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ster×Monster: Nihilism King Arc RAW novel - Chapter 534
몬스터×몬스터: 허무왕 편 (530)
‘으흠, 오늘은 기저귀까지 세척할 필요는 없겠지?’
쏟아지는 물 아래에서 장비를 하나씩 몸에서 떼어내며 투란은 생각했다.
검과 배낭, 안팎으로 소나기에 들이대듯 올렸다가 바닥에 내려놓고 잔뜩 긁힌 미늘갑을 벗으며 허리띠를 풀고 바지와 장화까지 씻어낼 차례가 되니 떠오른 생각이었다. 일찌감치 멧돼지를 만난 덕분에 뭘 싸고 돌아다닐 시간이 없었고, 아직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는 편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땀이 배어있을 정도였다.
―어차피 흉내 내는 거면서 뭘 따져?
드라고니아가 뚱하니 말했다.
‘아니거든! 아, 그냥 다 씻어야겠다.’
투란은 입술을 삐죽대고는 곧 머리카락 사이를 손으로 긁적거리면서 그 시원한 느낌이 온몸을 채우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벽의 안팎을 넘나드는 도수관은 세척실의 곳곳에 물을 쏟아내는 대롱을 내밀었고, 한쪽에 문고리처럼 불쑥 튀어나온 꼭지로 제어하게 되어 있었다. 대롱은 머리 위, 벽, 허리춤에 걸맞은 곳에 자리 잡고 용도에 따라 이용하면 되고…… 머리 위처럼 천장의 대롱이 아닌 경우에는 대롱 끝에도 작은 꼭지가 달려 있어서 물을 막을 수가 있는 구성이었다.
투란에게 이 기묘한 시설은 라비엔에서 본 것보다 훨씬 좋은 것이었고, 우물을 퍼다 큰 동이에 담아두고 퍼쓰는 것보다 훨씬 쉽다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이었다. 굳이 씻는다는 것보다도 뭔가 안에서 소나기를 맞으며 노는 것 같기도 했고!
벅벅, 빡빡.
철그렁, 싹싹.
칼집이 비워지고 배낭이 비워지면서 안에 담겨 있던 것이 하나씩 바닥에 놓였다. 세척실 안에 낮게 설치된 선반이 있기는 했지만 투란은 물이 찰랑이며 배수구(排水口)를 향해 흘러가는 바닥에 내려놓고 하나씩 닦고 있었다. 세척실에 미리 배치해놓은 세척용 걸레는 미리 세척액에 적셔놓은 상태라 물과 만나면 바로 거품을 내주니, 바닥은 온통 거품이 맴돌며 물결 따라 흘러가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장비와 도구를 닦아내면서 투란은 기저귀라 부르고 있는 반바지 차림이 되었다. 소나기 줄기가 그 몸을 기분 좋게 두들기는 것을 즐기는 셈이었다.
―다시 봐도 대단하긴 대단하군.
불쑥 나온 드라고니아의 말에 투란은 ‘응?’ 하며 어리둥절했다.
―이 물…… 미약한 수준이라고는 하지만 정화의 힘을 담고 있다. 요전까지는 애매했는데, 오늘 확실히 알겠어. 반복적으로 사용하면 정화의 힘이 서서히 몸에 배어들게 되어 있는 거다. 너무 미약해서 그런가 아닌가 애매했는데 말이지.
‘몬스터 로드에게 뭔 영향을 끼치는 거야!’
걸레질을 멈칫하고 투란이 물줄기에 혀를 날름대며 드라고니아의 말을 느껴보려 했다. 쓴웃음 같은 말투로 드라고니아가 바로 대답한다.
―좋은 영향이라고 해야겠지. 이 정화의 힘은 마력을 북돋워주고, 마력에 대한 제어 능력을 키워준다. 여길 이용하는 이들이 그냥 단순한 사냥꾼만이 아닌 때문인가 싶군. 마법사도, 마법장비나 도구를 쓰는 이들도 염두에 두고 조절된 정화의 힘이니까 말이야.
‘그래? 그래도 망가진 거 복원은 안 되네.’
