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39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39)
그 시작은 망상이었다.
사기를 치던 연금술사의 천칭, 그것을 보는 순간부터 어린 투란의 마음에 망상의 씨앗이 심어진 듯했다. 투박한 천칭은 그 망상을 어떻게든 실현하고픈 아이의 손장난에서 태어났다.
그렇게 아이가 원하던 천칭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러나 언젠가 보고 싶고 갖고 싶다고 여긴 보물이었다. 투란이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늘 바라보던 보석까지 박힌, 그런 천칭이었다.
그래서 투란은 늘 그런 천칭을 상상해 왔다.
공허가 심연의 나선을 움켜쥐며, 톱니바퀴 뚜껑에 금이 갔다.
하지만 이 금은 단단하게 조여진 톱니바퀴의 원반을 파괴하지 않았다.
원반의 금간 틈새로 아주 작은 새로운 원이 톱니가 서린 테를 굴리며 나타났다. 작은 톱니바퀴가 큰 톱니바퀴의 안에서 잔뜩 나타나 맞물린 꼴이었다.
갈라진 금은 점차 커졌고, 작은 톱니바퀴가 끊임없이 맞물리며 수를 늘려서 그 틈새를 메우고 큰 톱니바퀴의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섬광처럼 스쳐 가는 빠른 변화인 듯도 했고, 아주 느리게 한 점 한 점을 찍어 가며 하나씩 생겨난 듯도 했다.
어느 쪽이든 변화는 이뤄졌고, 투란은 이를 ‘알았다’.
곧 마개로 막힌 듯, 뚜껑이 덮인 듯해서 새카만 테로만 보이던 심연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공허가 그 속에서 함께 울어대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일렁거림에 박자를 맞추듯, 투란에게 그 존재를 명시하려는 듯이.
‘천칭!’
자연스럽게 그리고 보다 분명하게 투란은 간절하게, 소망하던 천칭을 상상했다. 흙장난으로 만들고 땅바닥에 그려 가며 엿들었던, 진정한 연금술사의 천칭을 몇 배나 화려하게 꾸며 놓은 듯했던 형상을 상상했다.
그런 투란의 기억 깊은 곳에서, 다시 하나의 목소리가 울렸다.
“문장을 믿어라…….”
“……기적을 일으켜 줄 거야.”
‘부탁해!’
투란의 염원이 훨씬 더 강해졌다.
* * *
시커먼 빛을 띤 달걀 모양의 벽이 스산하게 일렁였다.
그 중심에는 비스듬히 몸을 뒤로 기울인 채로 허공에 뜬 듯한 모습의 투란이 있었다. 투란의 살갗은 달걀처럼 빗어진 벽보다 훨씬 짙은 검은색이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이 살갗에서 반사된 빛이 달걀 모양의 벽을 그려낸다고 여길 수도 있었다.
주변을 휩쓸며 뒤틀던 허무의 파동은 이제 달걀 모양의 벽, 그 껍질의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파동은 껍질에 부딪치고 되돌아가 투란의 몸을 두들겼다.
새까맣게 짙어진 살갗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마치 투란이 균열을 일으키며 쪼개질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균열의 틈새로 하얀 빛이 배어 나와 회색의 자취를 남기며 사라져, 투란이 산산조각 나는 일은 없었다. 대신 투란의 몸은 회색으로 다시 채색되는 것처럼 보였다.
새카만 껍질이 부서지고, 그 자리를 회색의 거친 살갗이 대신하는 듯이.
색이 바뀌면서 투란을 중심에 뒀던 달걀 껍질도 서서히 사라져 갔다.
달아오른 석쇠 위에 떨어진 물방울이 증발하듯, 시커먼 빛의 껍질이 사라지고 나서 투란의 몸은 허공에서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주변의 뒤틀림도 정리되어 갔다.
서서히…….
* * *
작은 티끌이 빛나며 흩어졌다.
낡고 커다랗던 톱니가 완전히 부서지듯 흩어지며 공허와 어우러지듯 자취를 감췄다. 그 자리는 비워지지 않았다. 작고 반짝이는 새로운 톱니가 끊임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보기만 해도 현란하고 정교한 느낌으로 그 자리를 채웠다.
작은 조각들이 모여, 커다란 큰 것 하나를 대신하는 형세였다.
그리고 선명하게 두 흐름으로 느껴지는 심연의 나선이 움직였다.
새로운 뚜껑, 톱니바퀴의 마개가 빛의 잔영을 남기며 솟구쳤다.
바닥이자 바탕인 심연으로부터 기둥처럼 천칭의 축이 맹렬하게 뻗어 나오는 것에 밀려난 듯이.
공허가 광활하게 퍼져 나갔다.
새로운 지주(支柱)를 지켜보듯, 공허는 풍경 전체를 광대하게 변화시키며 물들여 갔다.
‘으큭!’
투란이 그 광활함에 당황하거나 말거나, ‘공허’가 천칭의 축이 뻗어 나오는 것에 질 수 없다는 듯이 퍼졌다. 그러나 투란은 이 ‘공허’로부터 여린 힘을 느낄 수 있었고, 천칭의 새로운 형상에 집중하며 버틸 수 있었다.
