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509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505)
백작가의 참화(慘禍)로부터 십여 년 후.
홀시딘이 파나틱 플레임이라 불리게 된 일을 저지르고 사오 년 정도 후에 알베룬 백작가는…… 백작과 영민 모두가 사라졌다. 영지는 텅텅 비어버렸고, 갈기산맥의 마수, 짐승들이 사람이 사라진 자리로 몰려들었다.
그 마수들 중에서 사나운 것, 혹은 사나운 것에 쫓긴 녀석들이 텅 빈 알베룬의 영지를 넘어서 아프론 왕국의 안쪽으로 흘러들었고, 왕국은 때 아닌 마수의 침공에 당황했다.
어째서 갑자기 튼튼한 알베룬 백작가의 경계를 넘지 못하던 마수 떼가 몰려나오는가? 괴멸할 뻔했지만 괴멸하지 않은 알베룬 백작가의 생존자들이 그 사투(死鬪)의 경험을 살려서 갈기산맥의 마수를 막고 있을 텐데!
아프론 왕국은 조사를 했고, 금방 알 수 있었다.
알베룬 백작이 그 영지민과 함께 사라졌다!
남은 핏줄이라고는 겨우 너댓 살짜리 손자 하나뿐인 늙은 백작, 기사단도 영지군도 병신만 남았다는 백작가가 그 영지민을 한 명도 남겨두지 않은 채 어딘가로 끌고 사라진 것이다.
갈기산맥의 마수들은 그 공백(空白)의 영지를 그대로 차지했고, 아프론 왕국의 국경 안으로 흘러드는 중이었을 뿐이다.
한두 마리 강한 놈이 설치는 것이 아니었다.
뭣 때문인지 마수들이 계속해서 와글와글 산맥에서 쏟아져 나왔고, 이를 막기 위해 바빠진 아프론 왕국에서는 더 신경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일은 참화의 다음을 잇는 괴사로서 기억되는데…….
“지금부터 한 십 년 전? 십이 년 전? 그 무렵에 알드바인에서 대규모로 물품제작을 의뢰해 왔던 일행을 기억하세요?”
케이라가 묻는 말은 홀시딘을 갸웃하게 했다.
“대규모……? 십여 년 전이면…… 베룬 일행? 엥? 베룬!”
화들짝 놀라는 스승을 향해 케이라는 씁쓸하니 이야기를 잇는다.
“베룬이라는 청년을 우두머리로 하는 그 일행이 의뢰한 물품은 거의 십만 명분의 장비였어요. 간단한 옷, 생활도구부터 시작해서 한 삼사만 명을 위한 갑옷, 도검, 각종 사냥 장비. 거의 모두 선금(先金) 지불이었고, 모자란 부분은 마수의 가죽이나 이빨, 발톱 따위로 지불했지요. 뭐, 스승님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 받았으니 만들어주면 될 일이라고, 대공방의 장인들이 와서 수상하다고 걱정하는 말에 대꾸하셨지만요.”
“아니, 그야…… 음, 여기서 그렇게 사간다고 해서 큰일 날 곳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게다가 중개상인이라면 그 정도 규모야, 뭐…….”
홀시딘이 민망하니 불꽃의 강도(强度)에 집착하던 그 시절을 되새기면서 웅얼거렸다. 다른 일을 거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눈앞에 닥친 일을 하고, 점점 커지는 몰튼노트 더 기긴탁의 위협에 몰두할 때였다.
“예, 말씀하신 대로예요. 알드바인까지 와서 그만한 물량을 사가는 게 좀 괴상하기는 하지만, 한곳 가게에 의뢰한 것도 아니고 대공방 전체에 의뢰한 거니까 그 정도 할 수도 있다 싶은 일이 맞기는 하죠. 그때 저도 스승님처럼 생각했어요. 팔린 물품에 대해서 알드바인에서 걱정할 일은 없으니까, 그냥 좋은 거래일 뿐이었지요. 뭐, 지금 다시 돌아봐도 나쁜 일은 아니었고, 좋은 거래 맞았어요. 그 베룬은…… 지금 정황으로 보면 분명히 알베룬 백작의 손자, 차기 백작일 거예요. 그러니까 이십여 년 전에 사라졌던 백작가는 영민을 끌고 화이트 레이크의 한곳으로 이주한 거죠. 갈기산맥을 돌파해서 말이에요. 뭐, 나름대로 좁은 쪽의 폭을 재면 몇백 킬로미터에 불과하고 이주민 숫자가 몇만 명인데 안 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은 할 수 있잖아요?”
