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453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449)
오우거의 피가 주변을 온통 젖게 했다.
뿔이 뽑혀 나온 자리에서 터져 나오는 핏줄기는 멈출 줄을 몰랐고, 핏줄기 속에서 생성되어 뿜어지는 넝쿨은 끌어당긴 나무의 잔해로 주변을 휘감으며 더 두터운 울타리를 꾸며나갔다.
그 울타리 안이 완연히 오우거의 핏빛이 가득해진 셈이었다.
오우거의 피를 굳이 따로 째서 받을 필요가 없을 정도였고, 피로 안개가 피어난다고 보일 지경이었다.
그 핏빛 위로 서서히 둥근 고리 무늬가 번져나갔다.
고리는 미세한 톱니바퀴 같은 가시가 돋아난 채였고, 서로 맞물린 채로 빙글거리면서 핏빛이 번져나간 모든 자리를 채우듯이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오우거의 핏줄기 속에서 만들어진 넝쿨이 여리게 빛나며 투명하게 스러지기 시작했고…… 격렬하게 발버둥치면서 주먹질, 발길질과 더불어 박치기를 하던 오우거의 몸이 멈춰져갔다.
격노가 가득했던 오우거의 포효가 멎었고, 그 팔다리도 힘을 잃은 듯이 느슨하게 늘어져갔다. 그래도 오우거는 자신이 공격하던 대상에 기댄 채로 바닥에 쓰러질 수 없다는 듯이 버티려 했다.
그 마지막 숨결은 투명하게 피어오르는 잔해와 함께 멎었고, 넝쿨이 모두 사라지면서 끌려왔던 나무 잔해가 그대로 떨궈지면서 쌓였다. 제대로 쌓이지 못해 우르르 무너지는 나무토막, 그대로 얽힌 채 버티는 나뭇가지…… 울타리는 그럭저럭 그 윤곽을 유지하려는 듯이 보였다.
그 중심에 있던 오우거의 형체는 거뭇한 색채를 잃어가면서 회색으로 변한 껍질을 두르고, 살갗 또한 빛바랜 채로 허물어지고 있었다. 기대거나 어쩌거나 하기 이전에 몸을 버텨주는 힘줄, 뼈대가 모두 사라진 듯…… 비어버린 가죽만 남은 것처럼 바람결에 흔들리는 넝마처럼!
이렇게 무쇠뿔 오우거가 변하는 풍경에 맞추듯, 검은 바위를 두른 마마 트롤의 형상도 변해갔다. 서서히 트롤의 형상이 사라지고, 그저 검은 바위―결정의 덩어리로 변해가며 크게 부풀었던 모습에서 점차 오그라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교차되어 꽂힌 오우거의 뿔…… 원래의 색채도, 감겨 있던 넝쿨의 흔적도 모두 잃어버린 두 뿔 틈새로 시커먼 형상이 사람의 몰골을 흉내 내서 앉아 있는 듯한 모습만 남았다.
시커먼 색채는 오우거 뿔이 변한 것을 따르듯이 서서히 흐려졌고, 사람이 살색으로 변해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입에서 낮게 투덜대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이 숲…… 확 불질러 버릴까…… 지금 불 지르면 깡그리 태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차피…… 도로 자라는 품종이라니까, 아예 한번 시원하게 몽땅 태워봐?”
누구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참을 수 없어서 되는대로 내뱉는 듯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런 투란의 중얼거림에 드라고니아는 소리 없이, 지체하지 않고 바로 대꾸를 하고 있었다.
―투란, 정신 온전하냐? 숲은 왜 불태우겠다는 거야?
‘쳇.’
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투란은 ‘천칭’의 풍경 속으로 마음을 집중했다.
그 풍경 속에 새로 담긴 오우거가 곧바로 투란에게 느껴졌고…….
* * *
무쇠뿔 오우거는 잔뜩 웅크린 형상으로 보였다.
투명한 보이드의 껍질에 싸인 채로, 무릎을 가슴팍을 끌어당겨 한껏 두 팔로 감싼 꼴을 하고 두 가닥의 뿔은 거침없이 뻗어냈지만 숙인 머리를 무릎 사이로 파묻으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미쳐 날뛰던 놈이 뭘 주눅 든 꼴이야!”