‘두 가닥……!’
무엇보다 먼저 투란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심연 속으로 파고든 공허의 자취, 그 엇갈림에 의해 형성되는 심연의 나선이 두 줄기라는 점이었다.
안에서 밖으로 휘돌아 나오는 한 가닥, 밖에서 안으로 휘감아 들어가는 한 가닥.
천칭의 축, 그 안팎을 제각각 더듬으며 함께 축을 구성하는 듯한 나선의 두 줄기 흐름이었다.
‘톱니…… 수레바퀴? 동그라미…….’
그렇게 구성되는 천칭의 축, 천칭의 형상은 모두 작은 톱니끼리 무수히 맞물리며 형성되고 있었다. 투란은 이를 섬세하게 느껴지고 분명하게 알 수 있었지만 조그만 거리를 두고 보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저 매끄러운 돌처럼, 쇠를 녹여 부은 기둥처럼 착각할 수도 있었다.
이런 축의 정상, 원반이 부드러운 느낌으로 형태를 바꾸며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는 듯이 멈췄다. 투란에게는 마치 저 심연을 덮기 위해 잠깐 딴 모습을 취한 것뿐이고, 이제야 제대로 된 자기 형상을 찾는다는 것처럼 느껴지는 변화였다.
그 변화는 곧 천칭의 축으로 번져 갔다.
우와아아아아!
소리 없이, 절규하듯이 비명을 지르듯이 투란은 즐거움을 터뜨렸다.
‘공허’는 메아리도 돌려주지 않고 이를 즐거움을 모조리 삼켜 버렸다.
하나 투란은 문장의 풍경 속에 자리 잡은 새로운 천칭을 보며 더 짙은 기쁨을 뿜어낼 뿐이었다.
천칭의 중심에는 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붉고 푸르고 노란, 반짝이는 보석 빛으로 투란이 상상해 본 적이 없는 현란하고 정교한 무늬를 띰ㄴ 알이었다. 더 이상 달걀처럼 보이지 않는, 그러나 무엇인가의 알이란 점은 분명히 느껴지게 하는 모양이었다.
그 아래로 화려한 보석의 광채가 흘러내려 가며, 언제라도 저울 손을 뻗어 낼 수 있는 두툼한 조각 장식품이 축을 따라 이어졌다. 모두 정교하고 섬세한 공예품처럼, 진짜 연금술사의 천칭 중에서도 마법까지 곁들여 만들어졌다는 말로만 듣던 최고급품처럼 보였다.
그 정상, 알의 위에 놓인 접시, 뚜껑이 수평으로 두 쪽 나면서 하나는 위로 하나는 아래로 자리 잡았다.
위로 간 톱니바퀴 뚜껑은 큰 원형 테 속에 연이어 작은 원형 테를 둔 것처럼 구분되더니, 작은 원들이 하나씩 중앙에서 위로 올라가며 원뿔의 형태를 갖췄다. 그 맨 아래 놓인 큰 테로부터 아지랑이처럼 살랑이는 바람결이 훤히 보이는 선을 만들며 아래편으로 이어졌고, 투란은 자세히 볼 수 있었기에 그것이 모두 티끌처럼 작은 톱니바퀴의 맞물린 형상인 것을 알았다.
그렇게 이어져 내려온 바람결이 아래쪽에 자리 잡은 반쪽 원형 접시 속으로 이어지면서 축의 중심을 타고 올라온 심연의 흐름에 반응하며 맹렬히 돌고 있었다. 이 축 안의 흐름은 곧 축의 바깥쪽으로 이어지며 완전한 하나의 흐름처럼 억세고 굳건하게 축의 형상을 이루기도 했다.
‘아, 그렇구나.’
본능처럼 투란은 이 형상에 담긴 의미를 깨쳤다.
그리고 보석의 알이 뭔가도 분명하게 느끼며 알았다.
그 안에 악마의 심장이 담겨 있었다.
‘공허’에 감싸여 저 심연 속에서도 보호받으며, 천칭의 새로운 형상과 함께 다시 투란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투란은 보석 알의 위에 놓인 받침 접시를 바라보았고, 주의를 기울이자 변화하는 그 형상을 즐겼다.
사라락, 하는 부드러운 흐름이 새로운 문장의 힘을 절실하게 전해 주었다. 그 감각 속에서 투란은 많은 것을 더 알고 느끼며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
* * *
부스럭.
몸을 움직이고, 눈을 뜨려고 하자 바로 살갗이 이지러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도 투란은 입을 꾹 다문 채로 눈을 떴다.
처음에는 뿌옇게 보이던 것이 바로 선명해졌다.
회색의 엷은 껍질, 눈동자 위에 얹어 놔도 빛을 가리지 못하는 꺼풀이 깜박임에 으스러져 사라지고 없었다.
천천히 한 팔로 몸을 지탱하며 투란은 일단 몸을 비스듬히 일으켰다.
찰랑거림이 주변에서 맑은 소리를 냈다.
몸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이 튀고 있었다.
‘이 녀석!’
