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427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423)
끼익, 돌과 쇠가 섞인 경첩이 작게 속삭인 듯한 울림을 토해 냈다.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거리의 모습은 한산한 듯하면서도 오가는 사람이 여기저기에서 움직이며 채워진 듯했다. 멀뚱히 그 거리를 바라보다가 불쑥 멜란드가 중얼거렸다.
“누나, 이제 치마 입어 볼…… 쿠엑?”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멜란드는 채인 엉덩이를 부여잡고 깡충깡충 앞으로 뛰었다.
그렇게 멜란드를 걷어찬 시알라가 따끔하게 한마디 한다.
“편한 거 입을 거야. 간섭하지 마!”
페란드와 제란드는 누나와 막내의 그런 모습에 쓴웃음을 멀리 보이는 거리를 둘러봤다. 간판이 길가에 자리 잡은 채로 옷가게로 사람을 유혹하는 풍경이었다.
그 유혹이 이끌린 듯, 옷가게로 들어가는 몇몇의 모습은 지금 네 남매나 투란과 비슷했다. 무장을 하고, 나름대로 싸울 준비가 된 차림새…….
옷가게에서 나오는 몇몇은 약간 부푼 짐을 짊어진 가벼운 차림새였고, 싸우기보다는 전부 내려놓고 쉬러 가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투란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한다.
“저러고 다녀도 괜찮은 곳인가?”
엉덩이를 문지르던 멜란드가 돌아서서 누나를 향해 입술을 삐죽이고는, 투란을 향해 대꾸한다.
“당연히 저러고 다녀도 괜찮겠지! 위험한데 저럴 리가 없잖아.”
“흠…….”
투란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열린 문턱을 둘러봤다.
창구의 마법사가 말한 대로 위층에서 바로 거리를 향해 나가는 문이었다. 계단이 거리를 향해 뻗어 있었고, 아래쪽 문과 맞닿은 통로와 이어져 있었다. 이 계단을 내려가 저 길로 들어서면 바로 거리의 풍경에 담기는 셈이었다.
아래층의 문은 이미 활짝 열렸고, 오가는 사람이 여럿 보였다.
잠시 그 풍경 속의 사람들을 흘깃거리다가 투란이 아주 낮게 속삭였다.
“그냥 무장 생성으로 저런 차림새를 하면…… 안 될까?”
“안 돼.”
딱 부러지는 소리로 시알라가 답했다.
답과 함께 시알라는 살짝 손을 들어 올렸고, 그 손에 은은하게 맺힌 빛의 고리를 통해서 투란도 그 까닭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이제부터 저 거리에 섞여 들어가, 저 거리의 사람과 만나고 이야기하고, 거래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각인’을 시작해야 했다. 미묘하게 지난 일을 왜곡해 놓은 지금, 은퇴하려는 헌터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남겨 둬야 했다. 그럼으로서 스쳐 간 사람들이 지금 일행의 모습을 새로 기억하고 입에 담을 경우, ‘아, 그 일행. 은퇴하려고 한다던데?’라는 말을 꺼냄으로써 대마법 로열 가든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옷가게에 들러서 옷을 사야 하는 것이고…… 루케인을 통해 홀시딘이 미리 말을 해 둔 것이다. 이제부터 새로운 신분, 살짝 뒤틀린 과거를 고정하기 위한 작업을 해야 하는 셈이었다.
“흠…… 그럼, 어느 가게로 가지? 옷가게라더니…….”
투란은 낯선 거리, 낯선 풍경 속으로 발 딛는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면서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시 보니 간판의 글자를 읽을 수는 있는데, 거기 쓰인 말은 너무 낯설고 이상하잖은가.
고가구입(高價購入), 저가판매(低價販賣)라든가…… 무기 갑옷류 고가매입(高價買入), 일상복 배낭 저가매매(低價賣買) 라든가…… 옷가게라면서 뭔가 연금술사의 냄새가 풀풀 피어나는 문자를 잔뜩 써 놨다.
