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52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52)
걸음걸이에 익숙해졌고, 그러면서 뭔가 뿌옇고 멍하던 감각도 보다 선명해졌다. 그사이에 기울어지고 넘어질 뻔하다가 울창한 나무 틈새로 허우적대며 들이받은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다치지 않아.’
이곳의 나무는 잎을 터뜨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악마의 심장 넝쿨 껍질 정도는 가볍게 스친 것만으로도 다 긁어낼 정도로 거칠고 사나운 표피를 두른 나무였다. 때문에 투란은 꽤나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잿빛바위의 살갗은 그런 나무의 표피에 닿으면 저절로 힘을 뿜어내며 오히려 나무껍질을 긁고 나무의 연한 속내를 그대로 드러나게 할 뿐이었다. 껍질이 벗겨진 나무의 속살은 이상하게 맛있어 보이기도 했고, 어느 순간 부딪친 나무의 껍질을 손으로 뜯어내고 그 속을 맛보게 되었다.
‘어, 먹을 수 있네!’
그랑츄의 내장 탓인지, 아니면 이 나무가 껍질을 벗겨 내면 먹을 수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당장 벗겨 먹을 수 있다는 점이 투란에게는 중요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벗겨 먹을 나무가 가득한 곳이라면, 잿빛바위 일족의 그랑츄 떼가 사는 것도 당연하다 여겨졌다.
‘조심하자, 조심.’
투란은 자신의 상황을 자각하고 되새기면서 악마의 심장을 통해 감각을 더 강화하며 긴장했다.
그랑츄가 사람을 닮았다는 이야기는 그 생김새나 기본적인 움직임이 ‘사람 흉내’에 가깝다는 것뿐이 아니었다. 그랑츄를 말할 때, 어느 일족인가를 따지는 이유도 분명했다. 그랑츄는 무리 짓는 몬스터였다.
홀로 나돌아 다니는 놈도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랑츄의 가장 위험한 점은 그 무리와 충돌하게 될 경우였다.
3미터 40센티가 넘는 오우거라도 한두 마리의 그랑츄는 그 괴력으로 찢어발기거나 후려쳐서 으깨 놓겠지만, 2, 30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들면 결국 박살 난다. 그 과정에서 살아남는 그랑츄가 대여섯 정도에 불과하더라도, 그랑츄는 무리가 되면 거침없이 오우거에게 덤비는 녀석들이라 했다.
때문에 투란은 그랑츄의 잔해를 보고, 쫓아왔다.
한 마리가 쓰러져 있다면 반드시 또 다른 놈도 있을 것이고, 그랑츄 한 마리를 잡은 놈이 그저 한 마리만 잡고 끝날 리가 없으니까.
그래서 투란은 그랑츄를 잡은 놈과 먼저 만나거나 그 뒤를 쫓는 그랑츄 무리랑 맞닥뜨릴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가능한 한 늪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쪽 길을 택하고 있기도 했다.
‘있다! 저건가?’
마침내 몇 마리 그랑츄가 나뒹구는 늪가에 도착했다.
새카맣게 타서 숯덩이인 놈이 셋이었고, 하나는 반만 타고 남은 잔해였다.
울창한 숲의 한 귀퉁이도 늪과 만나는 지점에서 푹 파이듯이 시커멓게 물든 꼴을 하고 있었다.
이는 뭔가 투란의 예상에서 상당히 벗어난 몰골이었다.
여태 쫓아온 놈은 뭔가 깔끔하게 힘으로 그랑츄를 찢어발긴 놈이었다.
한데 여기는 홀랑 다 태워 버렸다?
‘같은 놈? 딴 놈?’
투란은 고민하면서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봤다.
홀랑 타 버린 늪가는 늪 쪽을 향해 불쑥 튀어나온 꼴이었고, 그랑츄의 숯덩이 셋은 그 삐죽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반쯤 탄 놈은 나무 쪽으로 피하려다가 쓰러진 듯이 보였다. 그런 잔해 이외에는 딱히 이상해 보이는 것은 없었다. 이리저리 파헤쳐진 탓에 오목하게 파인 곳, 볼록하게 튀어나온 진흙 무더기는 늪가이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이렇게 주의하고 나서 반쯤 타 버린 놈에게 다가서려는 참이었다.