“몬스터도 잡아 죽이는 갈기산맥이란 말은 마수 때문에 생긴 말이 아니잖니. 그 수백 킬로미터가 계곡과 낭떠러지, 지형의 고저(高低) 차가 마물(魔物)이라 일컬어지는 곳이잖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제자의 말에 덧붙여보는 홀시딘이었다.
케이라는 스승이 졸지 않고 자기 말에 집중하는 것이 기쁘다는 듯이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렇죠. 하늘을 날아가도 수백 킬로, 하지만 그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는 지형을 펼쳐놓으면…… 어쩌면 수천 킬로미터가 될 수도 있는 산맥이고, 마수가 와글거리는 곳이죠. 수만 명이 뛰어들면, 한둘이 살아나오는 게 고작인 곳이니까…… 그래서 알베룬 백작가가 영민을 끌고 사라졌어도 갈기산맥을 돌파했을 거란 생각은 상식적으로 못할 일이었죠. 하지만 그들은 해냈어요. 게다가 몇 년 전에는 화이트 레이크 주변에서도 사라졌지요.”
“응? 사라져?”
“예. 예전에 의뢰받은 물품 때문에 베룬 일행의 마을, 자기네끼리 베룬 마을이라던 곳에 다녀온 공방 사람이 있어요. 마수 가죽 거래로 몇 번 다녀왔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 그 마을이 사라졌다더군요.”
“뭐야, 그게.”
홀시딘은 어이없어했다.
마법사답게 중간 과정을 여러 가지로 유추할 수 있어 생략하고 넘기며 요점만 파악하는 중이기는 한데, 이건 유추할 얘기가 아니었다. 갈기산맥 돌파, 수만 명을 이끌고 그런 짓을 했다면 가히 위업이라 할 만한데…… 그런 위업을 이루고 화이트 레이크에 붙은 마을을 이뤘다면, 알드바인처럼 자치도시로 서서히 성장시킬 수도 있었다. 그런데 사라지다니, 또 어디로 갔단 말인가?
“글쎄요…… 어쩌면 춤추는 산맥을 떠났을 수도 있겠죠.”
케이라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간단히 대답했다.
이 말은 홀시딘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럴 능력이 있었고, 그럴 만한 까닭도 있었다.
하지만 진실은 그 자취를 따라 추적하지 않는다면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베룬 마을이라고 했지? 거기에 대해서 우리 말고 아는 녀석들은?”
홀시딘이 불쑥 물었다.
케이라는 고개를 저었다.
“놀랍게도 없나 봐요. 알베룬의 괴사는 여전히 괴사일 뿐이고, 화이트 레이크 한쪽에 갑자기 나타난 마을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사람이 없어요. 어쨌든 화이트 레이크니까, 어딘가에서 물길 따라 찾아온 누군가가 대강 시작한 마을이라고…… 그나마 마을이 거기 있는 것까지는 아는 사람들도 적당히 생각하는 모양이더라고요.”
“하아…… 알베룬, 베룬. 그렇게 대놓고 말하고 있는데도 눈치채지 못했다니…….”
뭔가 자신에게 짜증을 내는 듯이 홀시딘이 중얼거렸다.
케이라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한다.
“눈치챘어도 뭘 어떻게 할 수는 없었잖아요?”
“응? 없기는! 그 정도 담력, 기량을 지닌 영민들이라면 우리 쪽으로 살살 끌어들일 수 있잖아! 이십만을 넘었다고 해도, 아직 여긴 사십만까지 채워야 하니까.”
투덜거리는 홀시딘을 향해 케이라가 어이없다는 눈길을 잠깐 보냈다.
홀시딘은 알드바인이 완전히 자급자족하는 자치도시로 필요한 조건을 말하고 있었다. 몬스터, 마수와 싸우고 몬스터, 마수와 싸우는 이들을 지원할 수도 있는 자치도시로서 인적자원까지 완전히 자급자족하기 위해서 대강 사십만이면 되지 않겠느냐고 초대 마스터 펠카윈이 계산해서 세워놓은 계획에 충실한 말이었다.