입술을 핥아내면서 투란은 멧돼지 이빨에 뚫리고 찢겼다가 적당히 복원한 미늘갑을 보며 생각했다. 멧돼지랑 싸운 흔적을 적당히 남기려고 한 탓에 완전 복원을 시키지 않은 미늘갑이었는데, 그 적당한 흔적 덕분에 계속 착용하기에는 힘들 정도로 망가진 꼴이었다.
―어차피 수리점에 들를 참이었잖아?
‘어, 그야 그렇지.’
북쪽 성벽 아래에는 귀환한 사냥꾼의 장비를 맡아 수리해주는 상점이 있었다. 직접 팔기도 하지만 망가진 장비, 도구를 수리해주거나 사들여서 해체해 다른 장비의 제작용 부속 소재로 재활용하는 상점이었다.
투란은 세척하면서 수리가 필요한 것, 그대로 재활용 소재로 팔아버릴 것을 구분했고 소나기의 세례(洗禮)를 즐겼다.
“못쓰겠네, 이 미늘갑은 다시 녹여야겠어. 조금만 더 뚫렸으면 죽을 뻔했잖아. 여기까지 망가지면 수리도 곤란하다고. 수리한 부분이 눈에 띄게 약해지니까. 아, 배낭끈은 갈면 되겠지. 배낭 본체는 멀쩡하고 끈은 원래 교체 가능하니까. 벨트 형으로 할래? 아니면 그물형? 그냥 원래대로? 그물이랑 줄도 새로 한 벌? 알았어. 어디 보자…… 미늘갑을 내가 사고, 나머지를 계산하면…… 동전 팔십 닢이면 되겠군. 야! 안 비싸! 비싼 거 아니라고!”
수리점 주인은 투란의 표정을 흘깃거리면서 열심히 계산하고 공정한 가격이라고 불을 뿜듯 외쳤다. 더 따져봐야 값이 달라질 것 같지 않은 분위기가 역력한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투란은 미늘갑과 잘라 쓴 그물, 토막난 끈을 넘기고 새 그물 한 뭉치, 가는 밧줄 한 뭉치, 교체된 끈으로 새단장한 배낭을 받아 챙기고 수리점을 나섰다. 그 등에 대고 수리점 주인이 한마디 더 외친다.
“다음에 또 와! 단골손님에게는 특히 더 잘해준다고, 내가!”
“제값 다 받으면서…….”
고개를 돌려 혀를 날름하고는 투란이 사라졌다.
수리점 주인은 피식 웃으며 다음 손님을 향하는데…….
“자주 오는 것 같군요?”
다른 손님이 삐걱거리며 흔들리는 문을 보고 가버린 투란을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묻고 있었다.
“음? 하핫, 더 자주 올 겁니다. 어려도 꽤 실력이 있고, 운도 제법 따르는 모양이니까 말이죠.”
“호오? 실력이 좋아요?”
“이 미늘갑, 보이시죠? 이 흔적을 남긴 채로 살아 돌아온 녀석들 중에 실력 없는 경우는 없어요. 아직은 갈기 산맥이 낯선 듯하지만, 저 친구 곧 대단한 마수 사냥꾼이 될 겁니다. 몬스터 사냥까지 나설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죠.”
“그렇군요.”
손님은 주인이 눈을 번뜩이면서 하는 말에 더 따지지 않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주인은 그런 손님에게 상쾌하고 상냥한 태도로 묻는다.
“그런데, 멀리서 오신 마법사님께서는 대체 우리 가게에서 뭘 찾고 계신가요?”
손님, 멀리서 온 마법사는 빙긋 웃었다.
* * *
“하클! 다녀왔어요!”
힘차게 문을 열면서 투란이 히힛 하는 표정으로 외쳤다.
하지만 며칠 사이에 늘 듣던 ‘여기가 네 집이냐?’라는 하클의 대꾸가 없었다.
하클은 눈가를 꿈틀거리면서 앞에 앉은 다른 방문객의 어깨 너머로 바라보는 눈길을 투란에게 보낼 뿐이었다.