치치칫, 치익!
뭔가 낯선 소리가 귀를 찔렀고, 늪에 반쯤 녹아내리고 있는 걸로 보이는 진흙 무더기 하나가 새파란 빛을 툭툭 튀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다음 순간, 투란의 몸이 뒤로 젖혀지고 나무 틈새로 굴러갔다. 뭔가 생각하기도 전에 투란은 반사적으로 그 자리에서 회피하는 동작을 해 버린 셈이었다.
이는 굉장히 빠른 반응이었지만, 그래도 늦었다. 갑자기 내리꽂힌 벼락에 한쪽 발 언저리가 거뭇하게 변색된 꼴을 보면서 투란은 뒤늦게 발목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콰직, 콰지직.
나무가 부러지고, 투란은 연거푸 뒤로 굴렀다.
한쪽 발이 시커멓게 된 꼴이 저기 널브러진 그랑츄의 몰골이랑 꼭 닮았다.
‘벼락불에 탔어! 근데 저건 뭐야!’
투란의 가슴속에서 악마의 심장이 격동했고, ‘작은 늪’이 맥동했다.
심장 속에 뿜어져 나온 늪이 악마의 심장에 삼켜지고 격류가 되어 화끈대는 발목으로 몰려갔다. 발목의 넝쿨 가닥이 굵고 거칠어져 뼈까지 닿은 열기에 저항하는 ‘작은 늪’의 물줄기를 뿜어냈고, 잠시 뒤에는 거뭇한 살갗이 벗겨져 나갔다.
투란은 발이 다시 회복되는 것을 보며 안도하고 반사적으로 부러진 나무를 집어다가 껍질을 손으로 밀어내며 그 속을 씹었다. 위장의 꾸르륵거림과 함께 나무는 착실하게 소화되며 양분이 되어 주었다.
번개를 끌어내린 이상한 빛은 반짝거리면서 그 진흙 덩어리 주변을 확실하게 밝혀 보여 주고 있었다. 울창한 숲과 늪의 어두운 풍경 속에서 보이는 그것은 뭔가의 팔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뭔가는 늪의 진흙에 덮인 채로 꼼짝도 않았고, 그 대신 가까이 있는 늪에서 출렁거리는 굵은 넝쿨과 꾸물거리는 구근이 오르내리는 꼴이 보였다.
악마의 심장이 늪에 떠돌고, 번개를 뿜어낸 놈에게 관심을 드러내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가까이 멋모르고 다가간 투란에게 벼락을 떨군 놈이 악마의 심장에는 왜 벼락을 떨구지 않을까? 훨씬 더 가까이 있는 위협일 텐데?
투란은 곁의 얇은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던졌다.
치직, 치익!
소리 없는 벼락이 한 번 더 떨어지며 나뭇가지를 허공에서 재로 만들어 버렸다.
오싹한 느낌 속에서, 하지만 이 거리까지는 벼락이 떨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지라 대담하게 투란은 나뭇가지를 연이어 던졌다.
벼락이 연이어 떨어졌다.
‘약해지는군!’
착각이 아니었다.
처음 그의 발목, 그랑츄의 발을 홀랑 태운 벼락불이 가장 셌고 그다음부터 날아든 나무에 대응하는 벼락불은 규모도 작고 약해지고 있었다. 더 굵은 나뭇가지를 분질러 던지니, 이제는 반만 겨우 태우고 나머지 반은 번쩍거리는 진흙 무더기 옆에 떨어질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투란은 계속 나무를 던졌다.
마침내 진흙 더미 속에서 반짝거리기는 하지만 더 이상 벼락이 떨어지지 않게 되었다.
‘좋아.’
늪의 표면을 출렁대는 악마의 심장, 그 여러 개의 구근 형상과 덩굴줄기도 잠잠해지고 있었다. 빛이 반짝일 때마다 함께 요동쳤던 것들이 빛과 함께 잠잠해지는 꼴이었다.