“기억하고 계시네요? 하긴 당연히 기억하실 일이기는 하네요…… 그럼, 이것도 기억하세요?”
“응? 그건…… 마스터 엘투란께서 널 내게 맡길 때, 네 목에 걸어놨던 이름표잖아?”
홀시딘은 케이라가 목 언저리에서 살짝 들어 올려 흔드는 명패(名牌)을 보며 어리둥절한 소리를 냈다. 왠지 굉장히 공적인 이야기에서 갑자기 아주 조그마한 사적인 이야기로 훌쩍 건너 뛴 느낌이잖나. 어째 하던 이야기가 갑자기 확 딴 곳으로 튀는 것인가?
의아해하는 스승을 향해 케이라는 차분히 말한다.
“마스터 엘투란께서, 스승님께 이것에 대해 뭐라 하셨는지 기억하세요?”
“너 잊어먹지 말라고 붙여둔 이름표라고 하셨지. 케이라가 완전히 자라서 스스로 거기 걸린 마법을 해석하고 해제할 때까지, 마력을 꾸준히 유지시켜주라고. 거기 걸린 마법은 순전히 갓난아기의 상태와 위치를 추적하기 위한 거라고, 그리 말씀하셨다만?”
“직접 조사는 해보셨어요?”
“응? 아, 그야…… 안 했던가?”
슬슬 케이라의 눈길을 피하면서 홀시딘이 기억이 가물거리는 척했다.
케이라가 조금 매섭게 그런 스승을 노려보다가 한숨과 함께 말한다.
“하셨든 안 하셨든, 그건 별 의미가 없기는 해요. 하셨다고 해도 결국 마스터 엘투란이 허용한 부분까지만 알아내실 수 있었을 테니까요. 제 마력에만 동조해서 발동하는 마법을 새겨두신 데다가, 마스터 랭크의 자격까지 요구하는 조건을 걸어두셨으니까 말이죠.”
“갓난아기 위치 파악하는 목걸이에 그딴 마법을? 아, 잠깐! 그럼, 엘투란 스승께서는 겨우 갓난아기였던 네가 결국 마스터가 될 거라고 예측했다고? 허?”
홀시딘은 새삼 자신의 스승에게 경악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케이라가 쯧 하고 짧은 소리를 내고 바로 짚는다.
“스승님, 이럴 때는 그게 대체 무슨 마법이냐고 먼저 따져야 하는 거잖아요!”
“응? 아니, 그야…… 에이, 나한테 갓난아기를 맡긴 분이 뭔 해로운 마법을 걸어두셨을 리가……. 뭔가 내게 어울리지 않는 마법이지만 전승시키고 싶어서 그러셨을 수 있잖니.”
어딘가 태평한 홀시딘의 대꾸였다.
마스터 엘투란에 대한 신뢰가 넘쳐나는 말이기도 했다.
케이라의 눈꼬리가 삐딱해지면서 약간 짜증 어린 낯빛이 맴돌았다.
홀시딘이 흠칫했다.
“응? 왜? 왜애? 그거 미리 파악해뒀어야 하는 마법이었냐? 하지만 너를 위해 준비된 거라며? 갓난아기 목걸이에 무슨 위험한 마법을 걸어두셨을 리가…….”
나름대로 합리적인 변명을 늘어놓는 스승을 향해 케이라는 아예 삐딱한 목소리로 말하니…….
“그렇기는 하죠. 그저 알드바인에 감춰진 ‘징벌(懲罰)받는 데스 메이지’가 감금된 곳을 알려주고 그 속박을 해제하는 열쇠에 불과하니까요. 갓난아기가 마스터 랭크의 마도사가 될 때까지는 아예 사용도 못 하…….”
“뭐어어? 뭐가 있다고! 케, 케이라아아! 그게 무슨 소리냐앗!”
무슨 말인가 잠깐 이해를 못하듯이 눈을 깜박거리다가 홀시딘이 책상 위로 뛰어오르면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스승의 행태를 미리 예측한 듯, 아예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케이라는 귀를 두 손으로 꼭 막은 채로 스승의 모습을 느긋하게 바라봤다. 그러다가 파들거리는 홀시딘이 씩씩대는 숨결과 함께 입을 다무는 것을 보고 느릿하니 귀에서 손을 떼며, 케이라는 짧게 한마디 한다.