으르렁거리는 듯한 투란이 투덜거림이 풍경 속으로 울려 퍼졌다.
이에 응하듯, 별빛무리가 찰랑이면서 드라고니아의 굵고 억센 말이 큰 메아리처럼 되돌아온다.
“그건 파괴하려던 짓이 아니니까. 그저 되찾고 싶어하고 돌아가고 싶어 하던 몸짓이었잖아. 결과적으로 때려 부수는 꼴이었기는 하지만…….”
투란은 이 소리에 뭐라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투란은 아련하게 느껴지는 오우거의 감각을 향해 마음을 뻗었다.
보이드 안으로, 오우거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더듬듯이…….
그리고 곧바로 투란은 뼛속으로 번져가는 시리고 아린 느낌을 깨달았고, 자신이 손을 펼쳐보려 했다.
* * *
‘넝쿨?’
손바닥 사이에서 씨앗에서 터져 나온 듯한 넝쿨이 실 가닥처럼 번져갔다.
‘악마의 심장’에서 나온 줄기가 아니었다.
오우거의 살갗, 그 속에서 나온 넝쿨이었고 거뭇한 빛깔을 띤 채로 살갗에 껍질을 씌우고 있었다. 어느 틈엔가 투란의 손은 손가락 끝마디만을 맨살로 남긴 채 두텁고 단단한 껍질에 휘감긴…… 딱 끝마디가 없는 건틀릿을 낀 꼴이 되었다.
‘시리잖아.’
오우거의 손 형상을 보면서 투란은 뼛속으로 밀려오는 아련함, 여리면서도 시리고 아픈 느낌을 알아차렸다. 뭔가가 새어 나갔고, 반드시 채워져 있어야 할 부분이 텅 비어있는 어딘가 깊숙이 저미는 감각이었다.
그 빈자리를 어떻게든 채워 넣고 싶게 하는…….
넝쿨 끝자락이 꿈틀거렸고 손이 저절로 숲을 향해 뻗어나갈 듯했다.
그러나 투란은 빠득, 이를 갈면서 주먹을 꽉 쥔 채로 버텼다.
‘저딴 숲은 필요 없어!’
자신에게 되뇌는 소리는 가슴을 울렸고, 심장 언저리 어딘가를 쿡쿡 쑤시는 듯했다. 마치 자신을 향해 자신이 칼을 꽂고 슬슬 저며보는 것처럼!
투란은 보다 더 세게 주먹을 쥐면서 손을 내려다보며 ‘필요 없다니까!’라며 되뇌었다. 그 소리에 응하는 듯한 작은 이슬이 맺힌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사람의 크기를 유지하는 탓인가, 이슬은 꽤 빠르게 손을 감아갔다.
‘응? 이거…… 휘드라곤?’
이슬이 길게 늘어지면서 힘이 잔뜩 들어간 주먹을 느슨하게 했고, 안팎으로 흐르면서 가늘고 긴 줄기를 그려냈다. 휘드라곤, 정령수(精靈獸)를 투란이 다시 본 것은 나름대로 오랜만이었다. 역병의 숲, 그 수해를 벗어나고서는 거의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애초에 엘레멘탈 링을 통해서 네 가지 속성의 스피릿 아티팩트―정령기(精靈機)라 불리는 유사자아(類似自我)를 지닌 정령수의 모방품을 얻은 이후로는 휘드라곤을 깊이 감춰둔 채였다. 반쯤 잊고 있을 지경이었고, 휘드라곤은 물의 정령기인 아쿠아(Aqua)를 불러낼 때 그 속에서 제멋대로 가끔 휘젓고 다니는 흔적만 살짝 드러낼 뿐이었다. 정령의 감각이 필요할 때다 싶으면, 간혹 팔 깊은 곳에서 저절로 맥동하며 그 힘을 빌려주기는 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휘드라곤이 물줄기를 드러내는 상황은 오랜만이었고, 투란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즉각 아쿠아가 휘드라곤을 덮듯이 피어나면서…… 좀 크고 두터운 물의 장갑을 이뤄냈고 휘드라곤은 그런 아쿠아 속에서 꿈틀거리며 바로 투란이 팔 깊은 곳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스며왔다. 마치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딘가 안다는 듯!