그냥 물방울이 아닌, 고무쇠를 담그고 있던 얕은 물웅덩이의 물방울처럼 생긴 정체불명의 괴물이다!
얼핏 둘러봐도 주변이 뭔가 허물어지고 파헤쳐지고 밀려나고 당겨진 꼴이라서, 도저히 정신 줄 놓고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던 순간부터 같은 자리에 있었다고 보기 힘들었다.
자고 일어나니 전혀 다른 집에 가 있는 느낌이다.
한데 이 물방울처럼 생긴 물방울일리가 없는 녀석은 여전히 투란의 주변에, 작게 파인 구덩이 속을 채우며 새로 얕은 물웅덩이를 꾸미고 있었다. 게다가 그 양이 아주 조금씩 늘어난다!
‘이게 어디서 흘러오는 거였어?’
주변의 지형이 변하기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이었다.
투란은 멍하니 있다가 우선 눈부터 비볐다.
미묘하게 몸을 덮고 있던 얇디얇은 회색의 껍질이 손등에 묻어났고, 손등과 팔뚝 언저리의 껍질도 비비는 동작에 살짝 뜨인 것처럼 보였다.
의아함 속에서 투란의 눈길이 자신의 몸을 훑었다.
가슴 아래, 배, 다리 부분까지 모두 얇은 회색의 표피에 덮여 있었다.
너무 얇아서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이는 투란이 잠을 자기 위해 시도했던 짓과 닮아 있었다. 악마의 심장으로 이 혹독한 환경 속에서 자신을 지켜 줄 포대를 만든 짓과.
하지만 이 회색의 표피는 뭔가 사람의 살갗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어느 정도는 악마의 심장도 엮인 듯했다.
통, 통.
물방울이 튀면서 투란의 손등으로 꽂혔다.
조금 화끈하고 조금 시린 느낌이 바로 찾아왔다.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던 투란의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물방울이 꽂힌 자리, 새끼손톱보다 작은 부위가 붉게 달아오르며 피가 뭉쳐 살갗에서 배어 나오려 하잖는가!
투란의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고, 바로 손등으로 넝쿨 가닥이 불끈 솟았다.
악마의 심장이 두근대며 손의 뼈와 살 틈새에 생성되었고, 바로 피를 마시고 그 자리에 꽂힌 물방울을 마셔 버렸다.
‘어……?’
반사적으로 본능적으로 저지르고 난 후에야 투란은 깨달았다.
회색 껍질에 덮인 몸, 순수한 사람의 몸이며 아직 악마의 심장이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지 않았다!
그 대신에 느껴지는 여린 파문.
통, 토토통.
점점 거세게 튀는 물방울 소리가 바로 투란이 해야 할 일을 정해 줬다.
“흐으읍!”
힘을 주고 기합을 넣는 듯, 투란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딱히 의미 있는 동작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의지, 그 원하는 바는 명확하게 표현된 셈이었고 가슴속에서 악마의 심장이 제대로 자리 잡으며 뛰기 시작했다. 사람의 심장을 먹은, 투란의 심장을 먹고 강해진 악마의 심장이 핏줄을 따라, 힘줄을 따라, 뇌수의 섬세한 신경망을 따라 굵고 가늘고 정교한 넝쿨의 가닥, 실그물을 퍼뜨렸다.
그 격렬한 힘은 투란이 잠깐 몸이 터지는가 할 정도로 사나웠다.
그리고 투란의 온몸을 덮으며 퍼져 나간 넝쿨 껍질, 통통 튀며 갑자기 나타난 듯한 사람의 피와 살을 담가 먹으려던 물방울이 물결이 되어 투란의 몸을 덮었다.
그다음에 튀는 물방울의 꼴은 마치 ‘이게 아냐! 여기서 도망쳐야 해!’ 하는 비명을 지르는 듯했지만, 가늘게 이미 주변을 장악하듯 뻗어 나간 투명한 넝쿨의 실 가닥과 그물질에 걸려 들이마셔지고 말았다.
투란은 촉촉하게 젖은 채로 천천히 일어섰다.
이상한 일이었다.
가늘고 쇠약했던 몸이 어느새 기분 좋은, 배가 부른 듯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팔다리도 굳이 더 힘줄을 자아내지 않아도 될 정도로 튼튼하게 느껴졌다. 이 물방울 괴물이 좋은 양분일까?
분명히 아니었다.
이건 여전히 삼키고 마셔 봐야 그냥 물이다!
한데 투란의 몸 상태는 이전과 다르게 깔끔하게 정리된 것처럼, 살도 오르고 형태도 단단해져 있었다.
촤악, 발을 움직이자 역시나 착각이 아니란 듯이 다리에 힘이 탱탱하게 느껴졌고, 차여 나간 발아래에는 졸졸 흘러오는 새로운 물결이 채워졌다.
‘이거 대체 어디서 오는 거지?’
이미 몸을 축일만큼 축였고, 굳이 물로 배를 채우지 않아도 되는 묘한 상태였다.
‘이게 괴물이라면…….’
이제는 달라진 주변을 점검하고, 변해 버린 ‘천칭의 문장’이 과연 소원대로 되었는가도 확인해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