투란은 나뭇가지를 분지르고 작은 나무는 통으로 꺾으면서, 굵은 놈은 몸으로 거칠게 밀어젖히면서 타 버린 터를 피해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타 버린 터에서 나온 두툼한 발자국이 몇 쌍 보인 곳에 이르렀다. 지금 투란의 발이 찍는 꼴이랑 딱 닮은 발자국이었다.
‘여기에 모였나?’
뭔지 모를 놈을 쫓는 그랑츄 무리, 그러다가 갑자기 늪가에서 벼락 맞고 타 버린 놈까지 생겼지만 포기하지 않고 쫓는 모양이었다. 방금 투란처럼 저편에서 나무를 꺾고 온 패도 있고, 늪을 가로질러 건너왔는지 진흙 묻은 발자국을 남긴 패도 있었다.
그 꼴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몰이를 하고 있어.’
이 그랑츄 무리는 혼자서는 상대할 수 없는 뭔가를 떼로 쫓고 있었다.
중간에 이상한 벼락불에 타 죽는 동료가 나와도 무시하고 쫓는 중이었다.
잠시 그 무리의 흔적을 바라보다가 투란은 늪에 몸을 담갔다.
그리고 출렁거리는 악마의 심장 틈새로, 늪 표면에는 눈만 빼꼼히 내민 꼴을 한 채 다가갔다.
구근이 꿈틀거리고 투란을 향해 덩굴줄기를 뻗었다.
넝쿨 가닥은 상당히 활기찼고,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그대로 감아 꽉 조일 정도의 힘을 보였다. 하지만 그랑츄의 팔을 이겨 낼 정도에는 전혀 이르지 못했다.
투란은 그 넝쿨을 잡고 당겨서 구근 덩이 꼴을 한 악마의 심장을 손에 쥐었고, 보통이 아닌 그 맥동을 잠깐 지켜보며 확인했다.
악마의 심장이 살짝 설레는 두근거림을 흘렸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악마의 심장이 아니었다.
뭔가에 접촉했고, 그 씨앗을 얻어 강해진 악마의 심장이 이 주변 늪가에 상당히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 뭔가는 저기 작은 진흙 더미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
투란은 손에 쥔 악마의 심장을 찢었고, 조각을 입에 물었다.
악마의 심장을 놓고 하는 도박, 항아리 결투에서 한쪽을 일방적으로 이기게 하려면, 다른 놈을 반 토막을 내면 된다. 일단 갖춘 형태가 반 토막 나는 순간, 악마의 심장의 힘도 반 토막 나니까. 그 반 토막이 다시 온전한 하나가 되면 그 힘은 회복되겠지만.
투란의 입속에서 헝클어지듯 흘러나온 작은 덩굴줄기가 입안에 문 악마의 심장을 파고들어 들이마셨다.
‘음?’
가슴속에서 악마의 심장이 맥동하며 투란에게 새로운 ‘기억’을 던져 줬다.
매끈매끈하고, 뽀송뽀송하니 살이 오르는 괴상한…….
‘뭐야, 이게!’
투란은 악마의 심장이 남은 조각도 원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조각낸 악마의 심장에 담긴 ‘기억’ 또한 조각이므로.
완전히 뭔지 파악하기 위해서, 새로운 재능을 얻기 위해서 투란은 계속 큼직한 구근을 찢어 입에 넣고 들이마셨다.
그 결과 매끈매끈하고 뽀송뽀송하게 그랑츄의 살갗이 부드러워지는 광경을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재생?’
단단하고 거친 그랑츄의 살갗이 지금 막 새로 태어난 놈의 것처럼 살집을 지어 내고 있었다. 투란은 잠시 고민하다가 생각을 접고 늪을 헤엄치는 척하며, 바닥을 밟으며 반짝거리는 진흙 더미를 향해 나아갔다. 그사이에 덤벼드는 악마의 심장은 모두 넝쿨째로 끌어당겨 뿌리를 토막 내서 열심히 들이마셨다.
‘도대체 이게 뭐야?’
진흙 더미는 저쪽에서 보던 것과, 가까이 붙어서 찬찬히 본 꼴이 완전히 달랐다.