‘어라?’
투란은 휘드라곤의 갑작스런 출현과 함께, 오우거의 형상 속에서 꿈틀거리던 아리고 시린 느낌이 상당히 잦아드는 것을 겨우 알 수 있었다. 여전히 많이 부족한 듯하지만, 휘드라곤이 뭔가 결여된 것을 채워준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상황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의아해 하다가 투란은 문득 아쿠아의 뒤를 잇듯이 연달아 생성되는 남은 세 가지 스피릿 아티팩트의 기척을 느꼈다. 불의 파이로, 흙의 테라트, 바람의 에어로까지 차례대로 그 힘과 성질을 드러내면서 아쿠아처럼 투란의 주변을 두텁게 맴돌며 덮어주고 있었다.
휘드라곤은 더욱 깊이 투란의 몸, 오우거의 형상 속을 들락거렸고 그때마다 네 가지 속성의 정령기로부터 차오르는 ‘뭔가’를 투란은 알아차렸다.
―흥미롭군. 숲의 정령이 빠져나간 빈자리, 오우거의 정수에 생겨난 여백을 사대속성의 정령으로 메꿀 수가 있다니 말이야. 이런 건 들은 적이 없어.
‘숲의 정령이란 거, 기본인가 근원인가 하는 네 속성이랑 어떻게 연결되는 거야?’
―근원이자 기본이니까 전혀 관계없다고는 못 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세상의 기본이고 근원이니 어쩔 수 없이 관계가 있는 것뿐이고…… 숲의 정령은 숲이 지닌 혼령 같은 거라서 사대 속성의 정령으로 직접 대체할 수는 없을 거야. 지금도 그저 오우거의 본능에 따라 끌어당겨 쓸 수 있는 거는 뭐든지 네 본능이 끌어당겨 채워 넣는 중일걸. 뭐, 덕분에 괴상한 꼴을 보는 셈이라고나 할까?
‘괴상한 거였냐! 쳇.’
―그보다, 홀시딘이 오는 것 같다. 금방 도착할 모양이니, 감추려면 어서 감추는 게 좋을걸.
‘그래…….’
투란은 가만히 자신의 상태를, 오우거의 형상을 살폈다.
뼈와 힘줄, 살갗은 분명히 오우거의 형상이었지만 여전히 두 뿔 사이에 앉아 있기 위해서인가, 반사적으로 이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서인지 체격은 사람인 투란의 몸집 그대로였다.
그 와중에 몸 곳곳에는 무쇠껍질이 미묘하게 넝쿨가닥을 두른 채로 생겨나 있었으니…… 늘 유지하던 반바지 가죽은 몇 번 요동치다가 무쇠껍질로 된 반바지가 되어 있었고, 어깨와 손발 곳곳에도 무쇠껍질이 돋아난 채였다.
머리에는 뿔도 작게 두 가닥 돋은 채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무쇠뿔 오우거의 형상을 꾸민 듯한 몰골로 사람이 앉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그 감각만큼은 분명히 오우거의 것이었고, 무쇠뿔 오우거의 본래 크기에 비하면 아주 작은 몸집이지만 사람보다 몇 배의 힘을 간단히 발휘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한 채였다.
‘좀 나아졌네.’
시리고 아린 느낌이 많이 잦아든 것을 다시 한번 깨달으면서 투란은 꾸물거리고 움직이는 스피릿 아티팩트의 뚜렷한 형상을 재우고 지웠다.
미묘한 열기가 머리 위에 살짝 남았지만 잔잔히 맴돌며 흐려져 가는 바람결을 따라 흩어졌고, 몸에서 굵게 흘러내린 물방울은 얌전한 땅위에 살짝 팬 흔적과 미세하니 고였던 자취만을 남기며 사라졌다.