“어라? 손님이 계셨군요? 많이 파셨어요?”
열흘 동안, 북쪽 성벽을 나서서 한 사흘 정도 나돌다가 돌아온 때도 있었으니 서너번 정도 들르는 사이에 하클의 공방은 늘 하클 혼자만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참 드문 날인지, 투란 말고도 방문객이 있으니…… 뭔가 팔았냐고, 그럴 리는 없어 보이지만 일단 묻는 시늉이라도 해본 셈이었다.
하클이 느리게 대답한다.
“나 말고, 너 보러 온 손님이야.”
“나요?”
투란이 고개를 옆으로 누이면서 ‘왜?’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클이 한숨을 쉬고 싶은데 참는다는 듯이 말한다.
“열흘 전에 감정 맡긴 것 때문에…….”
여기까지 말이 나오자 가만히 투란을 바라보던 방문객이 입을 열었다.
“난 크라쉬라고 하네. 하클 영감님은 내 부친과 아는 사이라서 조금 친분이 있지. 그런 분이 감정소에 뭔가 맡겼다길래 나도 관심을 두고 봤네. 그래서 여기 오게 된 거라네.”
투란은 눈을 깜박거렸다.
열흘 전, 북쪽 성벽 너머 갈기 산맥을 놀이터 삼아…… 사냥꾼으로서의 기본을 훈련한답시고 나설 때 하클에게 흑요강의 원석을 추출하고 남은 잔해를 다시 녹인 덩어리를 맡겼었다. 직접 감정소(鑑定所)에 가져가는 대신, 영감이라 불리는 하클에게 중개료 준다고 둘러대면서 얼렁뚱땅 맡기고 내뺀 것이다.
대공방 감정소는 열려 있다고 으르렁거렸던 하클이었지만 투란이 팔리면 적당히 한몫 떼어준다고 능청스럽게 숙련된 장사꾼 흉내를 내며 그냥 봐도 낯설고 이상한 암석 조각을 내미니, 얼떨결에 받고 말았다.
그리고 바로 내뺀 투란 때문에 하클은 투덜거리면서도 하루동안 감정을 해보고 나서 대공방의 감정소에 맡겼다. 아무래도 하클이 다루는 소재랑은 꽤 달랐고, 무엇보다 그 엉긴 상태가 아주 괴상해서 뭔가 단정 짓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거의 열흘 만에 불쑥 크라쉬가 튀어나왔다.
크라쉬는 하클에게 그 괴상한 원석을 맡긴 것이 누구냐고 묻더니, 올지 안 올지 모른다는 대답에 눌러 붙어 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그러고 나서 거의 반나절 이상을 하클의 공방에서 버티고 있었다.
덕분에 하클은 뭔가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불쑥 유쾌한 척하고 튀어 들어오는 투란을 봤으니, 꾹꾹 눌러 참으면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몇 마디도 크라쉬가 나서며 끊겼으니…….
“알아서들 하라고.”
두 손 들었다고, 이젠 모른다는 시늉을 하면서 하클은 뒤로 가라앉듯이 의자에 기대며 크라쉬와 투란을 구경하는 자세를 갖췄다.
투란이 바로 볼멘소리를 낸다.
“아니, 처음 보는 분인데 뭘 알아서 해요?”
크라쉬가 이 소리에 바로 빙긋 웃으며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여기 하클 영감과 아버님을 통해 아는 사이인 크라쉬라고 하네. 우리 집안 이름이 크라쉬라서, 아버님도 알드바인에서는 크라쉬라 불렸지. 나도 집을 떠나면 집안 이름을 쓰니까, 크라쉬라고 부르면 된다네. 내 소개는 이 정도로 하고…… 이거, 자네가 감정을 부탁했다면서?”
투란은 크라쉬가 빠른 말투로 다시 자기 이름을 늘어놓고 가방에서 꺼내놓는 주먹 서넛을 뭉쳐놓은 크기의 검게 번들대는 돌덩이를 봤다. 투란의 고개가 저절로 끄덕거려진다.
“예…… 그랬죠. 혹시 비싼 건가 해서 말이죠. 비싼 건가요?”
