웅덩이를 채운 물이 방울로 통통 튀어 오르며 투란이 손바닥으로 받아서 다시 회수하려는 핏방울을 먼저 덮친 것이다. 깔린 고무쇠 위로 올라오며 투란의 몸에 살짝 묻어 있던 물이 살아 있는 듯, 물방울로 뭉치며 튀기도 했다.
뭔가 생각이 사라지고, 소리 낼 기분도 없어졌다.
투란의 눈앞에서, 손바닥 위에서 물방울은 핏방울을 머금고 깔끔하게 없애는 광경을 보여 줬다.
잠깐 투란은 아무 생각 없이 손바닥만 내려다봐야 했다.
물방울이 어떻게 접시처럼 핏방울을 받쳐 올리고, 소용돌이처럼 꿈틀거리며 핏방울을 희석시키면서 잡아먹는가? 서너 방울의 핏기가 사라지고 얌전한 물방울이 되어 가면서 그런 일 없다고 시치미 뚝 떼는 광경을 보면서 투란은 뇌리 속에서 되새김질만 서너 번 했다.
그리고 잠시 뒤, 투란은 손바닥을 여전히 노려보면서 물을 들이마시는 살갗을 상상했다. 바로 손바닥 살갗이 엷게 도드라지며 실그물의 넝쿨이 고인 물을 쑥쑥 들이마셨다. 그렇게 흡수된 물방울은 혈관을 타고 심장으로 들어왔고, 악마의 심장이 일으키는 맥동 속에 사라졌다.
‘그냥 물이잖아!’
그 과정에서 투란은 확인할 수 있었다.
밟았을 때, 아무 이상이 없던 것과 같았다.
악마의 심장으로부터 생성된 덩굴줄기이자 핏줄기인 몸의 조직 속에서 물방울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흡수된 채로 걸러진 채, 다시 몸을 순환하며 넝쿨의 가지를 늘리거나 움직이는데 소모될 뿐이었다.
하지만 이 물방울이 사람의 살갗, 핏줄과 만나면 코피가 터지는 상황이 된다!
잠시 고무쇠를 내려다보다가, 투란은 그 머리의 눈언저리를 더듬어서 눈꺼풀을 열어 봤다.
눈동자조차도 그 특이한 신체 조직이기에 칼날도 안 박히고 충격에 터지지도 않는다는 몬스터 고무쇠, 그 눈동자도 푹 꺼진 채로 마른 가죽 주머니 꼴이었다.
‘너 정말…… 이 이상한 물 뒤집어쓰고 피가 말라 죽은 거냐?’
고무쇠는 대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