그 사이에 투란의 손목, 발목에서 살그머니 흘러내린 넝쿨의 가닥은 사라져간 정령의 흔적을 쫓듯이 꾸물거리고 움직이지만…… 투란은 자신을 가라앉히고 진정시키면서 오우거의 본능이 추구하는 갈망을 잠재우느라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그래서 홀시딘이 허공에서 내려와 물을 때까지, 투란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게…… 무슨 열매냐?”
홀시딘은 둥실거리면서 투란의 발아래에 눈길을 주며 묻고 있었다.
주변의 모든 풍경보다도, 홀시딘은 투란의 발아래에 맺힌 어떤 열매가 중요하다는 듯이 묻는 듯했다.
“열매……?”
갑작스런 소리에 투란은 빼꼼히 흔들거리며 늘어뜨린 한쪽 발을 옆으로 비키면서 내려다봤고, 거기에 정말로 이상한 열매 하나가 대롱거리며 매달린 꼴을 확인했다. 얼핏 보기에는 마치 자신의 발아래에서 흘러나간 넝쿨에서 생겨난 듯했지만, 가만 보니 그 넝쿨에 얽힌 채로 투란의 엉덩이 아래에서 빛바랜 뼈처럼 변해버린 무쇠뿔을 휘감으며 새로 번진 다른 넝쿨 줄기에서 생겨난 열매였다.
“어라?”
―응? 이런 게 언제?
드라고니아도 흠칫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
투란은 새삼스럽게 자신의 감각을 더듬어 펼쳤고……
“우어?”
사방에서 몰려드는 듯한 숲의 ‘존재’를 깨달으며 화들짝 놀랐다!
그 놀람 속에서 투란은 자신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를 몸 밖에서 들었으니…….
‘우웩! 왜 내 심장이 발아래에서 뛰어!’
―네 심장 아냐! 공명(共鳴)한 박동(搏動)이다! 열매 안의 심장이…… 오우거잖아!
‘뭐!’
투란이 재빨리 발을 휘저어 올리면서 다시 아래를 내려다봤고, 홀시딘의 목소리가 어딘가 뜨끈하게, 어딘가 사납게 흥분한 낌새를 담아 울려 퍼진다.
“오우거가 맺힌 거냐? 새로 오우거를 불러낸 거야? 아니, 이건 불러낸 것이 아니고 낳는다? 아니지! 열매를 통해 오우거를 생성한다? 재생성? 잠깐, 투란 지금 네 모습은 오우거의 정수를 삼켜서 꾸민 모습 아니었어? 있던 오우거를 삼키고 새로운 오우거를 낳을 열매를 키운 거냐? 어떻게?”
“뭐래요, 이게!”
투란은 점차 흥분해서 둥실거리며 다가오는 홀시딘을 향해 멈추라는 손짓을, 발아래를 가리키는 손짓을 해대면서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열매는 겨우 사람 주먹만 했지만, 그 여린 빛깔 속 깊은 곳에 담긴 작은 형체는 두 가닥 뿔이 독특하며 또렷한 무쇠뿔 오우거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대체 어떻게 된 까닭인지, 마법사도 모르는 듯하고 투란은 물론이고 드라고니아조차 당황하고 있었다.
‘나, 삼켰다고!’
―그래, 네 문장 속에 분명히 있다! 그래, 있어! 괴물 오우거가! 근데, 네 발아래 열매 속에도 있어! 네 심장 박동에 맞춰서 똑같이 심장이 뛰고 있는…… 그거 괴물 아냐! 몬스터가 아니다, 투란!
‘뭐? 뭐라는 거야, 지금?’
―숲…… 숲을 느껴봐, 투란.
투란은 숨을 골랐고, 드라고니아가 급하게 하는 말에 따라서 다시 한번 거대하게 울려오는 숲…… 그 ‘존재’를 느꼈다. 가늘게 땅속을 헤집고, 나무 잔해 틈새로 기어와서 어느 틈엔가 빛바랜 무쇠뿔을 감고 투란에게 닿아 있는 ‘숲’이 노래하고 있었다.
‘이런 썩을……!’
“투란, 대체 뭘 한 거야!”
투란이 울컥하는 사이에 홀시딘은 묻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