그 진흙 더미가 늪과 맞닿은 쪽으로 덩굴줄기가 줄줄이 늘어선 채였고, 그 뿌리인 악마의 심장은 진흙 더미의 한복판에 아주 애처로운 꼴로 매달려 있었다. 거기에는 시퍼런 빛깔로 꿈틀대고 맥동하는, 완전히 찢긴 몸만 남아 진흙을 뒤집어쓴 이상한 놈의 심장이 있기도 했다.
‘저 반짝이는 거는 팔인가? 그러면 이놈은 머리부터 목, 어깨까지 한 번에 찢겨 나가고 아랫도리도 덩달아 날아가 한쪽 팔과 가슴만 남은 꼴인데…….’
아무리 봐도 투란에게 다른 몰골은 생각나지 않았다.
보이는 꼬락서니대로 생각하자면, 이 이상한 꼴을 한 놈이 무엇인가에 확 찢기면서 남은 한 팔, 가슴의 쪼가리에는 심장이 뛰는 채로 늪에 던져졌다. 늪에서 둥실대던 악마의 심장은 본능대로 이놈의 심장에 들러붙었다.
‘아니, 못 이기는 거냐!’
이 이상한 괴물의 심장은 악마의 심장에 먹히기는커녕, 그 괴이한 재생력으로 오히려 잡아먹으려 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악마의 심장이 버티기 위해 선택한 길이 늪에 넝쿨을 잔뜩 뻗어서, 새끼를 치고 그 맥동하는 힘을 받아 저항하는 것, 그 와중에 닿은 심장의 재생력을 파악해서 넝쿨의 활동력을 강화한 것이었다.
투란에게는 뭔가 애매한 꼴이었고, 뭔가 짜증도 나는 상황이었다.
악마의 심장은 가슴속에서 쓴웃음을 피우는 듯한 잔잔한 맥동을 보이기도 했다.
저런 꼴인 채로 버티는 이유가 투란에게 본능적으로 전해졌다.
악마의 심장이 저 심장에 엉겨 붙어 양분을 들이부었고, 저 이상한 심장은 그 양분에 다시 맥동하자 저 괴이한 재생력으로 침입자를 몰아내고 완전한 형태로 되살아나려 했다. 하지만 그렇게 악마의 심장을 밀어내면 양분이 모자란 것이고, 다시 시들다가 파고드는 악마의 심장에 의해 또 살아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이상한 놈의 팔은 반짝거리며 벼락을 부르고, 주변에 알짱대는 놈을 숯덩이로 바꿔 버린다!
이 괴상한 대치가 대체 얼마나 오래 이어진 것일까?
‘그래, 대신 먹어 주마!’
투란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정했다.
탐나는 것은 저 반짝대는 벼락을 부르는 팔이지만, 악마의 심장조차 밀어낼 정도의 재생력이라면…….
스륵, 사악!
샤벨투스의 이빨이 그랑츄의 손아귀에서 길쭉하니 튀어나왔다.
투란은 먼저 심장을 몸통의 잔해에서 잘라 냈다.
거기 매달린 악마의 심장도 도려냈고, 입으로 씹었다.
쏴아아!
늪이 출렁였고, 씹히고 있는 악마의 심장과 이어진 작은 것들이 반항하려는 듯이 몰려들었다. 귀찮아진 투란은 슬쩍 이상한 몸통 곁, 늪가로 몸을 얹었다. 잔줄기를 모두 쳐 내서 멀리 던져 버린 다음에야 다가오는 놈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투란은 반짝이는 팔을 살폈고, 반짝임이 약해져서 얼마 동안은 벼락이 안 생기는 것을 확실히 파악했다.
‘굉장하구나, 머리통에서 왼쪽 어깨까지 몸통을 한꺼번에 찢어발기다니!’
그래서 이 이상한 놈은 활짝 열린 왼쪽 가슴으로 심장을 노출시킨 채, 늪에 버려져 악마의 심장과 어울린 몰골이었다.
치잇, 살짝 빛이 아까 보다 세진 것을 보며 투란은 서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