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520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516)
Chapter 104. 노장(老匠)의 이상한 하루
하클은 알드바인의 헌터 대공방에서도 할배 중의 할배라고 영감(令監) 소리를 듣는 늙은 장인(匠人)은 오늘이 매우 이상하다고 느꼈고, 그 느낌이 맞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착각인가 했는데 말이지.’
손에 든 편지 시늉을 내는 듯한 작은 종이, 거기에 적힌 말을 보면서 하클은 아침 일찍 찾아왔던 손님부터, 지금 눈앞에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자신의 공방 겸 가게를 구경하는 애송이인가 아닌가 아리송한 손님에 대해서는 잠시 잊은 채로 그 아침 손님부터 되새겨 보았다.
“내 아버지랑 아는 분이시라고요?”
“아, 난 크라쉬. 아들 크라쉬지요.”
“어차피 크라쉬 가문 사람이니까, 멀리 나가면 아버지나 아들이나 같은 이름을 쓰는 셈이니까 말이죠.”
“음? 역시 많이 닮았나요? 하긴, 아예 똑같다는 사람도 있군요.”
“기억이 안 납니까? 흐흠, 하긴 나이 들고 기억이 애매하신 분들도 많으니까 말이죠.”
한참 제멋대로 지껄이던 크라쉬가 늙어서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이냐고까지 꽁알거릴 무렵에 하클은 울컥했다.
‘아예 똑같이 생겨 처먹어놓고 뭔 소리야!’
입안에서 맴돌던 외침을 토해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울컥하는 기분에도 불구하고 하클은 오래 살아온 연륜을 바탕으로 거듭 생각을 했다.
수십 년 전에 알드바인 대공방을 이끌었던 크라쉬, 그와 똑같이 생긴 모습으로…… 세월이 흘렀나 말았나 신경도 안 쓰는 것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서 나불거리는 크라쉬가 정말 본인이 아닌가?
진짜로 자기가 말한 그대로 아버지와 똑같이 생긴 아들에 불과한가?
말하는 태도를 보아하니, 이미 여러 공방에 들락거리면서 하클처럼 과거의 크라쉬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똑같은 소리를 해서 어느 정도 먹힌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다들 하클처럼 ‘이 크라쉬가 옛날 그 크라쉬인 것 같은데?’라는 몰상식한 의혹을 품는 대신에 아버지랑 꼭 닮은 아들이 아버지의 자취를 따라서 알드바인에 찾아왔다는 말을 믿어주는 모양이었다.
‘의심하면 미친놈 취급 받을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가려는 건가?’
물론 하클은 그놈들이 이런 생각으로 그랬을 수도 있다고 추측했다.
당장 하클도 잔뜩 의심을 품고는 있지만 딱히 세월을 뛰어넘어 찾아온, 옛날 그대로인 크라쉬에게 제대로 된 물음은 못 던지고 어버버하다가 떠나가는 뒤통수를 향해 멍청해진 표정만 지어 보였으니까.
그에 대한 본격적인 생각과 다양한 추측은 그다음부터 시작되었던 셈이다.
만약 크라쉬가 요정의 일족, 그 혈통을 잇는 몸이라면 수십 년 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똑같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요정의 일족이 지닌 수명은 대부분 인간의 서너 배,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라쉬는 별로 달라지지 않는 게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요정의 혈통을 잇는 자가 춤추는 산맥을 떠돌아다닐 까닭이 있는가? 그런 일은 까마득한 옛날…… 드래곤로드의 시절에나 있던 일이라 했다. 가장 오래 버틴 바위요정의 일족조차도 몇백 년 전에 춤추는 산맥을 떠났는가 기억도 못하고 있잖은가.
‘젠장…… 바위요정 녀석들 때문에 더 헷갈리네.’
하클은 생각하다가 한숨도 굵고 두텁게 내쉬고 말았다.
보다 젊었던 시절, 바위요정의 일족이 산다는 춤추는 산맥의 북부 검은 강과 검은 산, 검은 계곡을 넘어갔다 돌아온 여행의 경험이 하클에게 자꾸 크라쉬와 요정의 일족을 연결해서 생각하도록 부추기고 있었다.
이제는 요정의 혈통을 잇는 자가 춤추는 산맥에서 제 정신으로 머물 수 없는 시절인데…… 고집 세고 성질 더러운 바위요정의 일족은 어떻게든 다시 춤추는 산맥으로의 진입을 꿈꾸며 온갖 수단을 다 시도해보고 있었다.
그중에서는 요정의 혈통을 지니지 않은 자, 평범한 인간과 바위 요정의 혈통을 지닌 자 사이에서 태어난 경우라면 춤추는 산맥에서 그럭저럭 제정신으로 살 수 있지 않는가 하는 것까지 시도하는 놈들도 있었다. 그나마 딸을 내세워 꼬드기는 경우라면 다행인데, 아들을 내세우면…… 다니는 곳마다 추행, 혹은 강간을 시도했다고 찍혀서 갖은 난장판을 터뜨리는 일이 잦았다.
어쩌면 크라쉬는 그 혈통 교배가 성공한 경우일 수도 있잖나?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그 혈통을 물려받았다면 그런 체격일 리가 없지!’