두어마디 내뱉자마자 ‘나 요새 돈이 쪼들려서 비싸게 팔아야 돼요!’라는 표정을 내미는 투란이었다.
하클이 이런 투란의 낯짝에 어이없다는 듯이 헛기침을 했다.
크라쉬는 그 기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보다 진지하게 투란에게 말한다.
“아주 비싼 거라네. 이것만으로도 금전 열 닢이지.”
“에, 네?”
“쿨럭! 뭐?”
투란이 맹한 소리를 냈고, 하클은 뒷짐 지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사람처럼 기침을 하며 당황한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하클 또한 저 뒤섞인 원석의 가격에 대해서는 자세히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크라쉬는 둘이 놀라는 모습이 별로 놀랍지 않다는 듯이 차분히 말을 잇는다.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인 데다가 상태가 꽤 좋은 경우라서 그렇다네. 어디서 구했는가, 정말 알고 싶을 정도야.”
“음, 그러니까 그게 우연히…….”
투란이 맹하니 눈을 깜박대면서 하클을 흘깃거리며 말을 더듬는 시늉을 했다.
맡길 때 ‘이거 보석이 되는 건지도 모르잖아요, 혹시 비싸게 팔리는 거면 한몫 떼줄 테니까 비싸게 좀 팔게 해줘요!’라고 투란은 주절거렸고 하클은 ‘내가 뭔 중개상이냐! 감정소 갖고 가!’라고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장난삼아 맡기고 귀찮다고 고개를 젓던 것이 금전 열 닢짜리라 했으니, 투란도 하클도 놀라는 것이 매우 당연한 상황이 아닌가?
크라쉬가 깊은 눈빛으로 투란을 잠시 바라보더니…….
“어디라고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네. 이 정도 크기로 집어 온 걸 보면, 뭔지 모르고 신기해 보여서 집어 왔다고 생각되니까. 다시 그곳에 갈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도 하고 있고 말이야. 다만…… 만약 다시 그곳을 지날 일이 생긴다면, 이번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괜찮으니까, 그 주변에 널려 있는 것들을 좀 집어와 줬으면 하는 거야. 그걸 부탁하고 싶어 왔네. 이걸 사는 사람으로서 말이지.”
“에, 그러니까 사는 건가요!”
투란이 눈을 부릅뜨며 물었고, 크라쉬는 품에서 바로 주머니 하나를 꺼내 주둥이를 열고 하클의 탁자에 털어보였다. 금전 열 닢이 반짝반짝하며 굴러나왔다.
하클의 눈이 번뜩거렸고, 투란은 입술을 살짝 핥으면서 중얼중얼하는 소리를 낸다.
“와, 팔리네. 비싸게 팔리네…… 어, 그치만 그게 보시다시피 돌이라서…… 거기 다시 갈 일도 없기는 하고…… 거기 다른 것은 저렇게 신기하지 않아서 말이죠. 게다가 큼직한 것이 대부분이라 우연히 다시 지나는 길이라도 들고 오기는 좀…….”
뭔 생각을 하는 것인지 오락가락하는 말이었다.
마치 금전 열 닢이면 다시 가볼 만하지만, 가기 싫다는 듯도 했고 가봐야 딱 저 정도만 가져오는 것이 고작인데 저렇게 신기한 것은 또 없으니 금전 열 닢은 될 리가 없고…… 그러니 다시 가기는 싫기는 한데 금전이 튀어나오니 한번 갈까 말까 망설인다는 듯한, 애매모호함이 가득한 태도인 셈이었다.
크라쉬는 투란의 이런 태도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품안에 손을 넣고 뭔가 꺼내 보이고 있었다.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하네. 그래서 이걸 맡기려고 하네…….”
검은 손수건이 고이 접힌 채로 내밀어지고 있었다.
하클은 그게 뭔지 아는 듯, 흠칫한 소리를 낸다.
“그거……?”
투란은 눈을 깜박거렸고, 내색하지 않은 채로 검게 접힌 손수건에 담긴 마법의 낌새를 느꼈다.