“옷만 파는 게 아닌가 봐?”
“응? 무슨 소리야, 투란?”
갸웃하면서 제란드가 곁에서 물었다.
투란은 잠깐 마법사가 한 말을 되새기면서 말한다.
“옷가게라고 알려 줬잖아. 이 문으로 나서서 가면 옷가게가 있을 거라고. 그런데…… 무기도 사들이고 배낭도 판다는 거잖아?”
“옷을 사고 처분할 수 있는 가게라고 했지. 장비를 갖춘 헌터가 찾아가는 가게라면 당연히 장비도 처분할 수 있고. 딱히 옷만 파는 곳이라고는 안 했어.”
“에, 엑?”
투란이 제란드의 대답에 놀란 시늉을 했다.
제란드는 다시 ‘왜 놀라?’ 하는 표정을 지었고, 페란드가 말한다.
“헌터를 상대로 한 잡화점이야, 흔히 말하는 헌터 숍. 뭐, 이쪽은 장비를 파는 것보다는 사들이는 쪽이 많은 방향인 모양이네. 아무래도 알드바인에 들어서는 문과 나서는 문이 따로 운영되는 탓인 모양인데?”
“나서는 문?”
의아해하며 투란이 다시 둘러봤다.
그러고 보니 아래층 문으로 들어오는 이들은 딱히 먼 곳을 가기 위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저 상아탑의 창구에 뭔가 볼일이 있는 것처럼 가볍게 들러 보는 듯했고, 다시 나오는 이들 중에는 손에 전표를 들고 세는 경우가 조금씩 보였다. 그중에서 투란과 네 남매의 경우처럼 무장한 차림새를 한 이들은 여행에 시달린 모습이 또렷했고, 휴식을 향해 걸어 나가는 태도가 분명히 엿보였다.
―아래층은 일상적으로 열려 있고, 이 위쪽 층부터는 조금 복잡한 용무를 보는 일들이 들락이는 모양이다. 위쪽 층의 문도 여기 한 곳이 아니야. 계단과 이어진 테라스의 복도를 봐라. 내려가는 계단도, 문도 많잖아.
투란은 드라고니아의 지적에 문턱을 넘어서면서 좌우를 둘러봤다.
이 문에서 바로 보이는 계단 말고도 빙빙 돌거나 딱딱 꺾이는 모습의 계단이 여러 곳에서 보였다. 더불어 이 문과 나란히 늘어선 문들이 양쪽에 멀찍하니 여럿 보이기도 했다.
상아탑에서 알드바인이 거리로 나가는 길이 아주 여러 갈래인 셈이었다.
“헤에…… 우리 계단은 쭉 뻗었는데, 저쪽은 다 꼬여 있네?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가는 길에 따라 굉장히 다른 걸 볼 것 같은데?”
흥미로워졌다는 듯, 투란이 중얼거렸다.
시알라와 세 형제도 그 말에 이리저리 멀리 있는 계단을 둘러보면서, 그 계단 아래쪽의 풍경이 이쪽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살피면서 갸웃거렸다. 정말로 어느 쪽으로 내려가서 거리에 들어서는가에 따라서 굉장히 다른 알드바인의 모습을 볼 것 같잖은가?
하지만 그 선택은 곧바로 로열 클래스의 징표가 미묘하게 울리면서 정해 버렸다.
여관의 거리, 잡화점이 가득하고, 알드바인의 소식이 가장 빠른 곳. 적응하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을 가장 빨리 습득할 수 있는 곳.
홀시딘이 보낸 간결하게 축약된 메시지였다.
바로 앞의 계단으로 내려가라는, 그래서 이쪽으로 보냈다는 말이었다.
픽, 투란이 웃었고 네 남매도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은 마법사의 인도를 따라야 할 때인 듯했다.
* * *
“이 녀석들, 조금만 한눈팔면 딴 데로 새겠구먼!”
홀시딘은 투덜거리면서 의자에 몸을 던지듯이 앉혔다.