하클은 바위요정의 혈통에서 나타나는 신체적 특징, 어깨와 몸통이 떡 벌어진 굴강(屈强)한 근육질에 150에서 160센티로 끝나는 키를 떠올리고 거기에 크라쉬의 날렵한 몸과 180을 훌쩍 넘는 듯한 키를 겹쳐보고 애써 그 생각을 부정했다. 하지만 세상에 요정의 혈통이 바위요정의 일족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잖나?
혹시 바위요정의 일족과 비슷한 생각을 한 다른 요정의 일족이 있다면?
그런 경우라면 크라쉬가 늙지 않고 옛날 그대로 찾아온 것이 말이 된다!
단순히 늙지 않았다는 부분만큼은 설명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하클의 생각은 막히고 말았다.
옛날 크라쉬는 대공방의 장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줬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지금의 대공방은 반 이상이 크라쉬가 일궈냈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하지만 왜 크라쉬가, 만약 요정의 혈통을 물려받아 보통 인간의 몇 배의 수명을 지녔다면…… 크라쉬가 왜 알드바인의 공방을 돕기 위해 그 혈통이 지닌 위험을 무릅쓰고 춤추는 산맥에서 수십 년을 산단 말인가?
하클이 아는 한, 요정의 일족 중에서 춤추는 산맥에서 살던 시절에 대해 미련을 가진 일족은 바위요정, 그 정신 나간 일족 말고는 없었다. 그나마 그들에게는 정신 나간 짓을 할 만한 이유라도 분명히 있는데…….
“우와! 이거, 뭐예요? 이거 꼭 인힐트 블레이드처럼 생겼는데? 여기서 마법 걸린 것도 파는 거예요?”
크라쉬에 대해 복잡해진 하클의 마음을 단숨에 으깰 듯이 떠드는 이 녀석은 대체 어디서 나타난 놈인가? 하클은 다시 한 번 종이를 쥔 손가락에 힘을 주고 거기 적힌 말을 들여다봤다.
잘못 보지 않았다.
틀림없이 짧고 굵게 쓰여 있었다.
봉이야, 잡아! 쌓아둔 거 다 사갈 수도 있어!
이 종이에 이딴 소리를 적어둔 사람이 누군지 몰랐다면 하클은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따지지 않고 그냥 화로 안에 종이를 던져 넣었을 텐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하클은 이 짧고 굵은 편지를 보낸 이가 알드바인의 마스터 홀시딘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무시할 수도 없다!
‘대체 얘는 또 뭐냐고!’
그렇지 않아도 크라쉬 때문에 한껏 머릿속이 복잡한데, 이 애송이처럼 보이는…… 하지만 연륜을 담은 하클의 눈에 몹시 헷갈리는 분위기를 띄우고 있는 녀석이 찾아와 홀시딘의 괴상한 편지를 내밀고는 저러고 해롱대는 소리를 하는 중이다.
하클의 공방을 둘러보면서 한껏 신기해하는 꼴을 보면 저건 분명히 그냥 애송이가 맞았다. 세상 구경 처음 하는 애송이가 하클의 가게에서 낯선 장비, 도구를 보고 한껏 신기해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 애송이가 입고 있는 것을 보면, 얘가 그냥 철없는 놈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검은 사자머리에 거미다리가 붙은 괴상한 버클을 지닌 물통과 두터운 허리띠.
다른 녀석들이라면 정교하네 어쩌네 하면서 누가 만들었나 할 장비겠지만, 하클에게는 저게 홀시딘의 솜씨라는 것이 너무 분명했다. 하클의 배다른 형이자, 하클을 알드바인으로 이끌었던 하펠의 마법을 그대로 이용한 티가 팍팍 나니까.
홀시딘에게서 저런 걸 만들어 받을 정도의 녀석이라면 어떻게 생겨먹었든, 어떤 이상한 태도를 보이든 간에 보통 놈일 리가 없었다. 즉, 이 편지와 그런 점을 고려해서 짐작한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봉?’
그런 것 같았다.
아침 일찍부터 찾아왔던 크라쉬, 그 생각에 젖어 멍청하니 과거와 현재의 틈새를 메우느라 점심을 훌쩍 넘기고 나니 어슬렁거리면서 찾아온 이 녀석…….
하클에게 오늘은 정말 이래저래 다른 날과 달랐다.
“자네, 이름이 뭐라고?”
“응? 아, 투란이요. 본명이거든요!”
이름을 말하자마자 이맛살부터 눈살까지 한꺼번에 구기는 하클의 모습에 투란이 잽싸게 본명이란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물론 눈을 부릅뜨고 그렇게 강조하는 말을 덧붙여도…….
“그래? 뭐, 이름 감추려는 녀석이라면 다들 비슷한 소리를 하기는 하지. 그래서, 어디서 왔나?”
“에? 음…… 아주 먼 곳인데…….”
투란이 믿지 못하는 하클을 보며 조금 투덜거리고 싶은 표정과 함께 애매하니 말을 흐렸다. 하클에게는 이런 투란의 모습이 확실하게 ‘나의 신분과 정체를 감추겠어!’라는 증거처럼 보였다.