“세비앙.”
“어?”
다시 홀시딘은 무슨 소리인가 잠시 눈만 깜박였다.
그러나 기억은 이미 한번 그 시절의 과거를 더듬은 적이 있노라고 주장하듯, 곧바로 홀시딘의 가슴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면서 투란과 함께 불타는 평야에 머물며 되살렸던 부분의 한 자락을 바로 뇌리에 울려 퍼지게 해줬다.
“세비앙? 그건…….”
“데스 메이지가 바로 세비앙이에요.”
“…….”
홀시딘의 입이 벙긋거렸지만 소리가 나지 않았다.
많은 일이 있었던 지난 날, 그 무렵의 세비앙은 이래저래 사고를 쳐놓는 동료로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란스러웠던 무렵이 지난 다음, 세비앙은 거의 마스터 엘투란의 시종(侍從)처럼 부려지며 순종(順從)했었다. 아무래도 얼마 동안 저지른 잘못 때문에 꽤 반성하는 중인가 싶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십몇 년을 지내다가 마스터 엘투란이 숨을 거둔 다음, 며칠 간격을 둔 채로 알드바인에서 사라졌다. 그 뒤로 세비앙에 대해 아쉬워하거나 찾는 사람은 없었다. 엘투란에게 완전히 복종하면서 지내는 사이, 세비앙의 주변 관계는 거의 단절된 듯했으니까. 그렇게 마스터의 명령에 복종하려 하면, 어쩔 수 없이 주변과 무딘 관계가 되는가 하는 예시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래서 홀시딘도 한참을 잊고 있었다.
그 시절을 정확하게 회상하는 순간이 찾아올 때까지, 세비앙이란 이름조차도 그냥 그런 누군가가 있었지 하는 정도로 잊고 있었다.
“징벌?”
문득 제 정신이 돌아왔다는 듯이 홀시딘이 중얼거렸다.
케이라가 바로 대꾸한다.
“예. 세비앙은 마스터 엘투란이 시킨 일을 일부러 망가뜨려놨어요. 그래서 마스터 엘투란이 죽음의 위기에 처했지요. 사실은 죽일 작정이었기도 했지만…… 거기에 동료 마법사들이 불타는 평야에서 맞닥뜨릴 위험에 대해서도 숨겼고, 아는 시기를 최대한 늦춰놓기도 했죠. 켈브란의 대의에 동감해서 말이죠. 하지만 세비앙에게 켈브란의 대의에 대해 떠든 이는 켈브란 일파에 속하지 않는 귀족이었어요. 세비앙은 켈브란에게 직접 감화된 것이 아닌 거죠. 거의 대화도 없었고 말이에요. 그래서 징벌은 켈브란과 그 일파를 비껴갔고, 스승님이 정리해야 했지요.”
“…….”
“전혀 짐작도 못 하신 것 같은데, 스승님이 두 분 동료를 잃고 돌아왔을 무렵을 떠올려 보세요. 마스터 엘투란은 사경(死境)을 헤매는 중이고 알드바인에는 그 임무를 대행할 마스터…… 켈브란이 와 있었어요. 켈브란은 돌아온 스승님을 바로 다른 급한 사냥에 필요하다며 투입해서 떠나게 했고…….”
“중급 마법사로서 그 명령에 복종해야 했지. 그리고 돌아왔을 때는 켈브란이 없었다. 마스터 엘투란이 이미 완치된 모습으로 계셨지.”
“완치되신 게 아니었어요. 상아탑의 마스터로서, 불확실한 회복 대신에 남은 시간을 정해서 억지로 일어나신 거였죠. 정확하게는 의식이 모호한 상태인 마스터 엘투란을 상아탑의 비술을 아는 대공방 장인, 크라쉬 님이 강제로 일어서게 한 거고요.”
“뭐?”
홀시딘은 다시 당황했다.
알드바인의 화창한 날, 할 일을 빨리 마치고 느긋하게 쉬려던 계획이 산산조각 나서 저 멀리 흩어지고 있었다. 누구는 지금 새로 얻은 마도구를 꺼내놓고 열심히 품평하며 즐기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