마스터의 방, 흔히 집무실이라고 불리는 곳에는 책상과 의자, 책장이 자리를 잡은 채였고 홀시딘은 그 책상 위로 손을 뻗어 파릇하니 반짝이는 수정판을 두드리고 그 반짝임을 확인한 다음 큰 소리로 말한다.
“마스터 케이라에게 연락이 가능한가?”
수정판이 울리면서 곧바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대답한다.
“예. 하루에 세 번, 정기적인 연락을 하고 계십니다. 그때 이쪽에서 말을 전할 수 있습니다.”
잠깐 낯을 찌푸린 다음, 홀시딘이 다시 말한다.
“케이라, 지금 정기 순찰을 하러 간 거지?”
“예. 지난해부터, 정기 순찰은 모두 마스터 케이라께서 맡으셨으니까요. 마스터 홀시딘께서 맡고 계셨던 곳까지 돌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린다고, 그래서 지난해보다 조금 일찍 순찰을 시작하셨고 조금 늦게 돌아오실 걸로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수정판의 대답을 들으면서 홀시딘은 책상 한쪽에 놓인 책을 당겨 펼쳤다.
책갈피가 꽂혀 있는 페이지가 바로 열렸고, 두 페이지가 하나로 엮인 지도가 바로 보였다. 지도를 눈길로 짚어 가면서 홀시딘이 말한다.
“순서는 몰튼노트(Motennaute)부터 시작되겠지?”
“예.”
살짝 의아해하는 말투로 수정판의 짧은 확인이 울려 나왔고, 홀시딘은 지도를 주욱 짚어 가면서 물음을 잇는다.
“그다음에 그레이우드(Graywood) 지역이고?”
“예, 그레이우드, 쟈카라 산림, 파센 동굴을 거쳐서 두 왕국, 세트반과 쥬레인의 교차 지역을 돌고 돌아오실 예정입니다.”
수정판은 홀시딘의 의도를 어느 정도 알았다는 듯, 마스터 케이라의 일정에 대해서 조금 구체적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그 대답은 홀시딘을 의아하게 했다.
“교차 지역? 세트반이랑 쥬레인 쪽에서 요청이라도 들어왔어?”
보통 때라면 알드바인의 상아탑에서 신경 쓸 일이 없는 곳이었다.
수정판이 반짝이면서 대답이 나온다.
“고블린 호드 때문에 두 왕국이 교차 지역에서 주둔 군단을 후퇴시켰습니다. 당장 국경 성벽부터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병력이 모자란다고 말이지요.”
“병력이 모자라? 거기서 병력 뺀다고 뭐가 되냐?”
짜증을 토하듯이 홀시딘이 말했다.
“흩어진 고블린 호드의 팩들이 예상보다 강력할 거라고, 두 왕국에 소문이 나돈 모양입니다.”
조심스러운 말투로 수정판에서 대꾸가 나왔다.
홀시딘은 한숨을 쉬고 말았다.
“겁먹었다는 소리로군. 우리 쪽에 연락을 했나? 아니면 케이라가 알아서 그쪽으로 가겠다고 통보했나?”
“마스터 케이라께서 먼저 통보하셨습니다.”
“쯧! 그럼, 교차 지역에 대해서 전혀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할 거잖아! 케이라가 왜 그랬지?”
홀시딘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세트반과 쥬레인, 두 왕국의 교차 지역에 대해 떠올리며 물었다.
라비엔을 지나, 경계 도시와 맞닿은 교차 지역에는 이런저런 마수와 몬스터가 쉴 새 없이 갈기 산맥을 오가고 있었다. 사람이고 짐승이고 모조리 자신들의 먹이로 삼았고, 인간의 국경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채로!