“들어도 모를 곳이라면 안 듣는 것이 좋겠지. 그런데 인힐트 블레이드가 뭔지는 아나?”
하클은 투란의 정체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이 심드렁하니 묻고 있었다.
아까 투란이 떠들어댔던 몇 마디를 바탕으로 한 물음이었다.
칼날 없이 자루뿐인 것을 힐끔거리면서 여차하면 쥐고 흔들어보고 싶은 눈치로 떠들었던 투란이 과연 알고 떠드는 것인가 모르고 떠드는 것인가, 하클에게는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젠장! 왜 안 사! 이 좋은 검을 왜 안 사!”
하펠이 마스터 엘투란의 지도를 받고 열심히 만들었다가 못 팔고 징징대던 마법이 걸린 검이었다. 검의 성능을 강화하는 마법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저 갖고 다니는데 편이성만을 높여놓은…… 몬스터 헌터 사이에서는 ‘생각은 하고 만든 거야, 이거?’라는 소리를 바로 튀어나오게 만든 마법검! 대체 왜 마법검인가 그 의미를 알 수 없다고 한창 투덜대는 소리가 줄줄 이어지게 한 마법이 걸린 검이었다.
그런 사연을 안다면, 절대로 하클의 가게에 진열된 칼자루뿐인 물품을 놓고 인힐트 블레이드냐고 물을 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이거 쓸모없는 거죠?’라고 히히거리는 소리니까!
하지만 투란이 보이는 태도는 전혀 그런 쪽이 아니었다.
하클에게는 이게 뭘 아나 모르나 묻게 하는 모호한 모습인 것이다.
“아핫! 설마 뭔지 모르고 막 떠드나 하시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투란은 가슴을 쭉 펴면서 의젓한 척하며 대답하고 있었다.
덕분에 하클은 투란이 물품에 대해서는 알아도 지난날의 사연에 대해서는 절대로 모른다는 확신을 했다!
“정말 알아?”
어쩌면 인힐트 블레이드가 그냥 칼자루 걸어놓고 하는 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에 하클은 한 번 더 확인해서 물었다. 그냥 칼날 없이 칼자루뿐이니까 인힐트 블레이드라고 부르는구나 싶은 건지도 모르잖나?
“안다니까요!”
두터운 허리띠를 툭툭 치면서 투란이 살짝 화난 표정까지 짓고 있었다.
그 태도를 보면서 하클은 넌지시 묻는다.
“폴딩 벨트인가?”
“어? 알아보시네요?”
투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티 나나?’ 하고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에 하클은 조금 당황했다.
상아탑에서 어느 전설적인 마도구를 열심히 연구해서 만들어낸 것이 폴딩 벨트라고 했다. 문제는 이게 배낭을 대신할 수는 있지만 인힐트 블레이드의 경우랑 마찬가지로 실제로 사용하는 데는 이래저래 거추장스러운 점이 많아 잘 안 쓴다는 것. 굳이 쓸모가 있다면 거의 하중(荷重)을 느끼거나 갖고 있는 물품의 부피를 잊게 해준다는…… 그나마 마법다운 효과뿐이었다. 물론 그것도 한계가 분명히 있는 마법이라서 전설이 되기에는 멀었다.
‘이거, 진짜 봉인가!’
하클에게는 새삼 종이 위에 옮겨져 있는 홀시딘의 말, 그 목소리가 귓가에 새록새록 울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봉이야, 잡아!”
‘잡을까?’
슬그머니 하클은 자신의 공방 겸 가게를 둘러봤다.
도전정신이 투철한 장인이라서 이것저것 착상한 대로 만들어본 것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팔리지 않은 채로, 몇 년씩……!
딱히 하클의 발상이라든가 물품을 만들어내는 솜씨에 뭐라 하는 녀석은 없었다. 다만 그걸 어디다 써야 하느냐고 어리둥절해 하면서 사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폴딩 벨트를 사는 놈이라면…….
‘관둬라, 하클!’
후우 하고 한숨을 쉬면서 하클은 장사꾼으로서의 기분을 접었다.
잘 모르는, 생각 없는 녀석에게 적당히 팔아치울 물품을 만들겠다고 젊은 시절에 과감하게 춤추는 산맥의 바깥, 바위요정의 일족이 사는 땅까지 가서 공예기술을 배워온 것이 아니었다.
당당하게 자신이 만든 물품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놈에게 판다!
그것이 바로 하클의 긍지……인데…….
“이거 말이에요, 이거! 인힐트 블레이드처럼 생겼는데 마법 걸린 거는 아니잖아요? 그럼, 대체 뭐예요? 이거?”
슬슬 손끝으로 쿡쿡 찌르면서 투란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잖은가.
조금 귀찮은 말투로, 물으니까 어쩔 수 없이 대답한다는 기분을 잔뜩 담아서 하클은 대답한다.
“마법 없이 만들어진 인힐트 블레이드다.”
“예? 마법 없이? 그런 게…… 된다고요? 아니, 어떻게?”
투란이 놀라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