거기서 뭔가 국경 안으로 뛰어들게 되면 나라가 앓을 정도로 골 아픈 일이 생기기 일쑤였고, 그 때문에 세트반과 쥬레인에서는 거기서 뭐가 튀어나올지에 대해 미리 손을 써서 대비하기 위해 사냥 파티를 대규모로 키운 듯한 군단을 주둔시켰다. 두 왕국에서 번갈아 가면서, 그 규모를 조절하기로 약속한 까닭은 군단을 유지하는 비용에 대해 부담을 나눈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블린 호드가 들이닥쳤고, 그 전투는 예상보다 큰 피해를 남겼다.
그 때문에 두 왕국은 방어선을 직접 관리하는 국경까지 물리면서 병력을 보강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계 도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헌터들, 그쪽에 교역로를 둔 알드바인에서 그 지역의 부담을 떠맡아야 하는 상황이 맞기는 했다. 하지만 그 부담을 떠넘기기 위해 두 왕국이 알드바인에 먼저 말을 꺼냈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지원을 약속했겠지만, 알드바인의 마스터가 먼저 말을 꺼냈다면 그냥 감사라는 말 한마디로 끝이다!
홀시딘은 그런 식으로, 전혀 감사할 생각 없이 말로 때우려는 꼴이 보기 싫은 셈이었다. 수정판에서 이런 홀시딘의 기분을 안다는 듯한 대답이 조심스럽게 울려 나온다.
“어, 실은…… 마스터 홀시딘께서 안식(安息)의 해를 맞이하셨다니까, 마스터 케이라께서 홀로 알드바인의 대표가 될 수 있겠느냐고…….”
“앙? 뭐야, 케이라가 그럼…….”
“예, 조금은 마법을 과시할 필요가 있으시다고 전에 마스터 홀시딘께서 알려 주신 광역 화염 마법으로 교차 지역에 불을 질러 놓으시겠다고 가셨습니다.”
“야, 그러면 나중에 엄청 시끄러울 텐데?”
“시끄럽더라도, 다시 알드바인에 교역세를 물리겠다느니 관리를 돕기 위한 귀족을 파견하겠다느니 하는 소리는 나오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소리가 또 나왔어? 아니, 내가 죽은 것도 아니고 한두 해 안식한다는데 그딴 소리를 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홀시딘이 수정판을 노려봤다.
대답하는 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미 이런 홀시딘의 분위기를 안다는 듯한 소리가 수정판에서 울려 나온다.
“어, 그게…… 마스터 홀시딘의 연세를 생각하면, 이쯤에서 마법의 오의(奧義)에 푹 빠져서 다시는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견이 세트반 왕국에서 나온 모양입니다. 음, 무엇보다 마스터 케이라께서 지난해에 홀로 순찰을 도셨으니까요. 이쯤에서 완전히 인수인계하시고 은퇴해서 알드바인을 떠나실 수도 있다는 소문이 꽤 돌았다더군요.”
홀시딘은 벅벅, 갈라진 머리카락의 틈새 살갗을 긁어 댔다.
파나틱 플레임, 그런 별명으로 불리는 미친 마도사인 홀시딘이 물러난다면 그 후계인 케이라와 교섭, 거래를 하게 될 테니 미리부터 주도권을 잡아가겠다는 왕국의 의도가 훤히 드러난 이야기였다. 케이라는 냉정하게, 한 해를 아주 바쁘고 시끄럽게 만들어서 그 의도를 꺾어 버리겠다고 나선 것이고.
“그렇게 간섭하고 싶으면서 도시 세울 때는 왜 털끝만큼도 돕질 않았냐고. 이봐, 케이라에게 당장 연락해. 파센 동굴 쪽으로 직행하라고. 몰튼노트부터, 쟈카라 산림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
“예?”
수정판에서 꽤 놀란 듯, 짧게 되묻는 소리가 나왔다.
홀시딘이 홀로 머무는 방을 둘러보며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히죽 웃음을 지었고…….
“지도에서 위험 표기를 지워 버릴 거야.”
수정판 너머에서 전혀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내뱉었다.
은은하게 로열 가든의 징표가 홀시딘의 팔뚝에서 일렁이며 투란 일행이 한창 쇼핑 중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